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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우리 편이 더 많아 (78/112)

#78화. 우리 편이 더 많아2021.07.31.

“잘 들어. 우리는 이 결혼, 찬성해.”

계 박사의 말이 뜻밖이라 나린은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니?”

“그래, 말만 해.”

고 여사도 한뜻으로 말했다.

“아…….”

나린의 불안이 한순간에 씻겨가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던 그때. 성준이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턱 목이 멘 음성으로 감사함을 전하는 성준에 계 박사 내외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하는 일에, 우리가 뭐라고 감사 인사까지 듣는단 말인가. 우리는 그저, 사랑하는 손녀가 행복하다면 그뿐인 것을. 게다가 일전에 백 회장을 따라 들렀던 식당에서 성준을 본 적이 있던 두 사람은 나린과 그의 만남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흡족하기까지 했다.

“두 분께 정식으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우성준입니다.”

이제야 제대로 인사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 성준이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그래요. 우리가 인사할 틈도 안 줬구먼.”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만 인사도 못 받았네. 반가워요.”

계 박사와 고 여사가 껄껄, 하하, 웃으며 성준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린이 성준을 소개하자마자 두 어른은 강호의 처남이라 알은척에 이어 바로 작전 회의에 돌입하더니 초고속으로 결혼 승낙에까지 이른 것이다. 모두 성준이 들어오기 직전, 임신이라는 놀라운 소식에 크게 당황했던 탓이다. 이제야 공기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많이 놀라시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그런 말 말아요.”

계 박사가 손을 젓고 고 여사가 한마디 보탰다.

“우리 나린이 성격이 하도 지랄맞아서 평생 혼자 사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렇게 참한 총각과 인연이라니 안심이 다 되는걸요.”

‘지랄’이란 단어를 분명히 들은 것 같은데, 워낙 말투가 우아하여 잘못 들은 느낌이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차차 하겠다고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우리가 빨리 말을 놓아야 더 편하겠지?”

“네,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리하겠네.”

두 분의 표정은 온화했다. 찬성뿐 아니라 도와주겠다고까지 했으니 마음은 이미 성준에게로 홀딱 넘어온 참이다.

“그런데 잔뜩 들고 온 건 다 뭔가.”

“아, 나린 씨 먹을 음식을 좀 싸 왔는데, ……혹시 식전이시면 함께 드시…….”

“그럴까.”

계 박사와 고 여사는 성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도시락을 착착 펼쳤다. 단 한 번뿐이지만 성준의 음식을 맛본 경험이 있기에 기대감이 컸다. 무척 인상적이었던 만남을 두 사람의 미각이 생생히 기억했다.

“어머. 세상에.”

두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끝도 없이 열리는 찬합 속엔 온갖 맛있는 음식이 그득했다. 심지어 각양각색 과일까지도 휘황찬란하게 들어차 있다. 놀라는 두 사람 앞에서 나린은 울컥하여 음식을 바라보았다.

“집에 가서 내내 만든 거예요?”

“그동안 나린 씨가 영 못 먹었다고 해서요.”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보고 싶었어요, 난. 다시 만난 순간 그가 전했던 말이 뜨겁게 와닿았다. 곧바로 자신을 먹이겠다며 많은 음식을 챙겨 온 그의 정성도. 기쁘게 요리를 하고, 벅차게 달려온 그의 고운 심성까지도. 밀어내기만 했던 지난날의 아픔을 온통 사랑으로만 돌려받는 중이다.

“이걸 다 우리 나린이 먹이겠다고 해 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거봐요. 무조건 찬성이라니까.”

고 여사가 뿌듯하게 턱을 들었고, 계 박사 역시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내 새끼 입에 들어갈 음식을 이리도 정성껏 준비한 사람이 어찌 예쁘지 않을까.

“나린아, 어서 먹어라. 우 서방이 애썼는데.”

“그래, 우리 우 서방은 어쩜 너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이렇게 잘했니.”

이미 계 박사와 고 여사의 마음엔 성준이 둘도 없는 손주 사윗감으로 자리매김한 후다. 나린과 성준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 ◆ ◇ 저녁에는 강호와 소란이 함께 나린의 병실을 찾았다.

“내일이면 퇴원할 건데 뭘 또 와.”

“나도 오기 싫었다.”

강호가 불퉁하게 내뱉으며 소란을 가리켰다. 그녀의 성화로 나린을 또 보러 온 것이다. 소란은 따뜻한 차를 컵에 따라 내밀었다.

“언니, 드세요. 유자차인데 별로 달지 않게 만든 거래요.”

“귀찮게 뭘 자꾸 마시래.”

말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손은 이미 컵을 받아서 호호 불고 있다.

“언니, 다음 병원 언제 가세요? 열무 검진이요.”

“그건 왜?”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

“뭐어?”

유자차를 마시려던 나린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옆에 선 성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아까 나린 씨 할머님, 할아버님께서도 같이 가면 안 되겠냐 물으셨는데.”

나린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아직 임신 20주에 불과한데, 산부인과 진료에 누가 식구들을 주렁주렁 다 달고 가냐면서. 나린의 조부모는 궁금하다며 아기 낳을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냐고도 하셨다. 소란 역시 눈을 반짝거렸다.

“조용히 밖에서 기다리기만 할게요.”

“……그냥 성준 씨랑 둘이서만 가게 해줘.”

제발, 부탁이다. 나린의 말에 소란은 할 수 없다는 듯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진료 끝나면 빨리 전화해주세요.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야 찜해뒀던 옷도 사고, 장난감도 사고…….”

강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벽에 깬 소란이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길래 뭘 하나 했다. 보니까 인터넷으로 아기용품 쇼핑 중이었다. 지금은 하얀색, 노란색 위주로 사고 있다며 얼른 열무의 성별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야 장바구니에 담은 옷들도 다 결제할 텐데 하고. 벌써 시작된 소란 고모의 조카 사랑은 누구도 말릴 수 없어 보였다. 강호가 입을 뗐다.

“그런데 할머님, 할아버님께서 다녀가셨다고? 말씀드렸어?”

“미쳤어, 내가? 혹시 네가 얘기한 거 아니야? 나 이 병원 있다고.”

“말하지 말라며. 난 아니야.”

강호는 고개를 저었다. 나린은 어차피 일찍 퇴원할 거니 할머니께 알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엄포를 놓았다. 연세도 많으신 두 분이 괜히 걱정하시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누구 병문안 오셨다곤 하셨는데 핑계 같았거든. 두 분, 내 병실만 들렀다가 바로 가셨어.”

나린은 두 분이 자리에서 일어설 때 지인의 병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렇게 나란히 오실 정도면 친분이 꽤 두터우실 테니 따라가 인사를 드릴 셈이었다. 그러나 두 분은 그냥 집으로 가지 않으셨던가. 다시 확인해보니 이미 퇴원했더라면서. 하도 티 나는 거짓말처럼 들려 병문안은 핑계고, 강호의 귀띔으로 절 보러 오신 거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니라고? 두 분도 병원에 나린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하신 얼굴이었다.

“뭐 착오가 있으셨나 보지.”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 강호도 심드렁하게 대꾸하는데 업무 전화가 걸려왔다.

“잠깐. 통화 좀.”

그는 양해를 구하곤 전화를 받기 위해 혼자 병실 밖으로 나갔다. 강호가 나간 후, 소란이 성준과 나린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데.”

민망해진 나린이 타박하듯 말하자, 소란은 두 사람을 보며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잘 어울려서요.”

소란은 자신이 먼저 결혼한 후 성준이 혼자 사는 게 내심 걱정스러웠다. 저만 너무 행복한 것 같아, 오빠는 외롭지 않을까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오빠에게도 좋은 사람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랐는데, 나린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꽉 차오르는 기분이다. 나린이 겉으로는 쌀쌀한 듯해도 속으로는 인정이 꽤 많다는 걸 알고 있기에, ‘새언니’로서의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소란 씨.”

나린이 그녀를 부르고는, 미적거리듯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고마워.”

“네?”

너무 작은 소리라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들었잖아.”

“아니, 못 들었는데요.”

“…….”

성준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정말. 다 너랑 매제 덕분이야.”

“나도 좋아. 그리고 어차피, 은혜는 또 갚게 될걸.”

소란은 강호가 남겨둔 일 한 가지에 대해 미리 언질을 받았다. 물론 ‘은혜’의 탈을 쓴, 두 사람에게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게 기대되어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은혜?”

성준이 되묻자 소란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언니 할아버님, 할머님이 다녀가셨다고? 이 상황 이해……해주신 거야?”

오빠를 허락해주셨나 싶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우리 편.”

“아, 너무 잘됐어요. 그런데…….”

기쁨도 잠시, 또 걱정이 밀려온다. 강호에게도 들었다. 나린의 부모님이 만만치 않은 분이시라는 걸. 나린과 사이도 그리 좋지 않다고 했다.

“언니 부모님은 괜찮으실까요.”

“쪽수로 밀어붙이면 돼. 우리 편이 더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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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린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소란은 풋, 웃음이 터졌다.

“걱정하지 마. 성준 씨도 잘 버티기로 했어.”

우리, 잘해낼 수 있어. 그런 얼굴로 성준과 나린은 시선을 나누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둘 사이가 무척 견고해 보여 소란의 걱정은 단번에 날아갔다. 역경이야 있겠지만 그걸 함께 헤쳐나가겠다는 의지가 있는 한, 그 무엇도 문제가 될 순 없다. 이미 어려움을 한번 겪어내고 맺어진 두 사람의 단단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소란의 코끝이 찡해졌다. 엄마, 아빠, 하늘에서도 보고 계시죠? 오빠가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났어요. 정말 다행이죠. 정말……. 모처럼 행복한 나날이다. ◇ ◆ ◇ 한편, 병실에서 나온 강호는 조용한 복도 옆쪽으로 마련된 공간에서 통화했다. 업무 때문에 걸려온 간단한 전화였다. 막 통화를 마치고 다시 병실로 돌아가려 할 때, 복도 끝 쪽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의사 무리 중 선두에 있는 이를 보았다. 강호의 눈에 익은 얼굴이다.

“장 박사님.”

눈이 마주치자 묵례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장 박사는 함께 있던 의사들을 먼저 보내곤 강호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오랜만이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친구가 입원해 있습니다.”

“아아. 그랬군.”

장 박사는 묘하게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오랫동안 할아버지 백 회장의 건강을 돌봐온 주치의다. 백 회장은 비교적 강건한 편이라 지금껏 미약한 호흡기질환 외에는 크게 앓은 적이 없다. 그렇기에 주치의는 주로 정기적인 검진과 처방, 컨디션 체크 등을 담당해오곤 하였다.

“팔은 어쩌다 그렇게 됐나.”

장 박사는 반깁스를 한 강호의 팔을 걱정스레 보았다.

“심각한 건 아니고, 인대만 살짝 늘어났습니다. 최근엔 분원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장 박사님 여기 와 계신 줄 알았으면 전화라도 드렸을 텐데요.”

어차피 장 박사는 호흡기내과의라 강호의 팔 진료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저 안부에 가까운 형식적인 인사였다.

“아, 급한 환자가 있어 잠깐 올라왔네만.”

“네.”

잠시 이어진 정적. 장 박사가 허허, 웃으며 강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럼 다음에 다시 보세.”

지나쳐 가는 장 박사에게 강호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가 출입구를 통과해 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사치레로라도 백 회장의 안부조차 묻지 않는 모습이 이상했다. 마치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강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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