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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진짜 짠한 사람 (52/112)

#52화. 진짜 짠한 사람2021.05.01.

카페에서 진상이 먼저 나갔고, 잠시 후 소란도 일어섰다. 어쩐지 살짝 휘청거리는 모습이 위태로워 태석은 그녀를 따라 나갔다. 얘기가 좀 더 길어지면 슬쩍 끼어들까 했더니 생각보다 자리는 빨리 마무리됐다. 주변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지만 소란은 그를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소란은 건물 밖으로 나서 착잡한 얼굴로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란이란이.”

“아, 선배님.”

“어디 가는 길?”

“저 법원 가려고 나왔어요.”

정신적 대미지를 입고도 바로 외근을 가야 하는 처지라니. 소란이 안쓰럽지만 법원에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차는? 안 가지고 왔어?”

“아, 네.”

“태워줄게. 주차장 내려가자.”

“저 먼 데 가요.”

“나도 먼 데 가.”

“저 수원까지 가는데요.”

“나도 수원까지 가는 길이야.”

카페에 앉아 있을 때, 태석은 미팅을 연기했다. 지금은 소란의 목적지가 그의 목적지였다.

“음, 그럼 거절 안 할게요. 감사히 얻어타겠습니다.”

택시를 잡으려 했던 소란은 태석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의 차를 타고 도로로 빠져나왔다.

“눈 좀 붙여. 가는 동안. 근데 오늘 오후 재판 없잖아?”

“선고 들으러 가는 건데, 잠은 안 올 것 같아요.”

소란은 웃으며 말했다.

“선고를 왜 직접 들으러 가? 장 변이 막 부려먹고 그래? 내가 혼내줄까?”

“어우, 아니에요. 중요한 선고라 제가 직접 챙기는 거예요.”

해가 바뀌어 3년 차로 접어든 어쏘 변호사 소란의 위로는 상사인 파트너 변호사가 있다. 파트너 변호사는 말하자면 법무법인의 수익을 나누어 수당으로 받는 지분변호사다. 반면 어쏘 변호사(Associate lawyer)는 말 그대로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소속 변호사로, 로펌 내에서 7년 미만의 경력을 가진 대부분이 이에 해당했다. 수임 계약은 거의 파트너 변호사가 진행하고, 어쏘 변호사들이 이에 따른 서면 작업이나 상담, 송무 등을 수행하는데, 파트너 변호사 아래로 시니어, 어쏘 변호사들, 사무직원들까지 팀을 이루곤 하였다. 태석이 이끄는 이 법무법인에서도 당연히 그런 체계가 존재한다. 보통 선고가 나오는 날엔 변호사가 직접 가지 않고 직원을 보내기에, 소란이 간다고 하니 태석이 눈을 크게 뜬 것이다. 그녀의 상사 장 변호사가 혹사시키나 해서. 전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일부러 과장하여 제 편부터 들고 보는 태석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진짜 부당한 일이라도 겪게 되면 마음 놓고 털어놓아도 될 것 같은 사람.

“사실 택시 타는 것도 싫고 운전하는 건 더 싫었는데, 선배님이 구세주네요.”

“내가 정말 구세주야?”

“네.”

그럼 나한테 얘기하지. 그 결혼, 나도 할 수 있었는데. 그 돈, 나도 줄 수 있었는데. 이렇게 차 한번 태워주는 게 아니라 네 인생의 진짜 구세주가 되는 거, 나는 좋은데.

“아까 백진상이랑 얘기하는 거 들었어. 카페 들어가다가, 우연히.”

우연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둘러댔다.

“아. ……네, 금전 문제가 좀 얽혀 있었어요. 들으셨다니 창피하네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말하지.”

“돈이요?”

“그래.”

소란은 “어우, 아니에요.” 하며 손을 저었다.

“그땐 돈 부탁드릴 만큼 선배님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요. 친한 사이였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되죠. 보세요, 돈이 얽히니까 백진상이랑도 끝이 지저분하잖아요.”

“…….”

“우린 오래 봐야죠, 선배님.”

소란이 예쁘게 웃었다. 태석의 가슴을 찌르는 미소였다. 그러면 돈이 얽힌 네 결혼은 끝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옆에서 그냥 견디기만 하면, 너와 오래오래 볼 수 있는 걸까. 그게 답일까.

“……강호하고는 어때?”

“좋아요.”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터져 나온 대답. 진심 가득한 얼굴에 오히려 태석이 당황했다. 얼굴도 예쁜데, 연기까지 잘하고. 변호사가 아니라 배우가 되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소란아.”

돈 때문에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하고, 거기에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 연기까지 하는 소란이 너무너무 짠했다.

“네?”

우소란도 아니고, 우 변도 아니고, 란이란이도 아니고, 나직하게 소란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무심코 대답할 뿐이다. 내 마음도 모르고.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언제든지 얘기해.”

“뭘요?”

얼마나 속으로 앓고 있을까. 강호와의 살얼음판 같은 결혼 생활 속에서, 그 허울뿐인 관계 속에서. 티 없이 순수하고 맑은 소란은 얼마나 힘이 들까.

“힘든 거 있거나, 할 말 있거나, 내가 도울 일이 있거나 상관없어. 정말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꼭 얘기해.”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마. 이제 내가 다 아는데, 널 보는 내 마음이 이리도 아픈데.

“우와……. 선배님 방금 되게 저희 오빠 같았어요.”

“오빠?”

“네. 친정 오빠가 한 명 더 생긴 기분이에요. 완전 든든해요.”

고작 친정 오빠 노릇이나 하겠다고 이러는 게 아닌데. 태석은 씁쓸한 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결혼 무르라고, 소란의 손을 잡고 깽판이라도 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가장 당황하고 곤란할 사람이 바로 소란이다. 어떤 일이건 계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고. 지금 제가 칼춤을 추어봤자 망나니밖에 더 되겠는가. 일단 그 칼은 잘 넣어두고 소란의 곁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저 그럼 죄송하지만 눈 살짝만 감고 있을게요.”

“그래, 살짝만 감아.”

킥킥 웃던 소란이 영 피곤했던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태우고 먼 길을 운전하는 태석의 가슴은 저릿저릿했다. 가여운 란이란이. 오빠가 다 알았으니 옆에서 잘 지켜줄게. 그는 신호에 걸릴 때마다 안쓰러운 눈길로 소란을 바라보았다. 진짜 짠한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 ◆ ◇ 달 뜨는 밥집.

“안녕하신가요.”

성준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노신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백 회장이었다. 소란의 시할아버지 되시는 분. 그리고 백 회장 옆 두 분의 노부부도 낯이 익었다. 결혼식 날, 사돈어른 가까이에 앉아 계시던 친구 내외분이 아니던가.

“아, 안녕하세요……. 일단 이쪽으로 앉으세요.”

서둘러 테이블의 의자를 빼내어 자리를 권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미안하군요.”

“아닙니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어떻게 여긴…….”

“식당에 밥 먹으러 왔지요.”

예상 못 한 방문에 성준이 당황하자, 백 회장과 함께 온 이들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우리는 끌려왔지 뭡니까.”

“밥만 한 끼 먹고 갈 거니 늙은이들 몰려왔다고 너무 주책스럽게 생각하진 말아요.”

내외의 다정한 목소리에, 성준은 놀란 기색을 지우며 정중하게 대꾸하였다.

“아닙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백 회장이 물었다.

“오늘의 정식 3인분 주문할 수 있을까요?”

“아.”

성준은 잠시 주방 쪽을 돌아보았다. 막 점심 장사를 마치고 정리하던 참이다. 양이 충분히 남아 있으려나. 식재료 쪽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는데.

“바쁠 것 같아 일부러 점심시간 지나서 오긴 했는데. 미리 연락해둘 걸 그랬나 봅니다.”

곤란한 기색을 읽었는지 백 회장이 건네는 한마디에 성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성준은 서둘러 물과 수저를 챙겨다 드리곤 주방에 들어갔다. 주방 안으로 들어간 성준을 살피던 부부, 그러니까 고복희 여사와 계석호 박사는 목소리를 낮췄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식사를 하려는 이유가 뭔가.”

“밥 사준다고 해서 뭐 근사한 데라도 데려가나 했더니만.”

“사돈 식당에 매상 올려주려는 건 아닌 것 같고.”

1인분에 만 원도 되지 않는다. 겨우 세 사람 와서 먹는다고 매상에 보탬이 되는 건 아닐 터. 백 회장이 갑자기 밥이나 먹자 하더니 부부를 데려온 곳이 변두리 작은 식당, 그것도 손주며느리의 오빠가 하는 가게였으니 의아할 법도 했다. 백 회장은 여상하게 말했다.

“혼자 먹으면 맛없어서.”

단순히 밥만 먹으러 온 게 아닌 것 같은데. 계 박사와 고 여사는 이 늙은이가 뭔 일을 꾸미려 그러나 싶어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제 와서 손주며느리 배경에 트집이라도 잡을 셈인가. 혹시 결혼식 때 조카네가 와서 속을 뒤집어놓았던 일 때문에? 그러는 사이 성준이 불편한 걸음이나마 천천히 옮겨 쟁반을 들고 나왔다. 1인분씩 세팅된 나무쟁반을 차례로 날라다 어르신들 앞에 내려놓았다. 윤기가 흐르는 흑미밥, 말간 순두부와 양념장, 찰랑거리는 도토리묵과 오이무침, 얌전히 부친 육전과 파절이, 계란말이, 동그랗게 말아 썰어낸 배추김치까지. 소박하나 더없이 정갈하고 맛깔스러운 상차림에 세 사람은 절로 침을 삼켰다.

“맛있게 드세요.”

성준은 공손하게 인사드린 후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원래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니다. 점심 장사만 하고 이르게 식당 문을 닫는다고 들었으니까. 그런데도 두말 않고 식사를 내어준 성준에게 백 회장이 애틋한 눈길을 보내는 사이, 계 박사와 고 여사의 그릇은 빠르게 비어갔다.

“이거, 이게 기가 막히네. 도토리묵이 아주 탱글탱글해.”

“두부 좀 드셔보셔. 시판 제품 아닌 것 같은데 직접 만들었나. 고소하니 부드러워.”

“우리 집 아주머니 솜씨보다 훨씬 좋구먼그래.”

부부는 왜 여기까지 데려왔냐며 의아해하더니 어느새 다 잊은 듯 음식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 또한 성준의 음식이 가진 매력이요, 마력이다. ◇ ◆ ◇ 집에 도착한 강호는 서둘러 씻고 나와 2층에서 제 짐을 챙겼다.

‘……이 정도면 되려나? 나머지는 주말에 한꺼번에 옮기고.’

사실 많이 챙길 것도 없다. 이미 1층에는 부부가 사용하는 것처럼 꾸며둔 물건들이 있다. 매일은 아니지만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가정관리팀이 방문하고 있다. 백 회장의 배려로 파견 나오는 인력이다. 워낙 사생활 보호가 철저하다고 이름난, 믿을 만한 업체이긴 했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1층 침실에서 함께 생활하는 듯 칫솔이나 약간의 옷, 슬리퍼, 화장품 등을 배치해둔 상태였다. 다행히 주방은 결혼 직후부터 1층에서 줄곧 같이 써오고 있으니 손댈 것도 없다. 2층에서 강호가 생활했던 흔적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업체에서 담당하는 부유층 고객 중에는 각자 다른 생활양식을 존중하여 공간을 따로 사용하는 부부가 많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함께 살게 되었다. 천둥이 치는 밤, 충동적으로 1층에 내려와 방문을 두드리고 그녀의 침대로 들어갔는데. 앞으론 특별한 용건이 없어도 매일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를 사용하게 된다. 강호는 드레스룸에서 패브릭 제품을 모아두는 서랍을 열어 세탁되어 있는 시트를 꺼냈다. 이불과 베개, 매트리스 커버 등을 다 벗겨내고 손수 갈았다. 팍 쳐서 끝내주게 각을 잡아 착착 해나가는 동안 기분 좋은 허밍이 공기 중에 맴돌았다.

“이 정도면 됐나.”

세상이 아름답다. 이 방 벽지가 분홍색이었던가. 천장도 분홍색이네. 커튼도 분홍색이고, 가구까지 온통 분홍. 모든 게 분홍분홍. 아니, 실제로 분홍색인 건 아니다. 그의 눈에 새로 장착한 필터가 꽃밭이었다. 이윽고 강호는 잘 정돈된 침대에 걸터앉아 시트를 쓰다듬듯 쓸었다. 부부. 침대. 신혼. 그런 단어들이 가슴을 북처럼 두드리며 아주 그냥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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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화를 해볼까 해서였다. 소란은 아직 일하는 중이겠지. 퇴근까진 한참 남았으니까. 그래도 재판 중이나 상담 중이 아니라면 통화할 수 있을 터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신혼 침실 입성 기념으로 저녁상을 차려야 하니까. 그녀에게 먹일 음식을 요리할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신호가 갔다. 하지만 소란은 받지 않았다.

“바쁜가.”

방해할 순 없고, 딱 한 번만 더 해야지 했다. 또 신호가 가고. 응답이 없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참이다.

- 강호 씨! 지금 좀 일이 생겨서 나중에…….

- 야! 너 뭐라고 했어! 이게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소란의 말허리가 잘리며 멀찍이 낯선 남자의 성난 목소리가 올랐다.

- 이 자식이 아주 건방진 새끼네. 확 다 받아버릴라!

내내 행복에 젖어 있던 강호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거기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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