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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미치게 예뻐해주고 싶어서 (49/112)

#49화. 미치게 예뻐해주고 싶어서2021.04.20.

강호는 생각했다. 제가 여자의 목에 흥분을 느끼는 타입은 결코 아니라고. 가끔은 회식 자리에서 제 옆에 다가앉아 아, 덥다, 하며 머리카락을 들추어 올리는 직원도 있었다.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아챌 만큼 노골적이었다. 신체의 가녀린 부분을 드러냄으로써 성적으로 어필하려는 노력이겠지만, 그건 제게 아무 소용 없었다. 상대가 아름답지도, 섹시해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그는 소란의 길고 하얀 목에 느릿하게 다가가 입술을 댄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이대로. 할 수 있는 만큼 깊게 맛볼 수만 있다면. 그녀의 여린 피부를 흠뻑 빨아들이고, 은밀하게 터져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욕심껏 입술을 탐했던 순간처럼 지금 그녀의 목에도 하염없이 키스할 수 있다면.

“……아.”

결국 소란이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밀어냈다. 강호가 입술을 떼며 떨어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성을 놓아버릴 뻔했다.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 ‘입술’이라는 나름의 강수를 두었는데 넘어간 건 자신이다.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소란이 굳게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 수 있어요.”

매우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저 입술을 대기만 했을 뿐인데도 속절없이 흔들린 저에 비해 소란은 진지하기만 했다. 사랑을 속삭이며 열망을 드러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프로페셔널 직업인 같은 태도다. 본분을 잃지 않는 그녀가 야속하면서도, 미친 척 더 세게 나갈 걸 그랬나 후회까지 되었다.

“그럼 이쪽으로 해볼게요.”

주사를 맞힐 준비라도 하듯 그녀가 강호의 목에서 터를 골랐다. 로션을 바르지 않은 쪽이다. 그의 턱을 잡고 살짝 돌려 목을 드러내게 한 후, 소란이 바짝 다가왔다. 이번엔 그녀의 차례였다. 추웁. 물기가 느껴질 만큼 촉촉한 입술이 목의 예민한 부분에 뭉근히 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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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미치겠군. 스스로 덫을 판 여우가 따로 없다. 닿아 있던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살짝 옆을 또 눌렀다. 달아오른 호흡이 간질이듯 목을 괴롭혔다. 입술과 숨결로 전해진 짜릿한 자극은 목에서부터 등줄기로, 손끝으로, 발끝까지 내달렸다. 목을 조이는 듯한 고통은 느낄 틈도 없다. 그러기엔 분위기가 너무 야했다. 트라우마가 다 뭔가. 절 잠식해간 두려움 따위,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없다. 성실하게 입을 맞춰 자극을 선사하는 그녀로 인해, 제 목이 이다지도 예민하게 성감을 느끼는 부위인지 처음 알게 됐다.

“된 것 같죠?”

어느새 그녀가 훅 떨어져서 물었다. 되긴 뭐가 돼. 사탕을 빼앗긴 아이의 심정이 돼 그녀의 손목이라도 잡아서 당기려는 참인데.

“오늘은 이만하겠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자극은 좋지 않다고 해서요.”

소란은 진지한 얼굴로 시간 종료를 알렸다. 여전히 그녀는 극복 프로젝트에 진심이다. 이게 목 키스라고까지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받는 사람 못지않게 하는 사람도 몸이 동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아까 나도 그랬는데? 사고 칠 뻔했는데? 그녀는 트라우마 극복 차원에서 시도한 일이란 걸 잊지 않은 듯 중심을 아주 잘 잡고 있다. 이렇게 되면 절 위해 노력하는 소란을 두고 자신만 미쳐 날뛰는 꼴이다. 짐승. 그것도 매력적인 짐승이 아니라 아주 추한 짐승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처음엔 그녀가 한 달에 한 번 맞이하는 시기라는 걸 알게 되어, 사정을 배려하고자 했다. 그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강호는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했기에, 적절한 자극을 가하려던 것뿐이다. 열쇠는 소란에게 건넸다. 여는 건 그녀의 마음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힘들 줄이야. 스스로 인내심이 강하다고 자신만만했지만 아무래도 과대평가였나 보다. 잠깐도 못 참겠다. 너무나 예뻐서, 마음껏 예뻐해주고 싶은데. 밤이 새도록 품에 안고 원 없이 예뻐해주고 싶은데. 당장이라도 그래, 나 짐승이다, 하고 달려들어 예뻐하고 또 예뻐하고, 미치게 예뻐해주고 싶어서 환장하겠는데. 고매하고 단정한 힐러의 모습으로 서 있는 소란을 보면서, 숨을 꾹 눌러 참은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래.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지.”

그뿐이었다. 새신랑의 사리는 오늘도 넘치게 생성 중이다.

“네. 정리할게요.”

소란은 서둘러 물건들을 추렸다. 후끈 달아올랐던 공기는 강호 혼자 느낀 것인지도 몰랐다. ◇ ◆ ◇

“후우우.”

1층에 내려온 소란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촉각 방어 극복을 도와줄 물건들이 담긴 쇼핑백을 거실 테이블에 툭 내려놓고는 소파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심장 박동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다. 쿵쾅쿵쾅. 다른 때보다 훨씬 빠르고 크게 뛰는 심장.

“이러다 내가 죽겠네.”

소란은 손을 들어보았다. 아직 그의 피부에 닿았던 손바닥의 감촉이 생생하기만 했다. 로션을 가득 발라 그의 목 한쪽을 문질렀다. 깃털이고, 스카프고, 붓이고 거의 붙다시피 해 진행했지만, 거리감 없고 직접적인 접촉은 오늘이 처음인 셈이다. 거리가 가까운 것이 제일 문제였다. 그의 숨소리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곳에서 자극을 가하는 일이 도리어 견디기 힘들었으니까.

‘그 얼굴이 유죄야, 유죄.’

멀쩡히 있는 사람 심장을 뒤흔드니 그건 모두 강호의 죄가 분명하다.

‘가만히 있어도 섹시 터지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냐고. 원인 제공한 사람이 잘못이지.’

살짝 찡그린 눈썹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도, 잠깐씩 드러나는 불쾌한 듯한 표정에 내려앉는 심장도, 소란 혼자 참아내야 했다. 절대 내색해선 안 된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잖아. 입장을 바꿔 내가 괴로워하는 그 순간에 상대가 흑심을 품고 달려든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참 한심한 일이다. 강호를 위해서 하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스스로 괴로운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도구와 손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렸는데 하물며 입술이라니.

‘그래……, 하아, 입술.’

입술은 이 프로젝트의 끝판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민한 자극의 끝. 목과 입술의 만남에, 침이 마르고 숨이 다 막혔다. 그가 먼저 제 목에 키스하듯 입술을 대었을 땐 이대로 녹아 없어져도 할 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시범 보인 대로 해보긴 했지만 정신이 콩밭에 가 있어서인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너무 야했어…….’

치료 목적도, 극복 차원도 아닌 그저 연인 사이의 스킨십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떨어졌더니, 그 역시 기다렸다는 듯 몸을 조금 물렸다. 한순간에 어색해질 뻔한 공기를 그녀 나름대로 정신 챙기고 잘 수습했다. 감정이 시시각각으로 드러나서 좋을 거 없기에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흑심 따위 한 톨도 없다는 듯 뻔뻔하게 굴었다.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온 것까진 좋았는데, 하아, 자꾸만 입술 사이로는 한숨이 비집고 흐른다.

“자, 우소란. 정신 차리고 생각을 좀 해봐.”

소란은 급기야 혼잣말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욕정에 휘둘려 미친 헛소리를 지껄였을 때도, 강호 씨는 바로 받아들인 게 아니었잖아. 시간을 두고 제대로 공들여 고백부터 했던 남자였어.”

진짜 멋있는 그 남자.

“선비야, 선비.”

겉으로는 웬만한 여자들 다 휘어잡을 것처럼 세상 야하게 생겨서는, 알고 보니 무척이나 정중하고 교양 있는 남자였다.

“그래, 그래, 선비님이셔.”

지독하게 퇴폐적인 이미지 때문에 오해를 사는 것일 뿐, 실상은 선비라는 걸 인정하자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녀 안의 유교걸이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아닌데. 사실은 그게 아닌데. 선비가 아니라 엄청난 여우, 그걸 넘어서서 미쳐 날뛰는 짐승이라는 건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제 헛다리 때문에 여우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그게 또 여우를 얼마나 자극하고 있는지까지도. 아무것도 모른 채 소란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실로 향했다. ◇ ◆ ◇ 태석의 집. 서재에 앉은 태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문서. 결혼 합의 계약서 세부 조항이 가득한 문서에는 백강호와 우소란의 이름이 들어 있다. 태석은 복잡한 얼굴로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문서를 스크롤했다. 몇 번을 봐도 믿기지가 않는다. 구체적인 결혼 시기와 보상, 동거에 따른 생활 규칙, 본 계약에 대한 함구 조항까지.  

“누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던 그들의 결혼 소식에 태석은 소란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녀가 백강호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제 하루하루는 엉망이 되었다.  

“두 사람이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니 너무 신기해서. 백번 양보해서 사귀기로 했다고 하면 놀랍긴 하지만 그래도 수긍은 할 텐데, 결혼이라고 하니까.”

“제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어요.”

  소란은 제가 구애하고 청혼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태석의 포기는 당연하다. 소란에 대한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으니까. 그녀의 결혼식에 가서, 강호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이 마음이 사랑이구나 알았으니까. 뒤늦게 깨달은 마음은 오직 제 몫이니까. 막 부부가 된 그들에게 제 존재가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홀로 어렵게 참아내던 중이었다. 희망조차 없었다. 끝난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유부녀가 된 그녀를 향한 외사랑이니, 두 사람이 이혼이라도 하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게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것도. 그런데……. 합의에 의한 계약이라고? 두 사람의 결혼이?

“후우.”

태석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책상을 펜 끝으로 툭툭툭 두드렸다. ◇ ◆ ◇ 태석이 그 계약서를 발견한 건, 며칠 전 집에서였다. 주말에 급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USB를 꺼내 노트북에 꽂았는데 어찌 된 일이지 기본 보안폴더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비밀번호 오류였다. 내가 비밀번호를 바꿨나 싶어 온갖 번호를 동원해보았지만 콧대 높은 보안폴더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러다 오류 누적 횟수가 쌓여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될까, 태석은 보안에 능통한 지인에게 긴급 도움을 요청했다.

“마태석이 비밀번호를 다 까먹어? 별일이네.”

“나이 먹나 봐. 급한 자문 건인데 자료가 다 거기 있어서, 바로 가능할까?”

“보자.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안 되는 건 아니야. 일단 자료 복사 땡겨서 파일 가지고 좀 만져보면 우회로 접근은 가능할 것 같은데. USB는 초기화할 거야?”

“아니, 일단 자료만 열어줘. 괜히 손댔다가 다 날아갈까 봐.”

“오케이.”

꼼짝 않고 앉아 고생해준 지인 덕분에 USB로부터 노트북 하드에 보안폴더 내 파일들을 옮길 수 있었다.

“자료 맞는지 확인하고 나서, 이거 초기화하려면 이 매뉴얼대로 하면 돼.”

“그래, 고맙다.”

  지인이 돌아가고 나서 부랴부랴 노트북 앞에 앉아 자료를 찾았는데. 그때 태석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폴더에 들어 있는 파일들은 제 것이 아니었다.

“아, 뭐야. ……이거 장 변네 팀에서 진행했던 사건인데. 우 변이 조사했던 자료들. 이것도 그렇고. 다 우 변 건데? 아, 설마 그때 바뀐 건가.”

그래서 안 열렸던 거구나. 그제야 소란의 USB와 제 것이 바뀌었다는 걸 깨달은 태석이 그녀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막 들던 참이다. 이건 뭐지? 폴더 안 가장 아래쪽에 꽁꽁 숨겨놓듯 자리한 또 다른 폴더가 눈에 띄었다. W W가 뭘 뜻하는 거지? 망할 호기심은 태석으로 하여금 그 폴더를 클릭하게 했고. 그렇게 계약서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백강호와 우소란의 결혼 계약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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