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미치도록 원해2021.06.15.
“아아, 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나도 안 해.”
딱 필요한 업무만 보고 종일 침대에 죽은 듯이 혼자 누워 기력을 보충하려고 했는데. 서방님, 출근을…… 안 하신다고요? 충전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소란이 당황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호 씨, 엄청 워커홀릭이라고 들었는데.”
“아닌데.”
또 천연하게 내뱉는 말.
“누구보다 워라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그에게 가장 소중한 건 회사도, 업무도, 그 무엇도 아니라 바로 신혼 생활이다. 소란의 눈앞이 바깥 풍경처럼 새하얘졌다. 취소. 폭설이 나를 돕는다는 거 취소. 아무래도 기력 보충은 불가능할 것 같다. 조금 채워지나 싶으면 이 남자가 단숨에 빨아먹을 게 분명하니까. 로브 자락을 옆으로 내려 한쪽 어깨가 드러나자 그가 깊숙이 입을 맞췄다.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차림이야.”
거추장스러운 천이 아무것도 없다. 오직 얇은 로브뿐이다. 로브의 벌어진 틈새로 차가운 손이 밀려 들어왔다. 소란은 다리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앞쪽으로 너르게 펼쳐진 순백의 정원이 아름다웠다. 뒤에서 자신을 단단히 안은 남편의 몸이 더 아름답긴 하지만. 통유리창 옆에 부드러운 페이크퍼가 걸쳐진 등받이 의자가 있다. 강호가 의자에 기대앉으며 그녀를 제게로 이끌어 마주 앉혔다. 어제와는 달리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말을 타듯 앉게 한 자세다. 하루 새 지나치게 가까워진 몸은 그마저도 자연스러웠다.
“또 씻었네.”
로브가 사르르 떨어졌다. 살결에 입술을 묻은 그가 산뜻한 내음을 흠뻑 마시며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몇 번을 씻는 거야.”
“제가 묻고 싶은 말……, 하아…….”
하룻밤 사이에 벌써 몇 번째냐고. 나는 꼴깍꼴깍 넘어갈 것만 같은데 왜 강호 씨는 멀쩡한 거냐고. 내 체력만 이렇게 저질이냐고. 나 무슨 운동 해야 하냐고. 나도 그렇게 멀쩡하고 싶다고……? 몸은 따라주지 않아도 의욕 하나는 무럭무럭 자라나는 사이, 신혼부부의 아침이 또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둠이 물러가고 환해진 사위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둘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 ◆ ◇ 다행히 주방에 먹을 건 그득했다. 거실 의자에서 카펫 위로 내려갔다가, 소파 위로 올라갔다가, 함께 욕조에 들어간 사이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더 이상은 못 해. 나는 절대 못 해. 소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꼬르륵. 배 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귀에 들린 후에야 두 사람은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상체를 드러낸 채 아래는 트레이닝복 바지만 입었다. 소란에게는 아무것도 못 입게 했는데, 그나마 우겨서 큰 배스타월 하나 몸에 둘러 감은 상태다. 이게 어딘가 싶다. 소리 참지 마, 눈 감지 마, 쓸데없는 거 입지 마. 그의 요구사항은 한결같이 야했다.
“앉아 있어.”
“아니, 같이해요.”
냉장고를 열려는 그의 곁에 다가서는데 저지당했다. 강호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조리대 위에 턱 앉혀놓았다.
“그냥 있어. 대신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소란의 턱을 잡고 부드럽게 쪽, 입을 맞췄다. 말로 옮길 수 없이 진한 밤을 보낸 터라 이 정도의 입맞춤은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막 씻은 후라 말갛기까지 한 피부에 잘생긴 이목구비의 그가 가볍게 입을 맞추니 설렘이 증폭되었다. 소란은 타월이 벌어지지 않게 잘 여미며 조리대 위에 앉은 채 그를 지켜보았다. 강호는 냉장고를 열어 몇 가지 음식 키트를 꺼냈다. 인덕션을 켜서 탕을 데우고, 몇 가지 음식은 오븐과 에어프라이어에 들어갔다. 볶음 요리는 프라이팬에 덜어 새로 볶아냈다. 시간이 없어 즉석밥을 이용해야 했지만, 음식을 그릇에 정갈하게 옮겨 담은 모양새가 꽤 훌륭했다. 그는 역시 손끝이 야무진 남자였다. 소란의 시선이 그의 벗은 등으로, 어깨로, 프라이팬을 흔드는 팔로 옮겨갔다. 드러난 상체의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갈라지고 너울졌다. 그리고 저 손으로는, 날 만졌지…….
‘악, 나 미쳤나 봐.’
그렇게 시달렸는데 정신을 못 차렸어. 지쳐 나가떨어질 정도로 힘들었으면서. 제게 시선을 주지 않고 상 차리는 일에 몰두한 강호를 바라보며 몸이 또 뜨거워지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다 됐어.”
그가 식탁에 차린 음식을 보고서야 이성을 붙들어 맸다. 틈이라도 보일라치면 아마도 강호는 밥상을 단숨에 밀어버리고 달려들지 모를 일이다. 무섭고 섹시한 남편. 까불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맛있겠어요.”
음식 냄새를 맡자 더욱 허기가 밀려왔다. 그런데, 메뉴를 보니 보양식 특집인가 싶을 정도로 과했다. 장어탕에 낙지볶음, 오리 구이와 부추 무침. 전복 버터구이까지……?
“어, 이거 다 못 먹을 거 같은데.”
조리대 위에서 내려온 소란이 식탁 앞에 앉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강호는 전혀 문제없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지만.
“내가 다 먹으니 걱정하지 마.”
“아니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도 모르게 아니라고 해버렸다. 다 먹지 마요.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지금도 체력이 빵빵하면서 보양식까지 골고루 다 먹어치우면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요. 날 죽일 셈인가요…….
“저도 먹을 거예요. 제가 더 많이.”
소란이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마음에 든다는 듯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야.”
엷게 웃으며 그녀의 접시에 자꾸만 음식을 놓아주었다. 많이 먹어. 더 먹어. 그래서 체력 한계치를 조금만 더 늘려봐.
“맛있지?”
“아, 네. 맛있어요.”
먹긴 먹는데 어쩐지 수에 말린 것 같다. 하지만 안 먹는 게 더 손해인 듯하니 소란은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너, 반말하는 게 더 섹시해.”
“제가요? 반말 안 했는데.”
“흥분하면 하던데.”
소란의 귀가 빨개졌다. 급박한 순간엔 말끝을 잘라먹었던 것도 같다.
“술 마셨을 때도 하고.”
“……그랬어요?”
일단 정신이 나가면 반말은 기본이었나 보다.
“너는 존댓말, 나는 반말. 이거 별로야. 너도 반말해.”
두 살 차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어려웠다. 쉽게 말을 놓을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대표님’이란 호칭에서 ‘강호 씨’로 바꾸는 것만 해도 상당한 결심이 필요했는데. 반말까지 하라니.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그럼 반반 섞어서 할게요. 존댓말이랑 반말이랑.”
“그래, 원하는 대로.”
그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전복을 집어 입가로 내밀었다. 설마, 아, 하라고?
“아니, 내가 먹을 수 있는데.”
“벌려.”
소란은 흡, 절로 입술을 다물었다. 입 벌려, 전복 들어간다. 먹여주는 것뿐인데 이게 이렇게 야할 일이야. 난 썩었어. 썩었다고. 그러나 문제의 소지는 언제나 그에게 있다. 강호의 얼굴이 무조건 문제인 것이다. 저 얼굴로, 저 눈빛으로, 저 목소리로, 게다가 지금은 또 서로 벗다시피 한 상황에서. “아.”라는 자상한 권유도 있고 하다못해 “자.”라는 다정한 재촉도 있는데. 기껏 선택한 말이 “벌려.”라니. 머릿속이 바짝바짝 마르고 탄다. 이 남자 자기가 야하게 생긴 걸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알면 상여우고, 모르면 중범죄다. 당장 구속시켜.
“먹어야지. 착하다.”
퇴폐적인 얼굴로 구슬리지 마, 이 사람아. 무슨 생각인지 입술을 꾹 다물고만 있는 소란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 그가 일어섰다. 왜 안 먹지, 하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크게 돌아서 오는 남편을 보며 소란은 생각했다. 모르는 게 맞구나. 누가 수갑 좀 가져와.
“벌려줘?”
제게로 온 그가 허리를 낮추며 손끝으로 입술을 가만히 쓸었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말이다. 입술을 벌리는 게 뭐. 워낙 한국어가 훌륭하여 다의적 의미를 내포한 건데 그게 뭐. 소란은 다시 잘생긴 얼굴에 가득 배인 그의 섹시한 분위기를 열심히 문제 삼았다. 결국 그의 손끝이 그녀의 입술을 열게 했다. 고소한 전복구이가 입속으로 들어왔다. 오물오물 씹는 소란을 보며 그가 흐뭇하게 웃었다.
“잘 먹으면서.”
네, 없어서 못 먹습니다. 버터 향이 진하게 퍼졌다. 쫄깃하고도 부드러운 식감에 입이 즐거웠다. 소란이 웃었다.
“먹여주니까 더 맛있는 것 같고.”
사실 눈이 마주친 순간 먹던 밥상도 치워버리고 싶었던 건 자신이 아니었을까. 쉴 틈 없이 달려든다고 그의 탓을 할 것 없다. 보기만 해도 불타오르는 건 둘 다 매한가지였다. ◇ ◆ ◇ 꼭 뜨거운 시간만 보내는 건 아니다. 어쨌든 소란은 일해야 했다. 거실 테이블 앞에 노트북을 펴고 앉은 지 얼마나 흘렀을까. 강호 또한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통화를 하고 온다더니 일을 마쳤는지 어슬렁거리며 거실에 나타났다. 소란은 그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하고 일에 몰두했다. 한숨도 섞어가며 서류 작업을 하던 그때.
“어.”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그녀의 한쪽 허벅지를 강호가 베고 누웠다. 그는 사실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일하느라 집중한 소란의 오리 입을 보니 너무 예뻐서 자꾸만 건드리고 싶어졌다. 자신이 없을 때 몸을 감싼 타월을 내던졌는지 그새 원피스로 된 잠옷을 꽁꽁 챙겨 입고 업무에 전념 중이다. 입지 말라니까.
“아직 일 안 끝났는데.”
어색하게 툭 끊어먹는 말끝이 귀여웠다. 말을 놓으라고 한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존댓말을 쓸 때도 물론 제게 거리낌 없이 할 말 다 하긴 했지만, 반말을 섞기 시작하자 말끝 어딘가에 투정이 묻은 것도 같아 그게 그렇게 귀엽게 느껴졌다. 또, 괴롭히고 싶어질 만큼.
“일해. 너는.”
강호는 그녀의 배 쪽으로 얼굴을 두고 허리 아래 엉덩이를 한쪽 팔로 안듯이 감쌌다.
“아니, 이렇게 있으면 내가 일을 할 수가 없…….”
“왜.”
“음?”
“왜 일할 수 없냐고.”
소란의 한숨이 내려온다.
“왜겠어요…….”
“모르겠는데.”
태연하게 내뱉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강호는 소란의 허벅지를 벤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포근하다. 거실 한쪽에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지금이 꿈처럼 느껴졌다.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 제 아래서 파르르 떨던 얼굴도, 환하고 따스한 미소를 짓는 얼굴도, 입술을 내밀고 일에 집중한 얼굴도, 전부 다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이건 기적이 아닐까. 그녀와 만난 것도,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녀와 함께하게 된 것도. 모든 게 그야말로 기적. 강호는 눈을 감은 채 날카로운 콧날을 그녀의 배 쪽으로 가까이 묻고서 나직하게 말했다.
“사랑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소리가 뚝 멎었다. 그녀는 처음 고백할 때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런데 저는 했던가. 속으로는 얼마든지 하고 또 했었는데.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넘치는 마음 전부를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없지만 또 ‘사랑’이라는 단어 말고는 찾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해.”
그러니 말할 수밖에 없다. 밀려드는 이 감정에 숨이 막히기 전에. 쏟아내야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기꺼이 사랑을 말할 수밖에.
“……사.”
이번엔 “사랑해.”를 말하기도 전에 소란이 그의 얼굴을 감싸 돌렸다. 그녀가 몸을 낮추며 짙은 키스를 퍼부었다. 잔잔한 고백 끝에 이어진 키스가 제법 농밀했다. 반복해 말할수록 더 커져만 가는 마음이 그녀에게 잠식당했다. 사랑해. 이런 마음이 어떻게 존재할까 싶을 만큼, 끝없이 원하고 끝없이 사랑해. 더 안고 싶고, 더 보고 싶고, 미치도록 원해. 아무리 가져도 모자랄 만큼 욕심은 자꾸 커져. 감당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나는 널, 너무 사랑해. 입술 안으로 뜨겁게 엉키는 살이 겨우 잠재운 정염을 또 건드렸다. 강호가 몸을 일으켜 그녀의 등을 받치고 소파에 올려 눕혔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소란을 팔 사이에 가두고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엔 네가 시작한 거야.”
난 분명히 일할 시간 주려고 했다고. 마냥 몸에 미친 사람 아니고 난 그냥, 사랑하는 마음을 순수하게 고백했을 뿐이라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미미하게 항변하며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어 올라갔다. 그러나 우소란이 누군가. 겁 없이 달려드는 결혼에 후회할 거라 경고했더니, 그럴 결정은 애초에 하지도 않는다며 강단 있게 밀고 들어온 여자가 아니었던가. 그를 건드린 키스조차 그녀의 선택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나 오늘, 일 안 해요.”
소란이 그의 목을 당겨 안았다. 유혹하듯 내뱉는 목소리가 제법 야했다.
“파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