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독 안에 든 나린2021.07.10.
“다음부턴 늦게 다녀.”
찬규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계단을 올라갔다.
“뭐래. 일찍 와도 난리야.”
어딘가 심기가 잔뜩 불편해 보이는 집주인의 사정은 제 알 바 아니다. 백강호가 살벌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서후를 안은 찬규는 그저 상상 이상의 저택 규모에 순수한 감탄을 쏟아냈다.
“가정집에 서른 명 초대라 그래서 걱정했는데, 이건 뭐 걱정할 게 없네. 축구 경기를 해도 되겠어.”
1층에 들어온 그들은 아름다운 집의 내부에 한 번, 이미 완벽하게 끝난 준비에 또 한 번 놀랐다.
“벌써 끝났네? 뭐 도와줄 건 없어?”
“없어.”
생활용품들이며 소품 등 집들이 선물로 가져온 것을 한쪽에 내려놓는데 안쪽에서 소란이 서둘러 걸어 나왔다.
“오셨어요!”
청소라도 하던 참인지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힘들었던 모양이다. 연희는 소란이 안쓰럽다는 듯 어깨를 안으며 토닥여주었다.
“응, 우리 왔어. 준비하느라 고생했지?”
“어, 아니? 어어, 아니, 맞아.”
어째 횡설수설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소란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내 친구 너무 힘들었구나, 하면서. 소란은 하하하,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강호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드레스룸 안에서 뜨겁게 몰아붙이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차분하고 냉정한 모습이다. 물론 그 차이가 소란의 가슴을 더욱 뛰게 하지만. 아까 두 사람은 난데없이 울린 인터폰 소리를 무시하고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몰입해 있었다. 아직 손님이 올 시간은 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일찍 온다고 해도 십오 분, 이십 분 빠른 정도겠지 했었는데, 연신 인터폰이 울리더니 강호의 휴대전화까지 울렸다. “홍찬규 이 새끼…….”를 나직하게 읊조리는 그의 탁해진 음성마저 섹시했다. 안타깝게도 찬규 일행의 이른 도착이 사실이긴 했다. 부재중 전화에 찍힌 이름은 홍찬규였다. 딱 십 분만 늦게 와줬어도 좋았을 텐데.
“내가 먼저 나갈 테니까 옷 입고 천천히 나와.”
그는 아쉬운 듯 입술에 몇 번이고 짧게 키스한 후 드레스룸에서 나갔다. 강호가 나간 후 소란은 서둘러 옷을 꺼내 입고 화장을 수정했다. 옷을 잘 챙겨 입었는데도 온몸이 화끈거렸다. 아직도 곳곳에 그의 입술이 남은 듯 느껴졌다. 거실로 나와 사람들이 들이닥친 걸 보니, 몰래 사랑을 나누고 온 것처럼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 와중에 내 남편은 또 왜 이리 잘생겼을까. 키스만 감질나게 한 데다가 그 시간마저 예상보다 빨리 뚝 끊기고 말았으니 몸은 더 안달이 나는 기분이다. 눈이 마주친 강호가 조용히 입 모양으로 말했다.
‘밤.’
딱 한 단어지만 소란은 바로 알아들었다. 이따가 밤을 기약하자는 의미다. 소란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괜히 옆에 붙어 있다가는 몸만 더 뜨거워질 테니 되도록 강호와는 거리를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둘만 남는 밤이 올 때까지는. 오늘 하루, 사람들이 많이 올 테고 여기저기 챙기느라 정신없을 테니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다. ◇ ◆ ◇
“언니, 여기 앉아 있어요. 이 의자가 제일 편해요.”
“언니, 음식은 입에 맞아요? 뭐 더 줄까요?”
“언니, 이거 루이보스 티 식혔어요. 미지근하니까 물 대신 드세요.”
나린은 소란이 언니, 언니 하고 계속 쫓아다니는 게 살짝 부담스러워졌다. 호스트라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왜 이리 저한테 신경을 쓸까.
“난 됐으니 가보라니까.”
“언니, 그럼 필요한 거 있으면 꼭 저한테 얘기하세요.”
그러고도 소란은 시시때때로 자신이 어디 있는지 눈으로 살피다가 마주치면 웃기도 했다. 꼭 도망치기라도 할까 봐 관리당하는 기분이다. 왜 저럴까. 어느덧 실내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친한 사람들끼리 있으니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밀린 수다도 떠느라 화기애애했다. 음식도 맛있고 준비해둔 VR게임이나 보드게임 등도 충분해 다들 즐거워했다.
“백강호, 루프톱으로 통하는 문 옆으로 2층에서 반 층 올라가 있는 공간 말이야. 다락이라고 하기엔 엄청 크고. 거긴 뭐야? 그냥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던데.”
위층을 구경하고 온다며 다녀온 찬규가 강호에게 물었다.
“아, 거기. 아이들 플레이룸으로 꾸밀 곳.”
나린도 보고 와서 어딜 말하는지 알고 있다. 사선으로 떨어진 한쪽 지붕에 커다란 창이 나 있어 햇살이 예쁘게 밀려들던 공간. 깨끗한 마룻바닥에 누워서 지붕을 바라보면 눈에 가득 하늘이 보일 것이다.
“플레이룸? 그거 혹시 2세를 위해 아버지께서 설계하신 거?”
“……그렇지.”
강호가 낮은 음성으로 수긍했다. 아버지가 꿈꿨던 집의, 어린 강호를 위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깜찍한 교구장과 안전한 매트로 꾸며놓은 그곳에는 그림책과 장난감이 가득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겠지. 반 층 계단을 내려오면 루프톱엔 수영장과 자쿠지가 있어 물놀이도 원 없이 했을 것이고, 너른 정원에선 공을 차며 뛰어다니다가, 오두막에 오르고 내리며 숨바꼭질도 했을 테고. 아이는 집 곳곳에 추억을 남기며 무럭무럭 자라났을 거다. 얼마나 행복한 삶이었을까. 나린은 강호 아버지의 꿈이었던 이 집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와의 시간을 그토록 바랐던 부모의 숨결이 가득 녹아 있는 공간. 강호에겐 참 자상한 부모가 계셨더랬다. 그러나 함께한 기억도, 추억도 없이 강호는 부모를 잃었다. 나린은 목으로 넘기는 침이 쓰게 느껴졌다. 제겐 부모가 있지만 함께한 기억도, 추억도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 어느 쪽이 더 불행한 아이일까. 강호, 아니면 자신. 분명한 건, 세상 그 어떤 아이도 삶이 불행하길 바라진 않는다는 것이다. 태어난 이상 행복해지고 싶은 건 당연했다.
“나중에 잘 꾸며둘 테니 서후 데리고 놀러 와.”
“좋지. 서후도 진짜 좋아하겠다.”
강호의 말에 무심코 대답하던 찬규가 문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너희 부부, 아기 낳으려고?”
“뭐, 언젠가는.”
덤덤하게 대답하는 강호를 보며 찬규는 우와, 하며 웃었다.
“상상이 안 된다. 백강호한테 아기라니. 뭔가 안 어울려. 야, 계나린, 그렇지 않냐?”
나린에게 동조를 구하던 찬규가 다시 멈칫했다.
“아……. 계나린과 아기는 더 안 어울리지.”
나린이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찬규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계나린을 닮았으면 아기의 카리스마가 상당할 텐데. 백강호야 말해 뭐 해.
“아무래도 너희 애들이랑 우리 서후는 좀 분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딱 봐도 우리 서후가 기에 많이 눌릴 것 같아.”
“널 봐서는 그럴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런가.”
생글생글 웃는 찬규는 그 순한 얼굴로도 강호와 나린에게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으니, 눈웃음 천사 서후도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쩌면 애교쟁이 서후가 나머지 애들을 찜 쪄 먹을지도 모를 일이고.
“근데 우리 연희는 서후 데리고 어디로 갔지?”
찬규가 고개를 돌리자 주방 테이블 쪽에서 연희 동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귀여움을 발산 중인 11개월 차 아기 서후가 보였다.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찬규가 그쪽으로 향한 사이 나린은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며 일어섰다.
“언니! 어디 가세요?”
어느새 나타난 소란이 나린의 손목을 붙들었다.
“화장실.”
“아아, 가시는 줄 알고.”
소란이 배시시 웃었다. 현관 쪽으로 향하니 집에 가는 줄 알았나 보다.
“나 왜 감시당하는 느낌이지?”
“네?”
“네가 나 어디 못 가게 자꾸 체크하는 것 같아서.”
“아뇨, 하하. 손님 챙기는 게 오늘 제 일인데요.”
나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화장실 밖 복도에 서 있는 소란은 초조해하며 시계를 보았다. 생각보다 늦어지는 손님을 기다리는 중이다.
“아아, 벌써 3시가 되어가는데.”
“우 변. 우리 2층도 좀 구경시켜주라.”
그때 친한 변호사 선배들이 소란에게 다가왔다.
“어어, 네, 가요.”
소란은 빨리 다녀와야겠다 생각하며 선배들과 함께 2층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나린이 핸드로션을 바른 손등을 살며시 비비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절 쫓아다니던 소란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즐거운 분위기고, 강호는 제법 주인답게 손님을 챙기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강호 이런 거 되게 싫어하는데, 볼수록 신기하네.’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연회에 가까운 집들이씩이나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거의 일평생을 옆에서 봐온 친구지만 참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귀찮은데 집이나 가야겠다.’
결국 소란이 우려했던 대로, 나린은 가방을 챙겼다. 밥도 먹었고 대충 얼굴도 비췄고 더 있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소란이 없으니 잘됐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소파에서 가방을 들어 올리는 나린의 뒤로, 거실 통유리창 옆에 있던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헐, 맞지? 소란이네 오빠.”
나린의 몸이 얼어붙은 듯 굳었다.
“저기 정원 옆으로 걸어오는 사람. 성준 오빠 맞네.”
“와, 오빠도 오시는구나. 눈이 다 환해진다. 소란이 결혼식 때보다도 더 잘생겨진 거 같은데?”
나린은 겨우 고개를 돌렸다. 아까 소란의 중학교 동창이라 했던 여자 두 명이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숨이 막힐 듯했다. 저택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가 창밖으로 보였다.
“나 진짜 저 오빠 다리 볼 때마다 내가 다 안타까워. 선수 때 진짜 짱이었는데. 그때 오빠 다치고 소란이 울어서 눈 이만큼 부은 채로 학교 다닌 거 기억나?”
“거의 한 달은 매일 울었지, 아마.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성준 오빠만큼 인성 바르고 착한 남자도 드문 거 같아. 요즘.”
“드물다 뿐이냐, 유니콘이지. 저 얼굴에 저 성격인데 몸이 조금 불편한 게 대수겠어. 아직도 솔로라던데 이참에 소란이한테 정식으로 소개해달라고 해볼까 봐. 돈이야 내가 잘 버는데 뭐.”
“오오, 오늘 작업 가나요.”
“오빠 들어온다. 인사하러 가자.”
나린은 쿵 내려앉은 심장을 수습할 새도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곧 그가 현관으로 들어올 테니 나갈 수도 없다. 이대로 거실에 있자니 마주할 것 같고. 지금껏 내내 숨어 다녔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 진정 몰랐다. 어떡하지, 어디로 가지. 곧 성준이 들이닥칠 텐데. 밖을 보니 아직 현관에 다다르진 않았다. 나린은 빠른 걸음으로 1층 중문으로 향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성준은 1층으로 들어올 테니 그전에 나린은 2층으로 올라갈 생각이다. 잠시 계단에 있다가 그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때 재빨리 내려가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계획을 짰다. 중문을 연 나린이 서둘러 계단으로 올라갔다. 반 층 올라가 몸을 틀 때였다.
“성준 오빠.”
“오빠, 저희도 왔어요.”
“어, 정은이랑 혜지구나.”
막 성준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간발의 차로 마주치지 않고 피할 수 있었다. 후우우우. 나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추격전도 아니고, 게릴라 전투도 아니고, 고작 집들이 와서 왜 이러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겨우 한숨 돌렸다. 계단 아래로 소란의 친구들과 인사하며 함께 내부로 들어서는 성준을 지켜보았다. 그럼 성준이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빨리 내려가 여기서 나가야겠…….
“언니.”
“히이익!”
너무 놀란 나린이 손바닥을 펼친 채 파르르 떨었다.
“언니, 괜찮아요?”
나린보다 더 놀란 듯 소란이 그녀를 붙들었다.
“괘, 괜찮아.”
“우리 열무도 괜찮아요? 언니 깜짝 놀란 것 같은데.”
소란이 걱정하며 나린을 꽉 붙잡았다. 차고로 내려갔다가 빠져나갈 걸 그랬다. 2층 계단을 선택한 건 크나큰 실책이다. 그나마도 촉박한 시간 안에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긴 했지만.
“응, 난 괜찮아.”
나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폈다.
“그런데 언니, 왜 여기 계세요? 어디 가시려고?”
아니, 잡혀도 왜 하필 소란에게 잡혀서는. 네 오빠 피해 도망가려는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나린은 그나마 강호에게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소란은 아무것도 모르니 대충 둘러대면 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조금 피곤해서. 2층에 쉴 만한 곳이 있나 하고.”
소란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란 걸 들킨 걸까. 나린이 침을 꿀꺽 삼키는데 이내 소란이 활짝 웃었다.
“네, 쉴 만한 곳 있죠. 저 따라오세요.”
나린은 소란이 안내한 2층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 안 1인용 소파에 앉은 나린은 그제야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줄도 모르고. 그리고 잠시 후, 서재 문이 열렸다. 키가 큰 남자가 서재 안으로 들어오다가 소파에 앉은 나린을 보곤 우뚝 멈추어 섰다. 성준이다.
“아…….”
그녀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