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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내 옆에 있어 (74/112)

#74화. 내 옆에 있어2021.07.17.

나린은 눈을 반짝 떴다.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헙, 하고 밭은 숨을 토해냈다. 어떻게 된 거지. 순간적으로 떠오른 마지막 장면은, 강호의 집 2층에서 막 도망치듯 나올 때였다. 2층 중문을 통과하자마자 계단으로 몸을 틀다,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부딪혀버렸다. 억, 하고 부딪힌 사람과 그 옆의 사람이 놀라서 들고 있던 쟁반을 놓쳤고 와인잔과 병이 떨어져 챙그랑 하고 깨졌다. 동시에 이를 피하던 나린이 계단 끝에서 발을 헛디딘 건 순간이었다.  

“아앗!”

  바닥의 유리 파편에 쓸리며 손이며 종아리 살갗이 찢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린은 쾅 떨어져 구르면서도 아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열무……!’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을 뿐. 안 되는데. 하아, 정말 안 되는데. 계단에서 떨어져 내려가는 순간은 아주 짧았다.  

“계나린!”

  아득하게 들려온 건 강호의 목소리였다. 그가 뛰어 올라오며 제 몸을 꽉 붙들어 안았고, 내려오는 무게와 충격을 받아내며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억은 거기까지.

“하아…….”

정신이 번쩍 든 나린이 일어나 앉았다.

“열무!”

손으로 배를 감싸며 내뱉었다. 넘어지며 유리 조각에 긁히고 쓸려 다친 양손은 붕대로 감겨 있고, 한쪽 손등엔 링겔 바늘이 꽂혀 있다. 그때 병실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돌아보았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그가 자신을 바라본다.

“깼어요?”

성준의 애틋하고도 슬픈 눈에 그녀의 심장이 그만 철렁했다. 내가 깬 건 중요하지 않아.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야.

“어, 어떻게 됐어요? 나, 나……, 나 괜찮은 거죠?”

묻고 싶은 건 제 상태가 아니다. 아기를 품고 계단에서 구르다니.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아기가 괜찮은지, 그게 제일 걱정되고 궁금해 숨이 턱 막혔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 성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왜, 왜요……. 왜 그래…….”

그러지 마. 왜 울고 그래. 울지 마요. 불안하게 왜 우는 거야. 나린이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씹었다. 심장이 조여왔다. 그가 다가와 나린의 침대 곁에 앉아 가만히 손을 잡았다. 뿌리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너무도 따뜻했다. 여전히. 성준의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그의 곱고 하얀 얼굴이 온통 슬픔으로 가득했다. 설마. 나린은 고개를 들어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강호나 소란은 없다. 제 상태를 설명해줄 의료진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청순한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리는 성준이 있을 뿐. 밖에 누구 없냐고 힘껏 소리치고 싶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그때 성준이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린 씨 몸 괜찮대요. 그리고…….”

“…….”

“아기도.”

그가 또 울컥한 얼굴로 덧붙였다.

“……아기도 무사하고.”

기다렸던 그 말에 잠시 멍해졌던 나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 ◆ ◇ 1층과 2층 계단 사이였다. 마침 2층으로 향하던 강호가 굴러 내려오는 나린을 보고 단숨에 뛰어 올라가 받쳐 안았다고 했다. 강호가 그녀를 안고 뒤로 밀려나 바닥에 내려앉았을 땐 나린은 정신을 잃은 후였다. 그때부턴 성준도 무슨 정신으로 여기 병원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어떡해, 언니, 언니!”

소란이 어쩔 줄 몰라 했고, 강호는 나린을 재빨리 안고 차고로 뛰어 내려갔다.

“오빠, 같이 가!”

소란은 성준을 끌고 강호의 차로 갔다. 구급차를 부를 새도 없이 바로 강호의 차를 타고 네 사람이 함께 병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소란은 울먹거리며 나린의 상태를 걱정했다.

“언니 어떡하지. 우리 열무 어떡해.”

“괜찮을 거야. 괜찮아.”

강호가 초조해하는 소란을 다독이는 동안에도 ‘우리 열무’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땐 알지 못했다. 계단에서 굴렀다고 바로 기절하는 게 흔한 일도 아닐 테니, 그저 나린의 몸이 많이 쇠약한 상태인가 걱정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제 품에 눈을 감고 누운 나린만이 그의 심장을 아프게 긁어댔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에 의해 응급실이 아닌 VIP 병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강호가 미리 연락해둔 덕분이다.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진행된 절차에 의해 간단한 검사부터 빠르게 마쳤다. 병실에 온 담당의가 예비 산모인 환자에겐 아무 이상이 없다고 알려주었다. 순간 성준의 머리가 멍해졌다.

“사, 산모?”

그제야 벼락같은 깨달음이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옆에선 강호와 소란이 안심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 뒤로도 의사는 환자의 영양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고 스트레스가 심하니 안정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런저런 말을 남겼다. 꼬리뼈와 팔 쪽에 약간의 타박상이 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깨진 유리에 상처를 입은 손과 종아리는 치료를 마쳤다고 했다. 깊지 않은 상처라 금세 아물 거라는 말을 끝으로 나린은 며칠간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 ◇

“나린 언니 지금 임신 중이야.”

소란의 말에 성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20주 정도 되었대.”

오늘 나린을 만나게 된 것부터 병원에 온 것까지 온통 갑작스러운 일 천지였는데, 나린이 임신했다는 말에는 댈 것도 아니다.

“오빠 아기. 맞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단 한 번이었다. 게다가 피임도 했었다. 어떠한 불가능 속에서도 찾아올 아기는 반드시 찾아온다더니. 희박한 피임 실패 확률을 뚫고 천사가 날아들었다. 20주라. 떨리는 마음으로 아직 잊지 않은 그날을 어림잡아 헤아리려는데 소란이 말했다.

“임신 주수는 ‘그날’로부터 세는 게 아니라 마지막 생리일로부터 세는 거라서. 아마도 ‘그날’에 보름 정도는 더해줘야 할 거야.”

그날에 2주 정도를 더하니 딱 20주였다. 성준은 소파에 탁 내려앉았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느껴본 적이 있나 싶다.

“강호 씨가 중간에서 알게 된 후로 두 사람 도와주고 싶다고 했어. 나도 같은 마음이고.”

“그래서 날 집에 부른 거구나.”

“응, 두 사람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소란은 성준의 손을 잡았다.

“처음엔 언니도 많이 놀랐던 모양이더라. 오빠가 내 오빠인 줄은 몰랐겠지.”

안 보면 그만인 사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계속 엮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오늘 예상치 못한 만남까지 이어졌다.

“언니도 나름의 사정이 있고 생각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무조건 피하기만 하는 건 서로에게도 안 좋은 거잖아. 혹시 잘되지 않더라도…… 만나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소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풀어야 할 문제야. 언니가 그 아기를 낳아 키우겠다고 결심한 이상, 오빠도 꼭 알아야 할 일이고.”

천륜은 끊을 수 없는 거니까. 성준은 저만치 침대에 누워 있는 나린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슴이 미어진다. 어떤 심정으로 그 힘든 결심까지 했을까. 그녀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전과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왔다. 그녀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까 봐. 제 존재로 인해 그녀에게 힘든 일이 생길까 봐. 그저 보고 싶어도,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나설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막연히 그리워만 했는데. 그사이 나린에겐 인생이 뒤집힐 만큼 커다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기 태명이 열무야.”

소란이 엷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나린 언니, 오빠가 담가준 열무김치를 너무 맛있게 먹더라. 입덧으로 고생해 제대로 먹는 게 없을 때도, 어떻게 오빠 음식은 귀신같이 알고 잘 먹었더라고. 나도 나중에 알았어.”

“…….”

“언니가 오빠를 아직,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멀리서 사라지곤 하던 뒷모습이, 실은 환영이 아니라 진짜 그녀였음을 성준도 이제야 깨달았다. 나린 역시 자신을 너무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다는 사실까지도. 그건 성준에게 큰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수액 다 맞을 때쯤엔 깨어날 거라고 했으니까 오빠가 곁에 있어줘. 나는 강호 씨 검사받는 데 가보고 이따 같이 올게.”

나린을 받쳐 안았던 강호는 병원에 도착해 입원까지 시킨 후에야 팔에 통증을 느낀 모양이다. 몸을 던져 나린을 받은 강호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그치진 못했을 테니,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은혜는 어떻게든 갚을 것이다.

“그럼 다녀올게.”

소란이 나간 후, 광활한 병실에 저와 나린 둘만 남았다.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참이나 나린을 바라보다가 창가에 가서 섰을 때,

“열무!”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제 배를 감싼 채 두려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배 속의 아기부터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성준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미안해요. 당신을 혼자 두어서.

“어, 어떻게 됐어요? 나, 나……, 나 괜찮은 거죠?”

미안해요. 당신은 나 같은 거 없어도 될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려서.

“왜, 왜요……. 왜 그래…….”

미안해요. 미안함이 너무 커서, 당신 옆에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그 미안함을 이겨내지 못해서, 내가 당신을 더 힘들게 했어. 그게 너무, 미안해요.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살면서 여자 때문에 이렇게 울어본 적이 있던가. 단연코 나린이 유일하다. 제게 처음이고, 마지막일 게 분명한 여자.

“나린 씨 괜찮대요. 그리고…… 아기도.”

“…….”

“……아기도 무사하고.”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그녀 역시 울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억눌린 감정이 한순간에 쏟아져 나왔다. 성준은 나린의 얼굴을 가린 두 손을 조심히 떼어냈다. 눈물이 그득히 차오르다 못해 넘쳐흐르는 눈이 너무나도 예뻤다. 성준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겨우겨우 만난 이 사람을, 이젠 절대로 혼자 울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난, 나린 씨 포기 안 해요.”

“…….”

“무슨 일이 있어도.”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그녀에 대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절대로 깨뜨릴 수 없는 신념 같은 사랑. 성준에겐 이제 그녀가 세상이다.

“그러니까 나린 씨. 숨지도 말고, 도망가지도 말아요.”

“…….”

“그냥 내 옆에 있어.”

어떤 산이든 다 넘을 각오 했으니까. 나린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끝까지 가보자. 함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입술에 조심조심 입을 맞추었다. 벌어졌다 맞물리며 뜨겁게 얽히는 감촉이 내리 꿈결 같았다. 애틋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얼어붙은 마음이 가만히 녹아들었다. 열무가 생기던 날 나누었던 첫 키스. 그리고 열무의 존재를 알게 된 후에야 하게 된 두 번째 키스. 이제는 절대 놓지 않을 서로의 손. 성준은 자신의 세상 전부가 되어버린 그녀와 비로소 다시 만났다. 매 순간 바랐던 기적이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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