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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깊은 인연 (1) (58/112)

#58화. 깊은 인연 (1)2021.05.22.

  30년 전, 은부동. 지연은 며칠 사이 깜빡거리던 형광등이 완전히 나가버려 결국 철물점에 다녀오던 길이다. 긴 형광등을 사서 돌아오는데 골목에서 옆집 아기엄마를 만났다.

“웬 형광등이야? 불이 나갔어?”

“네. 갈려고요.”

지연의 말에 아기엄마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걸 직접 하려고? 의자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리 내.”

지연은 이제 임신 6개월에서 막 7개월로 접어든 상태다. 아직 배 속에 있는 아기가 바로 소란이다.

“이런 건 내가 전문이야. 정말 잘 갈거든. 거기 앉아 구경이나 해.”

옆집 아기엄마는 지연의 손에 들린 형광등을 빼앗아 기어이 집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마침 눈에 띄게 배가 불러오고 걷는 것도 힘들던 터라 아기엄마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았다.

“매번 고마워서 어떻게 해요.”

금세 형광등 불이 환히 들어오자 지연은 웃으며 옆집 아기엄마를 바라보았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이런 거야 백번도 해줄 수 있으니까 괜히 고생하지 말고 나한테 얘기해.”

아기엄마는 웃으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거실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협소한 공간이다. 한쪽엔 최소한의 조리가 가능한 싱크대가 있고, 방 하나, 화장실 하나가 붙어 있는 집. 허름한 빌라의 반지하 집에 나란히 사는 그녀들은 이웃이다. 옆집 아기엄마는 이제 스물둘이 된 지연을 친언니처럼 다정하게 챙겨주었다.

“언니, 이거 가져가서 드세요. 가게 사장님이 주신 재료가 많이 남아서 더 부쳐놨어요.”

“장떡이네. 맛있겠다.”

아기엄마는 활짝 웃으며 지연에게서 접시를 받아 들었다.

“어쩜 이렇게 솜씨가 좋아. 정말 맛있다.”

젓가락으로 대충 하나 집어먹은 아기엄마는 감탄했다.

“제가 매일 도움만 받는데 반찬이라도 나눌 수 있는 게 어디예요.”

형광등을 갈아주는 일은 예사였다. 옆집 부부는 자신이 무거운 것을 들거나 빌라 앞 쓰레기라도 주울라치면 큰일이 나는 줄 알고 대신 해주곤 했다. 의지할 데 없는 지연으로선 가슴이 뭉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단지 물리적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마치 친정 언니, 오빠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지연은 보육원에서 자라 세상에 나와선 공사장 함바집에서 일했다. 그러다 건설근로자인 남자를 만나 혼인신고만 하고 함께 살았다. 비슷한 처지였지만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아기도 생겼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며 열심히 살아가던 때였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 남편이 어, 어떻게 됐다고요……?”

  지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하루아침에 공사장 사고로 남편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었다. 관리업체에서는 남편의 부주의를 이유로 들어 보상금도 코딱지만큼 건넸을 뿐이다. 이십 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지연은 임신 중기에 접어들면서, 일이 많고 고된 함바집에 더 이상 나가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 걸까. 지연의 솜씨를 잘 아는 함바집 주인이 소개해주어 시장 반찬가게 일을 받아서 하게 됐다. 출퇴근하지는 않고 사장이 집으로 재료를 실어다 주면 반찬을 만들어 납품하는 식으로 일했기에 임신한 몸으로도 가능했다. 반찬가게 사장은 인심이 후했다. 정해진 양만 만들어주면 남은 식재료는 지연이 쓸 수 있게 해주어 식비 부담도 많이 덜 수 있었다. 덕분에 식사도 잘 차려 먹어 배 속 아기도 무럭무럭 자랐고, 이렇게 동네 감사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며 살아갈 수도 있다. 남편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슬프고 서러워 견디기 힘들 때가 많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동네 사람들은 지연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그 덕에 힘을 내어 잘 지내는 중이다. 그중 옆집 아기엄마, 아빠는 지연을 정말 동생처럼 아껴주고 챙겨주었다. 지연에겐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 강호는 어디 갔어요?”

늘 아기엄마가 포대기로 업고 있던 아기가 보이지 않아 물었다.

“응, 강호 아빠가 유모차에 태워서 한 바퀴 돌고 온다고 갔어. 평일 내내 일한다고 강호 얼굴 제대로 보지도 못하니까 이렇게 일요일이라도 단둘이 놀고 싶다면서 나만 빼고 갔잖아.”

지연은 싱긋 웃었다. 아들과 놀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아기 보느라 고생한 아내를 위해 휴식 시간을 줬다는 것쯤은 지연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강호 아빠는 진짜 자상하세요. 언니한테도 엄청 잘하시고, 아기한테도 좋은 아빠고.”

지연이 조금은 부러운 듯 말하자 아기엄마는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나 사실 재혼이거든.”

“네?”

갑자기 듣게 된 말에 지연이 깜짝 놀랐다. 아기를 낳은 후 옆집으로 이사를 왔기에 그전 사정은 모르기도 했고.

“나 차 한잔 줄래?”

“네, 앉으세요.”

지연은 얼른 물을 끓였다. 아기엄마와는 친하게 지냈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다. 컵을 두 개 꺼내 뜨거운 물에 둥굴레차 티백을 우리고는 조그마한 상에 내려놓으며 앉았다. 아기엄마가 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전남편이 좀, 아니, 많이 개차반이었어. 술에, 여자에, 때리기도 많이 때리고…….”

힘겨운 말들이 아기엄마 입에서 흘러나오자 듣는 지연의 가슴까지 너무나 아팠다. 결국 전남편은 본인이 휘두르던 칼에 스스로 찔려 죽고 말았고, 그제야 그녀는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많은 아픔을 겪은 후에 만나게 된 남자가 지금의 아기아빠였다.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줄까. 나한테 뭘 원하는 걸까. 날 어떻게 망가뜨리려고 그럴까.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밀어냈었어. 무섭더라고. 사람이.”

모처럼 자유시간을 얻어 여유로워진 아기엄마가 지난날을 찬찬히 털어놓았다.

“그런데 점점 알겠더라고. 그냥 좋아하는 마음뿐이라는걸.”

아픔을 어루만져 치유해준 건 역시 사랑이었다. 아기아빠가 끊임없이 전한 진심이 그녀에게 닿았고 마침내 두 사람은 마주 보게 되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눈이 쌓인 풀숲에도 꽃은 피어났다. 어렵게 만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더욱 애틋했다. 서로에 대한 마음도, 아기에 대한 사랑도, 참 아름다운 부부였다.

“힘들다가도 좋은 날이 오고, 어려운 일이 있는가 싶다가도 또 행복해지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래서 사나 봐.”

한때 목숨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든 날들을 겪었던 아기엄마가 덤덤히 전하는 말에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위로와 동정보다도 힘이 되는 말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마지막 날까지, 하루하루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거다. 죽도록 힘들어도 또 웃는 날이 올 테니까. 지연은 제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지금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온전한 제 식구가 생기는 일이니 한편으론 기대가 되었다. 아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다.

“그러니까 지연 씨도 아기만 생각하면서 잘 지내자. 어려운 일 생기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알았지?”

“네, 언니.”

열심히 살아야지. 웃으면서,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다 보면 우리 아기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뜨거워지는 가슴으로 다짐했다. 마주 앉아 비워가는 둥굴레차가 참 구수하고 달았다. 그날 밤. 지연은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았다. 속도 더부룩한 게 저녁에 너무 많이 먹은 탓인가 싶었다. 요즘 들어 종종 입맛이 당기곤 했다. 밥을 먹고도, 아기엄마가 아까 남편이 넉넉히 사 왔다며 안겨주고 간 군밤까지 잔뜩 먹고 말았다. 부쩍 추워진 가을밤. 지연은 두툼한 카디건을 걸쳐 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한 블록 떨어진 놀이터까지 돌고 오면 소화가 좀 될까 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슬슬 동네를 돌며 산책을 마친 지연이 막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부, 불……!”

검은색 연기가 반지하 집 창문 사이로 길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쪽은 환한 불빛이 번쩍이듯 일렁거렸다. 옆집이다.

“불이야! 불이야!”

사색이 된 지연이 있는 힘껏 소리 질렀고, 한밤중이라 깊이 잠들었던 동네 사람들이 그제야 창문을 열고 내다보거나 골목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웬 불!”

“어, 어떡해, 저기 아기 있는 집 아니야?”

지연이 119에 신고해달라 소리치자 건넛집에서 알았다며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아기랑 다 어떡하나. 왜 안 나오는 거야?”

자다가 뛰쳐나온 이들이 새어나온 연기만으로도 콜록거리며 저만치 멀어졌다. 소방차 기다리는 수밖에 더 있냐며 다들 어찌할 바 몰랐다. 불이 난 걸 알았다면 벌써 아기를 안고 뛰쳐나왔을 텐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다가 유독가스를 마신 것 같다. 그럼 위험한데. 혼비백산이 된 사람들 가운데서 지연은 눈물을 쏟아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제발. 제발 나오세요.  

“지연 씨도 아기만 생각하면서 잘 지내자. 어려운 일 생기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알았지?”

  아기엄마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제게 항상 웃어주던 모습. 뭐든 다 해주려 팔 걷어붙이고 나서던 모습. 동네에서 누군가 시비라도 걸려고 하면 대신 삿대질을 해가며 싸워주던 모습까지. 지연은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다. 전봇대 아래 놓인 벽돌을 발견했다. 달려간 지연이 이를 꽉 깨물며 그것을 손에 쥐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잠깐만요. 가스 더 마시면 안 된단 말이에요.”

“미쳤어! 어딜 들어가려고!”

다른 이가 붙들려 했지만 지연은 이를 뿌리치고 빌라로 들어가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서웠다. 막막하고 두렵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러나 그냥 서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지연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골목이 좁은 데다 빽빽이 서 있는 차들 때문에 소방차가 들어오기도 힘들었다. 아마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불에 타서 죽는 것보다 유독가스 때문에 먼저 죽는다고들 했다. 불길이 더 번지기 전에 사람부터 빼내야만 한다. 현관 문고리가 헐거워 거의 걸어만 두는 수준이라 했던 아기엄마의 말을 기억했다. 집주인에게 바꿔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기에 내일은 아기아빠한테 새로 사 오라고 해야겠다 했던 것도. 그러니 충분히 벽돌로 내리쳐 부술 수 있을 것이다. 지연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아가. 부디 지금 엄마가 하는 일을 후회하지 않게 해줘. 아가. 엄마가 용기를 낼게. 두 손으로 벽돌을 쥐고 눈을 똑바로 떠 문고리를 보면서 팍 내리쳤다. 힘을 준 것이 무색하게도 문고리가 가볍게 부서졌다. 현관문이 열리고, 지연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들어갔다. 눈이 따갑고 숨이 막혔다. 골목을 향해 난 창문 밑에서 불이 번지고 있었다. 지연은 카디건 소매를 길게 당겨서 싱크대의 물을 틀어 적시곤 입가를 막았다. 몸을 낮게 낮추어 열린 방문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이불을 펴고 누워 있는 두 남녀. 아기는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세요! 언니! 부, 불이에요! 나가야 해요!”

지연이 앉아서 아기엄마를 흔들어 잡아당기자 이불 속에서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툭 굴러 나왔다.

“헉.”

깜짝 놀란 지연이 이를 보는데, 아기엄마가 끊어질 듯 말 듯 희미한 소리로 말했다.

“아기 좀……, 우리 아기 먼저 제발…….”

지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제정신일 수 없었다. 아기엄마가 방금까지 품고 있던 아기만이 전부처럼 눈에 들어왔다.

“우, 우리 강호부터…….”

어미 닭처럼 아기를 품고 있던 엄마가 애타게 하는 말에 지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방 올게요!”

지연은 아기를 안고 뛰쳐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기엄마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인 듯했는데, 그 와중에도 아기를 끝까지 품고 있었다니. 기적과도 같은 모정이다. 게다가 옆에 누워 있던 아기아빠는 아예 미동도 하지 않았기에 지연은 걱정이 되었다. 기다려요. 부디…… 다시 올 때까지 꼭 기다려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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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아직 사람 있어요!”

지연은 밖으로 나오면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 제발 도와달라고. 그제야 그녀가 부순 문 안으로 몇몇 사람들이 들어가 난리통 속에서 아기엄마, 아빠를 업고 나왔다. 소방차와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에게 아기를 넘겨주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지연은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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