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내 남편 좀 보세요2021.06.22.
먼저 씻고 나온 소란이 정원에 나가 눈을 구경하고 있겠다고 했다. 소란은 스웨터와 코듀로이 팬츠를 꺼내 따뜻하게 갖춰 입었다. 보온이 잘 되는 패딩에 귀를 가리는 모자, 장갑까지 야무지게 챙기는 걸 보니 한파에 눈싸움 좀 해봤나 보다. 그녀를 먼저 내보낸 후 강호도 겉옷을 꺼냈다. 따뜻하게 입으라고 신신당부하던 소란의 말을 기억하며 웜 진을 입고 니트에 팔을 끼우려던 그는 잠시 멈칫했다. 드레스룸 입구 저 너머 침실 창밖으로 소란이 보인다. 멀리 정원에 선 그녀는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눈엔 소란이 더 감동인데 말이다. 덕분에 강호는 옷 입던 것도 잊고 통유리창 바깥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넋을 놓고 섰다.
“중증이네.”
이렇게까지 뭔가에 빠진 적이 있나 싶다. 시선을 거두려는데 이번에는 창가 옆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있었군.”
이틀 전 강호가 사 온 자나 장미가 보였다. 밤낮으로 그녀를 안느라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꽃을 꽂아둔 화병이 침실에 있었다는 것을. 바깥도 온통 꽃밭이긴 했다. 전부 태석에게 받아 왔다던 꽃이다. 그런데 침실에는 오직 제가 소란에게 준 꽃만이 들어와 있다. 둘만의 공간에 허락된 건 저뿐이라는 듯. 강호는 꽃의 위치마저 의미를 부여하다가 문득 웃어버렸다. 어쩔 수 있나. 좋아서 죽겠는데. 꽃집 직원이 자나 장미의 꽃말을 언급했었다.
“꽃말이 아주 멋진 꽃이에요. 아내분께 손님 마음이 잘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찾아보니 ‘끝없는 사랑’이란다. 일 참 잘하는 직원이다. 제 사랑이 소란에게 잘 전해진 기분이라, 침실 안 꽃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이 가만히 벅차올랐다. 강호는 입으려던 니트를 내려두고 일전에 소란이 선물한 터틀넥을 꺼냈다. 일부러 깊숙한 곳에 넣지 않았다. 언제든 입을 수 있도록 가장 손이 잘 가는 곳에 올려두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입고자 시도한 적은 없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듯했다. 입을 수 있을까, 보다는 입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아기를 가진 몸으로도 소란의 어머니, 제 장모님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위험한 화재 현장에 뛰어들었다.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결국 용기를 낸 장모님 덕분에 자신은 목숨을 건졌다. 열여섯의 끔찍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미치광이 손에 붙들려서도 자신은 또다시 살아 돌아왔다. 숨통을 끊어놓을 듯 옥죄는 아픔은 허상에 불과하다. 품에 껴안고 살아갈 감정이 아니다. 떨쳐내야만 한다. 자신을 향해 손을 뻗던 소란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편안히 숨을 쉴 수 있게 끊임없이 노력해주던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꽁꽁 언 얼음을 녹이고 따스하게 불어오던 봄바람처럼, 지금의 그녀가 절 살게 했다.
‘괜찮아.’
강호는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의 눈빛과 손길을 새기며 터틀넥 소매를 팔에 끼웠다. 그리고 호흡을 크게 한 후 좁은 네크라인을 머리로 통과시켰다.
“후우.”
다시 심호흡했을 때는 옷자락을 내려 입은 후였다. 죽일 듯 목을 꽉 조르는 느낌은 전보다 훨씬 약하다. 확실히 그랬다. 일체유심조, 라. 모든 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그저 목을 감싼 천뿐인데, 이게 뭐라고 힘들었을까. 힘겹게 싸워 알에서 나온 자는 ‘데미안’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한 세계를 깨뜨리고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갈 수 있었던 건, 그녀가 강호의 손을 기꺼이 잡아 이끌어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전부가 되어버린 사랑으로 인해. 두려움이 비워진 그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충족감으로 가득 찼다. ◇ ◆ ◇
“너무 잘 어울려요. 진짜.”
소란은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터틀넥을 입고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또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모습 역시 감격스러웠다.
“괜찮아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 맞아요?”
믿기지 않는 듯 강호를 살피며 물었다. 사고로 입원하기 전까지 깃털에, 붓에, 키스에,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래도 트라우마라는 게 별안간 뚝 떨쳐낼 수는 없을 테니 길게 내다보고 천천히 가려 했다. 이제 슬슬 촉각 방어 프로젝트를 재개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가 높은 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괜찮아, 정말.”
그가 내뱉는 음성은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낮고 편안했다. 안심하여 벅찬 숨을 내쉬는 소란의 입술 사이로 흰 입김이 퍼졌다. 그녀의 눈에 비친 강호는 더없이 근사했다. 뭘 입어도 좌중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지는 남자지만, 제 취향의 터틀넥을 입은 그는 더더욱 멋있다. 목까지 올라온 옷 위로 베일 듯 날카롭게 떨어지는 턱선이 섹시했다. 패딩을 입고 있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뭘 입어도 캐주얼이 아니다. 마치 핏이 딱 떨어지는 정장 코트를 입은 듯 날렵한 각이 살아 있었다. 트라우마 극복을 차치하고도, 그는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감동인 존재였다.
“앞으로 쇼핑, 같이 해야겠네.”
강호의 말에 소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뭘 입혀놔도 끝내주니 앞으로 그의 아내로서 이런저런 걸 다 입혀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장 대문을 열고 뛰쳐나가 세상 사람들, 내 남편 좀 보세요, 완벽한 피사체가 우리 집에 살고 있어요, 소리치며 뛰어다니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 앞으로 내가 입자고 하는 건 다 입어줄 거죠?”
그가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 움직였다. 소란은 본격 남편 덕질을 시작할 생각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설렌다. 일단 어두운 색 터틀넥은 입혀봤으니, 아이보리색 터틀넥도 한번 입혀보고, 목이 살짝 올라오는 무스탕 재킷도 좋을 것 같고……. 그때 강호가 마주 선 그녀의 볼을 손가락 뒤로 쓸며 입을 열었다.
“너도.”
“응?”
“너도 내가 입자고 하는 건 다 입어야지. 공평한 거 좋아하잖아.”
“……네?”
소란은 자신이 내뱉은 말의 담백함과는 다르게, 그의 발언에서 그만 열기를 느끼고 말았다.
“입자고 하는 거……?”
하하, 그게 뭘까. 알 것 같지만 모르고 싶다.
“들어가서 입힐 거야.”
왠지 불안해졌다.
“지금은 눈사람 만들고 싶다며. 일단 만들어.”
뒤에 생략된 말들이 왠지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어디 놀고 싶은 만큼 실컷 놀아봐. 그다음은 내가 놀고 싶은 대로 놀 테니까.
“아, 저. 강호 씨, 혹시 들어가서 입힌다는 게.”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
강호는 눈 쌓인 정원으로 저벅저벅 나아갔다. 오늘 밤도 쉽게 재우진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오싹해진 소란이 서둘러 외쳤다.
“아, 그거 없어요, 없어. 내가 버렸어.”
강호가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있던데.”
새하얀 정원에 우뚝 선 그는 검은 악마였다.
“내가 침대에 올려놨어.”
리본의 탈을 쓴 그 속옷은 상자째 불태워버렸어야 했는데. 아아, 신혼이다. ◇ ◆ ◇ 나린의 오피스텔에 찾아와 벨을 누른 사람은 엄마였다. 늘 본인 일정이 가장 바쁜 엄마는 연락 없이 불쑥 나타나곤 했다. 효율성을 따져 동선에 두고 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린은 인터폰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웬일이세요.”
- 들렀다. 바쁘니까 빨리 열어.
역시 지나는 길이었나 보다. 엄마가 오피스텔에 온 건 처음이다. 나린의 독립 후 조부모는 몇 번 오셨지만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오신 적이 없었다. 아마도 할머니의 성화에 형식적으로 얼굴을 비치신 거겠지. 나린이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엄마의 뒤로 개인비서가 서 있다. 몸에 붙는 정장 슈트에 코트를 갖춰 입은 엄마는 힐을 벗고 들어서서도 겉옷을 벗지 않았다. 금세 가겠다는 의미다.
“내가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이런 걸 다 챙겨야 하는구나.”
엄마는 비서에게서 건네받은 보냉 가방을 식탁에 탁 올려놓았다.
“두 분은 대체 어디서 뭘 드시고 오셨길래 그렇게 집밥, 집밥, 노래를 부르시는지 모르겠다. 너 나가 살면서 밥은 잘 먹는지, 언제 거길 한번 데려가면 좋겠는데, 하시면서 내내 밥 타령을 하시는데…….”
지겹다는 듯 엄마는 툭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이야 대충 허기만 채우면 되는 거 아니냐는 엄마의 가치관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들이다. 가뜩이나 결혼 이래 내내 시부모와 한집살이 하는 엄마로서는 듣기 싫은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을 것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외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느라 부딪힐 일이 그리 많진 않지만. 다만 나린으로서는 조부모와 한집에 산 것이 천운이었다. 그나마 할아버지, 할머니의 정이라도 느끼며 자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내가 한가하게 노는 사람이니? 다 큰 널 붙들고 밥 걱정을 하게.”
다른 엄마들이 한가해서 자녀의 끼니를 걱정하며 챙기는 건 아닐 텐데. 밥은 그저 사랑의 다른 이름. 그녀의 부모는 아이에게 베풀어 온당한 사랑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나린은 속으로 자조했다. ‘다 큰’ 내가 아니라, ‘아이였던’ 나도 엄마의 밥 타령은 들어본 적 없었는데 이제 와 천덕꾸러기가 된 기분이라니. 부모의 커리어를 망치고 발목을 잡는 짐짝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이거 반찬이야. 밥 잘 먹고 산다고 할머니께 연락 좀 자주 드려.”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요.”
말 보태지 않아도 조부모와는 사이가 좋았다. 단지 엄마는 당신 귀찮은 일을 만들지 말라는 얘기다. 독립한 딸의 집에 처음 왔는데도, 집이 어떻구나, 생활은 좀 어떠하니, 그런 소린 일절 없다. 오로지 용건만 전할 뿐.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엄마보다 더한 워커홀릭이라 제게 틈 하나 내어주는 일이 없었다. 나린은 부모의 정은 한 조각도 느껴보지 못하고 자랐다. 두 사람은 아이를 하나 낳는 것으로 부부 사이의 할 일은 다 마친 것처럼 굴었다. 함께 사업체를 운영하는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다. 조부모의 사랑은 따뜻했지만, 나린의 가슴 한구석은 늘 텅 비어 있었다.
“그만 간다.”
역시 엄마는 외투도 벗지 않고, 의자에 앉아보지도 않은 채 돌아섰다. 나린은 물이라도 한잔 드릴까 하던 마음을 접었다. 그때. 엄마의 걸음이 뚝 멎었다.
“이게, 뭐니.”
나린은 아차, 싶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주방 보조 테이블에 올려놓은 초음파 사진과 아기 수첩이다. 서랍에 넣어뒀어야 했는데. 혼자 사는 집이니 깜빡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엄마를 집에 들이기 전에 저것부터 치웠어야 했던 걸 잊었다. 흑백으로 된 초음파 사진과 수첩을 집어 올리는 엄마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너.”
“주세요.”
“놔.”
엄마가 탁 소리를 내며 나린의 손을 치워냈다.
“설명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기 수첩 앞에는 ‘계나린 아기’라고 정확하게 쓰여 있으니까.
“기회 줄 때 똑바로 얘기해.”
엄마의 목소리는 쌀쌀했다. 나린은 변명하고 싶은 생각도, 더 이상 감추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부모도 알아야 할 일이다.
“아기 생겼어요. 낳을 거고, 신경은 쓰지 마세…….”
쫘아악! 엄마의 매서운 손바닥이 나린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고개가 돌아가며 머리카락이 날렸다. 불에 덴 듯 뺨이 뜨거웠다.
“미쳤구나.”
엄마의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실려 있다. 경멸, 실망, 한탄, 당황. 그 어디에도 새 생명에 대한 축복은 없다. 나린은 벌게진 뺨을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관심도 못 받고 자랐다지만 손찌검을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뺨보다는 가슴이 아팠다. 열무야. 듣지 마. 들려도, 듣지 마.
“정리해. 네 몸도, 이 집도, 회사도 전부 다.”
아이가 자랄 땐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면서, 왜 성인이 된 후 좌지우지하려는 걸까.
“그리고 다시 본가로 들어와.”
정성으로 키운 아이도 어른이 되면 훨훨 날려 보내줘야 하는데, 정작 제 부모는 거꾸로 가고 있다. 이제는 제법 이용 가치가 있는 딸이라서일까.
“호텔에 업무 배우러 나오고, 선봐서 결혼도 해.”
“…….”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아뇨.”
나린은 맞은 적 따위 없는 것처럼 덤덤히 입을 열었다. 오직 볼만이 벌게져 있을 뿐 분노도, 두려움도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지켜야 할 존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강하게 했다.
“내 할 일은, 내가 정해요.”
나린은 현관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내 집에서 그만.”
“…….”
“나가세요, 엄마.”
‘엄마’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치 예의를 지키는 건 여기까지라 경고하듯. ◇ ◆ ◇ 일요일 저녁. 성준은 노트북을 펴놓고 마우스를 바삐 움직이는 중이다. 한창 몰입해 있는데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소란이다. 아무리 급해도 동생의 전화가 먼저다. 성준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어, 소란아.”
- 오빠. 뭐 해?
형식적인 질문이겠지만 아직은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는 없기에, 성준은 그저 노트북을 덮으며 웃었다.
“그냥 있지. 저녁 먹었어?”
- 먹었어. 오빤?
“나도 먹었지.”
간단한 안부 끝에 그녀가 용건을 꺼냈다.
- 근데 오빠 있잖아.
“응, 무슨 일 있어?”
그러고 보니 일요일 저녁인데 웬 전화인가 싶었다. 퇴원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 아니,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다음 주말에 집들이하려고.
“집들이?”
- 응, 그때 오빠 꼭 왔으면 해서.
다행히 별일은 아니었다.
“아, 사돈 어르신도 오시는 거구나.”
다만 저를 부르니 당연히 가족 집들이라 생각했다. 가족이라 해봤자 백 회장과 성준뿐이지만. 그런데 소란은 웃으며 말했다.
- 할아버님 모시는 건 따로야. 그때도 오빠 함께 초대할 건데 이번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 그냥 가족 말고 친한 사람들 두루두루 다 초대하는 자리야. 어차피 오빠도 내 친구들 잘 알고 하니 편하게 왔으면 해서.
“지인들 초대하는 자리에 내가 끼면 불편하지. 나는 다음에 어르신 모실 때 갈게.”
그때 남자의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형님.
“아, 매제.”
옆에 있던 강호가 전화기를 채어 든 모양이다.
- 형님 안 오시면 집들이 안 할 겁니다.
성준의 머리 위로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굳이?
- 그러니까 꼭 오셔야 합니다.
그의 음성이 왠지 모르게 강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