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집착할 거야2021.06.01.
지금껏 어렵게 식당을 지켜 온 것이 다 이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몇 차례 고비가 있긴 했다. 소란까지 힘들게 할까 봐 포기할 뻔도 했다. 식당을 정리하거나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더라면, 굳이 이런 과거를 말할 계기조차 없었을 터다. 어쩌면 그냥 세월 속에 흘러간 이야기로 잘 묻어두고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르고 살 뻔했구나. 이렇게 귀한 인연으로 맺어진 걸 몰랐을 뻔했어.”
목이 멘 음성으로 백 회장은 소란과 성준에게 말했다. 어려운 처지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아껴주었던 강호의 부모와 소란의 어머니가 맺은 인연이 작은 씨앗이었다. 누가 누굴 살린 게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고 숨이다. 유기적으로 얽힌 인생사에 모두의 존재가 스며 있다. 강호의 부모는 소란의 어머니를 보듬었고, 그 감사함으로 소란의 어머니는 강호를 살렸고, 다시 그 덕에 조금 더 나은 터전을 일구며 살아갈 수 있었다. 상처 입은 성준과 아버지는 은부동에 와서 새 삶을 살게 됐고, 또 그 덕에 어린 소란은 어머니를 잃고도 아버지와 오빠의 따뜻한 품 안에서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었다. 힘겹지만 끝까지 지켜낸 식당에서 마침내 진실의 싹이 터 올랐다. 아름다운 꽃은, 이미 운명처럼 닿아 서로를 놓지 못한 강호와 소란 사이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 ◆ ◇
“주차장까지 잘 모셔다드렸어요?”
“음. 형님도 같이. 할아버지 가시는 길에 내려주신다고 같이 타고 나가셨어.”
강호는 백 회장과 성준을 배웅하고 돌아왔다. 병실로 들어온 그는 창가에 서 있던 소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할아버님이랑 오빠랑 부쩍 친해지신 것 같아요.”
“그러게. 질투 나네.”
농담처럼 가볍게 흘리는 말끝에 그녀 앞에 가만히 마주 섰다. 수만 가지 감정이 서린 눈빛이 매우 깊다. 소란의 이마부터 눈, 코, 입까지, 차분히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눈으로 매만지는 듯 그윽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우리가 그렇게나 확실히 이어져 있었다는데. 이제 전혀 다른 인생이 시작된 것만 같다. 왈칵 눈물이 날 듯해 소란은 입술을 꾹 물고는 팔을 뻗었다. 그의 늘씬한 허리에 손을 둘러 껴안았다.
“사랑해요.”
멍하니 멈춰 서 있던 강호는 이내 제 품 안의 그녀를 깊게 끌어안았다. 단단히 뿌리내린 사랑이 느껴지는 포옹이다. 강렬하고도 애틋했다. 품에 안는 행위만으로도 마음이 하나로 합쳐진 듯 가슴이 절절 끓었다. 깊게, 더 깊게 안고 있다가 강호가 조금 몸을 떨어뜨리고 소란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며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얼굴 한쪽을 가만히 쓰다듬던 그가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내렸다. 촉촉하게 닿으며 열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섞였다. 말랑한 살이 입속에서 얽혔다. 훑는 감촉에 등줄기가 저릿해지고 서로를 안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창가에 선 연인의 키스가 길고 진하게 이어졌다.
◇ ◆ ◇ 박 여사의 오피스텔. 커다란 저택에 남아도는 방들을 놔두고 굳이 외곽에 오피스텔을 얻어두었다는 건 그녀의 남편과 자녀들도 모르는 사실이다. 오직 박 여사의 친정 동생들만 아는 일.
“아니, 넌 또 뭔 사고를 쳤길래!”
박 여사는 이제 오십 줄에 들어서도 종종 허튼짓을 일삼고 다니는 막냇동생을 야단쳤다.
“별거 아니라니까. 깐깐한 새끼한테 잘못 걸려서 그렇긴 한데, 일단 원래 대놓은 선에다가 돈 새로 싹 발라뒀으니까 해결 잘해줄 거야.”
박후길 여사의 막냇동생 박후만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올려놓고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여상히 말했다. 이에 둘째 동생 박후성이 피식 웃었다.
“별거 아니긴. 그러게 술 처먹으면 대리 좀 부르라니까.”
“뭐어? 또 음주운전을 했어?”
박 여사가 대로했다.
“저 버릇 개 못 주지! 너 벌써 몇 번째야. 지금까진 운이 좋아 넘겼다 쳐도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모르는데!”
“아유, 누님. 나 지금 멀쩡히 여기 앉아 있는 거 봐도 모르겠어? 하다못해 구속 입건도 아니라니까. 하하, 대충 잘 마무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쇼.”
태평한 박후만을 보니 박 여사는 열이 다 뻗쳤다. 동생들을 시켜 은밀히 진행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이러다 어디 구멍이라도 나면 어쩐단 말인가.
“이제 중요한 일만 남았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지.”
“알아, 안다고요.”
제법 머리 컸다고 껄렁거리는 박후만을 슬슬 내쳐야 할 때인가 싶다. 그러기엔 서로 쥐고 있는 비밀이 너무 많아 쉽게 등 돌릴 수도 없는데 말이다. 저놈보다도 저놈이 부리는 이들이 뛰어나니 여기까지 순탄하게 달려온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골치가 더 아팠다. 박 여사 속만 시커멓게 타는 중이다. 친정아버지는 조경 전문 회사를 운영 중이지만, 사실 돈을 벌어들이는 건 몰래 하는 불법 사금융 사업을 통해서였다. 검은돈이 수시로 흐르고 빠지며, 막대한 금액을 해외 조세 피난처로 빼돌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똑똑한 박 여사에게 사업을 오픈해 가르치긴 했으나 정작 그 알짜 회사는 그녀의 첫째 동생이자 장남에게 물려주고 일찌감치 떠나셨다. 박 여사가 장녀, 아래로 남동생만 셋이다. 기가 막혔다. 뛰어나긴 내가 더 뛰어난데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첫째 동생에게 싹 물려주고, 나머지에겐 적당히 나눠주다니. 먹다 남긴 개밥도 아니고 이게 뭔가. 그런데 그 황당한 꼴을 시집와서도 보게 됐다. 차남인 시아버지는, 장남인 형에게 대부분 재산과 사업을 빼앗기고 손가락이나 쪽쪽 빨고 있는 꼴이 한심했다. 시아버지가 제대로 재산을 차지했더라면 그게 자기 대, 나아가 진상에게까지 안정적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빼앗긴 ‘내 것’을 되찾아오겠다는 열망이 끓어올랐다. 백 회장이나 주변인들 앞에서 뱀처럼 교활한 본성을 감추고 뒤로 간계를 꾸미는 것쯤이야 박 여사에게 일도 아니다. 머리가 여물었을 때부터 친정아버지 곁에서 보고 배운 게 그거였으니까. 아버지는 물고기 대신 물고기 낚는 법을 물려주신 셈이다.
“아무튼 정신 똑바로 차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
“알겠다니까.”
“걱정 붙들어 매.”
박후만도, 박후성도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결실을 거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참, 그 은부동 건물은 어떻게 됐어? 손해 보더라도 그냥 빨리 처분하라니까 왜 여태 끼고 있어? 돈도 안 되는 걸 가지고.”
박 여사가 성가시다는 듯 물었고, 박후만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니야, 누님. 작자가 나타난 모양이야. 매매가보다 더 주고 사겠다며 나섰다는데, 허위로 개발 계획 소문 뿌려놓은 게 드디어 먹힌 거 같아.”
“아직도 그 짓거리야? 거기 누가 속냐? 양아치 짓 좀 하지 말랬더니.”
박후성의 핀잔에 박후만이 억울한 듯 말했다.
“이번엔 진짜라고.”
“푼돈에 집착하는 버릇 좀 버리랬지.”
박 여사는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말했다. 어차피 돈 바라고 쥐고 있던 건물도 아니다. 아들 진상이 하도 목을 매는 여자애라, 그 애 가족이 하는 식당 건물을 매입하고 뒤에서 간단하게 판을 좀 짜봤다. 처지가 힘겨워지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거니 하고. 어쩌면 어려움을 겪는 걸 보며 진상이 귀찮아 돌아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베스트이긴 했다. 우소란이란 여자애를 깔끔하게 치워낼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진상은 오히려 더 매달렸고, 이를 지켜보는 박 여사는 어이가 없었다. 대리인을 앞세운 법인은 악랄하게 굴어도 이쪽 정체가 드러나지 않으니 그런 면으론 편했다. 진상의 앞에선 걱정하며 돈을 빌려주라 하고, 뒤에선 파리채 앞의 파리 처지가 된 그들을 마음껏 괴롭혔다. 이래도 안 죽니? 이래도 안 죽어? 하면서. 돈을 빌려준 후엔 그걸 무기로 머리채를 잡고 흔들 수 있으니 아주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애초에 박 여사가 손해날 짓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이후 쓸데없어진 건물의 처분을 박후만에게 미뤄두었는데, 시세차익에 욕심이 난 동생이 여태 그걸 끌어안고 있던 것이다.
“그럼 차익 다 내가 먹어도 되는 거지? 누님은 그런 푼돈 관심 없다며.”
“그래, 먹어라, 먹어.”
배포도 좀생이 같은 것. 그보다 급하고 큰일이 줄줄 이어졌는데. 박 여사의 머릿속은 앞으로의 그림을 그리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이미 작게 뚫린 구멍에서 구정물이 새기 시작했다는 것도 모른 채. ◇ ◆ ◇ 강호와 소란은 손을 잡고 병원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걷는 데 아프진 않아?”
“네, 조심하니까 괜찮아요.”
조금만 힘이 들어가도 아, 하고 늑골에 통증이 느껴졌기에 더더욱 속도를 늦추어 움직이는 중이다. 그런데 아까 병실에서 키스할 땐 전혀 아프지 않았다. 거참 신기한 일이다. 키스란 게 대단한 마취 성분을 띠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좋은 키스, 좀 더 오래 하고 싶었지만 여긴 병원이니까 자제했다. 아니 우리는 이렇게 서로 좋은데 왜 자꾸 참아야 할 일이 생기는 거야. 소란은 괜히 억울했다. 물론, 그래봐야 서로 마음을 확인한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겠지만.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쩌다가 형님이랑 만난 건지 그걸 안 여쭤봤네.”
“어, 그러게요. 어떻게 그런 얘기까지 하게 되신 거죠?”
백 회장이 직접 성준의 식당으로 찾아갔을 거란 생각은 쉽게 할 수 없었다. 의중을 알지 못하니까.
“어쨌든 우리가 그런 인연이었다는 걸, 알게 돼서 다행이에요.”
“다행일까?”
걸음을 멈춘 강호가 벤치에 소란을 가만히 앉혔다. 그녀를 조금 더 잘 보고 싶은 마음에, 강호는 소란의 옆에 앉지 않고 무릎 하나를 세우고 자세를 낮추었다. 무릎에 모은 손을 가만히 잡으며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이 꽤 야했다. 야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원래 눈이 그렇다는 걸 소란도 이젠 알았다.
“다행 아니에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알면 안 됐던 건가. 강호는 그녀를 보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그런 인연이란 걸 알게 된 이상.”
“……이상?”
“이제 난 절제가 안 될 것 같은데.”
“절제가…… 안 되면요?”
“집착할 거야.”
헙, 소란은 딸꾹질할 뻔했다. 이런 얼굴로, 이런 목소리로, 이런 눈빛으로, 이런 자세로 내 앞에서 하는 말이, 집착이라니.
“지, 집착이요?”
“그래. 너한테 나, 집착할 건데.”
무시무시한 선전포고다. 그래도 과연, 정말 다행일까?
“아니, 지, 집착 왜…….”
“미리 사과 겸 경고하는 거야.”
사과랑 경고가 원래 동시에 할 수도 있는 거였나요. 언제부터 같은 결이었죠. 저만 몰랐나요.
“안 그래도 좋았는데, 이렇게까지 엮인 인연이라면…….”
“…….”
“이건 그냥 좋아서 죽으라는 거 아닌가.”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은근한 직구에 소란의 심장이 펄떡거렸다. 이미 내 것이 아닌 심장 박동에 온몸이 탱탱볼이 된 듯 튀어 오르는 기분이다. 두려운데 설렌다. 이 양가감정 뭐야, 정말.
“사과도 좋고 경고도 좋은데……, 예고도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예고?”
“네, 어떤 식의 집착인지 알고 싶은데요. 너무 하드코어하면 좀 그러니까.”
소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고, 강호의 눈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그 표정 뭐지. 토 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이제 진짜 얼굴값 하려는 건가? 정말 제대로 집착하려고 그러세요……?
“눈 뜨고 감을 때까지 너만 볼 거야. 아니, 꿈에서도.”
흡. 소란이 다시 숨을 삼켰다. 이 농도 짙은 사랑의 맹세는 뭐지. 혼인 서약보다 더 엄숙하고 강렬한 거 같은데.
“최소한의 업무만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너만 따라다닐 거고. 네가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다 하게 해줄 거야.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니까 내 여건이 허락하는 한은 무조건 기다리고, 데려다줄 거고, 또 데려올 건데.”
“아…….”
“싫다고 해도 할 수 없어.”
느릿느릿 살벌하게 뱉는 말의 내용이 묘하게 스윗했다. 어디서 집착을 잘못 배워 온 모양이다. 그건 집착이 아니라 우소란 전속 머슴 아니세요?
“나한테 여자는 이제 죽어도, 너 하나야.”
착한 집착 인정합니다.
“도망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도망은 왜 가요.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범위의 집착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맛집인데? 소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모르셨던 거 같은데 저, 집착 되게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