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내가 다 해줄게요2021.07.27.
강호는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리게 됐다. 그건 전부 나린과 열무를 구한 덕이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
“자, 아.”
소란은 밥을 먹여주었다. 한 입, 한 입, 음식을 입에 넣어주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해서 이를 마주 바라보는 강호는 몇 번이고 웃음이 날 뻔했다. 그녀의 아기 새가 되는 기분, 나쁘지 않다.
“귀찮지 않아?”
“전혀.”
“일주일이나 이렇게 할 수 있겠어?”
미리 확답을 구하듯 묻는 강호에게 소란은 자신 있게 답했다.
“걱정 마요. 내가 다 해줄게요.”
다 해준다는 말이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나. 엄살 부릴 만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팔 이쪽 먼저……, 자, 아프지 않죠? 이쪽도 뺄게요.”
소란은 옷도 갈아입혀주었다. 이미 맨살에 수없이 닿고 몸을 섞었던 사이인데도, 살갗이 스칠 때마다 쿵쿵 심장이 울렸다. 그녀의 손이 옷감과 피부 사이를 부드럽게 넘나들며 벗겨지고 또 입혀지는 순간들이 야하기만 했다. 하물며 욕실에서는 어땠을까.
“너도 벗어야지.”
“아…….”
“옷까지 젖을 필요 없잖아.”
그녀가 긴장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같이 씻어.”
결국 소란 역시 그와 같은 상태로 물 아래 섰다.
“물 온도 어때요?”
“괜찮아.”
사랑을 나누다 욕실에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세심하고도 다정한 그녀의 손길이 몸 곳곳에 닿았다. 완벽한 보살핌을 받는 기분이다. 깁스에 물이 닿지 않도록 병원 의료용품점에서 사 온 방수커버를 착용했지만 역시 왼손만으로는 힘들었을 터다. 특히 머리 감는 일이 그랬다.
“키가 너무 커서 안 되겠다. 욕조에 들어가볼까요? 여기서 고개를 젖혀주면…….”
소란에게 제 몸을 맡기고 그녀의 뜻대로 자세를 바꾸면서 순순히 협조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머리를 적시고 부드럽게 헹구는 손길에 강호는 눈을 감았다. 평온한 밤이다.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오로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달콤한 공기만이 주위에 가득 차오른 밤. 사실 왼손만으로도 할 수 있는 건 많다. 이를테면 포옹이라든가. 아니면 키스라든가.
“앗.”
강호가 그녀를 제게로 당겨 욕조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소란이 들고 있던 샤워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물살에 못 이겨 춤을 추듯 움직였다. 맑은 물이 위로 솟았다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사이, 강호는 앉은 제 위로 겹치듯 안은 그녀의 입술을 흠뻑 물고 빨았다. 한쪽 팔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품듯 안을 수 있었다. 키스가 깊어지며 소란이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았다. 더욱 농밀하게 겹쳐진 몸 위로 분수 같은 물이 반짝이며 흩뿌려졌다. 하루 내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왔던 시간. 녹진하게 젖어가는 밤이다.
◇ ◆ ◇
“무슨 일이래. 밥집을 다 닫고.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
다음 날 식당 앞에 당분간 휴업한다는 안내문을 붙이는 성준에게 과일 가게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좀처럼 식당을 닫는 일이 없는 성준이기에 오늘 내건 휴업 공지가 신기하기만 했다.
“네, 일이 좀 있어서요.”
성준이 웃으며 돌아보았다. 평소에도 아름다운 미소가 오늘따라 더더욱 눈이 부신다.
“뭐 좋은 일 있나 봐. 하루 새 얼굴이 확 폈어. 뉘 집 아들인지 잘난 얼굴이 더 잘생겨졌네.”
아주머니의 말에 성준은 그저 입매를 늘여 웃을 뿐이다. 좋은 일은 당연히 있다.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게다가, 내가 아빠가 된다고. 그건 정말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져버릴 듯한 기쁨이었다. 일 분에 한 번씩 믿기지 않아 심장이 쿵쿵 떨어졌다. 이러다 꿈에서 깨는 건 아닐까. 갑자기 주어진 행복이 손에 쥔 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극한의 행복과 극한의 불안이 번갈아 찾아들었다. 그러니 아직은 조심하고 싶다. 입 밖으로 내면 사라질 행운처럼 느껴져 성준은 가만히 말을 아꼈다.
“아 참. 건물주 바뀐다는 얘기는 들었지?”
“그래요?”
“잘됐지 뭐야. 계약 만기 돌아오는 대로 임대료 상한선까지 다 올린다고 했는데. 예전에 성준네 화재 났을 때도 그렇고 하여튼 사정 봐주는 거 없이 너무 빡빡하게 굴었잖아. 건물에 문제 생겨 뭐 하나 고치려고 해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돈을 받는 일엔 귀신같이 빠르게 나타나는 대리인이, 입주 상인들의 요구 사항이 있을 땐 두문불출 자취를 감추곤 했다. 다들 장사하는 가게 입장에서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관리할 생각도 딱히 없어 보이는데 대체 무슨 이유로 이 건물을 틀어쥐고 있는 걸까 궁금할 정도였으니까.
“그놈의 투자회사인지 법인회사인지 이번에 건물값 비싸게 올려받고 나간다는데, 일단 주인 바뀐다니 속이 다 시원해. 새로 오는 건물주는 그런 양아치가 아니어야 할 텐데.”
“그러게요.”
성준도 과일 가게 아주머니의 말에 공감했다. 이제 계속 좋은 일만 생기길 바라며, 그는 나린의 병원에 가져갈 과일을 골랐다. 가장 모양이 예쁘고 신선한 것으로만 하나하나 정성껏 고르는 성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 ◆ ◇ 병원. 성준이 오전 중에 집에 다녀온다며 병실을 비웠다. 무조건 잘 먹어야 한다면서 음식을 해 온다고 했다. 치료상 주의해야 할 음식이 전혀 없기에 나린 앞으로 나오는 VIP 병실의 식사는 매 끼니 푸짐하고 화려했다. 요양이나 검진 차 비싼 돈 내고 병실을 차지한 VIP 고객들을 위해 맞춤형으로 준비되었기에, 예비 산모인 나린에겐 고영양식이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린은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입덧은 거의 없어진 것 같았는데, 희한하게 속에서 음식이 잘 받질 않았다. 이를 보며 성준이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모른다. 소란으로부터 나린이 입덧으로 심하게 고생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그러니 중간에 한번 제 반찬과 김치로 식사를 잘했다는 말이 얼마나 짠하게 들렸을까. 당장 음식을 해 와야겠다며 병원을 나선 것도 당연했다.
‘……심심하다.’
나린은 아무도 없는 병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늘 일에 치여 있던 그녀에게 낯선 상황이다. 내일까지만 쉬다가 퇴원할 예정이지만, 이렇게 할 일 없이 여유로운 시간은 드물었다. 어쩌면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 바쁘게 움직였던 건지 모르겠다. 지금 찾아온 이 적요는 외로움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심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언제 오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시계를 본다. 병실을 비운 성준을 기다리는 것이다. 간 지 얼마나 됐다고. 스스로 어이없어 픽 웃음이 나왔다. 퇴원하면 다니던 산부인과에 성준과 같이 가기로 했다. 열무를 만나러. 심장이 두근거렸다. 열무가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시간이 왔을까. 성준이 보고 싶을 때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 딱 두 가지뿐이었다. 그리워하거나 외면하거나. 이제는 이런 ‘기다림’조차 나린에겐 선물이다. 가만히 배를 문질렀다. 고마워, 아가야.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나린은 코트를 걸치고 병실에서 나왔다. 막연히 기다리기보단 역시 몸을 움직이는 편이 시간 보내는 데 더 좋을 듯했다. 조용한 복도를 걸어 보안요원들이 서 있는 병실 입구로 향할 때였다.
“어.”
자동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사람들은.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였다. 그녀의 조부모는 놀란 나린보다 더 놀란 모습으로 우뚝 멈춰 섰다.
“나린아. 네가 왜 여기 있…….”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기 웬일이세요?”
“아, 우린.”
고 여사가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는데 옆에 선 계 박사가 수습하듯 말했다.
“아는 사람 병문안을 온 참인데, 넌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게냐. 그 환자복은 뭐고.”
“그래, 나린아. 너 여기 입원한 거야? 손에 붕대는 또 뭐고. 다쳤어?”
“아아, 그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네 병실로 가자. 어디니?”
고 여사가 나린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은 그녀의 병실로 함께 들어왔다. 나린은 소파에 앉은 고 여사와 계 박사에게 물었다.
“혹시 엄마가 별말 없었어요?”
“무슨 말?”
오피스텔에 찾아왔던 엄마는 초음파 사진과 아기 수첩을 보고는 제 뺨을 후려쳤었다. 딸의 임신 사실을 알고 돌아갔기에 할머니까지 이 사실을 알고 달려오시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생각보다 매정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다. 엄만 어쩔 셈이었을까. 설득하고 달래는 과정조차 다 귀찮았을까. 뜻대로 되지 않는 딸은 놓아버리는 게 더 편했을까.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품고 엄마 아빠의 말라비틀어진 사랑이라도 바랐던 건 저였는지 모른다. 웅크린 채 텅 빈 속을 애써 감추던 어린 나린의 모습 그대로.
“할머니, 할아버지.”
이젠 저도 놓을 때가 되었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목숨처럼 사랑하리라는 건 제 착각이었다. 이러려면 날 왜 낳았을까, 나는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그런 의문은 절 갉아먹을 뿐이다. 태어났으니, 살아야지. 태어났으니, 행복해야지. 당연한 사랑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만들어간 사랑을 내가 지켜내면서, 그렇게 나도 살아야지.
“나 아기 있어요.”
“뭐?”
고 여사와 계 박사가 놀라 되물었다.
“좀 됐어요. 예정일은 6월 초.”
“임신했단 말이야?”
결혼도 하지 않은 손녀의 임신 소식에 놀란 건 당연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보던 고 여사가 나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몸은, 몸은 어떻다는데? 안 그래도 요즘 너 말랐다 했어. 입덧이라도 하는 거야?”
“병실까지 잡고 누워 있을 정도면 안 좋은 거 아니냐. 괜찮은 게야?”
두 분이 다짜고짜 제 몸부터 걱정하자 나린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자랐으니 그걸로 충분히 행복한 유년 시절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손에 쥔 건 모르고 갖지 못한 것만 바라보는 게 또 사람인지라, 제 인생이 온통 결핍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성준이 제 손을 단단히 붙들어주자 이제야 보인다. 받은 사랑이 이토록 커다랬음을.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 그냥 쉬러 들어온 거야. 내일까지만.”
“아이고……, 임신이라니. 아기가 아기를 가져서 이를 어째.”
“할머니, 나 서른 넘은 지 좀 됐는데요.”
“서른이든 마흔이든 아기는 아기지. 그래, 딸이라니, 아들이라니?”
정신이 돌아온 듯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증손주 임신 소식이 두 분께는 뜻밖의 선물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갈 때마다 자세를 틀어서 확실하지가 않대요. 다음에 가면 알게 될 것 같아요.”
“아기 아버지는 누구냐. 결혼은 언제 할 셈이고.”
계 박사의 질문에 나린은 숨을 삼켰다. 다른 건 몰라도, 조부모에게 혼자 아이를 낳을 거란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동시에 성준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우려도 되었다. 그때 병실 문이 드르르 열렸다.
“나린 씨, 나 왔…….”
병실 안이 환해지도록 웃으며 들어오던 남자가 멈칫했다. 조부모의 고개가 돌아갔다. 놀란 시선들이 허공에서 서로 부딪혔다.
“아, 성준 씨.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세요.”
나린이 얼른 소개하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양손 가득 짐을 잔뜩 든 성준이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다리를 절며 걸어오는 모습까지 나린의 조부모는 천천히 눈에 담았다. 사태 파악은 빨랐다. 이 청년이 누군지, 지금 여기 왜 있는지, 두 분은 전부 알아채셨다. 분위기를 읽으며 나린이 그의 옆에 가서 섰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쪽은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 우성준 씨예요.”
“강호 처남 되시는 분 아니냐. 식당을 운영하는.”
“맞아요.”
“……잠깐만.”
고 여사가 벌떡 일어서며 계 박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할머니의 돌발행동에 나린이 당황했다. 설마 성준의 존재가 불편하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시는 건가. 고 여사는 계 박사와 병실 구석으로 가더니 뭐라 뭐라 속삭였다. 흡사 작전 회의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는 사이 성준이 나린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성준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의지가 무척 강하게 느껴졌다.
“혹시 할머니, 할아버지가 반대하셔도 성준 씨야말로 절대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충분히 설득할 수 있으니까.”
나린도 비장하게 소곤거렸다. 어떻게 만난 인연인데 집에서 반대한다고 서로를 놓을까. 그럴수록 우리는 더 찰싹 붙을 건데. 그때 대화를 마친 고 여사와 계 박사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자네도 앉게.”
두 사람의 맞은편에 성준과 나린도 나란히 앉았다. 마침내 계 박사의 입이 먼저 열렸다.
“잘 들어. 우리는 이 결혼.”
“…….”
반대는 해도 좋으니, 성준에게 상처만은 주지 않으시길.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부디 이 사람에게 모진 말은 말아주시길. 제발. 나린이 입술을 짓이겨 깨물던 그 순간.
“찬성해.”
바위처럼 묵직한 승낙이 툭 떨어졌다.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니?”
꽃길 위로 빛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