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자고 갈 거야 (54/112)

#54화. 자고 갈 거야2021.05.08.

“소란아! 괜찮아?”

연희가 병실로 뛰어들었다. 소란의 사고 소식에 정신없이 달려온 모습이다. 응급실에 오자마자 검사와 급한 처치를 받느라 정신이 없던 소란은 겨우 숨을 돌리는 참이다. 4인실에서 출입문 쪽 침대였다. 그나마 자리가 있어 바로 입원수속을 밟을 수 있던 게 다행이다.

“나 괜찮아. 어떻게 알고 왔어? 외근 중이었잖아.”

연희에겐 아직 사고 소식을 전하기 전이었다. 병원은 로펌 근처다.

“안 비서님이 전화해서 알려주셨어. 마침 사무실 들어가던 길이라 바로 왔는데 어후, 진짜 깜짝 놀랐네. 어디 다친 거야, 어디? 왜 입원까지 하래? 많이 다쳤어?”

“늑골 골절. 검사 더 받아야 하고 치료도 계속 받아야 하고. 그래도 며칠만 입원하면 통원 치료 가능하댔어.”

오후에 있을 회의와 업무를 미뤄야 해서 팀 비서에게만 급히 알렸는데, 비서가 소란의 절친인 연희에게 일부러 따로 연락해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많이 아파?”

“조금.”

압통이 느껴지긴 했다.

“아니, 미친놈이 얼마나 세게 박았으면 안전벨트 매고 앉아 있는데 갈비뼈가 부러져?”

“심한 건 아니야.”

“심한 게 아니긴. 입원까지 했으면서.”

엑스레이상으로는 늑골 골절이 확실한데 CT로 더 정확한 상태를 봐야 한다고 했다. 우선은 간단한 치료를 받고 환자복 안 가슴 아래로 보호대를 착용했다. 잡아주는 느낌 덕분에 확실히 좀 나았지만 호흡은 편치 않았다. 연희는 소란을 안타까워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그 새낀 뭐야, 어떻게 한대? 음주운전이라며?”

“경찰서로 갔지. 난 태석 선배님이 병원으로 먼저 보내주셨고, 선배님도 현장 처리하고 곧 병원으로 오신댔어.”

제가 이렇게까지 아프면 같은 사고를 당한 태석도 마찬가지일 텐데, 끝까지 괜찮다며 기어이 소란만 병원으로 보냈다.

“굳이? 선배님이 개입할 필요까진 없잖아. 바로 검사부터 받으시지.”

그냥 끝날 일이 아니긴 했다. 태석은 화가 아주아주 많이 나 있었다.

“연희야, 나 물어볼 거 있는데.”

“뭔데?”

“혹시 찬규 오빠도 욕 잘해?”

“아니, 오빤 못해.”

연희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해도 아주 귀여운 수준.”

“너는 잘하잖아.”

“나는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지. 나한테 불이익 주는 것들은 싹 다 욕으로 응징하리니.”

연희가 씩 웃더니 덧붙였다.

“취향 호불호가 있겠지만 남자가 욕 잘하면 좀 섹시해 보이는 건 있더라. 막 너무 뒷골목 양아치 스타일 말고, 적당한 위협이 되는 정도라면. 그런 면에서 우리 찬규 오빠는 아주 꼬꼬마야. 그런데 왜?”

섹시해 보인다, 라. 소란은 사고 현장에서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던 태석을 떠올렸다. 누가 제 어깨를 치고 지나가도 하하, 웃으며 그냥 갈 길 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까는 정말 의외였다. 그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단순히 욕만이 아니다. 화를 내던 모습은 평소의 태석을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겉으로는 ‘짱짱쎄’ 같은데 그 속에 머슴이며 선비며 레트리버며 온갖 순둥이는 골고루 들어앉아 있는 강호나. 또 겉으로는 ‘하나도 안 쎄’ 같은데 극강의 파이터를 품고 있는 태석이나. 정말 다들 예상 밖이다.

“너 태석 선배님 욕하는 거 본 적 있어?”

“누가? 내가 아는 태석 선배님이 마성의 마태석 말고 또 있어?”

제가 아는 마태석은 그럴 리 없다는 듯 연희가 의아해했다.

“선배님이 아까 그 미친 주정뱅이를 아주 욕으로 아작 냈거든. 사실 내 속이 다 시원했어.”

“히익. 태석 선배님이? 욕을 했다고? 진짜?”

연희는 말도 안 된다며 눈이 동그래졌다. 직접 목격한 소란 역시 다시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다.

“응. 어쩜 욕을 그렇게 찰지게 하냐. 그것도 하나도 흥분 안 하고 목소리 깔고 잘근잘근 씹어버릴 듯이 내뱉는데.”

“내뱉는데?”

“개섹시.”

그 정도 속된 표현이 아니면 마성의 섹시함은 도저히 설명해낼 길이 없다. 눈앞에서 영화가 펼쳐진 느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다른 뜻은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그냥 그 모습이 섹시했다는 것뿐. 스크린 속 배우에 대한 감상을 전하듯이, 정말 그 정도였다. 아주 순수하게. 그런데.

“누가?”

문 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소란의 심장이 덜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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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휙 돌아본 그곳엔, 이미 눈빛부터 색기가 줄줄 흘러넘치는 진짜 핫 섹시가이 한 명이 서 있다.

“누가 개섹시한데?”

“가, 강호 씨.”

소란이 당황해 말을 더듬는데, 연희는 이 대화에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슬그머니 물러났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희도 금세 파악한 모양이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남자에게 ‘개섹시’하다고 했으니 그걸 듣고 기분 좋을 남편은 없을 것이다.

“아니, 영화요. 영화 얘기한 거예요. 뭐, 배우 보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니까.”

어떻게든 수습해보려 했지만 통할 리 없다. 강호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표정으로 추궁하듯 물었다.

“데뷔했어, 마태석이?”

“아.”

다 들었구나. 망했다.

“오셨어요, 오빠.”

연희는 현 사태에 제 책임은 하나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넙죽 인사했다.

“오면서 내가 연락드렸어. 하하. 너 사고 난 거 모르고 계시길래.”

강호가 병원에 나타난 경위까지 소란에게 설명했다. 다 좋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도착했을까. 소란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친구를 슬쩍 쳐다보니 연희는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린다.

“어머, 눈이 오려나.”

애써 꾸민 목소리로 아무 소리나 늘어놓다가,

“너 괜찮은 거 봤으니까 나는 가봐야겠다.”

서둘러 가방을 들었다.

“그럼 몸조리 잘하고.”

몸조심 잘하고, 로 들린다. 착각은 아니겠지.

“회사랑 가까우니까 내일 또 들를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화해.”

연희는 강호에게도 꾸벅 인사했다.

“그럼 오빠, 저는 가볼게요. 소란이 잘……. 아무튼 잘……. 가겠습니다.”

소란을 잘 부탁한다는 말은 차마 못 했다. 저 눈빛만으로도 이미 잡아먹게 생겼는데. 산길을 헤매다 맹수를 만난 것처럼 잔뜩 얼어붙은 연희는 겨우 병실에서 빠져나갔다. 소란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히잉. 저만 살겠다고. 그러나 야속해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연희는 이 맹수의 먹잇감도 아니니까. 소란은 어깨를 접고 접어 얄팍한 종잇장이 되고 싶었다. 팔랑팔랑 내려앉아 침대 아래로 쏙 숨어버리게. 지금 제 정수리에 따끔거리며 닿는 강호의 시선을 느끼며, 소란은 이불 끝만 바라보았다. 어째 갈비뼈가 더 아픈 것 같다.

“식사 왔습니다.”

병원 밥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와, 밥이다. 밥.”

병원에서의 첫 끼, 어느덧 저녁이다. ◇ ◆ ◇ 살면서 놀란 몇 번의 순간 중에 오늘이 최고였다.

- 강호 씨! 지금 좀 일이 생겨서 나중에…….

당황 가득한 소란의 목소리 뒤로 오르던 웬 남자의 심상치 않은 고함. 일하다가 싸움에라도 휘말린 건가.

“거기 어디야?”

당장 뛰어나갈 생각이었는데 소란은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는 그냥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소란은 받지 않았다. 강호는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로펌에 전화하여 직원에게 소란의 행방을 문의했다. 외근을 나갔지만 자세한 행선지는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메모를 남겨주시면 전달드리겠다는 말에 차마 남편이라고 밝힐 수 없었다. 남편이 제 아내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정신없이 로펌에 전화했냐는 말이 돌 것 같았다. 괜히 소란이 뒷말을 듣게 할 순 없지. 전화를 끊고 연희에게 걸었지만 그녀 또한 외근 중이라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돌아왔다.

“후우…….”

할 수 없이 태석에게 전화했다. 대체 소란이 지금 고함이 난무하는 현장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직장동료들만이 알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태석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변호사들이 단체로 수신 거부를 하나. 순식간에 열이 올랐지만 일단 진정했다. 소란이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직접 말한 걸로 보아, 적어도 위협을 받거나 위험에 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안심하고만 있을 수는 없고. 아내의 안위를 걱정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너무도 괴로웠다. 어디로든 나갈 생각에 차고로 뛰어 내려가던 중에 전화가 왔다. 연희였다.

- 아, 오빠! 지금 소란이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갔대요. 한재병원이고요, 저도 막 연락받아서 가는 길인데…….

교통사고였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방금 입원해 병실 호수까지 전달받았다며 일러준 연희는 그를 안심시켰다.

- 큰 사고나 중상은 아니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조심해서 오세요. 아셨죠?

그녀의 손끝 하나, 털끝 하나라도 상했을까 온몸의 피가 다 마를 것 같았다. 병원에 미친 듯이 달려왔다. 환자와 보호자, 방문객들로 꽉꽉 들어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뛰어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정신이 나가 있었다. 병실 문 앞에 막 도착해 거친 숨을 겨우 몰아쉬는데.

“개섹시.”

이어지는 대화 끝에 소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전에 한 소리까지 강호는 똑똑히 들었다.  

“선배님이 아까 그 미친 주정뱅이를 아주 욕으로 아작 냈거든.”

  마태석을 언급하며 섹시하다고 한 것이다. 파사삭. 애를 태우며 달려왔던 걸음걸음이 유리 조각처럼 깨어졌다. 머리가 확 돌 뻔했다. 저런 뻘소리나 늘어놓고 있을 만큼 위중한 상황이 아니라는 데 감사해야 하나. 외간 남자를 두고 섹시하다고 말한 데 죄를 물어야 하나. 다행인데 열 받는다. 정신이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버리는 기분이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절 쥐었다 놓았다 들었다 팽개쳤다 한 위인은 그래도 잘못은 아는지 눈치를 살폈다. 병원식이 나오자 신나서 베드 트레이를 꺼내 올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강호는 천천히 식판을 받아다 그 위에 놓아주었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투명한 뚜껑을 손수 열어주었다. 느리게.

“하하……, 고오맙습니다아…….”

제 불친절한 친절에 그녀가 인사했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소란은 더더욱 긴장한 모습이다. 사고를 당해 병원까지 온 사람을 괴롭히고 싶진 않지만, 제 속이 이렇게 좁다는 것도 처음 깨달았기에 강호는 먼저 마음을 풀 생각도 없다. 보호자용 의자를 빼내 침대 옆에 앉았다. 소란은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어색하게 숟가락을 들려 했다.

“누가 더 섹시한데?”

병실 안 누구도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너무 음산하게 들렸을까. 콜록콜록! 소란이 크게 기침했다.

“내가, 아니면 마태석이?”

“허억.”

기침하던 소란이 괴로운 듯 몸을 숙였다. 아무래도 꾀병도, 장난도 아닌 것 같다.

“괜찮아?”

강호가 일어나 그녀의 팔을 붙잡고 얼굴을 살폈다. 소란의 안색이 파리했다. 팔다리는 말짱해서 안심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하긴 그러니 입원까지 했지.

“하아, 토, 통증이 좀 있어서.”

“늑골 골절이야?”

“네, 심하진 않은데 그래도.”

질투 두 번만 했다간 사람 잡겠다. 갈비뼈 골절이라면 기침이나 심호흡에도 격한 통증이 느껴질 텐데, 그녀를 함부로 놀라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강호는 ‘마태석=개섹시’를 기억에서 지워내며 그녀에게만 집중했다. 이만하길 다행이지. 이 정도로 경미하니 그렇게 마태석이 섹시하다는 쓸데없는 소리라도 하는……, 젠장. 그건 왜 안 잊히는 거야. 머릿속에 박제가 되어버린 것 같다.

“어쩌다가 사고가 난 거야?”

마태석은 운전을 어떻게 했길래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또 열이 뻗친다.

“아, 네. 외근 나가며 선배님 차를 얻어타게 되었는데…….”

소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고 자체는 태석의 잘못이 아니었다. 상대 운전자는 만취 상태에, 시비까지 걸었다니 아마 호되게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다만 요즘 강호가 소란의 출퇴근을 직접 시켜주고 있어 그녀가 차를 두고 다니는데, 본디 소란은 외근이 잦다는 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태석의 차를 타는 바람에 이런 일까지 겪게 된 거라 이 또한 제 잘못처럼 느껴졌다. 그게 어디 강호의 잘못이겠냐만, 다친 아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모든 건 다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많이 놀라고 아팠겠다.”

천천히 건네는 말에 소란이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겨우 이런 말 한마디에도 고마움을 느끼는 표정이라니. 널 걱정하며 미친 듯 달려오다가 계단에서 고꾸라질 뻔한 걸 알면 웃으려나.

“……시해요.”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리며 조그맣게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뭐?”

“강호 씨가 훨씬 더.”

“더?”

“섹시하다고요.”

그게 어디 비교할 거리나 되냐는 듯.

“말해 뭐 해요…….”

소란이 볼을 붉히며 그가 아까 던진 질문에 답을 내어주었다. 그러곤 부끄러운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흐윽.”

그만 갈비뼈가 아팠는지 또 몸을 반으로 접었다. 귀여운데 안쓰럽고, 그런데 또 사랑스럽고. 통증 때문에 숨도, 기침도, 어느 하나 제대로 편하게 못 할 소란이다. 늑골 개복치가 따로 없네. 절대안정이 시급했다. 아무래도 조용한 병실로 옮겨야 할 것 같다. 입원은 며칠뿐이라고 해도 병원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도 좀 챙겨야 할 테고.

“저녁은 드셨어요?”

“아니.”

그럴 정신이 있었나.

“그럼 어서 가서 저녁 드시고…….”

“내가 가긴 어딜 가.”

“네?”

소란의 눈이 커졌다.

“자고 갈 거야.”

너랑.

“오늘부터 같이 자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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