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내가 안 재워2021.06.08.
강호는 꽃집에 들어섰다. 어제가 바로 소란의 퇴원일이었다. 당분간은 조심하며 통원치료를 받아야겠지만 집에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아직 옷 안에 늑골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긴 해도 일상생활은 가능했다. 그뿐일까. 소란은 오늘 출근까지 했다. 가뜩이나 일이 많아 한 명만 빠져도 다른 이들이 고생한다면서, 지금까지 자리를 비운 게 미안하다며 서둘러 회사에 갔다. 소란을 보내놓고 내내 마음이 쓰였다. 얼마나 퇴근만을 기다렸던가. 집으로 달려가다가 신호에 걸려 정차했을 때 길 건너 꽃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에게 몇 번인가 꽃을 준 적이 있다. 그때마다 소란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금세 입가에 웃음이 번지곤 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서 오세요.”
꽃집 직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이전에도 그랬듯 가장 예쁜 꽃다발로 만들어달라 주문했다.
“여자친구분이 꽃을 좋아하시나 봐요?”
보통은 강호의 서늘한 인상을 보고 말을 붙일 생각을 하지 못하던데, 꽃집 직원은 상냥하게 물었다. 아마도 그의 입술 끝에 희미하게 배인 미소 때문이리라.
“와이프.”
“네?”
“와이프 줄 꽃입니다.”
“아…….”
무감하게 정정하는 한마디다. 딱딱하고 쌀쌀한 음색이지만 꽃집 직원은 설레는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등장만으로 꽃집 안이 훤해질 만큼 잘생긴 남자가 아내를 위해 직접 꽃을 사러 왔다니.
“아내분 정말 좋으시겠어요.”
부러움과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직원은 세심하게 꽃다발을 만들어나갔다.
“꽃말이 아주 멋진 꽃이에요. 아내분께 손님 마음이 잘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동글동글한 살구핑크빛 자나 장미를 가득 넣어 완성한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꽃집에서 나온 강호의 눈에 건너편의 디저트 카페가 보였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대신 카페로 들어갔다. 꽃을 들고 등장한 강호에게 카페 직원과 몇몇 고객들의 시선이 꽂혔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모양 예쁜 디저트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 주문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화보였다. 강호는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꽃다발과 디저트를 샀다. 예쁜 것과 달콤한 것. 지금까지 그랬듯 소란은 분명 좋아할 것이다. 물론 그녀의 미소가 더 예쁘고, 그녀의 입술이 더 달콤하지만. 어서 집으로 가고 싶다.
◇ ◆ ◇ 강호는 집에 도착해 주차하고 올라와 1층에 들어섰다. 거실의 통유리 창으로 오후 햇살이 밀려들었다. 해가 넘어가기 전 가장 예쁜 시간. 막 내려앉기 시작한 햇살은 주홍빛으로 번져 그윽했다. 밤부터 폭설이 예고되어 있는데, 늦은 오후의 실내는 또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따스하다. 햇살을 가득 품은 거실에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소란은 머리카락을 집게핀으로 틀어 올리고서 뭔가에 열중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멀리 중문이 여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희고 길게 드러난 목이 너무나 예뻤다. 찬연한 빛을 머금은 그 목에 깊게 입술을 묻고 싶을 만큼. 잠시 소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호는 이내 옆에 있는 벽을 노크하듯 톡톡 두드렸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돌아보았다.
“언제 왔어요?”
반가운 듯 번지는 미소.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이걸 보고 싶어서 내가 미친 듯이 달려왔구나. 그의 가슴에 소란의 미소가 살랑거리며 불어 들었다.
“지금.”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강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소란은 꽃 정리에 몰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테이블 위에 커다란 비닐을 깔아놓고 꽃의 대와 잎을 다듬고 있던 모양이다. 화병도 세 개나 꺼내놓았다. 한눈에 봐도 많은 양의 꽃이다.
“어, 꽃이네요.”
소란 역시 강호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았다.
“그거 저 주시는 거예요?”
몸을 일으킨 그녀가 먼저 강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소란에게 이 꽃과 디저트를 안겨줄 생각으로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김이 샜다고 해야 하나.
“그래, 네 거.”
강호가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테이블 위의 꽃으로 향했다. 왠지 기분이 상쾌하지 못하다.
“와, 저 오늘 꽃복이 터졌네요.”
역시다.
“태석 선배님도 다시 출근한 기념이라고 꽃바구니 엄청 큰 걸 주셨거든요.”
왜 찜찜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바구니째 사무실에 그냥 두면 관리하기 힘들 것 같더라고요. 너무 커서요.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집으로 가져온 거예요.”
꽃바구니를 얼마나 크게 만들었으면 사무실에 덜어내고 왔는데도 꽃이 저렇게 많단 말인가.
“여기에 강호 씨 꽃까지, 우리 집 꽃밭 되겠어요.”
소란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 환히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예뻤다. 강호의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멱살 잡고 끌어올리는 미소다. 겨우 평정을 되찾은 그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건 너 좋아하는.
“디저트.”
“오늘 디저트를 너무 많이 먹어서, 이건 냉장고 넣어놨다가 내일 먹을게요.”
바로 받아치는 말에 강호의 몸이 딱 굳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얼마나 고민해가며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골랐는데 그걸 열어보지도 않고! 상자째 김치냉장고에 그대로 넣어버리다니!
“뭘 그렇게 많이 먹었길래.”
“태석 선배님이 이것저것 많이 사 오셔서요.”
또, 마태석?
“연희랑 선배님이랑 늑골엔 마카롱이 좋다느니, 까눌레가 최고라느니 하는데 너무 웃겼던 거 있죠. 맞장구치면서 저도 갈비뼈 다 낫는 기분이라고 이것저것 먹었는데. 과식해서 저녁도 못 먹겠어요. 참, 저녁 드셨어요?”
“안 먹었어.”
당연히. 너랑 먹으려고.
“차려드릴까요? 냉장고에 반찬 많은데.”
“아니.”
강호는 쌀쌀맞은 어투로 거절했다.
“생각 없어.”
소란도 없이 혼자 앉아 꾸역꾸역 밥을 먹을 기분은 아니다. 다만 기분이 좋을 때도, 안 좋을 때도 겉모습은 변함없이 늘 냉기가 흐르니 소란은 그의 감정 변화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하나하나 열거하자니 사람 참 치사해지고.
“꽃이랑 디저트 너무너무 감사해요.”
활짝 웃는 그녀는 얄밉게 예쁘기만 했다. 내 속만 타지, 내 속만. ◇ ◆ ◇ 강호는 침실 안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기 위해 옷을 벗었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 아래 서 있자 머리가 차가워졌다.
‘동료잖아.’
소란과 태석은 선후배인 동시에 회사 동료다. 대표와 직원 관계이기도 하고. 그의 감정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소란이다. 소란은 태석의 감정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다. 만약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였거나 껄끄럽다면, 제 앞에서 아까처럼 말하진 못했을 터다. 태석이 준 꽃, 태석이 사 온 디저트. 그런 발언을 담백하게 한다는 건, 태석을 전혀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얘기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다만 태석이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얼굴도 보고 대화도 나눈다는 사실이 상당히 거슬렸다. 자신은 온종일 소란을 보고 싶었고 멀리 떨어져 있음에 안달이 나 있었는데.
‘회사에 법무팀을 만들까.’
회사 규모는 슬림하게 유지해오고 있다. 쓸데없이 덩치를 키우지 않으려, 회사 내 법무 사안은 모두 아웃소싱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제야 사내 법무팀을 조직할 생각이 드는 건, 전부 아내 때문이다. 순전히 그녀를 종일 보고 싶은 욕심만으로.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조금만 더 깊어졌다가는 제대로 생활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그런 걸 두고 ‘현망진창’이라고 하던가. 한집에 사는 여자에게 제대로 빠져 있는 중이다. 강호는 샤워를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나왔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드라이어가 있는 화장대 앞으로 다가서는데.
“저어, 강호 씨.”
드레스룸 입구 쪽에서 소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머리카락 말릴 거죠?”
“음. 왜?”
“제가 해주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머리를?”
“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래.” 하고 대답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 ◆ ◇ 소란은 강호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꽃을 모두 정리해 집 안 곳곳에 가져다 두었다. 마지막으로 강호가 준 자나 장미를 담은 화병을 안고 침실에 들어왔다. 창가 테이블에 올려두자 기분이 묘했다. 둘만의 침실. 이곳에 남편에게 받은 꽃을 놓아두니 괜히 볼이 뜨거워졌다.
“……예쁘다.”
사적인 일에 비서를 동원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럼 직접 샀으려나. 그 차디찬 얼굴을 하고선, 꽃집이며 디저트 카페며 다니면서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정말 그랬을까. 상상이 잘 안 된다. 분명한 건 설렌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사실. 퇴원이 기쁜 게 아니라, 진정한 신혼의 시작이 행복했다.
‘나도 뭘 해주고 싶은데.’
그는 이렇게 꽃과 디저트까지 사 왔으니 뭐라도 하고 싶다. 잠시 고민하던 소란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드레스룸 안으로 연결된 욕실에선 물소리가 계속 들렸다. 샤워를 마쳤는지 어느새 소리가 뚝 끊겼다. 강호가 나왔다. 이제 자신이 한 공간에 있는 걸 아니 옷을 벗고 나오진 않았겠지. 그래도 잠깐 시간을 두어 기다렸다가 소란은 드레스룸 입구로 다가갔다.
“저어, 강호 씨.”
그를 부른 소란은 머리카락을 말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보통 로맨틱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런 장면 많이 나오지 않던가. 연인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는 모습. 물론 여주인공의 머리를 말려줄 때가 많았지만 소란은 그에게 해주고 싶었다. 촉각 방어 때문에 아직 남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 강호다. 입원하는 바람에 촉각 방어 극복 프로젝트는 잠시 중단한 상태지만 생활 속에서 실천할 방법들은 무궁무진했다. 이것도 또 하나의 극복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강호가 승낙하자 소란은 그에게 다가갔다. 드라이어를 켜자 조용히 더운 바람이 밀려 나왔다. 의자에 앉은 그의 뒤에 서서 머리카락 사이로 가만히 손을 넣었다.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감겨들었다. 거울에 비친 그가 정면으로 보였다. 강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빚은 듯 완벽한 이목구비에 압도적인 분위기가 심장을 떨리게 했다.
‘이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 눈앞에 있다.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머리카락을 날리듯 말리는 장면이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낮게 퍼지는 소음. 따뜻한 바람. 손끝에 간지럽게 닿는 촉감. 젖은 물방울이 공기 중에 탁탁 날아가 사라졌다. 그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흩뜨리는 손길이 아까보다 느려졌다. 어느새 물기가 마른 머리카락이 따스하게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 무척 부드럽고 결이 좋았다. 계속 만지고 싶을 만큼.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눈을 뜨고 손을 뻗었다. 소란은 얼떨결에 드라이어를 그의 손에 내주었다. 강호가 전원을 끄자 단숨에 고요해졌다. 무기를 빼앗긴 양 소란이 가만히 서 있었다. 강호가 드라이어를 화장대에 올려놓고 그녀 쪽으로 몸의 방향을 느리게 틀었다.
“아, 끝났어요.”
그제야 정신이 든 소란이 그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조금 아쉽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소란의 허리를 감아 당겨 허벅지에 앉혔다. 헙, 하고 숨을 들이 삼켰다. 풀썩 내려앉은 엉덩이 아래 탄탄한 근육이 닿았다. 그의 허벅지는 보는 것 이상으로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무거울 것 같은데…….”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 그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꿰뚫릴 것만 같다. 뜨거운 기운이 확 올라붙었다. 가까운 데서 퍼지는 숨소리만이 공기에 스몄다. 그저 다리 위에 앉아 쳐다볼 뿐인데도 키스할 때 이상으로 긴장감이 돌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시선이 얽힌 채 그에게 안겨 있단 사실이 말도 안 되게 설렜다. 하다못해 퇴원하고 돌아왔던 어젯밤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며칠간의 입원 생활 끝에 챙겨온 몇 가지 짐을 풀어놓고 씻고 나왔을 때 그는 잘 자라며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이후 소란은 오랜만에 누운 안락한 제 침대 위에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불면증과 거리가 먼 편인 소란은 머리만 대면 자는 스타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 덕분에 침실을 합친 후 우여곡절 끝에 보내는 첫날을 단잠에 녹여버렸다.
“오늘도, 일찍 잘 건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소란이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가뜩이나 살벌할 만큼 위압적인 포스의 그가 바로 앞에 있으니 긴장이 되는데, 훅 치고 들어오는 말이 심장에 직격탄으로 날아들었다.
“난 어제 못 잤는데.”
그가 소란의 한 손을 잡고 천천히 올렸다. 손등에 입술을 대며 바라보는 눈빛이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이 남자, 자신이 섹시하다는 거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미칠 듯 심장이 간질거렸다.
“너도 오늘은 못 잘 거야.”
입술이 손등을 스쳐 손가락을 잘게 잘게 물며 올라가, 손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하.”
소란의 입술 사이로 젖은 탄성이 작게 터졌다. 제 손가락 끝을 물며 바라보는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벗지 않았는데도 심히 외설적이다. 제 손가락에 닿은 그의 입술이 몹시 야했다. 살짝 혀를 움직여 끝을 핥았을 땐 그만 정신이 혼미해질 뻔했다. 강호의 음성이 낮게 탁 가라앉았다.
“내가 안 재워.”
그의 다른 손이 소란의 등허리를 쓸다가 이내 파자마 자락 사이로 들어갔다. 순간 옷이 들춰지며 드러난 맨살에 차가운 공기가 스쳤다. 예고는 끝. 긴 밤을 알리는 키스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