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나도 불렀어2021.05.04.
달 뜨는 밥집. 백 회장도 뜨끈한 순두부 국물을 떠먹은 후 만족스럽게 식사를 해나갔다.
“우리 나린이는 밥은 제대로 먹고 지내나. 바빠서 끼니 제대로 챙길 틈도 없으면서 기어이 나가 살겠다고 고집을 부려선.”
고 여사는 맛있는 밥을 먹다 보니 손녀가 생각난 모양이다. 계 박사가 안타까운 기색으로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이야. 요즘 들어 비쩍 더 말라서는 아주 보기 안쓰럽더만.”
“나린이가 나가 산다고?”
백 회장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묻자, 고 여사 내외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응, 얼마 안 되었어.”
“한번 가봤더니 냉장고엔 뭐 아무것도 없더라고. 시집가랬더니 독립을 해서는.”
“걔도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 언제까지 본가에 붙어살 거야. 진작 나갔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나가 산다고 지 부모가 신경을 써주는 것도 아닌데 시집가기 전까지만이라도 내가 옆에 꼭 끼고 있으려고 했지. 멀리 있으면 챙기기도 힘든데.”
고 여사는 손녀가 안쓰러워 착잡한 얼굴이었다.
“애 아빠고 엄마고, 자랄 땐 관심도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지들 좋은 자리에 시집보내려고 용쓰는 게 아주 못마땅해. 선보라는 소리를 하도 해대서 내 귀에도 딱지가 다 앉을 지경인데. 집 싫다고 뛰쳐나가도 할 말 없지.”
계 박사 역시 하나뿐인 손녀에게 무정한 아들 내외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윽고 주방 일을 어느 정도 끝낸 성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족한 건 없으세요? 국물 좀 따뜻하게 새로 가져다드릴까요?”
고 여사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도토리묵. 도토리묵 직접 쑨 거 맞지요?”
“아, 네. 제가…….”
“두부는? 순두부도?”
“아, 네, 그것도 제가…….”
“세상에. 파절이 양념은 어떻게 했길래 맵지도 않으면서 입에 착착 붙는…….”
“그만하시게, 그만.”
백 회장이 손을 저으며 말렸다.
“장사하는 사람한테 비결을 캐물으면 쓰나.”
“내가 언제 캐물었어. 맛있어서 그러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성준이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계 박사가 감탄했다.
“남매가 다 인물이 훤하고 좋구먼. 이렇게 식당 안에 있어도 빛이 나니 여기 들어오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어.”
허허, 웃으며 건네는 말들이 정다웠다. 백 회장도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돌리다가 작은 칠판에 적힌 ‘오늘의 정식’ 메뉴를 보게 되었다. 가정식 백반집으로 고정메뉴가 없고 매일매일 정식에 나오는 음식 종류가 달라진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메뉴는 방금 받은 밥상과 다 같았지만 하나가 달랐다. 칠판에 적힌 국물 요리는 맑은 순두부가 아닌 고추장순두부찌개였다. 이에 백 회장이 물었다.
“고추장순두부는 점심에 다 떨어졌나 보군요.”
“아니요. 내올 수 있습니다. 드시겠어요?”
바로 나온 성준의 대답에 알았다. 매운 고추장순두부찌개 대신 왜 맑은 순두부가 나왔는지를. 다 떨어지고 없어서가 아니었다. 삼삼하고 보드라운 순두부는 갑자기 찾아온 어르신들께 대접하기 위해 성준이 일부러 맑은 국물을 내어 만든 것이었다.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씨가 엿보였다. 성품이 얼마나 곱고 따뜻한지 새삼 알 수 있기에 백 회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이제 속이 안 좋아 매운 건 잘 못 먹어요.”
볼수록 참 마음에 드는 청년이다. ◇ ◆ ◇ 쾅, 소리와 함께 앉아 있던 몸이 뒤에서 치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신호에 걸려 서 있던 태석의 차를 뒤차가 들이받은 것이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음에도 강한 충격에 윽, 하고 태석과 소란 두 사람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소란이 법원에서 일을 마칠 때까지 태석이 기다려주었고, 두 사람은 로펌으로 복귀하려 거의 다 온 참이었다.
“뭐야. 괜찮아?”
태석은 먼저 소란부터 살폈다. 안전벨트를 꽉 쥔 채 소란은 놀란 숨을 삼켰다.
“괘, 괜찮아요. 으.”
하지만 어째 가슴 아래께가 욱신거렸다. 소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자 태석은 순간 눈이 휙 도는 느낌이었다.
“넌 안에 있어.”
태석은 짧게 말하고선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뭔가 지금 되게 열 받은 거 같은데. 소란은 놀라서 따라 내렸다.
“선배님.”
일단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내리고 보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태석의 차 뒷부분이 뒤차 보닛 부분에 제대로 받혀 있었다. 그나마 양쪽 모두 억대가 훌쩍 넘는 금액대로 튼튼하다 소문난 차량이니 그나마 이 정도 충격에서 그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차 상태를 확인하여 사진을 찍자마자 휴대전화를 들고 보험회사에 연락했고, 사고 사실과 위치를 말함과 동시에 동승자가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까지 전했다. 매우 신속하게 통화를 마쳤다. 그리곤 뒤차 운전석 문 앞에 가서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사고를 낸 차량의 운전자는 아직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다.
“나와.”
태석의 이렇게까지 화가 난 얼굴은 소란도 처음 보았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평소 유쾌한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나오라고. 안 들려?”
상대 운전자는 창문을 조금 열고 말했다.
“거, 차는 치지 마쇼. 나도 지금 보험 부르는 중…….”
“술 마셨냐?”
운전자의 얌통머리만큼 열린 그 틈으로 태석은 술 냄새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이미 돌아 있던 태석의 눈이 또 한 번 돌아가는 게 보일 정도다. 소란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사고 처리하기도 전에 무슨 일이 날 것만 같다.
“아니 그런데 왜 반말을 하고…….”
“내리라고. 안 들려?”
이나마도 겨우 예의를 갖춰준다는 듯 태석은 욕만은 참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 운전자는 그의 인내심을 테스트했다.
“백날 사정해봐라, 내가 내려주나. 애송이 같은 게 가서 얌전히 보험이나 부르고 기다릴 일이지. 어디 와서 깡패처럼 눈을 부라리고 지랄이야.”
참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때부터 태석이 낮게 지껄인 욕은 소란의 눈까지 휘둥그레지게 했다. 씨를 발라 먹고 개의 새끼를 찾고 난리가 났다. 그 어떤 영화 속 조폭 역할 배우보다 찰지게, 살벌하게, 싸늘한 욕을 내뱉으며 운전석 창문을 툭툭 두드리는 카리스마에 놀란 소란은 앞으로 태석에게 절대 까불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태석의 그 욕은 운전자를 도로 위로 끄집어내는 데 기여했다.
“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인마, 너 나이 몇이야!”
삼십 대 중반으로, 어디 가도 섭섭하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은 태석이다.
“이게 평일 대낮에 하는 일도 없이 비싼 차에 기집 태우고 양아치처럼 싸돌아다니는 게 어디 어른한테 욕지거리야!”
나름 사회에서 인정받는 전문직인 동시에 대표이기까지 한 태석이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분명한 건, 운전자가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훅 끼치는 알코올 냄새. 그사이 소란의 전화벨은 울리고, 태석에게 욕을 먹은 운전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차들은 이 광경을 구경하느라 서행하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선배님.”
그를 말리려는데 다시 전화가 울렸다. 강호였다. 일단 나중에 하겠다고 말이라도 할 요량으로 소란은 전화를 받았다. 통화 버튼을 누른 소란이 막 사정을 설명하려던 참이다.
“강호 씨! 지금 좀 일이 생겨서 나중에…….”
“야! 너 뭐라고 했어! 이게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태석이 또 낮은 소리로 뭐라 했나 보다. 운전자는 회까닥 정신이 나가 발광했다.
“이 자식이 아주 건방진 새끼네. 확 다 받아버릴라!”
도로 위에서 시비를 붙이며 트렁크에서 망치를 꺼내는 미친 또라이도 있다던데. 이러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 소란은 잔뜩 긴장했다. 만취 상태에서 운전해 앞차를 들이박은 운전자라면 분명 제정신은 아닐 터다.
- 거기 어디야?
강호가 물었지만 소란은 제대로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빨리 태석을 말리고 차 안으로 피신해서, 보험회사와 경찰, 레커차가 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소란은 태석에게 달려갔다. 윽, 또 가슴 아래께가 욱신거린다.
“괜찮아?!”
그 와중에도 소란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는지 태석이 바로 그녀를 붙들었다.
“이것들이 이제 합의금 뜯어낼라고 별 개수작 쌩쇼를 시작하고 앉았네! 너 이 새끼 나한테 욕하고 그런 거 내가 무슨무슨 죄로 다 집어처넣을 거야. 딱 기다려. 내가 변호사부터 부를 거니까!”
확실히 미친 게 분명했다. 나중엔 술 먹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려나. 이런 자들이 꼭 돈으로 처발라 심신미약을 주장하여 주취감형을 받곤 하는 게 현실이다. 안 될 말이지. 음주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들은 오히려 형량을 늘려야 했다. 반드시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변호사?”
태석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너 내가 아는 변호사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어? XX새끼야, 넌 나한테 잘 걸렸어. 딱 뒤졌어.”
“아는 변호사는 나도 많은데.”
운전자는 한 치 앞을 보지도 못한 채 제 말만 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기집X 옆에 끼고 있다고 한마디도 안 지고 허세는 XX, 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르장머리를 싹 고쳐놓…….”
태석이 고급스러운 명함 케이스에서 검은색 명함을 한 장 탁 꺼냈다. 반질반질 코팅된 명함에 하, 입김을 불어선 상대 운전자의 이마에 찰싹 붙여주었다.
“나도 불렀어, 변호사.”
눈이 커진 운전자가 명함을 떼어서 보았다. 법무법인 현송. 대표 변호사 마태석. 정자로 새겨진 이름이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났다. 태석은 검지로 명함을 한 번 가리키곤, 다시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게, 나야.
“내가 당신, 바닥까지 탈탈 털어 벗겨먹어줄게.”
한다면 하거든, 내가. 태석이 빙긋 웃었다. ◇ ◆ ◇ 식사가 끝난 후 백 회장은 계 박사 내외를 먼저 보냈다. 올 때도 서로 다른 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으니 갈 때도 문제가 없다. 성준과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해둔 참이다. 백 회장은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주변 골목을 돌아보았다. 성준의 식당에 찾아오려고 처음 주소를 받고선 적잖이 놀랐다. 은부동. 이 동네인지는 몰랐는데. 여기 은부동은 물론 옆 동네인 금부동까지 백 회장에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다만 일부러 찾지는 않았던, 씻을 수 없는 아픔이 깊이 서린 곳. 절대 제 발로는 오지 않을 곳이다. 그랬던 동네에 지금 제가 와 있다니. 세상 참 좁기도 하지. 하긴, 인생사 다 그런 것 아니겠나. 가늘고 투명한 실이 서로 얽히고설켜 저마다 인연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세월. 뜻하지 않은 순간에 알아차리게 되는 것조차 세상의 전부는 아니겠거늘. 아직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더 많을 터다.
“불쑥 찾아온 늙은이한테 맛있는 밥도 내주고, 시간까지 내주어 고맙습니다.”
식당으로 돌아온 백 회장은 성준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이에 성준은 따뜻한 물에 우린 녹차를 내려놓으며, 부담스러운 듯 서름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 할아버님.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그래도 우리 새아기 오빠 되시는 분 아닙니까. 사돈 어려운 법인데 함부로 말을 놓을 수야 있나요.”
백 회장은 선선히 웃었다. 성준은 불편하면서도 감사했다. 소란의 친정에 어른이 없고 저 하나뿐이라, 행여 낮잡아 보이는 건 아닐까 많이 걱정했다. 그러나 상견례 날, 그리고 결혼식 날, 두 번 뵈었던 백 회장은 인품이 무척 훌륭한 분이었다. 오늘처럼 따로 만나게 될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단둘이 있게 된 자리에서조차 저를 존중해주시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무리 사돈이라 해도 손자뻘인데 말을 조금 편하게 하는 정도가 뭐 어려운 일일까. 백 회장의 존대는 소란의 친정을 존중하는 태도를 상징한다. 깊게 팬 주름에 따스한 기운이 어렸다. 성준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여쭈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밥 한 끼가 용건일 리는 없다. 백 회장은 성준이 보고 싶었다. 진상 엄마가 의붓남매, 의붓남매, 노래를 부르고 갔지만 제 눈에 성준과 소란 남매는 더없이 우애 깊어 보였기에. 사람을 허투루 판단하는 법이 없는 백 회장은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하고자 걸음한 참이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일에 대해서도 슬쩍 살필 겸.
“사돈 만나 이야기나 좀 했으면 하고 왔습니다. 내가 귀한 시간 너무 빼앗는 건 아니겠지요?”
답정너 회장님의 질문에 성준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닙니다.”
소란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가 긴장했던 마음도 서서히 풀렸다. 백 회장의 미소가 따듯했다.
“부모님 작고하시고 두 남매가 힘들었겠어요.”
“소란이와 서로 의지하며 잘 지냈습니다. 동생이지만 워낙 똑똑하고 의젓해서, 마냥 철부지 같은 아이가 아니었어요, 어릴 적부터.”
백 회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소란은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제 오빠에겐 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사귀던 남자친구가 그 돈을 매개로 계속 접근해오던 것을 알았다면 아마 성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적어도 여기서 식당을 계속하고 있지는 못했을 거다. 식당을 지키기 위한 돈이었으니, 동생을 고생시키면서까지 이곳에서 장사하진 않았겠지. 결국 성준은 그 사정을 모른다는 소리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 식당을 해야만 했던 걸까. 왜.
“여긴 운영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내부를 고쳐서인지 얼마 안 되어 보이기도 하는데.”
“네, 몇 해 전 화재가 나는 바람에 손을 좀 보게 되었어요. 이 자리에서 식당을 운영한 건 부모님 대부터라서 꽤 오래되었습니다. 30년쯤.”
한자리에서 그렇게나 오랫동안 운영해온 식당이라니. 백 회장은 조금 놀란 얼굴로 다시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쓸고 닦아 운영해온 이 식당은 곳곳에 애정이 가득 배인 공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밥벌이 수단이 아닌 것이다. 부모님부터 이들 남매까지, 숨결이 깊이 배인 터전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화재 사고가 있었다니. 잘 수습은 했고요? 인명피해는?”
“밤중이라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고요. 고생은 좀 했지만 지금은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근방에 워낙 그런 일이 잦아서요.”
그것참, 다행이다. 돈 때문에 고생은 좀 했겠지만,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것만으로 정말 다행인 일이다.
“이 동네는 화재가 빈번한가 봅니다.”
“네. 그런 편이긴 해요. 아무래도 낙후한 건물이 많다 보니.”
백 회장은 지난 기억을 찬찬히 떠올렸다. 인근 지역에서 난 화재라고 해도 세월이 얼마인가. 근 30년에 걸친 시간이다. 자신이 아는 화재들 간에 연관성을 찾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니 꼭 무슨 관련이 있어서라기보단,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하기에 백 회장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식당을 운영한 게 30년 전부터라고 했던가.
“그럼 이 동네에서 쭉 살았겠군요.”
“네, 그렇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재혼가정이라서.”
몰라서도 안 될 이야기인지라 성준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기회가 없었을 뿐, 감추고 말고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이.
“이 동네에서 소란이도 엄마와 쭉 살았고, 저는 아버지와 이사 와서 살다가 두 분 재혼으로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럼 어렸을 때부터 살았으니, 혹시 알지도 모르겠군요.”
“어떤 걸요?”
백 회장이 저 깊은 곳에 있던 기억 하나를 더듬어 꺼내었다.
“은부동에 30년 전쯤에 생긴 식당인데. 너무 오래되어 지금은 없어졌을 것 같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살았다니 알 수도 있겠다 싶어서. 거기 이름이 뭐였더라. 주인 이름이었는데.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내 나이가 이리 들어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니, 원.”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이만큼 얘기하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일이려니 싶어 성준이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이내 백 회장이 다리를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지연이네 밥집’인가, ‘지연이네 식당’인가.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주인 이름이 문가 지연이었지, 아마.”
내내 고요하던 성준의 눈이 그만 커다래졌다.
“아는가 보네요. 그런 식당이 근방에 있긴 있었지요? 지금은 어디로 갔으려나.”
“여기가, ‘지연이네 밥집’이에요. 문, 지 자, 연 자 쓰시는 분이 소란이와 제 어머니시구요.”
“……뭐?”
백 회장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