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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나비 효과 (76/112)

#76화. 나비 효과2021.07.24.

  태석이 집들이에 오기 두 시간 전, 서울의 한 카페. 도심에 있는 카페치고는 비교적 한적했다. 태석이 직접 고른 이 카페는 커피가 맛없기로 유명했다. 덕분에 주말인데도 손님이 드문드문 자리했기에,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더없이 적당했다. 그가 장소를 고른 대신 시간은 상대가 정했다. 하필이면 소란과 강호의 집들이 시간과 맞물렸다.

“내일도 있고, 아니면 이따 저녁도 있는데. 왜 하필 오늘 이 시간이냐.”

“바빠서 이 시간밖에 안 된다니까. 나 그냥 가?”

태석은 맞은편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대학 동기이자 현재 서울OO지검 강력부 검사로 재직 중인 한서윤. 서윤에게 아쉬워 먼저 연락한 건 제 쪽이니 토를 달 생각은 없다. 집들이에 늦긴 하겠지만 이야기만 나누고 곧바로 가면 되니까.

“에이, 무슨 소리를 또 그렇게 하시나!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오셨는데 뭘 그냥 가. 앉아, 앉아. 제일 비싼 걸로 사다 줄게. 뭐 마실래?”

“그냥 커피.”

“심플하기는. 잠깐만.”

태석은 활짝 웃으며 일어섰다. 구김살 없이 환한 얼굴에 한쪽 눈이 찡긋 부서지듯 감겼다. 계산대 앞에 간 그가 주문했다.

“아메리카노 레귤러 사이즈로 주시고, 음, 여기서 가장 맛있는 케이크가 뭐죠?”

“바닐라 치즈 케이크와 당근 케이크가 제일 잘 나가요.”

“그럼 그거 한 조각씩 주세요. 금방 주시죠?”

“네, 바로 드리겠습니다.”

애매하게 걸린 점심시간이라 요깃거리까지 주문하고 계산한 후 픽업대 앞에 섰다. 낮게 허밍하며 기다리는 동안 자리를 돌아보다가 한서윤과 눈이 마주쳤다.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렸다. 먼저 보고 있던 건 본인이면서 뭘 또 그렇게 극혐하는 표정이야. 태석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늘어졌으나 오늘만큼은 ‘을’이다. 한서윤의 비위를 잘 맞춰야만 했다.

“주문하신 케이크와 음료 나왔습니다.”

직원의 말에 태석이 반사적으로 웃으며 돌아보았다.

“네, 감사합니다.”

환한 얼굴로 쟁반을 받아들고 자리로 가려는데 또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0.1초도 되지 않아 한서윤의 고개가 돌아갔다. 빠르기도 해라. 하긴, 학교 다닐 때도 저렇게 뜯어먹어도 시원찮겠단 얼굴로 종종 쳐다봤지. 하도 오래되어 잊고 있었다. 사실 그녀에겐 미움을 살 만도 했다. 태석이 시험에서 과 수석을 차지할 때마다 한서윤이 차석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한서윤에겐 전액 장학금이 절실했다는 것을. 힘든 학과 공부 외에도 과외에 알바까지. 어린 대학생에 불과했던 그녀의 인생도 참 고단하고 갑갑했다. 하물며 기를 쓰고 치르는 시험에서 자신 때문에 매번 수석을 놓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얄밉고 애가 탔을까. 그걸 알게 된 후 태석은 슬쩍 물러섰다. 애초에 제겐 수석 타이틀도, 전액 장학금도 간절한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도 모르는 양보였다. 심지어 당사자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일부러, 응? 수석도 양보하고, 응? 내가 그랬는데도 생색 한 번도 낸 적 없단 말이야. 알아? 동기 사랑 나라 사랑, 내 눈물겨운 양보를 네가 알기나 하느냐고. ……라고 물론 말할 순 없다. 한서윤은 자존심이 꽤 강해, 태석이 일부러 장학금을 양보했단 사실을 알면 절 수치스럽게 했다며 목을 조를지도 모를 일이다. 강산이 한 번은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졸업 후엔 서로 다른 길을 가느라 친분을 유지하긴 힘들었다. 두루두루 좋은 사이를 유지하는 마당발 태석과 달리 한서윤은 모임에 어쩌다 한번 나와 그나마 자주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녀에게 먼저 연락한 건, 바라는 게 있어서다.

“사건 많지? 너 작년에 서울 올라와 강력부 갔단 얘기 듣고 깜짝 놀랐는데. 부산지검에서도 장난 아니었다며. 동기 모임도 좀 나오고 그래라. 궁금해하는 애들 많…….”

“용건이 뭔데.”

한서윤은 흔한 인사치레도, 근황 토크도 허용하지 않았다. 거두절미, 단도직입, 그런 걸 좋아하는 편이다.

“나한테 갑자기 연락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좋은 정보 좀 주려고.”

“무슨 꿍꿍이야?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호오. 태석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꿍꿍이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역시 한서윤이네. ‘좋은 정보’라는 미끼를 덥석 물지도 않는다. 가녀린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윤의 기운은 보통이 아니다. 끌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강력부 검사로 버티는 그녀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될 일이다.

“뭐, 내가 원하는 게 있긴 한데, 좋은 정보 주려는 것도 맞아.”

태석은 싱긋 웃었다.

“거래는 안 해.”

서윤이 딱 선을 그었다.

“음, 주고받자는 게 아니고. 너는 네 일 그냥 하면 되는 거야. 그게 날 돕는 거고 내가 원하는 거거든.”

“무슨 소리야.”

서윤이 눈썹을 찡그렸다. 태석은 말하려다 말고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결 좋은 쇼트커트 헤어 아래 뻗은 목이 저리 길었나. 작고 날렵한 선으로 그린 듯한 얼굴은 얇은 테 안경을 쓰고 있어 꽤 이지적이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밥도 잘 못 먹나. 왜 저렇게 말랐어. 평균보다 키가 훌쩍 큰 편이라 늘씬하단 소리를 종종 듣는 것 같던데 이젠 마르기까지 했으니 길거리에서 보면 검사가 아니라 모델이라고 해도 믿겠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아.”

태석이 옆에 있던 냅킨을 집더니 재킷 안쪽을 뒤져 펜을 꺼냈다.

“자, 봐봐.”

그는 냅킨에 단순한 모양의 도식을 그려나갔다.

“여기 한 회사가 있어. 겉보기엔 아주 멀쩡한 회사지. 이를테면 조경 전문 기업 같은.”

순간 서윤의 눈매가 서늘하게 굳어졌다.

“주로 대형 병원이나 쇼핑몰의 큼직큼직한 조경 시설 공사를 진행하는데, 뭐 문제 될 건 하나도 없는 그런 우수 기업이야. 그런데.”

“…….”

“이 회사의 오너 동생들이 운영하는 업체들은 또 따로 있어. 계열사나 그런 건 아니고 독립된 소기업들. 용역업체도 있고 부동산 임대를 하는 법인도 있고. 뭐, 몇 개 있어 그런 게.”

몸통과도 같은 조경 회사를 큼직하게 그린 태석이 그 옆으로 작은 회사 표시를 해나갔다.

“얘네들이 하는 일을 보니까 뭔가 꺼림칙해. 단순한 용역이 아니라, 사람 써서 어디 밀어버리는 것도 잘하고, 엉뚱한 토지나 건물 매입 같은 것도 종종 한단 말이지.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지만.”

다 알고도 남는 투로 모르겠다 말하며, 그는 여유롭게 설명을 이었다.

“이익 추구를 위해 운영하는 회사가 아니라, 마치 어딘가의 구린 뒷일을 봐주기 위해 돌아가는 회사처럼.”

한서윤의 눈썹이 조금 더 구겨졌다.

“그래서 말인데.”

태석이 펜을 놓으며 씩 웃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몸통만 치지 말고, 쓸어 갈 땐 잔챙이까지 싹싹 쓸어 가줬으면 한다고.”

“……너 어디까지 아는 거야?”

서윤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음, 이 조경 회사 이름이 ‘원진조경’이라는 거?”

“……!”

“‘원진조경’ 뒤에 불법자금을 운용하는 거대기업 ‘제풍코퍼레이션’이 사실은 찐이라는 거.”

역시 목소리를 낮춘 태석이 조용히 덧붙였다.

“그 ‘제풍코퍼레이션’의 뒷청소를 맡아서 하는 잔챙이 회사가 여럿 있는데, 그중 박후만이라는 놈이 쥐고 있는 게 너무 코딱지만 해서 혹시나 네 관심을 못 받을까 봐. 나 그래서 왔거든. 아무리 하찮아도 굴비 엮을 때 잘 좀 챙겨달라고.”

서윤이 기가 찬 듯 하, 하고 웃었다.

“와, 마태석 대단하네.”

“응. 내가 좀.”

서윤은 어이가 없단 얼굴로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원진조경’이란 멀쩡한 회사를 앞세우고 뒤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으며 돈을 불리는 비밀기업 ‘제풍코퍼레이션’을 태석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오래전 경기 남부에서 활약한 조직폭력배의 일원이었던 자가, 몸담고 있던 조직이 와해되면서 설립한 회사였다. 조직의 브레인으로 이름을 날린 이답게 연막을 참 잘도 썼다. 멀쩡한 회사를 앞세워놓고 뒤로 비밀기업을 성장시켰으니. 야누스와도 같은 두 회사는 현재 장남에게로 대를 물려 이어졌다. 장남이 경영을 시작하고부터 비밀기업 제풍은 세를 더 불려나갔다. 돈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흡수해버리는 괴물과도 같았다. 차남과 삼남을 수하에 두고, 제풍코퍼레이션으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게 했다. 동생들이 가지고 있는 회사는 바로 그런 용도였다. 태석이 지적한 대로. 그러니 태석은 정확히 알고 온 것이다. 삼남 박후만의 이름까지도. 그녀는 지금 제풍의 덜미를 잡아 치기 위한 싸움 중이었다. 제풍은 덩치가 커지면서 더 이상 비밀기업으로만 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거기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도 한참 걸렸는데, 넌 어제 본 영화 얘기하듯 줄줄 읊고 있잖아. 어디서 따낸 정보야?”

사실 어디서는 중요하지 않다. 마태석의 재력과 영향력이라면 이 정도야 씹다 버린 풍선껌 정도일 테니. 더 궁금한 건, ‘왜’였다.

“한서윤. 너는 위에서부터 치는 중이었잖아. 나랑은 다르지.”

“뭐가.”

“나는 아래에서 짧은 끈인 줄 알고 휙 당겼는데, 어이쿠. 고구마 줄기야. 막 딸려 나와. 이게 뭐야, 뭐야, 하고 당기다 보니까 헐, 끝도 없네? 그렇게 계속 위로 올라간 건데, 한마디로…….”

“…….”

“얻어걸린 거지.”

태석이 씩 웃었다. 그날, 아주 작은 사건에 불과했다. 로펌까지 찾아온 진상을 상대하느라 피곤했을 소란을 차에 태워주었고, 함께 접촉사고를 당했다. 소란을 다치게 하고도 무례를 일삼고, 구렁이처럼 법의 구멍을 요리조리 피해가려는 가해자를 소소하게나마 응징하려던 것뿐이었다. 알아보다 보니 그의 회사는 악의 줄기에 잔가지처럼 얽혀 있었고, 생각보다 중심에 있는 그 덩어리가 꽤 크고 질이 좋지 않았다. 마침 몸통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는 자가 과 동기인 한서윤 검사였다. 아주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흘러 여기까지 이르게 했다.

“한서윤 일 잘한다던데. 기대해도 되지?”

“넌 왜 이 사건에 개입하는 거야? 제풍하고 무슨 관계인데.”

“제풍이고 뭐고 난 모르겠고. 박후만이 감방 가는 것만 보면 돼.”

“왜?”

“그놈이 내 차 박았거든.”

순간 서윤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라. 나 진지하다.”

“미치겠다, 마태석.”

서윤은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손가락으로 눈물까지 찍어내며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이를 먹어도 넌 어떻게 그대로냐.”

“내가 좀 동안이야. 피부 봐라, 완전 아기 피부지?”

태석은 그저 너스레만 떨었다.

“여전히 세상만사에 관심도 많고.”

“늙지 않는 비결이지. 아는 게 많으니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그런 의미에서 여기 케이크는 진짜 맛없다. 이건 사람이 먹을 게 못 돼.”

얼른 소란의 집들이에 가서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태석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서윤이 말했다.

“아는 게 많은 것 같진 않은데. 예나 지금이나.”

“뭐?”

“……아는 거 없어, 너.”

태석은 픽 웃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내가 캐낸 고구마 줄기 궁금하지 않아? 그 정도 큰 덩어리라면 너도 꽤 공들이고 있을 것 같은데.”

“좋아. 박후만 감방 확실하게 보내줄 테니까 제풍에 대해 다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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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부상조. 동기 사랑 나라 사랑.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다. 아름다운 격언들을 마음에 새기며 태석은 알고 있는 정보를 쏟아냈다. 작은 시작으로부터 이어진 만남 위로 창가의 햇살이 스며들었다. ◇ ◆ ◇ 강호와 소란은 느지막이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왔을 땐 이미 업체와 가정관리팀이 방문해 말끔하게 정리를 마친 후였다. 집들이를 언제 했었나 싶을 만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하아.”

소란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았다. 정말이지 피곤한 하루였다. 강호는 주방으로 들어가 왼손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물병을 꺼내고 컵을 꺼냈다. 왼손이라 편하진 않았다.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나니 어느새 소란이 곁에 와 있다.

“어떡해. 많이 불편하죠?”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반깁스를 한 오른팔을 보았다. 아니, 라고 대답하려던 강호는 제 앞에 선 사랑스러운 소란의 얼굴을 본 순간 마음이 싹 바뀌었다. 집에 돌아올 때 운전도 소란이 대신했다. “그 손으로 뭘 해요, 제가 할게요.” 하고 나섰던 소란이다. 그래. 이 손으로 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밥은 먹을 수 있나. 옷은 갈아입을 수 있나. 샤워는, ……할 수 있겠나.

“좀 불편하네.”

히잉. 소란이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강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씻어야 하는데. 뭐 일단 내가 어떻게든 해봐야지.”

“강호 씨가요? 이 손으로 어떻게요.”

아무래도 계나린이 은혜를 갚는 방법은, 새 가족으로서의 행복 말고도 또 있는 모양이다.

“내가 씻겨줄게요.”

아내의 특별 케어. 일주일간 그에게 내려진 달콤한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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