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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보호자는 나야 (55/112)

#55화. 보호자는 나야2021.05.11.

“오늘부터 같이 자자며.”

“제가 언제 같이 자자고 했어요?”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침실을 같이 쓰자고 했죠.”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대놓고 뜻을 곡해하는 강호에 소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엄연히 달라요.”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랍니다. 기대하긴 했다. 오늘부터 같은 침실을 쓰기로 했다. 연애를 오래 하다가 결혼해도, 막상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함께 잠을 자면 묘하다고들 하는데. 하물며 아직 긴장 넘치는 우리 사이에 한 침실에서 밤을 보내면 어떨지 상상이 잘 안 되었다. 벌써 발가락이 곱아드는 것만 같다. 자다가 코 골면 어떡하지. 나도 모르게 방귀가 나오면? 아, 끔찍해. 자신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어지는 건 아닐까. 사랑이 깊어지기도 전에 저 멀리 물러가버리는 건 아닐까. 막 연애를 시작한 새신부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했고, 침실을 합치는 문제는 당분간 유보되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같이 자겠다고? 백강호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제 곁을 지키겠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내가 결혼을 하긴 했구나. 그 사실만큼은 새삼스럽게도 참, 좋았다. ◇ ◆ ◇ 강호는 잠시 병실에서 나갔다가 돌아왔다.

“식사 끝나면 병실 옮기자.”

강호의 말에 의아해 물었다.

“다 저녁때 병실을 옮겨줘요?”

“절차는 다 밟아놨어. 이따 이동하면 돼.”

“여기도 편한데.”

“내가 불편해.”

1인실로 옮기자는 말에 소란은 괜찮다며 만류했지만, 강호는 뜻대로 실행했다. 물 흐르듯 편안하게 결정된 일에 소란은 잠시 아빠를 떠올렸다. 병실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옮기길 요청했을 때 바로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 만실이라서, 규정에 어긋나서, 투약 사고가 우려되어서 등등의 현실적인 문제와 어려움에 가로막히곤 했다. 그런데 비교도 안 될 만큼 값비싼 상급 병실로의 이동은 신속하게 처리되는구나. 이래서 빨리 성공하고 싶었는데. 아빠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씁쓸하고 슬픈 현실이다. 안내를 받아 병실을 옮기는 동안 강호는 내내 소란과 함께 있었다. 옮긴 병실은 깔끔하고 깨끗했다. 환자 침대 외에 보호자가 자거나 쉴 수 있는 소파베드도 놓여 있었다. 단독으로 쓸 수 있는 화장실과 샤워실은 물론, 탁 트인 전망에 반짝거리는 야경까지. 지금 들어온 방이 병실인지 시내 어느 호텔방인지 모를 정도였다.

“보험회사에서 이런 병실은 처리 안 해주지 않아요?”

“내 돈 내면 되는데 왜.”

아, 그렇지. 소란은 그가 저와는 사고체계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강호 덕에 초호화 병원 생활도 다 해보게 생겼다. 아픈 것만 아니면 어디 조용히 쉬러 온 느낌이다.

“집에서 가져와야 할 것 적어. 좀 이따 다녀올 테니까.”

이 병실엔 보호자 이불에 슬리퍼, 가습기, 청정기, 수건 등 없는 게 없어 따로 필요한 것은 많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도 물병이랑 컵이랑 충전기랑 화장품이랑 카디건이랑 속옷이랑……, 응, 속옷? 목록을 써내려가던 소란이 멈칫했다. 하. 그래, 속옷도 필요한데……. 차마 강호에게 제 속옷 서랍을 열고 챙겨 와달라고 할 수가 없다. 못 해, 아니, 안 해. 아직 그건 무리야.

“같이 가요. 저 잠깐 다녀오는 건 괜찮지 않아요?”

위중한 환자도 아니고 외출이 어려운 정도도 아니다.

“입원 첫날부터 외출하고 그러면 나이롱 환자로 오해받아.”

받을 땐 받더라도 내 속옷은 내 손으로 챙겨야겠습니다요. 당장 오늘 밤부터 필요한데.

“그래도 같이 가고 싶어요.”

“굳이?”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서요.”

급기야 둘러대버린 말에 강호가 소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빛. 심장 안쪽까지 파헤치는 듯 예리하고 집요한 시선.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종종 기가 빨린다. 무슨 꿍꿍이길래 수작질이냐고 추궁당할 것만 같다. 오해하지 마세요. 개수작은 아니고 저는 그저 속옷을…….

“나도 그래.”

“네?”

“나도 떨어져 있기 싫어. 한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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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토록 팽팽한 눈빛으로 쏘아보다 하는 말이, 너무도 달콤했다. 얼음인 줄 알고 물었는데 입속에서 사르르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아. 쏘아본 게 아니었구나. 그냥 쳐다본 거였구나. 그것도 아주 사랑스럽게 바라본 건데 오해는 내가 했구나. 소란의 입술에 간질간질한 미소가 스쳤다. 저 살벌한 사랑꾼을 어쩌면 좋아. 무서운데 귀엽고, 두려운데 하찮아.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가 극명하게 다른, 연희 남편 찬규 오빠와도 절친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강호가 잊을 만하면 보여주는 반전의 반전 매력이 자꾸만 소란의 가슴을 콩콩 뛰게 했다. 그는 참 특별한 사람이다.

“네, 꼭 붙어서 같이 가요, 우리.”

“그래.”

강호가 옅게 웃었다. ◇ ◆ ◇ 소란은 외출증을 받아 강호와 함께 집에 들렀다.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좀 있긴 했지만 무조건 누워 있기보다 조금씩 움직여주는 편이 좋다고 하였으니 이 정도는 무리가 아니다. 도착 후 강호에게 주방에서 물병과 컵을 챙겨달라고 부탁하고 소란은 침실로 들어갔다. 문제의 속옷을 챙기기 위해 안쪽 드레스룸으로 가려다가 문득 뭔가 달라진 느낌에 침대를 돌아보았다.

“시트가 바뀌었네?”

색과 재질은 같지만 이건 새로 갈아둔 게 분명해 보였다. 호텔에서 턴다운 서비스를 해주고 간 것처럼 팽팽히 당겨 정돈된 이불이 아침과 달랐다.

“오늘 가사 팀 다녀가는 날이었나?”

드레스룸에 들어오자 화장대 위도 눈에 들어왔다. 형식적으로 올려두었던 남성용 화장품 종류가 바뀌어 있다. 못 보던 소품과 정장, 셔츠 몇 벌까지도 아침 풍경과는 다르다. 강호의 것들이다.

“아, 벌써 짐을 옮겨놨구나.”

강호는 일이 없어서 바로 퇴근한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침실을 정리하고 있었나 보다. 다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진짜 부부의 공간이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그녀의 가슴을 간질였다. 이제 여기서 밤이면 함께 자고, 아침에 함께 일어나고. 같은 욕실을 사용하고, 같은 드레스룸을 사용하며 생활한다는 거지. 한집에 들어와 주방을 쓰며 같이 식사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설렘이다. 아. 병원 가기 싫다……. 그냥 오늘부터 여기서 같이 자고 싶다……. 그러다 소란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치료가 중요하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호는 공간을 다 세팅해놓고도 병원에서 제 곁에 있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후유증이 남지 않게 치료와 회복에 전념해야 했다. 둘만의 신혼 침실은 잠시 참는다고 해서 어디 도망가는 거 아니니까. 소란은 서둘러 속옷을 보관해둔 서랍을 열었다. 빨리 집어 가야지. 그런데 몇 개 챙기다 보니, 지금까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눈에 보였다.

“나도 참 나다.”

어쩌면 속옷이 이렇게 하나같이 재미없고 칙칙할까. 현재 가슴속에 빵빵 차오른 흑심은 예전엔 전혀 없던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위아래 속옷들 모두 그 흔한 레이스 하나 없이 단정하기만 했다.

“주니어 속옷도 이거보단 예쁘고 화려하겠다.”

디자인을 보고 속옷을 산 적은 없다. 백화점이나 속옷 전문 매장을 이용한 적도 없다. 그저 필요할 때마다 마트에서 면으로 된 속옷을 사서 깨끗하게 갈아입는 데에만 신경 썼을 뿐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도 이대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강호와 한 침실을 쓰게 되면 언제 어떤 순간이 어떻게 닥칠지 모르니까. 남들은 어떤 속옷을 입는지 이제 검색도 좀 해보고 쇼핑도 해봐야겠…….

“아, 이연희.”

연희가 준 결혼 선물이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야.”

  연희가 싱긋 웃으며 은밀하게 건네준 상자를 열어보았다가 식겁했다. 서둘러 상자에 넣어선 누가 볼까 두려워 서랍 안쪽에 깊이 박아두었다. 엄청 야했는데. 그런데 새삼스러운 발견은 제 단정한 속옷에서부터 연희가 전파해준 야한 속옷에까지 뻗어갔기에 소란은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열어보았다. 어떻게 생겼더라.

“흐으…….”

역시 야하다. 미쳤어, 이연희. 얘는 진짜 이런 걸 입는단 말이야? 신혼은 다 그래? 원래 그런 거야? 소란은 침을 꼴깍 삼키며, 손바닥 반도 안 되는 크기의 나비 모양 천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이어진 끈이 지금 팬티라는 거지……. 이럴 거면 그냥 맨몸에 리본을 감지, 왜. 다른 건 더했다. 얇은 끈에 잠자리 날개가 붙어 있다. 이게 브래지어라니. 대체 어딜 가린다는 거야. 이건 가리는 용도가 아니라 보여주는 용도인 거야? 그러면서도 소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불면 날아가게 생긴 속옷을 양손의 엄지와 검지만으로 슬며시 들어보았다. 마른침조차 넘어가지 않는다. 가슴이 바짝 탔다. 하, 미쳤어. 이걸 어떻게 입어. 그러면서도 속옷을 든 손을 제 몸쪽으로 끌어와본다. 언젠가는 내가 진짜 입을 수 있을까. 전신거울을 보며 제 가슴에 속옷을 대어보던 그때였다.

“다 챙겼으면 출발…….”

두둥. 거울 속에 나타난 남자. 강호도 얼고 소란도 얼었다. 환자복 위에 외투 하나 입은 채, 미치도록 야한 속옷을 가슴에 대어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거울을 통해 그에게 나 좀 보세요. 이거 어때요. 마치 물어보는 듯한 모양이 되어버렸다.

“아, 아니……. 그게요.”

간신히 입은 열었는데 손은 여전히 굳어 있다. 속옷을 등 뒤로 감추고 싶은데 어차피 거울을 통해 보고 있으니, 뒤로 숨겨봤자 강호의 눈앞이다. 소란은 이대로 동상이라도 되어버린 듯했다.

“그랬구나.”

네?

“원하는 건 몸뿐이라고 하더니.”

아악.

“역시 과감한 편이었구나…….”

아니에요. 이 정도는 아니라고요. 소란은 울면서 절규하고 싶었다. 강호는 조용히 나간 후였다. ◇ ◆ ◇

“제 취향이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그래.”

“제 속옷 다 그런 스타일 아니에요, 진짜로.”

“알았어.”

짐을 갖고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 소란의 항변이 형식적이라 생각했는지, 강호의 대답도 꽤 형식적이다.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

“정말로 선물 받은 거예요. 제가 원해서 산 게 아니고요.”

“본인이 원해서 산다면 그것보다 훨씬 야할 거다, 하는 소리인가?”

말을 말자. 이미 찍혔는데 무슨 변명이 통할까. 소란은 눈꼬리를 내려뜨리며 입을 꼭 다물었다. 더 해봤자 더 깊은 수렁에 빠질 뿐이다. 강호의 눈엔 소란의 억울해하는 모습마저 심장 떨리게 예쁘기만 했다. 더 놀리고 싶다. 아니라며 얼굴을 붉히는 표정까지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부끄러움에 축 처진 소란을 제 품에 당겨 꽉 안고 싶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세게. 아, 그건 안 되지. 이미 갈비뼈를 다친 사람인데. 조심해야만 하는 현실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아까 그 속옷은 심하게 섹시했다. 그에겐 대놓고 유혹하는 상대나 야한 속옷에 대한 판타지는 없었다. 그게 취향도 아니다. 그러나 소란이 속옷을 몸에 대어보던 모습을 본 순간 모든 건 달라졌다. 그 모습이 눈에 콱 박혀 지워지질 않는데 어떻게 하지. 나는 널,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참고로 말하자면.”

강호가 입을 열자 차창 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취향 개조당했어.”

“네?”

“그런 스타일, 나도 좋다고. 이제.”

네가 뭘 입든. 아니면 뭘 안 입든. 나는 그냥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까 백 개 사줄게.”

“괜찮아요!”

“천 개?”

“싫어욧!”

“나는 좋은데.”

아악.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그의 말에 소란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그 기억을 삭제해버리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좋은데. ◇ ◆ ◇ 소란이 강호와 함께 병원으로 돌아온 후였다. 태석은 목 보호대를 하고 나타났다. 일 처리를 마치고 병원에 도착해 검사를 받은 태석은 목과 척추에 무리가 왔다는 소견이었다. 입원할 정도는 아니라 외래로 치료하나 당분간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병실 옮겼구나. 잘됐다, 안 그래도 연희한테 4인실이라는 얘기 듣고 내가 와서 옮겨주려고 했는데.”

태석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강호가 싸늘하게 물었다.

“형이 왜.”

“응?”

“남편인 내가 있는데.”

왜 나서냐는 뜻이다.

“보호자는, 나야.”

태석의 입가에 만연했던 웃음기가 시린 눈발에 쓸려간 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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