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너무 귀엽잖아 (70/112)

#70화. 너무 귀엽잖아2021.07.03.

“두 사람을 도우려고 해.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두 사람이 원하는 거 맞아요?”

소란이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말했다.

“오빠한테 만나는 여자가 있는지 몰랐어요. 그 여자가 나린 언니인 줄은 더더욱 몰랐고……. 그런데 두 사람이 지금은 헤어졌다는 거잖아요. 무슨 사정이 있어서인지, 강호 씨는 알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어.”

“네에에?”

그게 더 놀라운 사실이다. 훅 치미는 배신감 이거 뭐지.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열무는 어떻게 생긴 건데! 내 이놈의 오빠를……! 갑자기 싸리비라도 찾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다.

“뭘 놀라. 성인이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긴 뭐가 그럴 수도 있어요! 성인이면 책임질 수 있는 행동을 했어야죠! 엄마 아빠 살아 계셨으면 우리 오빠 가만 안 뒀을 거예요! 잡아다가 아주 다리 몽댕이를……!”

아. 또 분지를 순 없지. 무심코 씩씩거리던 소란이 댕, 하고 얻어맞은 기분에 그만 테이블에 엎드렸다. 만감이 교차했다.

“흐윽.”

복잡하게 몰아치는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눈물이 솟구쳤다. 나린이 오빠의 아기를 임신한 줄도 모르고 지켜봐왔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까 안쓰러워하면서. 어떤 남자길래 제 아기까지 가진 여자를 밀어내고 살아가는 걸까. 속으로 몰래 욕도 했다. 나린은 아직 그 남자를 좋아하는 듯해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아기를 낳겠다는 힘겨운 결정을 한 그녀가 가여워서. 동정보단 동경이 컸다. 나린이 멋있었다. 자신도 저런 상황에서 제 삶과 아기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저렇게 강인하게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녀를 온 마음으로 응원했다. 그런데 상대가 성준이었다니. 모든 걸 차치하고, 여자에게 홀로 짐을 지게 한 것만으로도 소위 말하는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도 싼 놈’이다. 이미 저 때문에 다리를 다친 오빠인데. 그런 오빠의 다리를 어떻게 또 부러뜨려……. 투정 같은 울음이 터졌다. 꾹꾹 눌러두었던 미안함과 안타까움까지 쏟아져 내렸다. 상투적인 표현이었는데, 그만 헤집어진 건 제 상처였다.

“우리 오빠 너무 착한데……. 정말 착한데……. 나쁜 사람 아닌데…….”

서러운 눈물이 계속 흘러넘쳤다. 강호가 엎드린 그녀를 일으켜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울리려던 건, 아니었어.”

사실을 알게 된 소란이 울음을 터뜨릴 줄은 정말 몰랐다. 소란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나 보다. 강호는 그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나 때문에 오빠가 다쳐서. ……오빠 잘못이 아닌데.”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든 그녀가 물었다.

“다리 때문이죠? 오빠 다리 때문에 두 사람 못 만나게 된 거죠……?”

엄마를 향한 죄책감의 큰 산을 겨우 넘고도, 소란은 아직 오빠를 향한 죄책감의 산을 남겨두고 있다. 힘을 실어 두 손으로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이 터지는 건 한순간이다.

“한 가지 이유로만 일어나는 일은 없어. 모든 게 맞아떨어졌을 뿐이지.”

그러니 그것도, 네 탓이 아니야. 소란아. 네 잘못이 아니야.

“좋아하지도 않는 사이에서 열무가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아. 두 사람, 많이 좋아했을 거야.”

입술을 깨물며 소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린이야 당연히 그렇다고 했고, 성준 역시 그럴 게 분명했다. 한 길 사람 속 모르는 거라지만 그것만은 자신했다. 성준은 한낱 불장난으로 여자를 만날 사람이 아니다.

“지금도 서로 좋아하고 있을 거고.”

“…….”

“내 생각은 그래.”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는 거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리’ 때문만은 아닐 거야. 그게 이유 중 하나일 순 있어도.”

소란의 가슴이 꽉 메어왔다.

“계나린 부모가 대표로 있는 회사가 H호텔 앤 리조트야.”

“……H호텔이요? 우리가 결혼식을 올린 그 호텔?”

“그래.”

놀란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몰랐는데. ……말 안 했잖아요.”

“할아버지 대에 친분이 각별한 집안이고, 그러니 나는 당연히 결혼식 장소를 H호텔로 정했을 뿐이야. 그걸 굳이 말 안 한 이유는.”

“…….”

“계나린이 부모님이랑 사이가 딱히 좋은 편은 아니라서.”

그러고 보니 식을 올린 후 호텔 바에서 나린을 만났을 때도 여기가 우리 부모님의 호텔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걔 부모님은 계나린이 호텔이 아니라 우리 회사에 들어온 것도, 원하는 집안에 시집을 가지 않는 것도 전부 마음에 안 들어 하셔. 뭐, 원래도 살가우신 분들은 아니셨지만.”

쌀쌀맞고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애처로운 느낌이 드는 건, 단지 임신 때문이 아니었나 보다. 강호의 말대로 세상 모든 일은 하나의 이유로만 이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어쩐지 나린은 챙겨주고만 싶었다. 상처받기 싫어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는 것처럼, 사나운 성정마저 안쓰럽게만 보였으니까.

“그러다 형님을 만났을 거고, 솔직히 계나린이 푹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많이 좋아했을 텐데, 문제는…… 계나린 부모님이 쉬운 분들은 아니란 거야.”

어릴 때부터 옆에서 보며 자라 잘 아는 친구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계나린은 제 부모가 주는 시련 함께 이겨내보자 그런 말 못 했을 거야. 좋아하는 사람 힘들게 하기 싫었겠지, 그 성미에.”

소란은 가슴이 아팠다. 알 것 같다. 오빠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나린이 오빠를 너무 사랑해서였다.

“어떤 상처를 줄지 잘 아니까. 자신이 지금껏 자라며 받은 상처보다 훨씬 깊고 아플 거니까. 그걸 형님한테 겪게 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

“그래서 계나린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나중에서야 알게 된 아기를 지키는 것뿐이었을 거고. 그건 혼자 상처 입으면 되는 거니까. 여기까지가 내가 보고 짐작한 상황이야.”

“그러니까 언니는, 우리 오빠랑 잘 안 되고 난 다음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강호 씨랑 결혼하기로 했던 거네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게도 필요한 결혼이지만, 나린에게도 그와의 결혼은 부모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기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열무의 존재를 알게 됐던 거죠. 계약 직전에.”

“천운이지.”

나린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리고 앞으로 알게 될 성준에게도.

“그럼 오빠는 어떤 상황인 거예요?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형님 쪽은 나도 아직 정확히 몰라. 계나린에 대해서 제대로 얘기해본 적은 없으니까.”

이번엔 성준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소란이 짐작을 내놓았다.

“나린 언니의 배경을 알았다면, 어쩌면 오빠도 언니를 걱정해서 물러났을 것 같아요. 자기 때문에 언니한테 힘든 일이 생길까 봐.”

강호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 역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아. ……오빠가 혹시 우리 결혼식장에서 언니 봤어요? 언니가 강호 씨 친구라는 거 알아요?”

“아니.”

“같은 회사 다니는 것도요? 아무것도?”

“응, 아무것도 몰라.”

“언니는…….”

“걘 다 알아. 식장에서 네 오빠라는 거 알고 그때부터 피해 다녔거든. 나도 그때 보고 알게 된 거고.”

아아, 하고 그제야 소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들이는 두 사람의 재회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찬규 오빠가 집들이하라고 성화해서 한 게 아니었네요.”

“내가 걔 말을 뭐 하러 들어.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지.”

찬규 때문이 아니라, 나린과 성준을 위해서다. 형님이 오지 않으시면 집들이를 하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던 강호를 이제야 이해했다. 왜 그렇게 오빠에게 오라고 재촉일까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모든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숨기만 해선 아무것도 안 돼. 감추기만 해서도 안 되고. 열무가 없을 때라면 모를까, 두 사람 사이에 아기가 있고, 아직 남은 감정이 있는 이상 이 문제는 둘이 직접 만나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소란은 강호의 말에 공감했다.

“끝을 내도 두 사람이 같이 내야 하고, 다시 시작해도 두 사람이 같이. 책임도 두 사람이 같이 져야 하는 거겠지.”

“맞아요. 오빠도 알아야 해요. 열무가 있다는 걸.”

  ◇ ◆ ◇ 한편. 나린은 오피스텔 건물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SUV 차량이 멈추어 서자 다가섰다. 찬규의 차였다. 강호의 집들이 날, 나린을 데리고 간다고 와준 것이다.

“뒷좌석에 타.”

창문이 내려가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찬규가 말했다. 저 너머 운전석의 연희도 웃으며 인사했다.

“언니, 어서 타세요.”

나린은 엷게 웃어 보이며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

인사하며 차에 오르던 나린이 멈칫했다.

“고맙긴요. 가는 길인데요, 뭘. 출발할게요.”

뒤에 앉은 그녀가 당황한 걸 눈치채지 못하고 연희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나린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고개를 돌려 카시트에 앉아 새근새근 잠이 든 아기, 서후를 바라보았다.

16615904363954.jpg

  서후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직 어린 서후의 카시트는 의자를 마주 본 채 장착되어 있다. 이른바 ‘뒤보기’ 상태라서, 옆에 앉은 나린의 시야에 서후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나랑 자리 바꿔야 하는 거 아니야?”

나린이 앞의 조수석을 툭 치며 묻자 찬규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여기, ……아기 있잖아.”

“아, 잠들어서 괜찮아. 도착할 때까지 아마 안 깰 거야.”

“그래도.”

나린은 여전히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깨면 어떡해.”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깨면 깨는 거지 뭘 어떡해.”

“도로 위에서 막 울면 어쩌냐고.”

마치 아기와 둘만 남겨지기라도 한 듯 나린은 꽤 난처한 얼굴이다.

“옆에 부모가 있어야지 나 보고 놀라서 경기라도 하면 어떡하냔 말이야.”

“그래서 아기 참 잘도 낳아 키우겠다.”

“뭐?”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혼자 낳아 키우겠다니. 열무 어머님 용기가 참 가상하다고.”

찬규가 놀리듯 던지는 한마디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혼자 잘 해내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는데, 겨우 아기와 나란히 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긴장하고 말았다니.

“언니, 괜찮아요. 편하게 앉아 계셔도 돼요.”

연희가 나린의 긴장을 덜어주며 부드럽게 다독였다. 나린은 긴 눈썹을 드리운 채 쌔근쌔근 자는 서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터질 듯 부푼 볼엔 바람이라도 든 걸까.

‘……귀엽네.’

만져보고 싶다. 이 통통한 볼은 손가락으로 누르면 무슨 느낌일까. 다만 앞에 앉은 연희와 찬규가 신경 쓰여 나린은 손을 뻗어보지 못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직 서후를 안아볼 자신도 없다. 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몸이 굳는데 안았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어휴, 안 될 일이다.

“……원래 모든 아기가 차에 타면 자?”

“그렇진 않지. 타는 순간부터 내릴 때까지 울기만 하는 애들도 있는데.”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잘 자?”

“애들 성향이지 뭐. 우리 서후는 진짜 잘 자는 편이야.”

나린의 시선이 다시 서후에게로 향했다. ……귀엽다. 귀여워. ……너무 귀엽잖아. 열무는 어떨까. 얼마나 예쁠까. 잠은 잘 잘까. 투정이 심한 아기면 어쩌지. 나는 정말 잘할 수 있을까. 문득 밀려드는 걱정은 예비 엄마 나린에게 낯설기만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천사처럼 예쁜 서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콩콩 뛰었다.

“언니는 소란이 집에 한번 가보셨다고 했죠? 정말 그렇게 좋아요?”

“음, 좋더라.”

일전에 나린이 강호의 집에 갔던 건 일부러였다. 전주 출장을 가는 강호의 서류 가방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들러 소란을 보고 왔다. 성준의 동생이라 그런가, 제게 잘해줘서 그런가, 때때로 소란이 궁금한 마음이 들곤 했다. 살갑게 안부를 묻고 나눌 성격은 아닌지라 그냥 기회가 되면 얼굴이라도 한번 보겠다는 마음으로 몸이 먼저 나갔다. 덕분에 그날 성준의 열무김치를 먹었고, 또 소란은 그런 제게 반찬과 김치를 바리바리 싸다 주기도 했지만. 그 남매는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착한 걸까. 진짜 핏줄도 아니라니 유전은 아닐 텐데, 역시 가정환경이 성격을 만드는 걸까. 내 성격은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일까.

‘……할머니, 할아버지, 미안.’

조부모는 최선을 다해주셨다. 가정 탓은 하지 말자. 그저 자신이 열무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지. 제 부모가 했던 반대로만 하면 될까. 퇴직하고 나면 육아서라도 열심히 읽어두어야겠다. 경험하지 못한 모든 건 책에 다 있으니까. 그때 연희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맞다, 언니 그 채널 확인하셨어요?”

연희는 지난번 찬규를 통해 알려줬던 채널에 대해 나린의 의견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준의 부엌’이요. 어떠셨어요? 새 프로젝트에 섭외하실 거예요?”

갑자기 날아든 질문에 그만 나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