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오늘부터, 침실 같이 쓸까요?2021.04.24.
태석은 혼란스러웠다. 소란이 먼저 결혼하자고까지 했다잖아. 그런 거짓말은 왜 한 거지?
‘아니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결혼을 먼저 하자고 한 것 자체는 사실일 수 있으니까. 속이 갑갑해진 태석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쳐들었다. 천장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미칠 노릇이네. 그 파일을 확인한 후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혼란스러움을 넘어선 상태였다. 소란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괴롭진 않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집들이까지 하겠다니. 부부로서 할 건 다 하겠다는 건데.
‘혹시 협박을 당했나?’
백강호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건 아닐까. 태석은 그동안의 두 사람을 차근차근 떠올려보았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 괴로워졌다.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완벽했잖아.’
강호가 소란의 전남친 백진상을 때려눕혀 경찰서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소란은 뭐라고 했나. 강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했다. 그때 마음이 찢어진 건 백진상뿐이 아니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제주도에 혼자 내려왔던 소란.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데려갔던 강호. 그날 백강호는 마치 질투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얼마 전 소란은 강호에게 선물을 하겠다며 쇼핑을 가기도 했는데. 그런데 그 모든 게 다 거짓이었다고?
‘대체 왜 그런 가짜 결혼을 한 거야.’
결혼이 장난도 아니고. 이게 말이나 될 일인가. 직업의식이 발동해 태석은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다. 대체 몇 년짜리 계약인가 해서. 놀랍게도 그 계약은, 종신이었다. 두 사람의 계약 기간은 정하지 아니한다. 계약 종료는 서로 간의 협의에 따른다. 대외적으로 실제와 다름없는 부부로서 주어진 의무를 수행한다. 이혼을 전제로 한 계약이 아니라는 소리다. 평생 가짜 결혼 생활이라도 할 셈인가. 둘 사이에는 돈까지 오갔다. 백강호는 우소란에게 정해진 기일까지 일정 금액을 입금한다는 조항이 분명히 쓰여 있다. 꽤 큰 돈이다. 그렇다면 백강호가 얻는 것은 뭐지? 태석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강호 할아버지께서 결혼 안 하면 투자금 빼버린다고 하셨다는데. 어떻게 딱 때맞춰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냐. 둘이 사귀는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어쨌든 우리 회사로선 정말 엄청 잘된 일이지.”
찬규가 했던 말이다. 할아버지, 그리고 투자금. 태석도 그땐 그냥 잘되었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귀가 딱딱 맞는 게 아닌가. 소란은 돈을 받았고, 강호는 할아버지의 투자금을 지켜냈고. 결혼으로 분명 둘 다 얻는 게 있었던 것이다.
‘이해관계가 얽힌 결혼이라.’
논점은 명확하고 생각보다 단순할 수 있다. 실리를 취하고 나면 ‘결혼’이라는 틀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태석의 생각은 점점 더 깊어졌다. ◇ ◆ ◇ 또다시 밤, 강호의 침실. 오늘도 입술이다. 소란은 상냥하게 물었다.
“어떠세요? 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한두 번에 바로 괜찮아질 것 같으면 내가 몇 년을 이렇게 살진 않았겠지.”
그는 오늘따라 유독 까칠했다. 역시나 이 과정은 강호에게도 쉽지 않은 것임이 분명했다. 소란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아픈 기억을 힘겹게 떨쳐낸 경험이 있기에 안다. 멀어지는가 싶으면 다시 숨통을 조이고, 내려놓는가 싶으면 다시 무겁게 짓누르는 게 상처였으니까. 그는 오죽할까.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고 오늘은 이걸로 마칠게요.”
소란은 마인드 컨트롤했다. 진정해. 이건 전혀 야하고 섹시한 상황이 아니야. 그를 돕는 일이지. 소란은 폭주하는 욕망을 간신히 겨우 잘 달래며 그의 목에 부드럽게 입술을 찍었다. 살갗이 느껴진다. 미세한 떨림까지 전해졌다. 알잖아, 이건 울산바위인 거. 나는 지금 바위에 뽀뽀하는 중이야. 속으로 수없이 세뇌하며 소란은 무사히 입술로 자극 주기를 끝마쳤다. 떨어져나오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엔 또 한 번 심장이 두근 뛰었다.
“이제 이런 자극들은 강호 씨에게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거, 느낄 수 있겠죠? 익숙해지다 보면 또 다른 자극들까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소란은 최선을 다해 그를 안심시켰다. 목숨을 위협받던 열여섯 살 소년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저는 정말요.”
“…….”
“강호 씨한테 도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요.”
나로 인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누구도 당신을 해할 수 없고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그렇게 당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기쁘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나야말로 기뻐.”
강호가 옅게 웃으며 수긍했다. 오늘의 치유도 무사히 끝났다. 소란은 성실한 힐러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는, 아내로서 어디 한번……. 그때 강호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피곤할 텐데 내려가서 쉬어야지.”
“아.”
분위기가 편하게 풀어진 틈을 타서 용기 있게 다가가 포옹이라도 해줄까 했던 소란은 멈칫했다. 더 이상의 질주를 용납하지 않고 언제나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이 남자.
“따뜻하게 하고 자. 보일러는 잘 틀어놨지? 온열용품 같은 거 필요하면 말해.”
최근 들어 굉장히 융숭한 대접을 받는 듯한 느낌이긴 한데.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좋긴 하지만, 너무 아껴주시고 또 너무 지켜주셔서 소란은 다시금 그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백강호는, 역시 선비다.
◇ ◆ ◇ 소란은 그에게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 극복 차원이 아니라,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포옹하다 보면 당연히 입술은 입술을 찾게 될 터. 그러다 밤도 깊었겠다, 치유를 위한 자극이 아니라 서로 몸이 동하여 느끼는 자극으로 키스는 점점 더 깊어질 거고.
“아……. 몰라.”
생각만 해도 온몸의 세포들이 핑크빛으로 물드는 듯하다. 어느덧 대자연의 날이 지나가고, 마침내 소란은 자유의 몸이 됐다. 그와 한집에 있게 된 뒤 처음 맞게 되는 주기라서 마음이 은근히 불편했는데 생각보다 무사히 지나갔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슬슬 생활 공간을 합치는 문제도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나 기회는 잡지 못했고, 가벼운 스킨십의 타이밍조차 놓쳐버리고 말았다. 강호는 말만 급진파였지,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대감님이시다. 엣헴. 그 대감님이 너무 섹시하셔서 문제지. 악의 없는 색기에 휘둘리는 자신만 불쌍할 따름이다. 절레절레. 소란은 고개를 저었다.
“자중해야지.”
마음을 원한다고 했던 그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강호는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깊어지는 사이를 원하는 게 분명했다. 제가 너무 들이댔다가는 있던 정도 뚝 떨어지고 말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대로는 바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소란은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 어플에 접속했다. 예능 프로그램 하이라이트 클립이라도 보고 웃다 보면 이 상황을 잊을 수 있겠지. 첫 화면에 들어가 뭔가 찾는데. 자꾸만 들이대는 여친에게 점점 정이 떨어집니다. 헉, 이게 뭐야. 방금 자신이 한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문구가 어느 동영상의 섬네일에 떡하니 박혀 있는 것 아닌가. 동영상 정보에는 ‘늑대들의 고민 상담소’라 쓰여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터치하니, 연애 상담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재생되었다.
- 남자라고 다 그것만 밝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 맞아요. 사연자분은 보다 진지한 관계를 바라셨던 것 같은데, 여자친구분이 적극적이다 못해 선을 넘는 경향이 있으셨다는 거죠.
가슴이 찔리다 못해 뼈까지 아프다. 진지한 관계. 그거 나도 원하는데요. 무조건 선부터 넘으려는 게 아닌데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소란은 쭈글쭈글 혼자 변명했다.
-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제가 예전에 라디오 진행할 때, 남자친구가 정말 자신을 사랑해서 그러는 건지 아닌지 헷갈린다고 했던 여성분들 사연 정말 많았거든요. 이제는 여자친구분의 과도한 스킨십 때문에 고민하는 남성분들이 계시는 시대가 되었네요.
- 사실 남자와 여자가 문제가 아니죠. 아마 이전에도 그런 문제는 충분히 있었을 겁니다. 그걸 표현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일 뿐. 그런 점에선 시대가 조금 달라진 건 맞는 말이네요.
- 인간이면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과 스킨십하고 싶어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여기 사연 주신 분의 여자친구분은…….
소란은 침을 꿀꺽 삼키며 패널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 맞습니다. 오로지 스킨십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분도 정이 떨어진다고까지 표현하시는 거겠죠.
- 이거는 문젭니다. 모든 일엔 단계가 있고, 절차가 있고, 더욱이 인간관계에는 서로 간에 배려와 이해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 이 여자친구분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기회만 엿보려고 한다는데.
핑계 아닙니다. 아니었어요. 소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촉각 방어를 극복하자는 노력은 진심이었어요. 되도 않는 핑계를 만들어 그의 신성한 신체에 접근하려고 했던 것, 정말 아니었습니다. 맹세해요.
- 자신의 몸이 여자친구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느껴진다고 할 정도라니.
- 여자가 들이대는데 남자는 무조건 땡큐 아니냐, 이렇게만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 네, 충분히 수치심과 모멸감, 느낄 수 있어요. 남자인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정상인가 하는 사연자분의 고민,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하아아. 설마, 사연을 보내셨나요. 말없이 2층을 올려다보는 소란의 눈이 슬프기 그지없었다. ◇ ◆ ◇ 점심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시간, 강호의 집무실. 오늘따라 강호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오전에 릴레이로 이어진 회의가 너무 힘들었다며 소파에 죽치고 누운 찬규가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욕구불만인 줄 알겠네.”
“뭐?”
“저거 봐. 저거 봐. 나 혼잣말인데 막 무섭게 반응하고. 귀는 또 엄청 밝아.”
찬규는 소파에 엎드려 누워 노트북을 펼치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중이었다. 아들 서후의 사진과 영상을 잔뜩 집어넣고 있는 걸 보니, 자료를 자동으로 정리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모양이다. 피곤하다더니 쉬지는 않고 또 머리를 쓰고 있다. 물론 찬규에겐 이게 휴식이지만.
“계싸가지는 까칠하고, 백싸가지는 으르렁거리고. 하여튼 성격 좋은 내가 참아야지.”
포스 강한 두 친구 사이에서도 찬규는 전혀 밀리는 법 없이 여유로웠다. 심심풀이 삼아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깐죽거리기 스킬까지 동시 사용이라니. 참 대단한 멀티플레이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새신랑 뭐 고민 있으면 이 형아한테 다 얘기해도 돼.”
친규는 여전히 시선과 손은 노트북에 둔 채 집중하면서 강호에게 말을 건넸다.
“형아?”
“형님은 너희 형님 한 분뿐이라며. 그럼 나는 형아지. 해봐, 찬규 형아.”
어째 강호가 결혼한 후로는, 자신이 선배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더 으스댄다. 그런데 욕구불만이라니. 묘하게 예리한 놈.
“네 방 가서 쉬어라. 좋은 말로 할 때.”
“난 여기가 좋은데? 볕이 잘 들어.”
“사무실 바꾸든가.”
“싫은데? 좀 어둑어둑해야 작업이 잘되지. 내 방이 짱이야.”
“그럼 네 방 가라고.”
“지금은 쉴 건데?”
강호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친놈이지. 홍찬규랑 무슨 말을 해. 가뜩이나 소란과 가까워지기가 어려워 한껏 예민해진 차였다. 고백하고 서로 마음까지 통했는데 그다음이 뭐 이렇게 힘든 건지.
“이제 이런 자극들은 강호 씨에게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거, 느낄 수 있겠죠?”
아니, 위험해. 대단히 몹시 아주 많이 위험하다고.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성공적인 치유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에의 위협이라든가, 두려움이라든가. 그런 것보다 그녀가 주는 자극이 훨씬 더 강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으니까.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고 했나. 제 경우 자극은 자극으로 덮는 거나 마찬가지다.
“후우우.”
절로 비집고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다. 강호는 묵직한 회전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긴 다리를 꼬아 책상 끝에 올렸다. 홍찬규가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지루한 장마 같은 기다림은 언제쯤 끝나려나. 오늘 밤 미친 척 들이닥쳐버려? 그랬다가 아직 몸도, 마음도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하면? 지금 이대로도 관계가 좋은 편인데 그마저 망쳐버리게 되면? 그건 누가 책임질까. 애초에 걸리적거리는 요소들을 확실히 제거할 방법으로써, 소란 스스로 다가오게끔 하려 했던 것인데. 웬 철옹성이 끄떡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우소란 정말 어려운 여자다.
‘그래, 언제는 쉬웠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오랜 기간 그녀를 멀찍이 바라보기만 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기적이나 다름없지 않나. 성급하게 굴다 손에 쥔 것마저 다 놓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오늘도 마음을 비워가고 있었다. 휴대전화에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애써 가라앉히던 마음은 위선이었는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마치 무중력 의자처럼 등받이를 한참 뒤로 꺾어 기대 누운 채로 강호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 확인해 뭐 해. 어차피 업무 관련이겠지. 세상 다 귀찮다. 아무것도 하기 싫…….
“……어?”
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콰다당!
“뭐야, 뭐. 왜 그래?”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던 찬규가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는데. 책상 너머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의자와 그 옆에 강호가 쓰러져 누워 있었다. 백강호가 지금 의자에서 떨어진 거야?
“야, 괜찮아?”
다쳤나 싶어 찬규가 서둘러 다가가다가 멈칫했다.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선 강호가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채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다.
“뭐야……. 무서워…….”
넘어졌는데 왜 웃어?
“설마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거야?”
의아해하는 찬규를 뒤로하고 강호는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메시지를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빈 주먹을 말아쥐고 입가를 막아보려 했지만, 새어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오늘부터, 침실 같이 쓸까요?]
그녀의 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