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오작교 선언 (69/112)

#69화. 오작교 선언2021.06.29.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나오던 태석은 소란을 발견했다. 건물 밖으로 나간 그는 반가운 얼굴로 소란에게 다가갔다.

“란이란이 우리 란이, 굿모닝.”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를 바라보던 그녀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앗, 선배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디 보고 있어? 뭐 기다려?”

“지금 막 강호 씨가 저 내려주고 출발해서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남편의 이름에 태석이 멈칫했다.

“강호가 데려다준 거야?”

“네, 집에서 따로 나오기 싫어서요. 계속 같이 출퇴근 중이에요.”

덧붙여 말하는 소란의 볼이 수줍게 붉어졌다. 이를 보는 태석은 안타깝기만 했다. 내 앞에선 그럴 필요 없는데. 그렇게 진짜 부부인 척 억지로 애쓸 필요, 전혀 없는데. 안쓰러운 라니라니. 사람들 앞에서 ‘척’하느라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소란아, 내가 전에 한 말 기억하지?”

“무슨 말이요?”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나는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얼마든지 도와줄 수도 있고.”

“하하, 네.”

그녀는 말간 얼굴로 웃기만 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맞다. 선배님, 그런 의미에서 경신전자 규제 관련 소송 건 말인데요.”

업무상 애로사항을 말하는 줄 알았나 보다. 소란은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새로 맡은 일에 대해 태석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게 아닌데. 태석은 애써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구나. 그럼 문제가 되는 부분은?”

성의 있게 듣고 답해주면서도 태석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차라리 그녀가 속 시원히 털어놓으며 지금 처한 상황이 힘들다고 토로하면 훨씬 쉬워질 텐데, 그러지 못하는 소란의 마음은 오죽할까 하고 안쓰럽기만 했다. 아직 때가 아니라 그런 거겠지. 그녀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를 더 견고하게 다져두어야겠구나, 싶었다. 조만간 기회가 올 테니까. 제대로 준비한 자만이 그 기회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태석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누가 이 사람한테 아직도 귀띔 안 해줬나 보다. 그거 아니라고. 답답해도 어쩔 수 있나. 스스로 부딪쳐 겪어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인생의 모든 건 제 선택이고, 그에 따라 감당해야 할 몫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던가. 자신이 만들어가는 삶만이 자신의 것이었다. 어쩌면 오해와 착각도. 예기치 못할 행운까지도.

  ◇ ◆ ◇

“백강호 타이 매고 왔네? 오오, 새신랑의 새로운 스타일링 좀 멋있는데? 그런데 안색은 왜 또 이렇게 좋아?”

집무실에 들어서는 강호의 뒤를 졸졸 쫓아 들어온 사람은 찬규다.

“몰래 좋은 거 먹었냐? 얘기해봐. 같이 좀 먹자. 얼굴이 활짝 피었는데? 주말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예리한 놈. 강호는 찬규를 애써 외면하며 코트를 벗어 걸었다.

“아, 신혼 때 생각난다. 형아도 그랬지. 피부과에 안 가도 얼굴에 번쩍번쩍 광채가 흐르고 말이야. 이게 다 기가 잘 맞는 사람끼리 만나서 서로 빈틈을 쫙 채워주니까 허한 게 사라져서 그런 거잖아? 크흐, 음양의 조화가 괜히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동감. 강호는 수긍하는 마음과 달리 무표정한 얼굴로 집무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렇다고 소란 씨 너무 무리하게 하면 안 된다? 이제 막 퇴원했잖아. 너 인마, 어? 몸 좋고 힘 세다고 어? 막 인정사정 안 봐주고 몰아대고 그러면 못쓰는 거야, 어?”

“가서 일이나 해.”

귀신 같은 놈. 강호는 찔리는 속내를 감추며 툭 내뱉고는 묵묵히 컴퓨터 전원을 켰다. 손에 잡힐까 모르겠지만 업무에 전념할 시간이다. 그래야 칼퇴근하고 소란에게 달려갈 수 있겠지. 꿀 발라놓은 집으로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참아야 했다. 어차피 지금은 소란도 출근했으니까.

“후우…….”

강호는 저도 모르게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큭,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찬규가 음흉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뭐야, 안 갔어?”

돌아간 줄 알았더니.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찬규의 행방은 안중에도 없다.

“이 자식 목석같아 평생 결혼도 못 하고, 사랑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죽을 줄 알았더니, 기특하게 할 거 다 하네? 와이프 보고 싶다고 한숨도 쉬고.”

“시끄럽고, 가서 일이나 해라.”

물론 찬규 부부가 아주 영양가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연희가 선물했다는 그 속옷은……, 그야말로 핫했으니까. 소란이 손에 들고서 거울에 비춰볼 때도 놀랄 만큼 섹시했는데 직접 입은 그녀는 다른 차원의 존재 같았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신혼부부에게 허락된 유희가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밤이고 낮이고 계속 타오를 수밖에 없을 터다. 아, 당장 퇴근하고 싶다. 그때 강호의 집무실로 나린이 들어왔다.

“이거, 리스트 업한 거 네가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 한식 쪽이야.”

나린이 강호에게 제출하는 서류를 옆에서 본 찬규가 끼어들었다.

“이거 온라인 쿠클 그거구나. 요즘 핫한 분들 엄청 섭외했다며? 기획팀 인력 너무 갈아 넣는 거 아니냐?”

“갈아 넣는 건 내 몸뚱아리 하나니까 넌 우리 팀 신경 접고 니네 팀이나 챙겨.”

톡 쏘아붙이는 그녀에게 찬규도 지지 않고 말했다.

“너 요즘 너무 열심히 하는 편이다? 마지막 불꽃처럼 막 불살라버리고 어디로 사라지고 그럴 거 아니지?”

이에 뜨끔한 듯 나린이 얼굴을 굳혔다.

“그 표정은 뭐야, 진짜야?”

“진짜는 뭐가 진짜야. 시끄러워.”

“얘넨 뭐 맨날 나한테만 시끄럽대.”

“너만 시끄러운 게 팩트.”

“알았다, 알았어.”

두 친구의 대화를 들으며 강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계나린이 많이 힘들긴 한가 보다. 이번 일 끝나면 휴가든 휴직이든 좀 쉬라고 해야겠다, 하고. 강호가 들고 있는 리스트를 기웃기웃 살핀 찬규가 좀 약한데, 하고 중얼거렸다.

“연희가 얼마 전에 내공이 어마어마한 쿡튜버 새로 등장했다면서 보고 있던데, 한식 주력이더라고. 알아? 무슨 키친인가 부엌인가 그러던데.”

“그래?”

나린이 눈을 반짝거리며 흥미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 뽑은 리스트도 마음에 안 찼던 모양이다. 찬규는 선심 쓰듯 말했다.

“정 원한다면 정확한 채널 이름 물어봐줄게.”

“정 원해. 반드시 물어봐줘.”

계나린이 이 정도 나오면 정말 발등에 불 떨어진 거다. 나린의 안달 난 모습이 신선해 찬규는 즐거워하며 덧붙였다.

“영상에 얼굴은 안 나왔는데, 잘생겼다고 난리라더라.”

“얼굴이 안 나왔는데 잘생긴지 어떻게 알아.”

“봐야만 아냐. 느낌이란 게 있지. 아무튼 그 정도로 훈남 포스 풍긴다 이거지. 그런데 연희가 뭔가 되게 친근하다고 하던데.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같고, 본 적 있는 손 같고. 그 정도로 친밀감 느껴져서 꼭 이웃 같은데 가만 보면 진짜 이웃 중엔 그런 사람 절대 없고.”

“딱 내가 찾던 인물이네.”

나린의 눈이 아까보다 열 배는 더 반짝거렸다. 이제 막 등장했다니 신선함까지, 백 점 만점에 천 점이다.

“연희한테 당장 전화해서 물어봐.”

“우리 연희가 놀고먹는 백수도 아니고 얘도 지금 시간엔 한창 일하는 전문직 종사자거든?”

“존경하는 홍 대표님. 아름다우신 아내분께 조속히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계싸가지에서 계 팀장으로 돌연 정체를 갈아엎은 나린을 보며, 찬규가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뚝을 슥슥 문질렀다.

“쟤 태도 스위치 누른 거 봐, 너무 무서워. 일을 왜 저렇게 잘해.”

계나린 업무 성과가 괜히 좋은 게 아니다. 사회생활 제대로 하는 친구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찬규는 전화를 걸었다.

“어어, 연희야. 나 지금 되게 무서운 사람이랑 있거든. 그래서 말인데, 여보 저번에 보던 그 요리하는 채널 있잖아. 막 팥죽 쑤고…….”

바로 아내에게 채널 이름을 묻는 찬규가 내심 귀엽다는 듯 나린이 풋, 웃었다. ◇ ◆ ◇ 드디어, 집들이하는 날. 집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초대해본 적이 없기에 소란은 아침부터 긴장했다. 단 한 번에 해치우자는 취지로, 강호는 가까운 지인 모두를 초대했다. 덕분에 강호와 소란의 직장 동료, 친한 친구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이에 호스트인 소란은 여러모로 신경을 쓰는 참이다.

“음식은 안 모자랄까요?”

“충분할 것 같은데.”

강호는 그런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애초에 소란이 직접 요리해 손님을 대접하는 건 무리였다. 강호가 미리 예약한 케이터링 업체에서 방문해 오전 내내 꽃이며 음식, 음료와 술, 테이블 등을 세팅했다. 아무리 추려도 초대 인원이 서른 명은 되었기에 준비하는 음식의 양도 상당했다. 원래 강호는 즉석에서 요리를 담당할 셰프들과 서빙 전문 인력을 배치하려고까지 했다. 지금 정도만 해도 화려한 홈 파티가 따로 없는데, 강호의 뜻대로 진행했다간 집들이가 아니라 하우스 웨딩 수준이 될 뻔했다. 추운 날씨 탓에 정원에 테이블을 깔지 못해 1층이 손님맞이 메인 장소가 되었다. 준비를 마친 업체 사람들이 철수하고 마지막으로 커트러리를 살피는 소란에게 강호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사람들 오기 전에 할 말이 있는데.”

“이거 체크하고…….”

“얘기 먼저 해.”

그가 소란의 손에서 커트러리를 내려놓게 했다.

“중요한 말이야.”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길래 이럴까 싶어 소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요.”

강호는 그녀를 소파에 앉히곤 옆에 앉았다.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아마 놀랄 거야.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한데, 나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 그 점만은 이해해줬으면 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소란은 미간을 살짝 모은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 계나린이 올 거야. 그리고…….”

“…….”

나린이 오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후로 어쩐지 엄청난 얘기가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라, 소란은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그 아기, 아빠도 올 거고.”

“……아기? 열무요? 열무 아빠가 온다고요? 오늘? 여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무 아빠가 누군데요? 여길 온다면 우리 아는 사람 중에 있다는 소리인데. 강호 씨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언제부터?”

질문이 쏟아졌다. 이 정도만으로도 놀란 소란에게 더 큰 비밀을 전해야만 했다. 강호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님이야.”

소란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뭘 들은 건가 싶어서. 생각이 하나로 좁혀지지 않았다.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들은 사실만이라도 정리를 해야 했다.

“……형님이면 우리 오빠? 성준 오빠……?”

“그래.”

열무 아빠가 형님. 형님은 성준 오빠. 그러니까…….

“열무 아빠가 성준 오빠라고요?”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고, 용수철 튕기듯 소란이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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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잠깐만. 나, ……아니, 잠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린 언니가……, 아기를 가졌는데……, 그 아기가 열무인데, 그 열무 아빠가, ……우리 오빠라니?”

인연의 끈은 돌고 돌아 제 가족에게로 닿아 있었다.  

“나 임신했어.”

“……뭘 했다고?”

“임신.”

  강호와 나린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로 했던 날. 나린이 대차게 던진 폭탄으로 그 둘의 계약은 단숨에 파투 나버렸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강호에게 결혼을 제안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 존재를 알게 됐던 열무가, 사실은 우리 오빠의 아이였다고?  

“그 남자도 알아? 아니지, 알 정도의 사이였다면 애당초 네가 이 계약을 하겠다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래, 내 짝사랑이다. 전부 네가 계약을 제안하기 전의 일이고. 그 사람은 지금 이런 상황 전혀 모르고 있어, 됐어?”

  그때 강호가 던진 말에 나린이 했던 대답도 똑똑히 기억했다. 그녀의 짝사랑.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성준 오빠. 그래, 오빠가 알았더라면 나린 언니가 혼자 아기를 낳도록 마음먹게 하진 않았겠지. 아귀가 딱딱 맞는 상황이라 부인하기도 어려운 현실임을 깨달았다. 바로 자신이, 열무의 고모였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소란은 믿기지 않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도, 계나린과 형님을 오늘 여기에서 만나게 하는 이유도 하나야.”

엄청난 사실을 던져놓고도 강호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만큼 차분했다.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두 사람을 도우려고 해.”

소란이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게 인간 오작교가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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