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강호를 구해준 분2021.05.18.
“백강호는?”
소란의 병실에 아침 일찍 나린이 찾아왔다.
“강호 씨는 사무실에 다녀온다고 새벽에 나갔어요. 오전 중에 돌아온다고요.”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올 요량으로 강호는 동도 트지 않은 새벽 일찌감치 나갔다. 내내 소란의 곁에 있기 위해서였다.
“모레까진 회사에 못 나온다더니 일 정리해두러 갔나 보네.”
나린은 쯧쯧, 혀를 찼다.
“사랑에 미치면 눈에 뵈는 게 없다고. 마누라 위해 아주 지극정성이셔.”
백강호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다.
“언니는 출근하는 길이시죠? 아침에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와주시고 감사해요.”
“고마울 건 없고, 시간이 남아서 들른 거야.”
나린은 대충 대답하면서 손목시계를 보고 다시 문 쪽을 보았다.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시계를 보다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제 병실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간 나린이 문을 열어주었다.
“계나린 씨 퀵 왔습니다.”
“네, 이쪽으로.”
소란은 영문을 몰라 바라볼 뿐이다. 배송 기사가 커다란 과일 꾸러미, 디저트 가게 로고가 찍힌 상자들, 책 묶음과 퍼즐 상자 등등을 카트에서 끊임없이 내려놓았다. 나린에게 배송 확인을 받고서 기사가 돌아가자 소란이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뭐야. 보는 그대로지.”
나린은 과일과 디저트들을 가리켰다.
“이건 너 먹고.”
그리고 소설, 인문, 잡지, 만화책 고루고루 쌓아둔 묶음을 가리키면서.
“이건 너 보라고.”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듯 말할 뿐이다. 소란이 감동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언니가 직접 준비해주신 거예요?”
“그래, 설마 내가 직접 준비한 거 맞아. 그게 왜?”
“저 입원했다고 이렇게까지……. 이 정도면 거의 고백 아닌가요? 언니 저 좋아하셨구나.”
“원래 인간은 자기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거야. 너도 네 맘대로 생각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나린의 대답이 왜 ‘맞다’라고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언니, 진짜 감사해요. 잘 먹고, 잘 볼게요.”
병원에 있는 동안 다 먹지도, 다 보지도 못할 양이다.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언니였다. 소란은 그런 나린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네가 하도 뭘 많이 줘서 그냥 나도 보답 차원에서. 별거 아니야.”
“에이, 보답이라뇨. 그럴 만한 일도 별로 없었는데요.”
소란은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나린에겐 하나하나 고마운 일들이었다. 낮은 신발을 선물해준 것부터 음식을 싸다 준 것, 늘 마음으로 걱정해준 것 전부.
“그렇다고 내가 우소란 씨한테 일부러 잘 보이려고 애쓴다든가 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네? 언니가 저한테 왜 잘 보여요?”
괜히 덧붙였나 싶어 나린은 말을 돌렸다.
“난 이제 회사 가봐야겠다. 푹 쉬고 얼른 나아.”
“아, 네, 감사해요! 조심히 가세요!”
서둘러 병실에서 나온 나린이 복도를 지나가려 할 때였다. 무언가에 놀란 그녀는 가던 걸음 그대로 휙 돌려 옆에 있는 코너 벽 뒤로 붙어 섰다. 강호의 결혼식 때도 이런 적이 있었지. 그때도 성준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멀리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성준이 소란의 병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불편한 걸음이 나린의 눈에 아픈 가시처럼 박혔다.
‘아, 여기 언제든지 올 수 있는 사람이었지.’
그가 소란의 오빠라는 걸 잊지 않았는데, 또 가끔 이렇게 잊어버린 듯 새삼스러운 순간이 찾아왔다. 소란이 입원한 병실이니 성준이 오는 건 당연한데, 내가 겁도 없이 여길 왔다니. 나린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하마터면 마주칠 뻔했다. 숨지 마. 백강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살면서 가장 계나린답지 않은 날들이 바로 요즘이다. 숨기는커녕 앞장서서 뭐든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자신이 어째서 성준의 일이라면 꿩처럼 머리 박고 숨기부터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번엔 열무가 나린을 그냥 두지 않았다.
“우웁…….”
울렁거리며 치받치는 느낌에 나린은 두리번두리번 화장실을 찾았다. 아침에 가볍게 뭐라도 좀 먹고 나왔어야 했는데, 속이 비면 입덧이 더 심해졌다. 서둘러 화장실에 들어가 빈속을 괴롭게 게워내고 나자 아침부터 어질어질했다. 세면대로 나와서 입가를 정돈하며 거울을 보는데 설움이 밀려왔다.
“아니야.”
나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 강하게 먹기로 했잖아. 입덧이 힘들긴 해도, 아기가 잘 있다는 신호라고 했으니까. 나 여기 있어요. 열무가 그렇게 외치고 있는 거니까. 괜찮아. ……괜찮아, 정말. 나린은 살며시 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직 배가 나오지 않아 안에 아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다. 점점 배가 나오고, 몸이 달라지고, 입덧은 사라져도 또 다른 힘든 부분이 생기겠지.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괜찮아.”
나린은 다시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얼굴은 봤다.”
스치듯 멀어진 성준을 본 것만으로도 먹먹한 가슴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그게 어디야. 애틋한 욕심이 아주 조금 채워졌다. 그래, 이 정도도 충분해. 내가 더 가까이 가면 그 사람은, ……결국 다칠 거야. 휴, 한숨으로 마음 정리를 끝낸 나린이 천천히 화장실에서 나왔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고 고개를 들며 나오던 나린의 걸음이 딱 멎었다. 심장도 멈춘 것만 같다. 아니,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정지된 것만 같은 순간. 눈앞엔 그가 서 있었다.
“이번엔 진짜네.”
너무나 맑은 눈빛. 동화 속 왕자님처럼 희고 고운 피부. 커다란 키에 벌어진 어깨, 입가에 스민 희미한 미소. 가까이에서 보니 그사이 더욱 멋있어진 모습. 성준이었다.
“……잘 지냈어요?”
기절할 뻔했다. 이렇게 맞닥뜨리게 될 줄 몰랐는데. 다정하게 건네는 물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이 병원에 있어서 잠깐 들른 거예요. 출근해야 해서 전 이만.”
나린은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겨우 대꾸했다. 그게 잘 지냈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아니요. 나는 잘, 못 지냈어요. 대답은 차마 하지 못했다. ◇ ◆ ◇ 성준은 잘못 본 줄 알았다. 매번 그랬듯 또 그녀의 헛것을 봤다고만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소란의 병실을 찾아온 지금 난데없이 나린의 뒷모습이 보일 리 없을 테니까. 저만치 떨어진 여자 화장실로 쏙 들어가는 사람이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성준은 발길을 돌려 그쪽으로 향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복도에 서 있는 자신이 점점 어이없게 느껴졌다. 겨우 떠나보낸 그녀를 잊지 못해서 수없이 환영을 보고, 그러다 못해 여기에 서 있는 모습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다 끝났잖아. 시작도 못 해보고 보냈잖아. 그게 아니라며 잡을 용기도 없었잖아. 이제 와 상사병처럼 앓고 있는 자신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우습게 생각할까. 그때 한 여자가 화장실에서 천천히 나왔다. 고개를 든 그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번엔 진짜네.”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정말 나린이다.
“……잘 지냈어요?”
겨우 꺼낸 말이었다. 나는 잘, 못 지냈어요. 그리 덧붙이고도 싶었다. 그사이 나린은 전보다 더 말랐다. 눈매는 조금 둥글어졌나 싶지만 어쩐지 날카로운 느낌도 남아 있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밥은 잘 먹는지, 일하느라 지금도 밤을 자주 새우는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모든 관심을 차단하듯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 병원에 있어서 잠깐 들른 거예요. 출근해야 해서 전 이만.”
우리가 안부를 나눌 사이는 아니라는 듯이. 나린은 이내 자신을 지나쳐 휙 가버렸다. 그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성준 씨는 어떤 여자를 좋아해요?”
“따뜻한 사람.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요.”
“본인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그런가……?”
“일단 나는 아니겠네.”
분명히 그랬다. 성준은 늘 다감한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랐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린의 차갑고 날카로운 가시가 제 심장을 깊이 찔렀다. 날 보라고. 나 때문에 아파하라고. 나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도 사랑임을 깨달으라고.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가시였다. 차마 뽑아낼 수 없이 깊이 박힌. 그녀를 품은 채 성준은 여전히 아파하는 중이다.
“엄마 아빠 엿 먹이고 기껏 한다는 짓이 이런 거니?”
“여기까지 쫓아와서 뭐 하시는 거예요? 그냥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관심 끄고 살면 서로 편하잖아!”
“선보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고작 결혼 하나 우리 뜻대로 못 해주니? 어렵게 만든 자리엔 나타나지도 않더니 룸에 남자를 끌어들여? 그래, 네가 부른 남자는 얼마나 대단한지 얼굴 좀 보자. 어디 있니. 침실 안에 있어?”
“안으로 한 발짝만 더 들어가 봐. 나 여기서 뛰어내려요!”
그날 밤 호텔에서 듣게 된 그녀의 처절한 절규.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며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은 나린의 엄마였다. 나린이 하고 다니는 차림만으로도 배경이 대단한 사람이겠거니 생각은 했었지만 예상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성준은 소란의 결혼식에서도 하필 왜 이 호텔일까 생각했다. 소란이 식을 올린 H호텔은 그가 나린과 함께 있었던 곳이었기에. 그녀의 부모가 대표로 있는 호텔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운명의 장난이 가혹하게도 느껴졌다. 세상 모든 건 그녀를 잊지 못하게끔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감히 품을 수도 없어 놓아버렸던 나린은 아직도 성준의 심장에 깊이 박혀 있다. ◇ ◆ ◇ 사고를 당했다는 소란이 걱정되어, 성준은 백 회장과 오기로 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 그 덕에 나린을 만나게 되긴 했지만.
“괜찮다니까. 진짜 별거 아니야. 금방 낫는대.”
성준은 병실에 들어와 환자복을 입은 소란을 보니 다시 걱정이 피어올랐다. 금쪽같이 귀한 동생이 다친 게 안쓰러워 성준은 어쩔 줄 몰랐다.
“별거 아닌 게 어딨어. 엄청 아플 텐데.”
성준은 한참이나 소란의 물건이나 자리 등을 세심하게 챙겼다. 따뜻한 물을 텀블러에 채워 소란에게 주고는 과일을 살폈다.
“누가 이렇게 좋은 과일을 가져왔어? 엄청 비싼 것만 있네. 매제가 가져온 거야?”
“있어. 예쁘고 돈 많은 언니.”
“아, 그래.”
“엄청 귀여워. 맞다, 이 언니한테 저번에 오빠 반찬 싸다 준 거야. 지금 임신 중이라서.”
“되게 친한 모양이네. 더 필요하면 얘기하고.”
“응응.”
소란은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강호가 들어왔다. 번개처럼 일을 보고 부랴부랴 돌아온 참이다.
“형님 오셨어요.”
“어, 사무실 다녀오는 길이라고?”
“네. 소란이 옆에 있으려고 일 정리하고 왔습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소란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무척 사랑받는 기분이라 마음이 충만했다. 그런데 강호 앞에 다가서는 성준의 온도가 평소보다 더 높은 듯했다. 따스한 정도를 넘어서서 뭔가 뜨겁고 애틋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강호야.”
“혀, 형님, 왜…….”
성준이 다가서자 강호는 흠칫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성준은 흔들리지 않고 조금 더 다가서서 팔을 벌렸다.
“……한 번만 안아보자.”
“네?”
“결국 만날 사람들이 만난 거야. 이렇게.”
인연은 참으로 신기하지.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강력한 힘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는지도 몰라.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가듯 우리는 그렇게 만났을 뿐. 성준이 강호를 큰 품으로 안고 등을 툭 툭 두드렸다. 영문도 모르는 채 성준에게 안긴 강호는, 역시나 침대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앉아 있는 소란과 눈이 마주쳤다. 뭐지? 글쎄요. 그렇게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데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백 회장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들어섰다.
“아가!”
대뜸 감정이 북받치는 얼굴로 절 부르자 소란은 긴장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소란이, 우리 아가.”
“하, 할아버님. 오셨어요.”
“내가 어제부터 달려오고 싶어 얼마나 혼났는지 아니. 어쩌다 사고가 나서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는 게야. 이 할애비 마음 찢어지게.”
분명히 전에도 충분히 예뻐해주셨는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귀애가 느껴졌다. 애정이 폭발하여 주체하지 못하는 느낌. 그때 백 회장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하, 할아버지.”
소란이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백 회장 앞에 섰다. 성준도 강호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백 회장과 성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뭘까.
“왜, 왜 우세요…….”
할아버지의 눈물에 당황한 소란이 손을 뻗어 맞잡았다. 백 회장이 그 손 위에 또 손을 겹치며 그래, 그래, 하며 감격스러운 얼굴로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추스른 백 회장이 드디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엄마가…….”
목이 메는 듯 힘겹게 꺼낸 말.
“소란이 네 엄마가, ……강호를 구해준 분이셨다.”
자신이 무슨 소릴 들은 건지 금세 파악이 안 되었다. 소란은 눈을 깜빡거리며 강호를 바라보았다. 강호가 놀란 얼굴로 백 회장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갑자기 이게 어디서 튀어나온 얘기인가. 백 회장은 울음을 삼키며 팔을 벌려 소란을 품에 안았다. 소란은 생각지 못하게 나온 ‘엄마’ 이야기에 그만 코끝이 찡해졌다.
“엄마가요……?”
“그래.”
“강호 씨를요……?”
“그래, 맞아.”
엄마가 강호를 구했다니. 화재가 있었던 반지하 집에서 10개월 아기였던 강호를 안고 나왔다던 임신부가, 우리 엄마였다고? 백 회장이 자신을 꼭 안은 채 흐느끼자 소란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수면 아래 가라앉은 진실 몇 가지 중 하나가 이제 겨우 물 밖으로 떠올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