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새로운 가족 (75/112)

#75화. 새로운 가족2021.07.20.

한편 연희는 소란과의 통화를 마치며 소식을 전했다. 다행히 나린과 아기는 별 탈이 없대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근데 강호 오빠가 아무래도 반깁스를 할 것 같다네.”

연희의 말에 찬규가 깜짝 놀랐다.

“깁스까지? 어디 부러졌대?”

“부러진 정도는 아니고 팔의 인대가 좀 늘어났다나 봐. 나린 언니 몸에 깔렸었잖아. 불안하다 했어.”

그나마 심하진 않다고 했다. 보호 차원에서 일주일 정도만 하면 될 거라고 했단다.

“계 씨는 멀쩡하고 구해준 백 씨만 다쳤다, 라.”

찬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계나린 이거 각오 단단히 해야겠네.”

“왜?”

“백강호가 채무 관계를 얼마나 확실하게 하는데. 내가 유학 가기 전 카페에서 꿨던 만 원을 5년 후에 미국에서 만났을 때도 까먹지 않고 도로 받아 간 애야, 걔가.”

“꿨으면 갚아야지.”

“맞는 말인데 그게 다가 아니야. 동전 없어서 자판기 앞에서 오백 원 꿨다가, 다음 날부터 나 마주칠 때마다 오백 원, 오백 원, 그래서 난 내 이름이 오백 원인 줄 알았어.”

듣고 있던 연희가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질렀다.

“와, 그 얼굴로 빚 받아내는 거 생각하니 너무 살벌한데.”

“은혜도 확실하게 갚는 스타일이긴 하지. 하여튼 무섭게 깔끔해. 그러니 계 씨도 어떻게든 그 빚 꼭 갚아야 할걸?”

앙숙인 두 사람 사이에 부채가 생겼고, 주도권을 쥔 쪽은 강호다. 영리한 백강호는 아마도 뭐든 얻어내기 위해 생명의 은인으로 포지셔닝할 것이 분명하다. 강호가 원하는 게 무엇일지 기대된다는 듯 찬규는 싱긋 웃었다. ◇ ◆ ◇ 강호는 오른팔에 반깁스를 하고 나타났다. 아무리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다고 해도 손가락 부분부터 팔꿈치까지 반깁스를 한 모습은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나린이 강호에게 괜찮냐며, 아깐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건넸을 때 그가 말했다.

“말로만?”

어째 음산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찬규의 예상은 적중했다. 강호는 어떻게든 이 빚을 받아낼 심산이다.

“나는 말로 때우는 거 딱 질색인데.”

나린은 그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준 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 진심으로 고마웠다. 덕분에 자신과 열무가 무사한 셈이니 무엇으로든 은혜는 갚을 생각이다. 하나 제 순수한 마음과 다르게 강호의 태도는 지나치게 고압적이다. 이쯤 되니 이 자식이 지금 이걸 가지고 한탕 해먹겠다는 건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요구하려고 저러나. 잔뜩 경계심이 생긴 나린이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돈? 장기?”

장기 소리에 옆에 선 성준과 소란이 움찔했다. 친구 사이가 아니라 두 조직의 일원이 만난 것 같은 이 분위기는 뭐지. 살벌한 얼굴과 이미지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의 농담은 진짜 같아 무섭기만 하다.

“계나린 팀장.”

강호가 나직하게 불렀다.

“사직서는 찢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받아주지도 않을 거였어.”

“너 알고 있었어……?”

“미국 거처도 그만 좀 알아보고. 빚 잔뜩 져놓고 가긴 어딜 가.”

강호는 툭 자르는 투로 싸늘하게 말했다. 이젠 가지도 않겠지만, 행여 그냥 가게 둘 생각도 없다. 이유는 단 하나다. 소란이 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누가 뭐래도 계나린은 이제 소란의 가족이다. 30년 넘는 우정보다 제 아내가 소중한 건 어쩔 수 없다. 그야 계나린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서로 서운할 것도 없겠지만.

“언니 퇴직하고 미국까지 가려고 했어요? 정말?”

소란이 놀라서 물었다.

“아기 혼자 키우려고요?”

“아, 그게.”

고개를 돌리던 나린은 성준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그의 선한 눈이 제 가슴을 쿡 찔렀다.

“아니야. 내가 왜애.”

일단 부인하고 본다. 꾸준히 숨고 도망가기에 바빴던 그동안의 제 행보가 착한 사람에게 상처만 준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간 성준이 절 좋아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기에. 거절당할 용기가 없어 먼저 물러섰던 그녀는 짝사랑이 아니었단 사실에 안도하는 한편 몹시 미안했다.

“아니에요, 성준 씨. 나 안 가요. 내가 가긴 어딜 가.”

숨을 땐 언제고, 피할 땐 언제고.

“진짜 안 가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성준이 따뜻한 손을 얹자 그제야 나린의 가슴이 따끈해졌다. 계싸가지, 계마녀, 계시베리아 등등, 찬규가 붙인 별명들만 해도 온통 무시무시한 것들뿐인 나린이다. 팀원들도 웬만하면 그녀와 길게 얘기하기 두려워하는 편이고. 특히나 업무에 있어선 사정을 봐주지 않았기에, 그녀가 지나가기만 해도 알래스카 칼바람이 분다고들 했다. 나린을 녹인 건, 바로 저 따뜻한 이의 사랑이다. 누구보다 부드럽고 환한 빛을 품은 성준. 그의 미소에서 퍼지는 훈풍. 성준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린은 눈에 띄게 안정을 찾은 모습이다. 그런 나린이 가증스럽다는 듯 강호가 입을 열었다.

“사직서 네 책상 서랍에 있던데. 굉장히 무방비하게. 지난주는 내내 미국에서 거주할 곳 미리 알아보느라 점심시간 쪼개 통화하고 있었고. 갈 의사가 그보다 더 확실할 수가 있나.”

‘그므흐르그(그만하라고).’

나린은 이를 꽉 물고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강호가 피식 웃었다. 두 사람, 나린과 성준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을 보니 우려했던 것보단 제법 잘 어울린다. 따로 떨어져 있을 땐 꿈도 꿀 수 없던 투 샷이었는데. 소란과 작당하여 두 사람을 만나게 한 보람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퇴직이고 미국이고 이제 꿈도 꾸지 말고, 형님 옆에 딱 붙어 있어.”

“맞아요, 언니. 아무 데도 가지 마세요. 저 열무 태어나고 크는 거 옆에서 꼭 보고 싶어요. 세 식구 꼭 여기 있어야 해요.”

소란은 내내 감격한 얼굴로 새로운 가족을 반갑게 맞이했다. 폭풍처럼 몰아친 하루. 상상도 못 했던 존재, 소란에게 올케와 조카가 한꺼번에 생긴 날이다.

16615904551179.jpg

  ◇ ◆ ◇

“뭐? 그래서?”

집들이에 가장 늦게 도착한 이는 태석이다. 태석이 강호와 소란의 신혼집에 도착한 건 모든 상황이 다 정리된 후였다.

“사색이 되어서 병원으로 달려갔죠. 나린 언니 어떻게 되기라도 했을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형 도착하기 전까지 여기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연희와 찬규가 상황을 전해주었다. 나린이 계단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혀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있었고, 집주인들은 찬규와 연희에게 뒷일을 맡기고 병원으로 떠났다고 했다. 찬규와 연희 부부는 남은 손님들을 챙겨 떠나보내면서도 내내 소식만 기다리고 있던 차에 다행히 조금 전 병원에 있는 소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단다.

“나린 언니가 잘 먹지도 못하고 몸이 좀 허한 상태라 계단에서도 쓰러졌던 모양이에요. 안정을 취하면 금세 나아질 거라니 다행이에요. 아기도 아무 이상 없다고 하고. 아깐 진짜 어후……, 십년감수했어요.”

연희는 쓰러져 있던 나린을 떠올리며 아찔하단 표정을 지었다. 괜찮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전화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안심한 모습이었다. 나린의 몸 상태를 들어 알고 있는 태석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아기 아빠한테는 아직도 안 알린 거야?”

“계나린이 원래 독하잖아.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말 안 했을걸.”

“그런데…….”

찬규의 말에 이어 연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란이는 왜 성준 오빠까지 병원에 데려간 거지?”

아까는 정신없어 생각지 못했던 걸 되짚으며 연희가 의문을 제기했다.

“아, 그러게. 소란 씨가 같이 가자며 갑자기 막 끌고 가던데.”

뭐지, 뭘까.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도 나오는 건 없다. 그러다 찬규가 입을 뗐다.

“혹시.”

“혹시?”

“혹시 계나린이랑 소란 씨네 오빠분이 사귀는 사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이야, 홍찬규 상상력 장난 아니네. 둘이 언제 봤다고 사귀는 사이겠어.”

“형이 아까 상황 못 봐서 그래. 계나린 쓰러진 거 보고 소란 씨 오빠분 표정이 아주…….”

“설마.”

연희도 그건 상상도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은 연결점이 없다.

“성준 오빠야 워낙 사람이 선해서 무슨 일 났다 하면 자기 일처럼 걱정하니까. 그래서 그랬겠지.”

병원에는 왜 같이 갔을까 하는 질문에는 아무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찝찝하게 남은 의문을 외면해버릴 뿐. 세상에는 상식이란 게 있으니 말이다.

“하하, 그래, 내가 착각했나 봐. 갖다 댈 걸 대야지. 소란 씨 오빠분 인생을 위해서라도 계나린이랑은 엮이면 안 되는데.”

“왜, 언니가 어때서. 예쁘고 매력적인데. 난 나린 언니 볼수록 좋더라. 사람이 차갑긴 해도 뭔가 따뜻한 정이 느껴지잖아.”

“차가운 핫초코 같은 소리 한다. 네가 계마녀한테 안 당해봐서 그래. 사흘 잠도 못 자고 코드 짠 사람한테 기획 새로 바꾼 거 들이밀면서 당장 수정하라고 요청하는 애야, 걔가. 잠은 죽어서나 실컷 자라면서.”

찬규는 끔찍하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우리 신랑 고생 많았구나, 하면서 연희가 안쓰러운 얼굴로 토닥토닥 해주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태석이 분명한 목소리로 확언했다.

“딴 건 모르겠고, 두 사람 연인은 아닌 건 확실해.”

“하긴, 형이 만사 촉이 좋은 편이지.”

“촉보다는, 음……. 사람 사이에도 인과관계가 중요한 법이잖아.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지, 엮일 일이 전혀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떻게 인연이 있겠어.”

촉으로 때려 맞히는 게 아니라 철저한 이성의 논리 아래 도출해낸 답이다. 찬규와 연희 역시 태석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연이 닿아 있다면 지금껏 나린이가 혼자 고생하고 있던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긴 해.”

“나만큼 남녀 사이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 없다니까.”

태석이 똑 부러지게 말하며 강호와 소란의 집을 슥 훑어보았다. 마치 모래성을 바라보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애정도 없는 부부 사이를 유지하며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집들이까지 하는 소란의 고충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다. 소란이 이 집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사람은 저뿐이다.

“선배님 뭐 좀 드셔야죠? 점심은 드셨어요?”

“그러고 보니 점심도 못 먹었네.”

연희의 말에 태석은 그제야 출출함이 느껴졌다. 집주인들이 자리를 비운 후 적당히 먹고 즐기던 손님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고, 찬규와 연희가 양쪽 지인을 거의 다 아는 덕에 마지막 손님까지 배웅하여 마무리할 수 있었다. 두 사람도 그만 가려던 차에 태석이 도착한 것이다. 마침 찬규의 품에서 잠든 서후를 게스트룸에 눕혀놓고 세 사람은 빈집에서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좀 먹어, 형. 되게 맛있어. 술 줄까?”

“아니, 술은 됐고. 음식 맛있겠네.”

태석은 간단한 핑거 푸드 위주로 골라 접시에 담으며 물었다.

“정리랑 청소는 어떻게 한대? 얘넨 언제 온다는 얘기 없어?”

대충 요기한 후에 싹 청소라도 해주고 갈 생각이다.

“늦을 것 같다고만 했는데, 청소는 업체에서 이따 저녁에 방문할 거니까 그냥 두고 가면 된대요.”

연희에 이어 찬규가 못 말리겠다는 듯 덧붙였다.

“소란 씨 고생 안 시키려고 음식 준비부터 정리까지 싹 다 업체 부른 거잖아. 백강호가 얼마나 팔불출인지 형은 모르지? 와, 내가 아는 백강호가 아니라니까. 집들이 내내 아주 소란 씨 손에 물 한 방울 묻을까 봐, 뭐만 했다 하면 나타나서 다 자기가 하겠다고. 어후우.”

“맞아, 진짜 의외야. 강호 오빠 장난 아니었지.”

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자신을 경계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강호의 마음은 진심인 듯했다.

“그런데 소란이는 깜짝깜짝 놀라면서 은근 피하려고 하던데. 남들 앞에서 챙기는 거 엄청 쑥스러운가 봐.”

“백강호 카리스마에 나도 하루에 열두 번씩 놀라는데 소란 씨 심장이라고 뭐 철갑을 둘렀겠어. 쪼는 게 당연해.”

찬규와 연희는 농담처럼 주고받았다. 집들이에 일찍 도착한 손님들 때문에 부부의 깊어지던 스킨십이 끊겼다는 사실, 덕분에 강호와 눈만 마주쳐도 몸이 화끈 달아오르던 소란이 사람들 앞에선 일부러 피하려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으니까. 다만 듣는 태석은 소란이 피했다는 그 말에 마음이 아플 뿐이다.

“그래도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리잖아. 강호 오빠도 소란이한테 그렇게 정성일 줄 몰랐고.”

“맞아, 아까 다른 사람들도 둘 사이 좋다고 난리더라. 이러다 소란이 바로 아기부터 가지는 거 아니야?”

우리처럼. 찬규와 연희가 닭털을 폴폴 날리며 까르르 웃었다. 태석은 씁쓸한 얼굴로 억지로 웃어 보였다. 얘들은 그렇게 친하면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역시 소란을 도와줄 사람은 저뿐인 것 같다.

“아, 참. 형은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늦게 왔어?”

“그러게요. 선배님 왜 이제 오셨어요? 많이 급한 일이었어요?”

“우리 태석이 형이 놀 때 늦는 사람 아닌데.”

누구보다 노는 일에 진심인 마태석이 아닌가. 아무리 급한 업무도 놀 때만큼은 확실히 뒤로 미루는 사람인데.

“응, 그럴 일이 좀 있었거든.”

태석은 싱긋 웃으며 두 시간 전을 떠올렸다. 늦게 오는 바람에 소란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성과는 꽤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