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숨 쉴 때마다 그리웠다고2021.07.13.
“네, 쉴 만한 곳 있죠. 저 따라오세요.”
소란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바쁜 일이 생겼다며 간다고 했었어야 했다. 아무리 소란이 꼬치꼬치 물어볼까 걱정됐더라도, 평소처럼 그냥 무시하면 됐을 일인데. 집들이 내내 소란이 절 붙들었기 때문일까. 매정하게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그 이상한 느낌이 나린의 몸을 2층으로 향하게 했다.
“여긴 안쪽에 있어서 사람들이 막 마음대로 들어오진 않을 거예요. 웬만한 사람들은 다 구경했으니까 올 사람도 없죠, 뭐.”
소란은 생글생글 웃으며 2층 서재 문을 열어주었다.
“언니 아까부터 피곤해 보이던데, 여기 소파에 앉아서 좀 쉬고 계세요.”
딱 봐도 편안해 보이는 소파를 보니 나린도 긴장이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그럼 전 내려갈게요. 손님들은 대부분 1층에만 계시니까. 늦게 오신 분들 식사도 좀 챙겨드려야 하고.”
싱긋 웃는 소란을 보며, 의심했어야 했다.
“그래, 내려가.”
딱 오 분만 앉아 쉬었다가 이 집을 빠져나가야겠다는 계획 따위는 소란에게 잡힌 순간 전부 무용지물이었음을, 알았어야 했다. 소란이 나간 지 채 삼 분도 되지 않아 서재 문이 열리고 성준이 들어왔을 땐,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아…….”
나린의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병원에서 마주치고 이번이 두 번째. 물론 성준은 모르겠지만 몰래 보고 도망친 적은 수없이 많다. 심지어 일부러 성준의 식당에도 찾아가 멀리서 보고 돌아서기도 했으니까.
“또 보네요.”
안에 나린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성준도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내 그는 평소 모습처럼 잔잔해졌다. 성준이 등 뒤로 문을 밀어 닫았다. 탁, 문이 닫힌 소리 뒤로 정적이 흘렀다. 나린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편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있느라 살짝 부풀었던 배를 자연스레 감추면서.
“나린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 전 여기가 여동생 집이라서.”
성준이 물었다. 나린의 침이 바짝 말랐다. 이 집의 주인들과 자신이 무슨 관계인지 성준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다. 반면 자신은 성준이 소란의 오빠라는 걸 알면서도 여태 피해 다녔으니, 이제 와 놀라는 척하는 것도 우스웠다. 나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강호랑 친구예요.”
“아, 매제 친구였구나. ……전혀 몰랐어요.”
“저도 소란이 오빠인 줄 몰랐어요. 두 사람 결혼식에서 보고 알았어요.”
그 말에 성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린 씨가 결혼식에 왔었어요?”
“친구 결혼식이니까 당연히 갔죠.”
“그랬구나.”
그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나린은 목이 바짝 타서 더 이상 바라보기 힘들었다. 후, 숨을 내쉰 후 그녀는 일어섰다.
“그럼 전 먼저 갈게요.”
그와 어긋난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다. 고작 넉 달 정도였다. 아직은 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물론 편해질 때가 오지도 않겠지만. 나린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를 지나쳐 문 쪽으로 가려 했다. 어찌 된 건지 좀처럼 먼저 나서는 법이 없던 성준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몸에 흠칫 놀란 나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막을 줄은 몰랐다. 나린이 옆으로 비켜서자 그가 다시 한 발 움직여 가로막았다.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뭐예요. 비켜요.”
밀쳐봤자 꿈쩍도 안 할 것 같아 나린이 괜히 더 날카롭게 뱉었다. 돌아온 건 느릿하고도 부드러운 음성.
“나는.”
“…….”
“잘, 못 지냈어요.”
나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 ◇ 성준의 식당에 그녀가 등장한 건 가을비가 내리던 날이다.
“갑자기 비 오네.”
“예보에도 없더니 웬 비야.”
계산을 마친 마지막 손님들이 나가려다가 하는 말에 성준도 밖을 내다보았다. 정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성준은 계산대 아래 놓아두었던 우산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쓰고 가세요.”
“아, 그래도 돼요? 내일 가져다드릴게요.”
“네, 그러세요.”
웃으며 손님들을 배웅했다. 손님들이 우산을 쓰고 떠난 후, 몸을 돌려 들어오려던 성준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웬 여자가 비를 맞고 선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뭐지, 좀 무서운데. 검은 옷에 검은 머리카락, 차가워 보이는 인상. 비에 잔뜩 젖은 얼굴. 빗속에 선 그녀는 소위 마녀 같은 모습이었다. 성준은 이상하다, 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들어왔다. 문을 닫으려는데 그녀가 들어왔다.
“어.”
영업이 끝났다고 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깝게 다가선 그녀의 얼굴은 생각보다 말갛고 순했다. 멀리서 본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짙은 눈화장에 가려진 눈빛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녀는 성준을 한번 올려다보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빈 테이블에 앉았다.
“정식 하나 주세요. 국물은 뜨겁게.”
영업이 끝났다는 말은 또 꺼내지 못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성준이 그녀를 위한 식사를 처음 준비한 날이었다. ◇ ◆ ◇
“오빠 올라갔어요.”
소란이 강호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확인했지?”
“서재 안에 들어가는 것까지 살짝 보고 내려왔어요. 지금 확실히 둘이 같이 있어요.”
강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2층 거실에 올라가 있어야겠어.”
“거실?”
“계나린 대화도 제대로 안 하고 뛰쳐나올 수 있으니까.”
퇴로를 차단하고 지키겠다는 소리다.
“굿.”
소란이 엄지를 들었다. 강호가 고개를 끄떡, 하고는 비장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 ◆ ◇
“나는.”
“…….”
“잘, 못 지냈어요.”
나린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성준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다르게 나린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성준은 점심 장사를 이르게 마치고 정리도 미뤄둔 채 소란의 집으로 달려온 참이다. 강호가 1시까지 오면 된다고 해서 장사를 거를까도 했지만, 일찍 마치더라도 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먼 곳에서 방문한 지인을 데려왔다는 단골이 있었기에 식당을 연 건 잘한 일이었다. 덕분에 집들이 도착은 좀 늦어졌지만.
“오빠, 왜 이렇게 안 와. 아직 출발 안 했어?”
“오빠, 언제 도착해? 3시 전에는 올 거지?”
소란이 평소답지 않게 재촉해댔다. 어디 숨어서 전화라도 하는 건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면서 말이다. 굳이 자신이 가지 않더라도 집들이하는데 아무 지장 없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찾는지 모를 일이다. 막 도착해서 소란의 동창들과 인사를 나눌 때였다. 소란이 자신을 보더니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오빠, 2층 제일 끝방이 서재인데 거기에 내 가방을 두고 왔거든. 소파 위에 있어. 그것만 좀 가져다주면 안 될까? 오자마자 미안해.”
손님들이 많이 와서 소란이 정신없긴 한 모양이다. 가방은 왜 서재에 두고 왔으며 그 가방을 굳이 지금 찾는 이유는 또 뭔지, 설명할 시간도 없이 급하다며 부탁하는 말에 성준은 2층으로 올라왔다. 사람들은 다 1층에 있는지 2층은 조용하기만 했다. 천천히 걸어 2층 끝방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나린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그 안에 있자 성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다른 의문은 모두 사라졌다. 아무것도 궁금한 게 없었다. 내내 품었던 ‘굳이?’라는 의문조차 증발해버렸다. 오직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나린뿐. 그녀에게 전화한다고 받아주지도 않겠지만 전화할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나린이 보고 싶을 때마다 그날 호텔 침실 밖에서 엄마를 향해 절규하듯 소리치던 그녀의 음성이 생생히 들려왔다.
“선보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고작 결혼 하나 우리 뜻대로 못 해주니? 어렵게 만든 자리엔 나타나지도 않더니 룸에 남자를 끌어들여? 그래, 네가 부른 남자는 얼마나 대단한지 얼굴 좀 보자. 어디 있니. 침실 안에 있어?”
“안으로 한 발짝만 더 들어가봐. 나 여기서 뛰어내려요!”
그녀를 힘들게 하면 안 되는데. 이런 관계라면, 더 깊어지기 전에 잘라내는 게 옳지 않을까 했다. 쓰게 삼켜낸 숨이 제 목을 조이는 것 같지만 할 수 없이 돌아섰다. 그녀는 절 잡지 않았다. 애초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만남이었다. 사랑이 될 수 없다. 그게 둘 사이의 전부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만난 순간, 제 모든 운명은 그녀에게로 향해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 한 번쯤은 미친 척 다가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성준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나는 잘, 못 지냈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해놓고 후회하긴 싫어서요.”
의도가 있는 말은 아니다. 어차피 흔든다고 흔들리는 나린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성준은 그저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궁금했어요. 어떻게 지내는지.”
처음 만난 날처럼 낮에 비가 올 때마다 당신을 생각했다고.
“밥은 잘 먹는지.”
당신이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 때마다 또 생각했다고.
“잠은 잘 자는지.”
아니, 숨 쉴 때마다 그리웠다고. 이렇게라도 꼭 얘기해야겠어.
“……보고 싶었어요, 난.”
당신은 아니겠지만.
“하.”
나린이 웃을 듯 울 듯 미묘한 표정으로 숨을 탁 내뱉었다. 늘 차갑기만 하던 얼굴에 온갖 빛이 어려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얽혀 있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가슴속이 일렁였다.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선 성준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부서질 듯 여린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는 순간, 나린이 탁 하고 손을 들었다. 대지 말라는 몸짓이다.
“난 아니에요.”
이럴 줄 몰랐던 건 아니다. 그러나 싸늘하게 내뱉는 말과 다르게 그녀의 눈엔 눈물이 고여 있다. 눈물……? 그녀의 깊고 검은 눈빛에 파동이 일었다.
“나린 씨.”
“난 아니야. 난 아니니까……, 아니야. 나는.”
입술을 꽉 깨물던 그녀가 성준을 지나쳐 서재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는 듯. 그녀의 알 수 없는 눈에 그리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터져 나온 감정에 놀란 성준이 그녀를 따라 나갔다.
“나린 씨!”
잡아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꼭 잡아야만 했다. 절 놓지 말아달라는 듯 아프게 돌아서는 그녀의 눈빛에 제 삶 모두를 걸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나린이 2층 복도를 달려 나가는 걸 보며 성준은 더 서둘렀다. 처음으로 제 불편한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힘껏 뛰어가 그녀를 붙잡고 돌려세우고 싶은데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자동으로 열리는 중문을 지나 나린이 막 계단으로 몸을 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였다.
“꺄아악!”
“꺅!”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 새된 비명. 쿠당탕탕,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 온갖 소리만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그려내며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성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떡해!”
“계 팀장님! 대표님! 어머!”
서둘러 중문을 지나 나간 성준의 시야에는, 계단 위쪽에서 놀라 입을 틀어막은 남자들도, 바닥에 떨어져 깨진 와인잔들과 병, 접시도, 1층 중문을 열고 나와 놀라서 서 있는 사람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반 층 아래. 강호의 몸 위에 안기듯 누워 몸이 축 늘어진 나린만 보일 뿐이다. 그녀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