#79화. 뜻밖의 만남2021.08.03.
집으로 돌아온 후 소란은 아까부터 강호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걸 느끼고 물었다.
“혹시 회사에 뭐 안 좋은 일 생겼어요?”
“그건 아니고.”
나린의 병실에서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온 후부터 그랬다. 아니라고 하니 캐물을 수도 없어 소란은 입을 다물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연락이 안 된다고 했었나. 그게 언제였지.”
“그저께였던 거 같은데. 어젠 워낙 정신이 없어 다시 전화 못 드렸고……. 왜요?”
그땐 강호도 일상적인 일이라 생각해 소란이 하는 말을 그냥 넘겼다.
“신경 쓰지 마. 안 받으실 때 많아. 그런데 전화는 왜? 무슨 일 있어?”
“안부 전화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백 회장은 집중해서 글씨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하실 땐 전화를 안 받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까. 그러니 강호도 급한 일인 경우엔 비서를 통할 때가 많았다. 대부분은 급한 일이랄 게 없긴 했지만. 소란의 안부 전화 한 번 안 받으셨다고 걱정할 일이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지금 이 싸한 느낌은 뭘까. 강호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다시 코트를 채어 들었다.
“나 잠깐 나갔다가 올게.”
소란을 두고 강호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 ◆ ◇ VIP 병동에는 나린의 방문객으로 등록되어 있어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강호는 나린의 병실을 지나쳐 복도 끝으로 향했다. 병실마다 굳게 닫힌 문 앞에는 환자의 이름조차 기재되어 있지 않다. 오로지 병실 번호만 있을 뿐이다. 저벅저벅, 닫힌 문을 차례로 바라보며 복도를 한번 걸어 나왔다. 철통같은 보안이 약속된 병실들이다. 무작정 오긴 했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직접 확인할 방법이란 없다.
“무슨 일이시죠?”
병실 한 군데서 나오던 간호사가 강호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강호는 몸을 돌려 병동에서 빠져나왔다. 병원에서 나온 그는 거칠게 차를 몰아 도로로 접어들었다. 현실적으로 각 병실마다 일일이 확인할 수 없다면, 방법은 직접 눈으로 보는 것뿐이다. 하여 그가 연락 없이 찾아간 곳은 백 회장이 사는 본가였다.
“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뜻밖에도 백 회장은 아무 일 없는 모습으로 강호를 맞이했다. 일부러 전화하지 않고 갑자기 들이닥친 참이다. 강호의 가슴이 안도감으로 물들었다. 어쩌면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백 회장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기를.
“……소란이 전화는 왜 안 받으셨어요.”
“겨우 그것 때문에 예까지 달려온 게야?”
쯧쯧, 혀를 차는 백 회장을 보며 강호는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차라리 한심하단 소리를 듣는 게 낫다. 고 여사 내외가 병문안하러 왔다는 지인이 바로 백 회장이고, 그래서 백 회장이 병원에 있다는 걸 감추려 했던 건 아닌가 의심했다. 장 박사의 태도도 그렇고, 소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고. 한번 의심하니 모든 게 들어맞는 기분이라 영 불안하고 가슴이 서늘했다. 어차피 할아버지의 비서에게 전화해봤자 그럴듯하게 둘러대면 그만이니, 눈으로 봐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아 달려왔다.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계신 할아버지를 보고서야 다행스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뭐, 불편하신 곳은 없으시죠? 편찮으신 데나.”
“할애비한텐 관심도 없는 녀석이 도깨비처럼 나타나 난데없이 무슨 건강 체크야. 하던 대로 해라, 이 녀석아.”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는 백 회장을 보니 더 확실해졌다. 제 반응이 그저 과민했음을.
“집에만 계시기 적적하지 않으세요?”
“안 그래도 별장 하나 알아보고 있다. 산 보이고 강 흐르는 곳이면 좋겠는데.”
“여기도 충분히 외진 곳인데 얼마나 또 멀리 가시려고요.”
“늙을수록 자연이랑 가까워야 몸도 마음도 편안한 거 아니겠냐. 내 멀리멀리 가련다.”
한 기업의 수장으로서 치열하게 보낸 삶이다. ‘백화푸드’는 이제 전문경영인 체제가 안정화되어 잘 꾸려지고 있으니 백 회장은 이제 걱정할 게 없다고 누누이 말해왔다. 하나뿐인 손주인 강호는 회사를 물려받지 않겠다 하고 본인의 사업을 제법 잘 일궈나가는 중이다. 게다가 좋은 짝도 생겼다. 강호가 혼자 남겨질 게 눈에 밟힐 일도 없을 것이다.
“나도 좀 편히 쉴 테니 귀찮게 할 생각 말아라.”
모든 게 평화로운 나날이다. 표면적으로는.
“곧 소란이 생일이 돌아오지?”
“네.”
“그날 소란이에게 줄 선물이 있으니 시간 좀 내라고 해라. 너는 오지 말고.”
워낙 예뻐하는 손주며느리니 따로 챙겨주고 싶은 게 있으신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별일 없으면 그만 가봐. 새신랑이 이 시간에 여길 왜 와, 오긴.”
“네.”
강호는 순순히 일어섰다. 잘 계신 것을 보았으니 됐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서는 손주를 배웅하며 백 회장은 문가에 한참이나, 또 한참이나 서 있었다. 급하게나마 돌아와 있길 잘했다, 생각하면서.
“회장님, 바람이 찹니다.”
중년의 남자가 안으로 들길 권했다. 백 회장 본가에 상주하는 개인비서 구형익으로, 백 회장이 현직에 있을 때부터 모시던 측근이다. 두 아이와 아내 모두 외국에 유학을 보내고 한국에 혼자 남은 그는 백 회장의 곁에서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다.
“들어가지.”
“장 박사님께는 제가 전화 넣겠습니다. 집에 잘 돌아오셨다고요.”
“그러게.”
백 회장은 예정보다 빠르게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강호의 예상이 맞았다. 나린의 조부모가 찾으려던 병실에는 백 회장이 있었고, 그로 인해 장 박사가 병원에 와 있는 것도 맞았다. 다만, 손자에게 병환을 밝히고 싶지 않은 백 회장이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 아직은, 아니다. ◇ ◆ ◇ 주말을 끼고 하루만 병가를 쓴 후, 나린이 출근했다.
“팀장님, 좀 괜찮으세요?”
강호의 집들이에서 나린이 쓰러졌단 얘기는 회사에 퍼진 후다. 출처는 당연히 홍찬규. 나린이 임신했단 사실은 직원들도 다 알고 있으니 보는 사람마다 걱정 한마디씩 보탰다.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나린은 차분히 대답하며 지나갔다. 직원은 지금 자신이 무얼 본 건가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걱정은 됐고 오늘 업무 내용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대답이 흘러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그러면 그게 괜찮다는 뜻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건데.
“너무 친절하시잖아……?”
껍데기는 분명 계나린인데 반응이 평소와 다르다. 계단에서 쓰러졌다더니 혹시 머리를 다친 건 아닐까, 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간 업무 시간. 오전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나린은, 모니터에 붙어 있는 메모를 확인했다. [영상콘텐츠 한식 분야 A급 인물 미팅. 계나린 팀장이 직접 진행할 것. 7층 C스튜디오, 오전 11시 30분. -백강호]
“이게 뭐야.”
점착식 메모지를 탁 떼어낸 나린이 미간을 좁히며 읽어보는데 팀원이 얼른 다가왔다.
“아, 그거요. 대표님이 직접 지시하신 사항인데요. 외근 나가시는 길이라며, 팀장님 회의 중이니 메모만 남기고 가셨어요.”
“A급 인물이 누군데.”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만 써놓고 가셔서요.”
“사전 정보나 자료도 없이?”
“네, 그냥 스튜디오로 가시면 될 거라고.”
밑도 끝도 없이 웬 미팅이야. 그것도 A급 인물이라니. 성가시게. 생명의 은인이고 뭐고, 출근하길 기다렸다는 듯 까다로운 일부터 시키는 백강호가 역시나 얄미웠다.
“대표님이 직접 추천하는 인물이니 꽤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한식 분야 지금 잘 안 풀리는데 다들 기대가 커요. 이제 시간도 촉박하고.”
“그래, 뭐.”
멍석까지 깔아놨다니 일단 만나는 봐야겠지. 나린은 미팅 상대에게 전달할 자료를 착착 챙겼다. 백강호 안목 하나는 믿을 만하니 A급 인물이 진짜 A급이길 바라면서. ◇ ◆ ◇
“와, 진짜 잘생겼네. 대박…….”
“혹시 현직 모델이나 그런 거 아니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미팅이 예정된 C스튜디오로 향하는 길. 나린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직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대화 중이다. 7층엔 사내 스튜디오들이 있고, 그중 C스튜디오는 촬영보다는 신메뉴 시연이나 테스트를 위한 조리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촬영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스튜디오에 비해 개방되어 있어 복도로 난 통유리 벽으로 안쪽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십 분 전에 내려왔는데 이미 상대는 스튜디오에 도착한 모양이다. 보아하니 문이 열려 있었다.
“백 대표님 픽이라던데 혹시 얼굴로 승부 보려고 데려오신 거 아닐까?”
“얼굴로 하려면 대표님이 그냥 영상 찍는 게 낫지. 진작 그랬으면 우리 회사 집밥 고객 수 진짜 확 늘어났을걸.”
그러다 나린을 발견하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혹시 C스튜디오에 미팅 가시는 거예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던 나린이 대답했다.
“맞는데, 왜요?”
“대표님 픽으로 오신 분이 엄청 미남이라길래 살짝 보러 내려왔거든요. 근데 진짜 대박이에요.”
“연예인 포함해서 지금까지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겼어요. 아, 대표님 빼고.”
직원들은 크흐, 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대표님이랑은 견줄 수 없지. 일단 분위기가 다르니까.”
여기서 분명 대표는 두 명. 이 회사는 공동대표 시스템이라 백강호와 홍찬규 두 사람이 대표였다. 지금 말하는 대표는 누가 들어도 백강호다.
“대표님은 싸늘하면서도 뭔가 퇴폐적인 분위기인데, 저분은 엄청 부드러운 분위기잖아.”
“맞아. 일단 저분이 이번 기획에 참여만 해주신다면 제대로 성공할 텐데.”
얼굴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외모에 치중한 평가가 마음에 걸렸다. 다른 부분들이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잘난 외모 하나 때문에 억지로 기획에 참여시키고 싶진 않았다. 일에 있어선 프로페셔널한 나린이기에.
“모르는 사람 얼굴만 가지고 평가하지 말죠, 우리.”
“아아, 맞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저희도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워낙 쩔어서.”
나린의 쌀쌀한 타박이야 예상했다는 듯 직원들은 금세 인정하며 대답했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생겼다’라는 거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모양이다.
“그럼, 수고하세요.”
직원들이 인사하고 지나간 후 나린은 심호흡을 한번 한 후 C스튜디오의 열린 문을 통과했다. 조리대 앞쪽으로 긴 테이블이 있고, 문을 등지고 이제 막 자리에 앉으려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린은 안으로 들어가 제 소개를 하며 테이블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기획팀 계나린 팀장…….”
소개를 채 마치지 못했다. 자리에 앉으려다가 ‘안녕하세요.’ 소리에 얼른 일어선 그는.
“어?”
“……성준 씨.”
그녀의 남자였기에.
“나린 씨.”
뜻밖의 만남에 놀란 성준의 얼굴이 이내 환해졌다.
◇ ◆ ◇ 한편 소란은 외근 나갔다가 사무실에 들어가는 길에,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사러 카페에 들렀다.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뜻밖의 사람을 마주쳤다. 모른 척하기도 어려운 사람.
“소란 언니?”
전남친 진상의 여동생, 백진혜였다. 진상과 사귀는 동안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더러 얼굴을 보아 잘 알고 있었다.
“아, 진혜 씨?”
“소란 언니 맞네요. 안녕하세요.”
“네, 잘 지냈어요?”
인사를 나누기도 뭐하고, 안 하는 것도 뭐하고. 전남친의 가족을 만나는 건 참으로 뻘쭘한 상황이다. 그러나 진혜는 우연히 만난 소란에게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언니 일하는 로펌도 이쪽에 있어요?”
“네. 진혜 씨는 무슨 일이에요?”
중소형 법률사무소가 줄지어 선 대로변 카페에 진혜는 혼자였다.
“상담 좀 받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너무 일찍 도착해서 카페 들어온 거고요.”
다른 로펌에 상담을 받으러 온 모양이다. 뭔가 곤란하거나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는 걸까. 참견하고 싶진 않았다. 마침 포장 주문한 샌드위치와 커피가 나와 이를 받아 든 소란이 적당히 인사하고 가려 했다.
“그럼 진혜 씨, 난 먼저…….”
“언니, 기회가 없어 따로 얘기는 못 했었는데요.”
진혜가 우연히라도 만난 김에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오빠랑 진짜 잘 헤어졌어요. 조상 신이 도우신 거예요. 평생 감사해야 할걸요.”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진혜 스스로 냅다 가족을 디스할 줄은 몰랐기에 소란의 눈이 커졌다. 진혜와는 친하지 않았기에 몰랐다.
“우리 엄마고, 오빠고, 전부 노답이거든요.”
한집안이니 그저 같은 족속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혜는 제 가족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편이었다.
“언니 전에 오빠가 바람피운 적 몇 번 있잖아요? 그거 사실은…….”
진혜의 폭탄 같은 입이 열리고, 뜻밖의 말들이 술술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