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안 참는다고 했잖아2021.06.05.
“모르셨던 거 같은데 저, 집착 되게 좋아해요.”
둑이 무너졌다.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마음의 무게는 그보다 훨씬 더 무거운데. 서로를 향해 밀려드는 두 사람의 감정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섰다.
“그러니까 꼭 지금 얘기한 그대로 해주셔야 해요.”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의 ‘집착’은 사전적 정의가 다른 모양이다. 달콤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걸까. 너만 볼 테니, 너도 나만 봐. 너에게 내 전부를 걸 테니 반드시 너도, 나를 사랑해. 강호의 진득한 시선이 감겨들었다. 그가 먼저 몸을 일으켜 소란의 손을 잡아당겼다. 강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요?”
갑자기 향한 곳은 병실이 있는 건물 로비가 아니다. 건물을 돌아서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반대쪽 길. 지하주차장으로 차들은 들어가고 나오지만, 사람의 통행은 별로 없는 곳이다.
“어어…….”
그가 보폭을 일부러 크게 한 것도 아닌데도 속도가 제법 빨랐기에 소란은 종종거리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강호에겐 한 가지 목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소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살면서 이런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싶다. 서로를 갈망하는 마음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마침내 다다른 곳은, 건물 뒤편 보수공사를 위해 쌓아둔 건축자재 옆이다. 주차장 출입 차들도 보이지 않는 위치. 가볍게 밀린 소란의 몸이 벽에 닿았다. 강호의 짙은 눈빛이 그녀의 입술을 세세히 쓸었다. 그가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숨조차 삼킬 수 없는 분위기에 소란은 빳빳하게 굳고 말았다.
“이제.”
“…….”
“안 참는다고 했잖아.”
낮게 잠긴 목소리.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섰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전기가 올랐다. 시선만으로도 몸이 저릿해졌다. 이제 참을 생각이 없는 남자가 다가와 몸을 맞대며 입을 맞추었다.
“흐읍…….”
소란은 사실 뭐라 말하고 싶었다. 안 참는 거 너무 좋다고. 내가 스킨십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인지 내내 모르고 살았다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 기분이라고. 겹친 입술 속으로 아득히 멀어진 말들은 이제 필요 없다. 두 사람이 나누는 키스 속에 모든 감정이 스며 있다. 소란의 목 뒤를 감싼 커다란 손이 차갑고도 뜨거웠다. 틈 하나 없이 몸이 딱 맞붙었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곳이 없으며, 어디로든 빠져나갈 생각조차 없다.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소란의 어깨가 살며시 떨렸다. 키스만으로도 극한의 감정을 느끼며 그녀는 그의 허리를 더 세게 껴안았다. 단단한 몸이 저를 품고 가두었다. 누구의 발길도,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고 완벽하게 고립된 곳. 강호와 소란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 ◆ ◇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태석의 사무실. 그는 빙긋 웃으며 모니터와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번갈아 보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야 정상이지. 내가 딱, 알고 있었다니까.”
혼잣말하며 서류를 들춰보는 손길이 마냥 경쾌했다. 며칠간 몰입했던 일이 있다. 접촉사고의 가해자인 음주운전자 주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사고 당시 소란을 다치게 한 사실에 분노한 태석은 그놈의 바닥까지 털어주겠다 결심했다.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긴 지 며칠, 드디어 의미 있는 자료를 수집해냈다. 그놈의 이름을 건 사업체와 운영 실태. 수상한 구석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거 봐, 이게 어디 정상적인 회사냐고.”
자료를 오래 들여다본 태석은 습관적으로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었다. 그러다 그만, “으.” 하며 손으로 목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아프네.”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걸 자꾸만 잊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걱정을 지나치게 유발하는 감이 있어 경추 보호대를 빨리 떼기는 했다. 다친 정도가 심하지 않고 치료 경과도 좋아 가능했지만, 아직 완벽하게 나은 것은 아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우리 란이란이는 오죽할까! 다쳐서 병원 신세까지 지고 있는 소란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화가 치솟았다. 그놈은 사방에 연줄이 제법 있는지 요리조리 처벌을 피해 움직이는 꼴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모처럼 승부욕이 들끓는다. 그 승부욕을 연적인 강호를 향해 불태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소란이 억지로 결혼했을 뿐이라고, 그 결혼은 가짜라고, 태석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강호의 존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직진을 하는 중이다. 이보게, 방향 잘못 잡았네. 아무도 말해주는 이가 없으니 태석은 그저 앞으로 열심히 나아갈 뿐이다.
“이름, 박후만. 나이가 51세.”
그놈의 이름으로 운영 중인 사업체는 총 두 개다. 하나는 용역업체, 또 하나는 임대사업을 하는 법인이다. 사실상 허울뿐인 회사들이라 해도 무방했다. 제대로 운영된다기보다는 게릴라성으로 치고 빠지는 일을 다루는 회사로 보였다.
“확실히 구린 구석이 있어.”
어딘가에 기생하는 쓰레기가 분명하다. 태석의 예리한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연애 빼고는 모든 촉이 탁월하게 좋고, 소란 빼고는 다 가진 남자. 태석은 눈빛을 이글거리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난데. P 관련 서류 확인했어. 고맙다.”
- 그런데 웬일이야? 일할 때도 조사 부탁한 적은 없었잖아.
“딱히 그럴 일이 없긴 했지.”
- 하긴. 워낙 얌전한 사건들만 맡으시니까. 이번에 사고당한 건 어지간히 열 받는 모양이네.
“어, 좀.”
합법적인 선에서 무엇이든 다 알아봐줄 수 있다던 지인에게 도움을 청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소란의 존재는 태석을 강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추가 조사해줄 일이 있어. 일단 이 P가 운영하는 업체 주변으로 억울하게 피해당한 사람이나 회사가 있진 않은지 봐야겠는데.”
해서는 안 될 일을 주로 하는 회사가 분명하다.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라면 응당 폐기해줘야지. 방향은 잘못 잡았지만, 어쩌면 뒷걸음치던 소가 쥐를 잡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 ◇ 소란의 사무실.
“뭐 그딴 게 다 있니?”
연희가 화가 나 씩씩거렸다. 태석의 차를 박은 음주운전자는 요즘도 유유히 돌아다닌다고 했다.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면허 취소 수준의 측정 수치에, 대인 사고를 일으키고도 현장에서도 행패까지 부리는 등 죄질이 불량하여 당연히 구속 대상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시작부터 맥이 빠졌다. 음주운전 처벌법이 강화된 시기인데도 이런 식이라면 벌금형 등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진하게 느껴지는 솜방망이의 향기. 양형에 대비해 선임한 변호사만 여섯 명이라고 했다. 그들의 안내에 따라 그 음주운전자는 자필 반성문이며 합의 시도 등의 미션을 착실히 수행 중이었다. 전혀 마음에도 없는 짓일 텐데도.
“어디 하루 이틀인가.”
소란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 현장에서 큰소리 빵빵 치는 상대를 보고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다. 괜히 열 내봤자 정신건강에만 해로울 뿐이라 소란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연희는 친구의 일이라 그런지 조금 더 분노해주었지만.
“하루 이틀 아니긴 하지. 돈으로 별 지랄 다 하는 것들 숱하지만, 볼 때마다 혈압 올라 미치겠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니 그딴 놈들이 계속 판을 치는 거 아니야. 싹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다.”
악한 일을 행하고도 돈의 비호를 받는다. 그러니 돈을 더 많이 틀어쥐기 위해 다시 악한 일도 불사한다. 돈과 악 사이, 끊을 수 없는 고리다. 다만 소란은 이럴 때 절망과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공부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 더 나은 세상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가진 자들의 세계는 냉혹했고, 자신은 여전히 뒷배 없는 변호사일 뿐이다. 그나마 태석의 로펌에 들어온 건 행운이었다. 적어도, 싼값에 자존심을 팔아넘기는 일은 없었으니까. 제대로 뉘우치지도 않고 돈으로 죗값을 깎는 이들이 많지만, 태석을 위시한 이곳에서만큼은 절대 그런 자들의 변호를 맡지 않았다. 돈만 주면 뭐든 하는 곳이 아니란 사실만으로도 태석을 존경할 이유는 충분했다.
“태석 선배님 요즘 뭔가 분주하시던데, 가만히 계실 분은 아니야.”
연희가 일말의 기대를 품고 말했다. 정의의 편에 선 태석이 이대로 물러나진 않을 거라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 그때 양반은 못 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란이란이!”
똑똑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을 연 사람, 바로 태석이다.
“퇴원했으면 조금만 더 쉬었다가 나오지, 왜 벌써 나왔어.”
소란이 퇴원한 후 출근한 첫날. 소식을 듣고 연희에 이어 태석까지 사무실에 찾아온 참이다.
“이제 이 정도 움직이는 건 괜찮아요. 선배님은 좀 어떠세요?”
“나야 괜찮지.”
그가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와, 이게 뭐예요?”
연희가 태석의 손에 들린 꽃바구니를 보고 물었다. 뭔지 몰라서가 아니라, 풍성하고 화려한 꽃이 너무나도 예뻐서.
“우 변 퇴원 기념 꽃.”
태석은 파스텔톤 색감의 꽃바구니를 턱 하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고, 소란이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보기만 해도 늑골이 다 낫는 기분이다.
“정말 예뻐요. 감사해요.”
요즘 들어 꽃을 종종 받다 보니 친숙한 느낌이 다 들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스해지며 행복해지기도 하고. 몰랐는데, 나 꽃 좋아하는구나.
“아, 부럽다. 퇴원했다고 이렇게 큰 꽃바구니까지 사다 주시고. 소란이 너 없을 때 네 잡무까지 다 봐주셨잖아. 역시 대표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구나, 우리 라니라니.”
연희가 태석이 즐겨 부르는 호칭을 장난스레 흉내 내며 꽃바구니 주변을 살폈다. 흰 상자가 곱게 담긴 종이가방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혹시 먹을 거? 늑골엔 마카롱이 그렇게 좋다던데.”
“역시 우리 여늬여늬.”
태석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이건 갈비뼈 아무는 데 특효라고 소문난 까눌레.”
“역시 우리 선배님. 센스 대박이야, 정말.”
연희가 양손 엄지를 척척 들어 올려 보였다. 물론 디저트의 효능이야 늑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편안한 정서가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면 좋은 영향을 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소란은 태석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한 마음으로 답했다.
“까눌레 너무 좋아요. 잘 먹을게요, 진짜.”
“이거 말고도 다른 디저트들도 잔뜩 사다가 휴게실에 넣어놨으니까 이따 또 갖다 먹어.”
그는 정말 완벽한 대표였다. ◇ ◆ ◇
“조금 일찍 들어갈 예정이에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을 테니 퇴근하고 오세요.”
강호는 아까 소란에게 걸려온 전화를 떠올렸다. 퇴근 후 데리러 가려 했더니 일찍 들어간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오후 업무를 다 접고 소란의 시간에 맞추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요즘처럼 일이 하기 싫었던 때는 없었다. 그냥 때려치울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란의 옆에만 있고 싶다. 그녀가 종일 뭘 하는지, 뭘 먹는지, 어딜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모든 게 다 궁금하고 애가 탔다. 모니터에도 소란이 떠오르고, 서류 귀퉁이에도 소란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야말로 열병이다. 강호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으며 겨우 업무에 매진했다. 마침내 퇴근. 평소 회사를 나서던 시간보다는 조금 이르지만 이 정도면 급한 일은 끝냈으니 집에 가도 된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이제 소란이 퇴원도 했겠다, 한집에서 보내는 저녁 시간은 너무도 소중하다. 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아까 회의한 거 공유했……, 뭐야, 퇴근이야? 벌써? 배, 백강…….”
그는 찬규가 제 집무실로 들어오는 걸 본 체도 하지 않고 쌩 지나쳐 나왔다. 퇴근시간 다 됐는데 일을 가지고 오다니, 상종해서는 안 될 인간이다. 홍찬규 아웃. 강호가 직원들과 짧게 인사하며 엘리베이터까지 왔을 때 마주친 나린이 물었다.
“왜 그렇게 바빠? 무슨 일 있어?”
“없어.”
“그런데 어디 가?”
“집.”
간결한 대답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야. 아까 전자결재 빠진 거 체크했…….”
강호는 가차 없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타앙. 문이 닫혔다. 계나린도 아웃. 집에 꿀 발라놓은 강호는 귀가를 서두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