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좋다는 말이었어2021.04.27.
로펌. 소란은 초조한 마음으로 엎어놓은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일단 지르긴 했는데, 그가 어떻게 반응할까 싶었다.
[우리 오늘부터, 침실 같이 쓸까요?]
강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 하나 보내는데 몇 번을 고쳐 썼는지 모른다. 그러다 그 말이 그 말 같아 그냥 보내버렸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제야 몸이 준비된 거지만.
‘뭐 꼭, 몸이라고 해서, 어떤 일을 대비한 건 아니고…….’
소란은 손톱만 만지작거렸다.
‘방을 같이 쓴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니까. 그래서 그냥 그 얘기지 뭐.’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또 열심히 해명 중이다. ‘늑대들의 고민 상담소’ 선생님들도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단계. 배려. 이해. 존중. 새해 첫날엔 둘이 함께 계약서를 삭제했다. 이제 다음으로 나아가도 되겠지, 하고 위대한 한 걸음 내디딘 참이다. 더 깊어지는 관계야 그 후의 일이겠지만. 나만 조심하면 돼. 같은 침실을 쓴다 해도 내가 덮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우선 침실부터 차근차근……. 띠링. 알림음이 울렸다.
“왔다.”
두근두근. 우리 호랑이 선비님은 뭐라고 답해주셨을까.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까, 분명히…….
“응?”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한 소란은 눈을 깜빡거렸다. 예상 답안은 ‘그래’였다. 아니면 ‘좋아’, 내지는 ‘그렇게 하지’ 정도. 그런데 화면에 뜬 메시지는.
[돟ㅇ]
“돟? 이응?”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응, 안 돼, 돌아가? 소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문자의 이면에 숨은 의미가 뭘까 해석해보려고 노력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강호였다.
◇ ◆ ◇
- 아, 네. 여보세요.
소란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좋다는 말이었어.”
- 네?
“문자. 좋다는 얘기였다고.”
아, 하면서 작은 웃음소리가 스쳐갔다. 강호는 이제야 안심하여 숨을 내뱉었다. 조금 전. 소란의 문자에 깜짝 놀라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아픔 따윈 느껴지지도 않았다. 믿기지 않는 듯 웃으며 화면을 바라보다가, ‘좋아’라고 회신을 보내려고 했다. 자세한 얘기는 곧바로 전화해서 할 참이었고. 좋아서, 좋아도 너무 좋아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그만 ‘ㅈ’옆의 ‘ㄷ’을 누른 건 순전히 실수였다. 그 결과, 오타를 내고 말았다. 돟아. 멍청해 보이는 메시지 그대로 전송할 순 없었다. 돟긴 뭐가 돟아. 다시 창을 눌러 삭제를 하려고 하는데 찬규가 쑥 손을 뻗었다.
“형아도 좀 보자. 뭐 어디 투자한 거 터졌어? 노다지야?”
강호는 휴대전화를 쥔 손을 훅 올렸다.
“관심 끄고 네 방 가.”
“뭔데. 형아한테 얘기해봐. 같이 좀 좋자고.”
우리의 작고 귀엽고 소중한 찬규는 아무리 팔을 쭉 뻗어도 강호가 성화처럼 치켜든 휴대전화엔 닿을 수 없었다. 폴짝 뛰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 그러질 못하고, 찬규는 강호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아악.”
순식간에 밀려든 간질거림에 강호의 허리가 접혀들 뻔했다.
“나가, 나가라고.”
강호는 휴대전화를 끝까지 사수하며 가볍게 찬규의 등을 떠밀었다. 쾅. 문을 닫고 잠가버리자 밖에서 찬규가 문을 두드렸다.
“야, 야! 형아 노트북 안에 있잖아!”
그렇지. 강호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다 휴대전화를 놓곤, 찬규의 노트북을 아무렇게나 챙겨 문을 열었다. 조금 열린 틈 사이로 찬규가 배시시 웃었다. 먹고 떨어지라는 듯이 노트북을 툭 건네는데, 찬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뭐.”
“이제 좀 괜찮은가 보다?”
뭐가 괜찮다는 거지?
“몸에 손대는 거. 원래는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강호의 과민반응이 전보다 확실히 약해졌기에 찬규도 놀라서 건넨 말이다. 친한 사이라 어쩌다 닿는 건 몰라도, 이런 식으로 대놓고 간질인다든가 일부러 손을 대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강호였다. 살기까지 느껴졌던 예전 반응에 비하면 오늘은 참 부드러웠다. 물론 바로 떠밀려 쫓겨나긴 했지만.
“시끄럽고. 가라.”
강호는 문을 다시 쾅 닫았다.
‘좀 나아졌나?’
마치 살수에 대비해 한밤중에도 베개 밑에 칼을 놓고 잤던 왕처럼, 강호는 내내 과민하고 예민했다. 누구에게도 틈을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소란과 함께 있는 동안 깨닫지 못하는 사이 이만큼이나 나아졌음을 깨달았다. 제 상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준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야릇한 자극을 참아내는 건 다음 문제고, 본질적인 접근의 결과는 성공에 가까웠다.
“아, 문자.”
강호는 보내려던 문자를 다시 전송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런데, 지우려다 만 ‘돟ㅇ’ 메시지는 전송되어버린 후였다. 찬규의 손을 피하다가 또 잘못 누른 것이다. 강호는 당황하여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하는 소란의 목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내 삶에 이런 순간이 있다니, 믿기지 않을 만큼. 꿈결처럼 비현실적이고 한편으론 또 너무 현실감 넘치게 생생했다.
“좋다는 말이었어.”
사랑은 나를, 내가 아닌 사람으로 만든다. 웃게 하고. 울게 하고. 당황케 하며, 바보가 되게 한다.
“문자, 좋다는 얘기였다고.”
그리고 그런 게 전혀 부끄럽지 않게. 가슴 안엔 오로지 상대만 가득 차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게 하였다.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기분.
- 다행이다.
그녀가 가볍게 중얼거렸다. 다행, 그 정도에서 그칠 수 없는 그는 지금 앞뒤로 공중제비를 돌고도 남게 행복했다.
- 그럼 오늘 밤부터 합치고. 나머지 짐은 주말에 옮길까요?
오늘 밤. 그 단어가 이렇게 달콤한 말이었나.
“1층, 아니면 2층.”
- 아무래도 1층이 낫겠죠?
“그래. 그럼 내가 1층으로 짐 옮길게.”
- 네, 이따 가서 제 짐도 좀 치울게요. 같이 써야 하니까.
이런 대화를 나누다니 감격스러울 지경이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됐구나. 이전에도 같이 살았지만, 이제 격하게 더 같이 살게 되었구나.
“몇 시에 데리러 갈까?”
- 아, 저는 오늘 좀 늦어요. 많이는 아니고, 오후에 일이 많아서 조금 늦을 거예요. 택시 타고 들어갈게요.
“아니야. 전화해. 데리러 갈게.”
- 언제 퇴근하세요?
“지금.”
- 네?
강호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려고.”
- ……아직 낮인데요?
“일이 없어서.”
없긴. 업무가 많다 못해 제 턱밑까지 차올라 있지만 오늘은 도저히 회사에 있을 수 없다. 집에 갈 것이다. 가서 짐을 챙기고, 우리의 신혼집, 아니 신혼 침실로 이사할 것이다. 쓸고 닦고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내 공주님을 모셔와야지. 벌써 날아갈 듯하다.
“먼저 집에 가 있을 테니까 퇴근하기 전에 전화해.”
결혼한 지 한 달이 되어가고 마음을 확인한 건 고작 열흘이나 되었을까. 그런데도 오늘부터 진정한 신혼 1일 차에 접어들게 됐다. 만약 그냥 데이트를 시작한 연인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급전개였다. 결혼 먼저 하는 거, 이렇게까지 좋을 줄이야. 심장의 묵직한 울림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 ◆ ◇ 태석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사무실을 나섰다. 미팅 약속을 앞뒀다. 멍하니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다가 문이 열리자 걸어 나왔다.
“어? 여기 어디야?”
로비였다.
“아, 지하 내려가야 되는데.”
주차장에 가려고 했는데 1층에서 열린 문으로 무심결에 내려버렸다. 오늘 아침에는 샴푸를 다섯 번이나 했다. 샤워하면서 머리에 샴푸를 하고 씻은 후, 다시 무심코 또 샴푸를 하고, 아차 하며 씻어낸 후 또 샴푸를……. 그렇게 머리를 다섯 번 감은 것이다. 커피 머신에 캡슐도 넣지 않고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뜨거운 물만 나왔는데 그걸 모르고 또 그냥 마셨다. 확실히 심리상태가 정상은 아니다.
‘정신 차리자.’
태석이 지하 주차장으로 가려 돌아서려는데, 로비 안쪽 1층 카페 유리벽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백진상?”
저 자식이 여기 왜 있지? 태석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쪽으로 향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진상의 앞으로 기둥에 가려졌던 여자가 드러났다. 소란이 진상과 마주 앉아 있었다. ◇ ◆ ◇
“너한테 악착같이 받아내려고 빌려줬던 돈 아니었어.”
“갚아야 했던 돈이야. 더는 너와 나 사이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고.”
“나는 너 진심으로 사랑했어.”
소란의 입술 사이로 기가 찬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제 그만하잔 소리는 할 필요도 없다. 정말로 다 끝난 사이니까. 아까 강호와 통화를 마쳤을 때만 해도 기분 좋았는데. 갑자기 찾아온 진상 때문에 머리가 다 아팠다. 그것도 연락도 없이 와 로비에 기다리고 있다가, 외근 때문에 나오던 소란을 잡아채듯 카페에 데리고 온 것이다. 얼굴을 잘 아는 카페 종업원이 반갑게 인사했기에 소란은 화를 가라앉히며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듣게 된 말은 얼척이 없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니. 그런 말을 왜 하는 거야.
“너한테 이런 식으로 돈을 돌려받을 줄은 몰랐어. 결혼하자마자 강호 형 돈 빼내서 이것부터 청산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또 나왔다.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널 얼마나 생각했는데.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끊임없이 소란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말들. 헤어진 후의 진상은 너무도 교활하게 피해자인 척했다. 문제는 진상으로선 그게 ‘척’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지만. 소란은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으로 진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슬픈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내가 선의로 준 돈을 모욕한 거야. 우리 지난 시간을 다 무시한 거라고.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진상아,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
소란이 입을 열었다.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또박또박 씹어 삼키듯 하는 말에 진상이 긴장했다.
“네가 돈을 무기 삼아 나를 함부로 휘두르려고 한 건 아닐까. 혹시 내가 돈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 걸 반겼던 건 아닐까. 이걸 기회 삼아 내 팔다리를 다 묶어버리고 그 돈을 핑계로라도 옆에 두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듯 진상의 입이 꽉 다물렸다.
“그런데 진짜 그런 거였다면.”
“…….”
“너무 쓰레기잖아.”
톡톡 부러지는 발음이 아프게만 들렸다.
“그래서 아닐 거라고, 아무리 네가 별짓을 다 해도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말자. 어려운 순간에 선뜻 손을 내밀어줬는데, 그 고마움까지, 곡해하지는, 말자.”
“…….”
“그랬어.”
소란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진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히려 진상이 그 기에 눌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확실하게 알겠다.”
“…….”
“끝까지 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지는 널 보니까.”
“…….”
“너는 정말로 내 숨통을 쥐고 있었구나. 그 돈을 가지고.”
생계를 위협당하고,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이렇게 한 발짝 물러서자 너무나 잘 보였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그는 손안에 절 두고 희롱했다. 제겐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진상에겐 그저 수단에 불과했단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우리의 지난 시간을 무시하고 모욕한 건 너야. 내가 아니라.”
“소란아.”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소란의 싸늘한 얼굴. 진상은 소란이 제가 알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제가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걸려 헤어졌을 적조차 저런 얼굴은 안 했는데. 정말, 끝인가. 소란이 식당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먼저 돈을 빌려주면 어떠냐 했던 건 바로 그의 엄마 박 여사였다. 그런 큰돈을 덥석 빌려줘도 되나 간이 쪼그라들었던 진상을 박 여사는 다정하게 웃으며 다독여주었다.
“뭘 깊이 생각해. 네가 좋아하는 아이라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또 혹시 아니. 식구가 될 수도 있는데, 니 돈 내 돈 따질 것 있나 뭐.”
끝까지 거절하는 소란에게 억지로 쥐여주듯 돈을 빌려주고 나니, 채권자가 된 기분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그녀의 목줄을 쥔 느낌이라 우위에 선 듯 착각도 들었다. 어쩐지 소란을 마음대로 해도 될 것만 같은 기분. 그녀가 기를 쓰고 돈을 갚는 모습이 거슬린 건 그 때문이다. 진상도 이제야 알았다. 소란의 말대로, 그 돈은 확실히 제 무기였음을.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 소란은 제 손을 떠났고 전 무엇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와의 사이엔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에 진상은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았어. 잘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