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입만 열면 내가 예쁘대2021.07.06.
“맞다, 언니 그 채널 확인하셨어요? ‘준의 부엌’이요.”
연희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지만 나린은 얼어버렸다.
“어떠셨어요? 새 프로젝트에 섭외하실 거예요?”
“정말 그렇게 괜찮아? 요즘 난리라던데. 나도 보고 요리 좀 배울까 봐.”
찬규가 궁금하다는 듯 보태어 질문했다. 나린은 굳은 입술을 겨우 움직여 대답했다.
“별로.”
심장을 꼬챙이로 쑤시는 것만 같다.
“어, 별로예요?”
그럴 리가 없다는 투로 연희가 되물었지만 나린은 그저 싸늘히 대답하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다.
“응. 우리랑은 안 맞아.”
거짓말이다.
◇ ◆ ◇ 그날, 찬규가 연희에게 물어 ‘준의 부엌’이란 채널 이름을 전해주었다. 새 기획 때문에 아쉬운 쪽은 나린이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알고 싶어 재촉했다.
“‘준의 부엌’이라…….”
그런데 채널 이름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때 이미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준, 그리고 부엌.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지만 애써 외면했다. ‘준’이란 이름이 얼마나 흔한데. 검색하여 들어가자 사이트 곳곳의 자극적이고 현란한 섬네일들과는 다르게 서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채널이라 일단 호감이 상승했다. 기본적으로 그녀가 참 좋아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준의 부엌] 무채를 듬뿍 넣은 굴덮밥을 만들었습니다. 최신 영상 제목부터 나지막하고도 다정한 음성이 덧입혀진 듯했다. 나린은 천천히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섬네일에는 대부분 감각적인 구도로 클로즈업된 음식만 보였지만, 이쯤 되니 영상을 클릭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당신이구나. 쿵쿵쿵,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아니길 바랐다. 제 마음이 전부 그를 향해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우기고 싶었다. 그러나 영상 하나를 클릭한 순간, 마침내 등장한 남자의 체격과 아름다운 손을 보고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한숨이 느리게 밀려 나왔다.
‘……우성준.’
나린의 심장이 격한 파동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왜 피하면 피할수록 당신은 내 삶에 더 가깝게 스며오는 걸까. 어느덧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영상 속 남자의 목소리까지 흘러나왔다. 굴을 씻고, 무채를 써는 예쁜 손 위로 흐르는 따스한 음성. 그는 확실히 성준이다. 얼굴이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세상 아무도 모른다 해도 나린의 눈에는 단번에 보였다.
“어, 팀장님도 이거 보시네요. 어제 친구가 추천해줘서 바로 구독했잖아요. 그동안 올라온 영상 전부 다 봤어요, 저.”
팀원 한 명이 다가왔다가 나린의 모니터를 보고는 반가운 투로 말했다.
“분위기 너무 좋죠? 얼굴은 안 나왔지만 훈남일 것 같고 목소리에 신뢰감도 느껴지고, 그러면서도 친절해서 가르치는 데 최적화된 사람 같아요.”
나린이 영상을 정지시키며 한쪽만 끼고 있던 이어폰을 툭 빼내었다.
“그래서 제안 자료 만들려고 하는 중인데, 팀장님 보시기엔…….”
“그럴 필요 없어요.”
나린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사이트를 닫았다.
“아직 검증된 인물도 아니고 채널 생긴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리스크가 너무 커요.”
“그래도 콘택트라도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요.”
“아니.”
마지막이 될지 모를 프로젝트.
“다음 일정 진행합시다.”
조용히 마치고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 ◆ ◇ 한편, 소란의 집. 강호에게 성준과 나린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열무……, 우리 열무. 엄연히 말하면 소란의 핏줄은 아니다. 성준과는 피가 섞인 남매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진한 사랑이 섞인 가족이 아니던가. 지금껏 옆에서 보아온 나린의 아기가 바로 제 오빠의 아기였다니. 처음에는 기분이 묘했지만, 그게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라는 건 곧 깨닫게 되었다. 어쩐지 마음이 벅차올랐다.
“내가 이렇게 안 이상, 열무는 누가 뭐래도 내 조카예요.”
소란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코 평수가 살짝 넓어지며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뭔가를 굳게 다짐할 때의 표정이다. 나린은 필사적으로 숨고, 성준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이 상황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 강호가 그랬듯 소란 역시 같은 생각이다. 반드시 도울 것이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우리 열무랑, 나린 언니, 성준 오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안 둬. 나 진짜 딱 결심했어요. 우리 열무, 이 고모가 꼭 지켜줄 거예요.”
세 사람, 내가 진짜 행복하게 해줄 거야. 강호는 다시 기운을 회복한 소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예쁠 수 있을까. 눈에는 진한 사랑의 감정이 가득 배어 있다. 내내 그윽하게 바라보던 강호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열무는 좋겠다.”
“네?”
“이렇게 예쁜 고모가 있어서.”
열무와 성준, 나린에게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던 소란의 머리가 순간 댕, 하고 울렸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전하는 그의 진심이 새삼 또 비현실적이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예쁘대……. 이 사람은 뭐 입만 열면 내가 예쁘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괜히 쑥스러운 소란이 입을 오물거렸다.
“예쁘긴 뭐가요.”
“난 틀린 말 안 하는 사람이야.”
시베리아 찬 바람 부는 외모와 강호의 진짜 모습은 전혀 달랐다. 표현 같은 건 전혀 안 하고, 또 못할 사람처럼 보이는데. 환심을 사려고 꾸며낸 말이 아니라 강호가 덤덤하게 하는 말들은 모두 숨 쉬듯 자연스러웠으니 더더욱 두근거렸다.
“진짜 좋긴 하겠어요. 이렇게 멋있는 고모부도 있고.”
그의 말을 흉내 내어 소란이 덧붙이는 한마디에 또 한 번 사랑이 샘솟았다. 눈만 마주쳐도 꿀이 흐르는 신혼이란 걸 잠깐도 잊을 수가 없다. 얘기도 끝냈겠다. 서둘러 준비를 마친 덕에 아직 손님 올 시간도 충분히 남았겠다.
“화장 고쳐야지?”
“네, 많이 울어서 아무래도 고쳐야겠어요.”
그녀를 제 품에서 떨어뜨린 강호가 턱을 가만히 잡아 올렸다. 손님이 오기 전 곱게 한 그녀의 눈화장은 눈물로 엉망이 되었지만 핑크빛으로 바른 입술만은 아직 그대로다. 하지만 계속 그대로 둘 생각은 없다. 어차피 고칠 화장이라면.
“아무래도 여기도.”
엄지 끝으로 통통한 아랫입술을 살며시 쓸었다.
“다시 발라야겠지.”
촉촉한 그녀의 입술을 단숨에 머금었다. 체리를 베어 문 듯 달콤한 향기가 입속으로 끼쳤다. 키스는 언제쯤, 얼마나 해야 질릴까. 해도 해도 질리기는커녕 갈수록 좋아 죽겠으니 큰일이다. 그 어떤 중독보다 키스 중독이 위험한 것 같은데. 입술을 빨아들이는 움직임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섞이는 숨결이 뜨거웠다. 손님 도착 한 시간 전.
“소매가 눈물범벅인데, 옷도 갈아입어.”
강호는 입술을 흠뻑 물었다가 놓으며 그녀가 입은 옷자락을 지분거렸다. 가만히 침입한 손끝의 시원한 감촉에 소란이 어깨를 떨었다. 옷 갈아입으라는 말에 담긴 뜻이 뭔지 알고 있다.
“청소 이미 끝났는데…….”
시간도 있고 마음도 있으나, 이후 다시 방을 정리할 여유까진 없단 소리다. 집들이에 온 손님들이 집 안 곳곳을 구경하게 될 날이기에 모든 공간은 가사 팀의 손길로 아침 일찍 청소를 끝내놓은 참이다. 그 뜻을 찰떡같이 이해한 강호가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가뿐하게 들어 안았다.
“아앗.”
소란은 제 체중이 이렇게 가볍게 느껴지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지탱하는 힘이 든든하고 강인했다. 강호는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안고 다리는 제 허리를 감싸게 한 채 침실로 향하면서도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소란 역시 그의 목을 안은 채 온몸이 녹아내릴 듯 아찔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침실에 들어섰을 땐 역시나 청소 걱정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는 안 되는…….”
“알아. 침대 안 건드려.”
강호는 그녀를 안고 열띤 키스를 계속하며 침실 안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소란은 자신이 놓이게 될 도착지가 어딘지 몰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침내 그가 소란을 내려놓은 곳은 드레스룸 중앙의 낮은 수납장. 그의 시계며 벨트 등의 액세서리가 가지런히 놓인 수납장 유리 위였다.
“아무리 매너 없는 인간이래도 부부침실 안에 있는 드레스룸까지 뒤지진 않을 테니까. 여긴 좀 흐트러져도 상관없을 거잖아.”
적당히 프라이빗한 공간이다. 개방하지 않는다 해도 별 무리는 없을 만한 곳. 그는 장소 선정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남편이다. 그녀의 다리를 옆으로 열어 바짝 다가선 그는 마음껏 키스를 퍼부었다.
이내 소란의 옷이 툭,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차피 갈아입어야 할 옷도 미리 벗겨줄 만큼 그는 친절한 남편이고.
“너무 긴장하지 마. 지금은 키스만 할 거야. 화장할 시간은 남겨줄게.”
남은 시간을 알차게 쓰는 계획성 있는 남편이기도 했다.
“아아…….”
유리로 된 수납장 위에 앉은 소란의 목이 젖혀졌다. 부끄러움에 허리가 뒤틀렸다. 흥분해 선을 넘을 법도 한데 오직 ‘키스’만 하겠다던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야 마는 대쪽 같은 남편이다. 다만.
“여, 여긴…….”
“쉿.”
키스를 꼭 입술에만 해야 한다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단숨에 깨주는 남편이기도 했다. 그뿐일까. 아내는 어쩔 줄 몰라 숨이 꼴깍 넘어갈 듯한데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무서울 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남편이다. 그래서 더 야했고 머리가 어질거릴 만큼 섹시했다. 소란의 편견을 깨는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온몸 구석구석 붉은 자국이 남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강호의 신혼집 동네가 가까워지자 조수석에 앉은 찬규는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나 아니었으면 강호 그 자식이 집에 사람이나 들이겠냐? 오늘 이 자리는 다 내가 마르고 닳도록 집들이 노래를 부른 덕에 만들어진 거니까, 이따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 나한테 고마워해도 돼.”
누가 집들이하랬다고 순순히 할 백강호는 아닌데, 이번 초대는 의외였다.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하더니 싸가지가 좀 완화되었나. 덕분에 찬규만 실컷 공치사 중이다.
“하긴 강호 오빤 진짜 집들이 같은 거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베프인데 우리는 좀 따로 불러주지, 무슨 결혼식 피로연도 아니고 지인을 싹 모아 한자리에 부르냐. 귀찮은 거 싫어하는 백강호답긴 하지만.”
“아무렴 어때. 소란이랑 강호 오빠 조합이라니. 아직도 신기하고, 두 사람 신혼집 너무 궁금해.”
연희와 찬규가 대화하는 사이 마침내 주소지에 도착했다. 그것도 사십 분이나 일찍. 연희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우리가 1등일 것 같은데. 너무 일찍 왔나?”
“집주인들 정신없을 텐데 친한 우리가 일찍 일찍 도착해서 일손 좀 덜어주고 그래야지. 이런 게 센스 아니겠어?”
찬규는 싱글벙글 웃었고, 나린이 뒤에서 맞장구쳤다.
“행사나 회의에 늦는 거 백강호가 제일 싫어해.”
“맞아. 늦으면 잡아먹을 듯이 째려보잖아. 완전 살벌하게.”
찬규가 일찍 도착해 다행이라는 듯 격하게 공감했다. 연희는 운전석 차창을 내리고 팔을 쭉 뻗어 차고에 연결된 인터폰을 눌렀다.
“……음, 왜 안 열어주지?”
몇 번을 눌러도 집주인은 답이 없다.
“준비하느라 바쁜가?”
“너무 바쁜가 보다. 얼른 들어가서 빨리 도와줘야겠다.”
찬규가 휴대전화를 꺼내 강호와 통화를 시도했다.
“뭐야, 전화도 안 받아.”
이상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하는 차에 지이잉, 차고 문이 열렸다. 역시 바빴구나 하면서 차고로 들어갔는데 주차장 규모에 연희가 감탄했다.
“우와, 주차 자리가 몇 대야. 스케일이 다르네.”
차 시동이 꺼지자 귀신같이 일어난 서후와 집들이 선물들을 챙겨 세 사람은 실내로 통하는 문 쪽으로 갔다. 와본 적 있는 나린을 제외하고 찬규와 연희는 연신 우와, 우와 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차고 라운지를 통과해 계단으로 향할 때였다. 1층으로 연결된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가 보였다. 집주인 강호였다. 편안한 차림이지만 어딘가 서늘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백강호! 우리 일찍 왔어. 잘했지?”
찬규가 반갑게 손을 흔드는데 강호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다음부턴 늦게 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