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네가 더 달아2021.05.15.
“보호자는, 나야.”
필요에 의한 결혼이고 계약으로 맺은 관계. 하지만 태석의 눈에 읽힌 감정은 그게 아니다. 어쩌면 강호 쪽은 진심일지 모른다. 전쟁터에 선 듯 날카로운 긴장감이 스쳤다. 강호는 지금 자신을 수컷으로 보고 경계한다. 그 말은, 소란에게 몰래 품은 제 감정마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태석의 가슴이 따끔 쑤셨다.
“……하하. 이게 뭐라고, 1인실까지. 전 진짜 괜찮은데, 퇴원도 금방 할 거고요.”
소란이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밝게 얘기했다. 그녀의 노력을 눈치챈 태석은 할 줄 아는 게 웃는 것뿐인 사람처럼 환히 웃었다.
“아니야. 며칠이라고 해도 편하게 지내면서 치료받아야지. 늑골 골절이 최소 4주는 간다는데.”
지금 그에게 복잡한 마음을 감추는 건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내 차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난 거니까 좀 더 신경 써주고 싶었을 뿐이야. 이후에라도 내가 해야 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태석은 유연하게 반응하며 강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리곤 소란을 향해 제 잘못도 아닌 일에 사과했다.
“우 변. 정말 미안해. 업무 걱정은 하지 말고 치료 충분히 받고 천천히 출근해. 내가 그 팀 업무 더 살필 테니까.”
“선배님이 미안해하실 필요 전혀 없어요. 그 운전자 때문인데요.”
태석은 그래도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사고가 났던 순간. 그가 전에 없이 분노에 휩싸였던 건 순전히 소란이 다쳤단 사실 때문이었다.
“뭐야. 괜찮아?”
“괘, 괜찮아요. 으.”
제 옆에 있던 소란이 아파하는 걸 보자마자 태석은 머리가 홱 도는 것만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났던 적이 있었나 싶다. 심지어 술까지 마시고 돌진한 차량이라니. 저런 미친놈 때문에 소란이 다쳤다니. 그 운전자는 진짜 가만히 두지 않을 예정이다. 사고 처리와 처벌이야 보험회사와 경찰에 맡기면 될 일이지만 태석은 그걸로 끝낼 생각이 없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털어줄 터다. 세상 편하게 사는 듯 보이는 태석이지만 실상이 그럴 리는 없다. 마음먹은 건 끝까지 해내는 오기와 집요함이 있었기에 그래도 이만큼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것이다. 태석도 차에 함께 타고 있던 사람이 소란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텐데. 결국 그녀를 좋아하는 제 마음만 한 번 더 확인하게 된 꼴이다.
“그만 가.”
강호의 목소리는 내내 서늘했다.
“너는 집으로 안 가고?”
“난 여기 있어야지.”
당연한 소릴 한다는 듯 강호가 대꾸했다. 보호자는, 나야. 그 한마디로 모든 관계와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정작 태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계약이든 뭐든, 이들이 그 관계를 유지하는 한은.
“나 가는데 배웅은 해야지. 엘리베이터까진 데려다줘라.”
“형이 애야?”
“응, 애야. 나 애 맞아.”
태석은 싱글싱글 웃으며 강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듯 강호가 가볍게 밀치며 먼저 문 쪽으로 향했다.
“빨리 나와.”
“우 변, 푹 쉬고 치료 잘 받고 있어.”
“네, 조심해서 가시고 선배님도 치료 잘 받으세요.”
“그래, 그래. 또 들를게!”
태석은 소란을 향해 밝게 인사하고는 강호와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갔다.
◇ ◆ ◇ 태석은 언제나 여유로워 보였고, 고민이라곤 하나 없는 듯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때때로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보일 때가 있었다. 강호의 신경을 자극할 정도로. 모두 소란 때문이란 걸 강호도 알고 있다. 태석의 한숨, 그녀에게 가닿는 시선, 시시각각 변화하는 표정, 애써 되찾는 여유, 전부 사랑에 흔들리는 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연적이라 할 수도 없다. 이미 끝난 게임이란 걸 누구보다 태석이 더 잘 알 테니까. 뒤늦게 깨달은 감정이라면 아마 정리에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건 태석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강호 자신이 강요할 순 없는 일이다. 더욱이 태석과 이런 껄끄러운 감정으로 계속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차는?”
“대차 서비스받기로 한 건 내일부터. 오늘은 택시로 가야지.”
강호의 간결한 물음에 태석은 편안하게 대답했다.
“같이 내려가자. 바람 좀 쐬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강호가 먼저 탔고 태석이 따라 탔다. 1층으로 내려와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택시 승하차장이 보이는 벤치에 강호가 먼저 앉았다. 대화 좀 하자는 얘기였다. 태석은 주머니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강호에게 내밀었다.
“이거 기억나냐? 나 담배 끊는다고 할 때 네가 먹어보라고 줬던 거.”
강호가 머리 아프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요즘도 자주 먹곤 하는 사탕이다. 찬규 때문에 먹게 된 후로, 금연에 도전하는 태석에게도 권유한 적이 있다.
“담배는 끊었는데 이제 이걸 못 끊고 있네.”
싱긋 웃으며 사탕을 입에 쏙 넣는 태석을 보며, 강호는 막대 사탕 껍질을 천천히 깠다. 태석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많이 좋아하나 봐.”
강호는 사탕을 입에 넣어 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달달한 딸기 맛 사탕이 쓰게 느껴진다. 주어를 생략한 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알 것 같아서. 강호는 암흑가 보스처럼 살벌한 얼굴로 입속에서 막대 사탕을 굴려 물었다.
“내가 먼저.”
“…….”
“그리고 내가 더 많이.”
싸늘하게 올라간 눈매가 태석의 부드러운 침범을 칼같이 차단했다. 주어는 이쪽도 생략하기로 한다. 태석 역시 알아들을 테니까.
“좋아하고 있었어.”
애초에 이 선을 넘어올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말라는 듯 강호는 싸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해.”
강호는 막대사탕을 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누구랑 뭘 나누는 취미 같은 건 없으니까.”
사탕도, 사람도. 그리고 사랑도.
“그럼 형, 조심해서 가.”
태석에게 인사를 건넨 강호는 사탕을 입에 문 채 병원 건물로 향했다. 그가 들어간 후로도 태석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시린 밤공기에 낮은 한숨이 섞이고, 달빛은 힘없이 내려앉았다. 닿지 못한 사랑이 아프게 흩어져도 담아낼 길이 없다. 한편. 강호는 병실로 올라가기 위해 로비를 가로지르던 길이다. 진동음이 울려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발신인은 할아버지였다. 다 늦은 밤에 어쩐 일이시지.
“네, 저예요.”
- 내일 좀 보자.
갑작스러운 호출이다.
- 바쁘단 소리는 하지 말고 어떻게든 시간 내. 소란이도 같이.
“소란이는 왜요. 그냥 저한테 말씀하시죠.”
지금 병원에 있다는 건 모르실 터였다.
- 아니. 꼭 둘 다 있어야 한다. 저녁 몇 시쯤 집에 들어오냐. 내가 가마.
“음. 그럼 소란이와 상의하고…….”
- 지금 가랴?
뭔가 평소와는 달랐다.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오신 적은 없었는데.
“할아버지. 무슨 일 있으세요?”
-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런단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는지.
아무래도 강호가 궁금해하도록 스포일러 뿌리기로 방향을 트신 듯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이냐구요.”
- 가서 얘기해준다니까. 아주 깜짝 놀라서 내가 여태 마음을 진정하느라 혼났지 무어냐. 참 신기하기도 하지. 인연이 어떻게…….
“여기 병원입니다. 소란이 입원해 있어요.”
결국 강호는 실토했다.
- 뭐어?
“저희가 당장 나가서 뵙기는 어려우니 내일 병원으로 와주시면…….”
- 어디가 아픈 게야!
소란이 병원에 있다는 말에 백 회장은 역정을 내듯 소리를 높였다.
“아픈 건 아니고 교통사고가…….”
- 아니, 어쩌다가 사고가 났어! 어떤 잡놈이 우리 귀한 새아기 몸을 상하게 한 게냐. 내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 당장!
“할아버지, 고정하세요.”
쉽게 흥분하는 분 아니셨는데 언제 이렇게 다혈질이 되셨지. 금방이라도 전화기를 뚫고 나오실 것만 같아 강호는 진땀을 흘리며 백 회장을 진정시켰다.
“중상은 아니고 며칠 있으면 퇴원도 할 거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 일단 알았다. 내일 오전 중으로 사돈총각이랑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네, 내일 뵐게요.”
뚝, 전화가 끊겼다. 끊고 나서 생각하니 이상했다. 사돈총각이랑? 형님과 함께 오시겠다는 건가? 왜? 할아버지가 형님과 어떻게? 그러고 보니 소란의 사고 소식을 성준에게도 전해야 했다. 강호는 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왜? 어쩌다가! 아니, 소란이는 괜찮고? 지금 상태는 어떤데? 병원은 어디야? 내가 바로 갈게!
소식을 전하자 성준 역시 평소답지 않게 무척 흥분했다. 성준까지 겨우 진정시키며 내일을 기약한 후에야 강호는 다시 병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형님 두 분 다 하도 흥분하는 바람에, 내일 왜 같이 오겠다는 건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내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 강호는 병실 문을 슥 밀고 들어섰다. 아직 불이 환히 켜진 병실 안.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던 탓일까. 소란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 있다. 약이 꽤 독하다더니 그 탓으로 제법 깊이 잠이 든 모양이다. 강호는 메인 조명을 끄고 조도가 낮은 포인트 조명만을 남겼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 기다렸을까.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을까.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데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그녀의 존재가 여전히 제 심장을 쥐고 흔드는 것만은 분명했다.
“예쁘네.”
강호는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주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찹쌀떡 표면처럼 매끄럽고 탱글탱글했다. 소란의 볼을 쓸어보다가 입술을 바라보던 강호는 천천히 다가갔다. 붉은 입술이 자석처럼 절 끌어당겼다. 몇 번쯤 진한 키스도 했었지만 마치 처음인 것처럼 떨렸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끌림에 마침내 입술이 닿았다.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깊게, 조금 더 깊게. 맞닿은 입술이 건네는 아찔한 유혹에 정신이 흐릿해지려는 때였다.
“……!”
그녀의 입술 틈이 벌어지더니 보드랍고 말캉한 것이 나와 단번에 강호의 입술을 훑었다. 기습에 놀란 강호가 몸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소란이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안았다. 동시에 강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어 빨아당겼다. 맛을 보듯 천천히 핥으면서.
“흐음……, 맛있어.”
잠에 취한 듯, 약에 취한 듯, 몽롱하게 흐트러진 음색이다. 입술을 탐하면서 스치듯 속삭이는 말에 강호의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너무 달다.”
달콤한 사탕 맛이 아직 강호의 입술에 남아 있던 모양이다. 소란은 눈을 감은 채 맛있는 사탕을 빨아 먹듯 강호의 입술을 맛보았다. 허리를 굽히고 그녀에게 붙들려 인간 사탕이 되어준 강호는 더 참기 힘들었다. 소란의 정신이 반만 남아 있든, 아니면 전부 다 나가 있든 상관없다. 그를 끌어당긴 건 소란이고 이건 강호가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이니까. 소란은 여전히 꿈속을 노니는 듯 행복한 얼굴로 그를 붙들었다. 강호는 그대로 침대 위로 올랐다. 그녀를 두 팔 안에 가두고 입술을 열어 겹쳤다. 그간 참았던 키스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예민한 감각이 하나로 얽히고 짙은 욕망이 온몸을 샅샅이 훑었다.
짜릿하게 퍼지는 전율에 소란이 눈을 떴다. 잠이 확 깨버렸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펼쳐지는 키스는 진행 중이다. 정성껏 음미하는 듯하다가도 거친 해일처럼 몰아닥치는 키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혼미해지는 순간이 반복됐다. 소란은 사람 미치게 하는 스킬에 꼼짝없이 풀어지고 말았다. 그가 이끄는 대로. 그가 원하는 대로.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처럼 열정적인 키스에 온몸을 내맡겼다.
“네가 더 달아.”
들릴 듯 말 듯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이 지독하게 색정적이다. 그의 말에 제 몸이 온통 꿀통에 빠진 기분이었다. 아까 그녀는 태석과 함께 나간 강호가 곧 돌아오겠거니 하고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주사와 약이 독할 수 있다곤 했다. 약을 먹은 후엔 잠도 많이 올 거라 했고. 그러니 저도 모르게 잠이 든 것까진 알겠는데, 그의 키스 때문에 깨어나게 될지 상상도 못 했다. 이곳이 병원 맞나 싶을 정도로 야하고 깊은 키스였다.
‘미치겠네. ……너무 좋아.’
소란은 이러다 심장이 터져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사람이, 키스까지 완벽해. 끝까지 좋을지 아닐지는 키스만 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게임 끝이다. 무조건 이 남자는 자신과 한 치의 틈도 없이 꼭 맞는 사람이 분명하다. 이어지는 키스에 욕망의 선을 살짝 넘은 걸까. 환자복 자락을 헤치며 들어온 손끝이 맨살에 닿는 게 느껴졌다. 움찔 떨리는 몸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입술은 여전히 노련하게 움직였다.
“흐읏!”
마침내 그의 손이 환자복 안의 가슴 보호대 끄트머리에 닿았을 때, 소란은 흠칫 놀라 숨을 들이 삼켰다. 격한 호흡 끝에 따라붙은 건 늑골 통증이다.
“어억.”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비명이 낮게 튀어나왔다. 그 결과 강호가 재빨리 손을 떼며 소란을 살폈다.
“괜찮아? 아파?”
“아, 조, 조금.”
이 남자. 심장에도 해롭지만, 갈비뼈엔 더더욱 해롭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공간에 밤이란 특별한 시간까지 더해지니 신혼부부의 키스는 평소보다 짙고 과감했다. 다친 늑골을 감싼 보호대가 아니었으면, 그의 못된 손은 아마도 허리를 지나 위로 또 위로…… 상체의 중요 부위까지 무리 없이 도달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소란의 귀가 새빨개졌다. 최소한의 조명만 켜두어 어둑어둑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달아오른 뺨까지 다 드러났을 터다.
“안고 자야겠다.”
그녀의 통증 섞인 비명으로 강호는 정신을 차린 듯했다. 소란의 옆에 누워 팔 벌려 가볍게 안고는 더 이상 스킨십을 시도하진 않았다. 후우우. 소란은 조그맣게 한숨을 흘리며 그의 팔에 머리를 대고 안겼다. 단단한 가슴이 바로 앞에 있다. 쿵쿵, 쿵쿵. 설마 강호의 심장 소리인가.
“잘 자.”
낮은 음성으로 건네오는 밤 인사.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인가. 소란이 잠든 줄 알았는지, 강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병원이니까 이 정도로 참은 거야.”
병원 침대 위라서 자제한 게 이 정도라면, 대체 신혼집 침대에선 어쩌려고 이러나. 나…… 퇴원해도 무사할까. 소란은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또랑또랑 뜨고는 숨만 겨우 삼켰다. 백강호로 인한 각성상태가 독한 약 기운을 이겼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잠이 쉽게 오진 않을 것 같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 계속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