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달콤한 신혼2021.06.19.
“나 오늘, 일 안 해요. 파업이야.”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진 상태에서 소란이 파업을 선언했다. 계산은 할 줄도 모르고, 할 필요도 없다는 듯 그 눈은 말갛고 투명했다. 호수에 내린 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깊이 배인 감정은 그저 솔직하기만 하다. 난 당신을 원해. 다른 건 없어. 그런 소란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이런 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라던 바야.”
그녀의 파업을 반기며 강호가 입을 맞췄다. 쪽. 소란이 예쁘고 또 예뻐서 견딜 수 없다. 그토록 바라던 그녀가 자신을 향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입술에, 볼에, 코에, 천천히 키스가 쏟아졌다. 이마에, 눈가에. 초옥, 촉, 쪽, 얼굴 곳곳에. 살갗에 입술이 닿는 소리만이 거실을 채웠다.
“아, 간지럽…….”
살짝 웃는 소리도. 사르락 벗겨진 옷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도. 흐음, 이어지는 신음까지도 흐릿하게 흩어졌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런 감흥도 없이 내뱉는 상투적인 표현인 줄로만 알았다. 얼마나 애타는 마음으로 품는 소망인지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강호는 그녀와 함께 완벽하게 갇히길 원했다. 세상의 끝이 바로 여기라 해도 좋을 것처럼.
◇ ◆ ◇ 주말 오전. 나린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층 오피스텔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아직도 새하얗다. 그제 밤부터 내린 폭설로 어제는 도시 전체가 마비 수준이었지만 이제 차들이 다니는 대로는 제설작업이 잘되어 정체가 한결 풀린 모습이다. 그러나 낮은 기온 탓에 건물에 쌓인 눈은 아직 녹지 않은 곳이 많아 그대로였다. 참 예쁘다. 삭막한 도시도 하얀 눈이 내려앉은 모습은 동화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예쁜 것만 보라고 했던가. 문득 태교라 할 만한 일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것 같아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듯했다.
“너도 그래?”
나린은 배에 손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물었다. 아기에게 말을 건넨 건 처음이다.
“열무야.”
아기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른 것도.
“너는 어때? 예뻐?”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란 아기에게 이제 귀가 생겼다고 했다. 청각이 발달해 외부의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됐다고. 그래서 의사는 아기에게 말을 자주 건네라고 해주었다. 낯간지러울 것 같아 태명으로 부른 적은 없었는데 막상 입을 열자 왜인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낯설면서도 마음이 몽글거렸다. 배 속의 생명체가 뿅, 뿅, 공기 방울을 올려보내며 톡톡, 터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설마 이거 태동인가. 인터넷에서 스치듯 본 글에서 첫 태동이 비눗방울 터지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내가 말 걸었다고 지금 열무가, 대답한 건가? 나린은 얼른 휴대전화를 열어 다시 검색해보았다. 이 느낌이 정말 태동인지 궁금해져서.
‘정말이네.’
많은 임신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태동이라 하면 아기가 발로 뻥뻥 차는 걸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미묘하고도 여린 느낌으로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벌써 첫 태동을 느끼는 시기라니. 처음 열무의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만큼이나 경이로운 감정이 나린의 가슴을 콩콩 뛰게 했다. 그녀는 주방 보조 테이블의 서랍에서 열무의 초음파 사진과 아기 수첩을 꺼냈다. 다음 주 병원에 갈 날짜를 확인하고,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흑백사진 속 아기는 하나의 점에서 젤리곰으로 자라났고, 이제는 제법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크기가 고구마 한 개만큼 커졌다니, 그런 생명체가 제 속에 자리한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곧 배가 본격적으로 나오겠지. 생식기도 생겼다는데 아직 성별은 듣지 못했다. 초음파 찍을 때마다 아기가 다리를 오므리고 감추는 바람에 명확하지 않다며, 다음 방문 시 다시 보자고 했다. 얼마 전에 찬규가 물었다.
“성별 나올 때 되지 않았어? 아들이야, 딸이야?”
“몰라, 아직.”
“나오면 얘기해줘. 궁금하다. 그런데 넌 아들이면 좋겠어, 딸이면 좋겠어?”
“딸.”
나린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내뱉었다.
“확고하네. 하긴, 이미 노산인데 부지런히 늙어가는 엄마한테 딸처럼 귀한 친구가 어디 있겠…….”
“닥쳐.”
찬규를 향해 표독스럽게 내뱉긴 했지만, 사실 친구 같은 딸을 바라서가 아니다. 아들이면 그를 닮을까 봐. 커가는 아들을 볼수록 그가 더 생각날까 봐. 그를 빼닮은 아들을 보며, 붙잡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할까 봐.
“아들도 이뻐. 우리 떠후 봐봐. 얼마나 애교쟁이냐. 웃는 거 보면 아주 살살 녹는다니까.”
그래, 그럴까 봐. 그를 닮아 햇살처럼 눈부시게 웃을까 봐. 웃는 모습만 봐도 내 가슴이 무너질까 봐. 그가 너무…… 보고 싶어질까 봐. 힘겹게 돌아서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계속 이대로 살아가긴 힘들 것이다. 강호의 말대로, 중간에 백강호와 우소란이 있는 한은 어떻게든 엮일 테니까. 나린은 이번에 진행 중인 일만 끝내면 퇴직할 생각이다. 아직 강호에겐 얘기하지 않았지만 결국 말리지 못할 것이다. 퇴직하고 해외로 나가 아기와 둘이 지내려고 한다. 돈은 충분했다. 살아갈 계획도 어느 정도 세워두었다.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하는 성격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저 성준의 인생에 제 존재가 상처로 남기 싫은 마음.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어쩌면 아직, 사랑하는 탓이다.
“후우.”
나린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냉장고로 향했다. 어느덧 한낮으로 넘어가는 시간, 허기가 느껴졌다. 일전에 소란이 가져다준 반찬은 이미 다 먹고 없다. 열무김치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소란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있었으니 리필은 턱도 없다. 우연으로나마 성준의 음식을 다시 먹을 일은 없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일단 우유를 꺼내고 시리얼을 그릇에 부었다. 혼자라면 거르고 말 텐데 열무 때문에 뭐라도 먹어야겠다.
‘이따가는 고기 사다 구워 먹어야겠네.’
귀찮지만 열무 때문에. 나는 굶어도 열무는 굶길 수 없으니까. 그렇게 꿋꿋이 한 끼를 때웠다. 다 먹고 나자 노곤해졌다. 임신 전엔 잠이 별로 없는 편이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야근을 더 줄여야 하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일 중독 계나린에게 주말 업무는 숨 쉬듯 당연한 일이다. 새롭게 도입할 온라인 쿠킹클래스 프로젝트가 난항을 겪고 있기도 했다. 요즘 나린의 팀에서는 ‘비욘드 더 테이블’의 정기구독자를 대상으로 영상 강의 기획에 한창이었다. 단순히 식품을 판매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객들에게 문화와 여가를 제공한다는 전략으로 다가서고 있는 회사다. 정기적으로 배송받는 박스만 열어도 집에서 무슨 메뉴를 어떻게 먹을지에 대한 고민이 싹 사라지게끔 하고자 했다. 그때그때 식단에 맞춰 잘 구성된 키트는 구색만 갖춘 것이 아니라, 맛과 비주얼, 신선함까지 잡았기에 ‘믿고 먹는 집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식단 활용법이나 쿠킹 과정, 꿀팁 등을 영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자체 콘텐츠를 개발한 것이다. 나린은 초급부터 상급으로 단계를 나누어 정리한 강사진과 커리큘럼, 연계된 상품구성 등을 꼼꼼히 살폈다. 양식과 건강식, 홈 카페 쪽으론 세팅이 끝나 콘택트 작업부터 들어간 참이다. 반면 한식 쪽은 아직 제자리걸음이었다.
“이 사람은 너무 거물이라 빼라고 했더니.”
팀원에게 제출받은 리스트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밥’을 기본으로 하기에 고객의 눈높이보다 한참 위에 있는 셰프들은 나린이 죄다 거르고 있다. 주 고객층이 누군가. 요리에 뜻을 품고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쁜 일상 속에서 그저 맛있는 집밥 한 끼를 먹고자 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어렵게 느껴지면 안 된다. 보상을 위한 한 끼라면 ‘대충’은 또 싫고, 그렇다고 너무 거하거나 복잡한 건 사절이고. 간단하게 차리고 치울 수 있으면서도, 고단한 하루를 토닥여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까다로운 고객들의 니즈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새 기획으로 연결하는 것이 바로 나린의 일이다.
“다른 쪽은 대충 얼개가 잡혔는데. 한식엔 왜 이런 트렌디한 느낌이 없지.”
나린은 팀원이 고생하며 추렸을 후보들의 이력을 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한식이 주력이다 보니 나린은 더욱 깐깐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른 카테고리에는 SNS나 동영상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가 상당수 포함되어 진행 중이다. 젊고 세련된 감성에 어딘가 친밀감이 느껴지는 이미지. 고객은 배송된 박스를 열고, 영상을 켜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해도 근사한 밥상을 뚝딱 차려낼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져야 했다. 한식 쪽으론 나린의 마음에 찰 만큼 괜찮은 감각을 가진 이가 보이지 않았다. 편안하게 요리하면서도, 감성과 비주얼 다 잡은 인물. ‘너무나 잘생긴 옆집 오빠’처럼, 현실에 왠지 존재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이미지. 물론 적합한 사람이 있긴 했다.
“여기에, 딱인데…….”
우성준. 훤칠한 키에 만인에게 호감인 선한 얼굴, 다감한 미소, 중저음의 목소리. 음식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예의, 실력, 훌륭한 맛과 비주얼을 갖춘 결과물까지. 그야말로 나린의 새 기획에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이다. 사실 그의 요리로 식단을 구성하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성준을 좋아하기 이전이었다. 특집 식으로 식당 주인 혹은 요리전문가들의 집밥 키트를 제작하는 기획이었는데, 진행하고자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일이 생겼다. 결국 두 사람은 어긋나고 말았지만. 성준은 끝내 자신이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알았다면 매제가 된 강호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자신을……, 그 역시 열심히 피해 다녔겠지.
“이번 기획만 잘 끝내자. 얼마 안 남았어.”
나린은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에 집중했다. 좀 더 서칭해봐야겠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화면을 보니 엄마였다. ◇ ◆ ◇ 두 번의 밤을 보내고 맞이한 주말 낮. 소란의 세상은 달라졌다. 그녀의 몸은 너무나 많은 걸 알아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렇게 뜨거운 관계가 존재할 수 있구나. 한파가 다 뭐야. 세상을 얼려버린 추위조차 그들의 신혼집엔 얼씬도 하지 못할 만큼 열기에 타오르고 있다. 전환이 필요했다.
“눈사람 만들고 싶어요.”
밥을 먹어도, 일을 해도, 음악을 들어도, 몸을 씻어도, 종일 그와는 영혼까지 찰싹 붙은 채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니 소란은 그렇게라도 바깥바람을 쐬어야겠다 생각했다. 밤은 또 찾아올 텐데. 공부할 때도 그랬지만 적절한 체력 배분만이 오래 버틸 수 있는 비결임을 잘 알았다.
“눈사람?”
“음, 이렇게 많은 눈이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소란은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유 워너 빌더 스노우맨. 엘사의 문을 애타게 두드리던 안나의 심정이 바로 이랬을까.
“저기 나가서 만들고 싶은데.”
“추울 텐데.”
“단단히 껴입고 나가면 되죠.”
강호는 생각했다. 폭설에 고립된 게 아니라, 여기가 아예 무인도면 좋겠다고. 사방이 바다라 어디로도 갈 수 없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으면. 한파로 인해 중무장할 게 아니라, 땡볕을 피해 훌훌 다 벗어버리고 싶은 곳이었으면. 그러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찬규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신혼여행을 가면 뭘 구경할 필요 없이 룸에서만 일주일도 짧을 거라던. 한창 입만 열면 호텔 타령을 하던 찬규의 그 말들 말이다. 그러니까 강호는 지금, 격하게 나가기 싫다는 소리다.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예쁘게 눈을 깜빡거리는 소란을 보며, 마침내 강호는 뜻을 굽혔다.
“그래.”
강추위까지 날려버릴 달콤한 신혼이다. 잠시 후 소란은 정원으로 먼저 나왔다. 그녀는 냉장고 속으로 들어온 듯 차가운 기온에 흠칫 놀랐다. 안에선 후끈할 정도로 더워서 벗고 다녀도 될 정도였는데 바깥은 이렇게나 추웠구나. 가슴속까지 시린 듯하다. 숨만 쉬어도 하얀 입김이 퍼져나갔다.
“너무 춥네.”
아무래도 눈사람 만드는 일은 접어야 하려나. 강호는 또 목을 드러낸 채 나올 테니 말이다. 저보단 강호가 추울 것이 염려되었다. 추위를 많이 탄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그래, 이 정도 바람을 쐬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자. 소란이 눈 쌓인 정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가 나오기 전에 다시 들어갈 생각으로 돌아섰다.
“어…….”
소란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현관에서 나오는 강호를 본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심장이 망치로 두들기는 듯 거세게 쿵쾅거렸다. 그는 후드에 털이 달린 슬림한 패딩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안에 입은 건 목을 드러낸 티셔츠나 니트가 아니다. 터틀넥이다. 지난번 자신이 선물했던 바로 그 터틀넥 말이다. 목을 죄는 괴로움에 몇 번이고 힘겨운 숨을 토해냈던 그가, 스스로 알을 깨뜨리고 나온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