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입술은 어때?2021.04.17.
그의 방에서 나와 소란은 1층으로 내려왔다. 참았던 숨을 하아, 몰아서 내쉬었다. 굉장히 위험한 곳에 맨몸으로 내던져졌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기분이다. 2층 그의 침실은 그야말로 사지였다.
“아니, 트라우마 때문에 힘든 사람을 앞에 두고 나는 왜 불순한 생각이냐고.”
제발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소란은 제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뭐야, 왜 이렇게 불타. 완전히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깃털이 닿았을 때 강호의 모습이 눈앞에 박제가 되어버린 듯 생생했다. 그의 날카로운 얼굴이 괴로움으로 무너졌다. 눈썹이 일그러지고 숨통이 조이는 듯 목을 감싼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또 역설적으로 너무나 음란해 보였다. 게다가 상을 달라니. 잘하면 상을 달라니! 그 상 입술로 드려도 될까요, 바로 물어볼 뻔했다. 하아. 그보다 더한 상도 줄 수 있는데.
“아아, 나는 쓰레기야.”
소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하게 생긴 강호의 탓을 하기도 지쳤다. 그가 무슨 죄랴. 끊임없이 그를 욕심 내는 자신이 문제라면 문제겠지.
“일단 상태가 좀 나아져야 할 거 아냐. 그러려고 준비한 건데.”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보며 설레는 마음, 두근거리는 심장, 닿고 싶은 욕망, 그 모든 걸 이겨내며 소란은 제 본분을 잊지 않기로 했다. 그나마 이만큼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그 사실은 소란의 의지를 불태우기 충분했다. 강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게도 느껴졌다.
“그러니까 멍청하게 굴지 말자.”
촉각 방어 극복. 주거 공간 병합을 코앞에 둔 지금, 그녀가 바라보고 달려가는 유일한 목표지점이다.
◇ ◆ ◇ 백 회장 본가.
“몸은 좀 어떠세요? 우리 집안 최고 어르신인 회장님께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계셔야 저희도 힘이 나지요.”
박 여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결혼식 때 그 창피를 당하고서도 박 여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사람 좋게 웃고 있다.
“어쩐 일인가. 자네가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온 게야.”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찾아뵙나요. 새해도 되었고 겸사겸사 인사드리려고 왔죠. 애들 아빠는 요즘 워낙 일하느라 바빠서요. 저 혼자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구정 땐 같이 인사드릴게요.”
박 여사는 뒤끝 없이 활달하게 대답했다. 백 회장은 기가 찼다.
“자넨 결혼식도 제대로 못 보고 쫓겨나다시피 했으면서도 서운한 게 없는 겐가.”
없을 리가 없을 텐데.
“서운하긴요. 그날은 제가 좀 지나쳤고, 회장님께선 지당한 말씀을 해주신 것뿐인데요. 저희 가족이 이만큼 평안하게 잘 지내는 것도 모두 회장님 은덕인데, 제게 옳은 소리 해주셨다고 서운해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백 회장은 조소를 감추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은 아우의 며느리. 성격이 밝고 시원시원한 그녀는 남편인 백 사장보다 뭐든 뛰어났다. 상황을 판단하여 빠르게 처신하는 능력도 있고, 시부와 남편으로부터 새어 나갈 돈을 틀어막아 재산을 불리는 감각도 탁월했다. 백 사장의 회사도 박 여사가 맡아 운영했더라면 지금처럼 어려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그 집에 박 여사가 있으니 이만큼이나마 풍족하게 살아나가는 것이지 싶다. 백 회장은 조카 내외를 좋게 보려 애썼다. 아무리 아우가 한심하고 밉다 한들 그 감정이 자손까지 내려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래저래 욕심을 부리듯 제 비위를 맞추며 들러붙는 것도 참아주려 했다. 백화푸드를 이용해 어떻게든 부를 더 쌓아가려는 것도 모른 척해주었다. 그 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백 회장이 이때껏 허투루 살아온 것은 아니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박 여사를 지켜봐왔다. 박 여사가 드러내고 큰 잘못을 한 적이 없는데도 그녀를 보는 가슴은 어느새 불쾌하고 찜찜해졌다. 결국 결혼식 날, 숨은 발톱 끝을 드러냈던 건 박 여사의 패착이었다.
“소란이 그 애가 보통 영악한 게 아니라서, 아마 똑소리 나게 잘 살긴 할 거예요. 제 며느리가 될 줄 알았는데 조카며느리가 되어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강호는 부디 뒤통수 맞는 일 없이 행복하게…….”
소란의 험담을 제 앞에서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것도 아닌 척 교묘히 꾸민 얼굴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워낙 제가 진상이 짝으로서 아끼며 품었던 아이인지라, 저도 그날은 감정이 앞섰던 것 같아요. 다 끝난 일이고 강호와 또 좋은 인연을 맺었으니 그걸로 축하했어야 하는 자리였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런들 그녀를 달리 보기 시작한 백 회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거두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백 회장은 일부러 감추었다. 어딘가 모르게 음침함이 느껴지는 박 여사를 제대로 파악할 때까지는 그래야만 했다.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내가 다 부끄럽군. 인연이 깊은 사이였다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던 것을.”
진심이 아니다. 박 여사를 안심시키는 말이다. 제 이야기가 통했다고 여겼는지 박 여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회장님께선 이렇게 아량이 넓으시니 큰일도 해내시고 한 것 아니겠어요. 정말이지 존경스럽습니다.”
살랑거리는 말에 백 회장은 억지로나마 옅은 미소를 띠어 보였다.
“소란이가 사실 생활력도 무척 강하고 얼마나 야무진지 몰라요. 아마 강호 하는 일에도 큰 힘이 되어줄 겁니다.”
“그런가.”
“그럼요. 다만 그 애 오빠하고의 관계가 좀 찝찝해서 그렇지. 아시겠지만 피 안 섞인 의붓남매란 사실이 좀 그렇잖아요. 워낙에 둘 사이가 좋아서 저도 그게 참 마음에 걸리고 했거든요. 물론 저야 속이 좁아 그렇게 생각할 순 있지만 배포 큰 회장님이야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으실 테죠.”
“의붓남매?”
“어머, 회장님. 모르고 계셨어요? 어머, 제가 괜한 소리를.”
박 여사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의도한 발언이 분명했다. 단지 백 회장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되물었을 뿐이다.
“아휴, 그래도 아실 건 아셔야 하는데. 숨겼나 봐요……? 앙큼하게.”
박 여사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소란이 엄마가 재혼해서 만난 남자 아들이라대요. 서로 데려온 자식들인 거죠. 그 애 엄마는 일찍 죽었고, 아빠도 오래 투병하다 죽었는데, 말이 남매지 그냥 남녀 사이인 거잖아요. 내내 붙어 있었는데 애 엄마, 아빠 다 죽고 둘만 남아 아무 감정이 없었을까 싶어요.”
“…….”
“그래서 우리 진상이한테 마음을 완전히 안 열었던 건가 싶고. 하물며 그 애 오빠 식당 때문에 돈 필요하다고 뜯어 가기까지 해서……. 아, 이런 말씀까지 드리는 건 좀 그렇죠.”
박 여사는 또 일부러 말을 끊었다. 백 회장은 어디까지 가나 보기 위해 독려했다.
“아니, 계속해보게. 나도 알아야지.”
“네, 아셔야죠. 그 애 오빠가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는데 거기서 돈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진상이가 마음이 약하니 빌려주고 했던 거예요. 오빠 생각을 끔찍이 하더라고요. 진짜 남매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까 싶을 정도로 서로 아주 극진하고요.”
백 회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을 어린 남매를 두고, 이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백 회장이 속내를 감추고 그녀의 말을 잘 들어주자, 그 숨은 발톱이 점점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매우 썩은 발톱이었다.
“그렇게 뜯어 간 돈을 이날 이때까지 제대로 갚지도 못하고 찔끔거려서 진상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이제 필요 없어졌다고 진상일 차버리더니, 그 애 잊지 못해 찾아가는 우리 진상일 빚쟁이 취급하면서요.”
“진상이도 마음이 많이 상했겠군.”
“그럼요. 그때 받은 상처는 말도 못 하죠. 그러더니 갑자기 강호와 결혼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게다가.”
“……게다가?”
“결혼하자마자 빌려 갔던 돈을 한 방에 떡 갚는 거예요. 휴. 돈 때문에 강호랑 결혼한 게 확실하구나 싶더라고요. 그게 다 누구 돈이겠어요. 강호 돈이죠.”
강호 돈이 아니다. 백 회장의 돈이었다. 그걸 박 여사가 알 턱이 없다.
“친오빠도 아닌 의붓오빠 때문에 뜯어 갔던 돈을, 결혼하고선 남편 돈 끌어다가 단번에 갚아버리고. 그 애가 이래저래 대단하긴 해요, 정말.”
박 여사는 세 치 혀를 살살 놀리며 백 회장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오늘의 용건은 바로 이것이었다는 듯 그 속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처음 강호가 결혼할 상대라며 소란을 데려왔을 때, 그 아이에 대해 알아보려면 그 집 주방의 숟가락이 몇 벌인지까지 다 알아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백 회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만 떠올렸다.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이루는 게 꿈이었던 제 아들의 비참한 죽음만을 기억했다. 기준을 두고 사람을 판단하는 일 따위, 손자에겐 절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여느 보통 집에선 자식이 결혼한다고 하여 상대의 뒷조사까지 하진 않으니까. 그저 강호를 믿고, 그 선택을 지지해줄 뿐, 백 회장은 다른 무엇도 하지 말자 다짐했다. 그래서 소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첫 만남에서부터 정감이 가서 좋았다. 진상과 9년을 만났다는 사실은 결혼식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백 회장은 상관없었다. 강호가 괜찮다고 하니 백 회장도 더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쪽과는 인연이 아니었을 뿐, 지금은 강호와 부부의 연으로 만나 살게 됐다는 게 중요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참 특별한 남매지간인 모양이군.”
“그렇죠? 결혼하기 직전까지도 한집에 같이 살고. 다 큰 성인 남녀가 서른이 넘도록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인데요. 저는 그게 내내 찜찜하더라고요.”
백 회장의 맞장구에 박 여사가 격하게 공감하며 보탰다. 진상과 9년을 만났다는 게 상관없었듯 백 회장에겐 소란과 그녀의 오빠가 의붓남매라는 사실도 찜찜한 일이 전혀 아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 진상에게 빌렸다는 그 돈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이었다. 소란의 오빠 성준의 식당에서 일어났다는 화재 사고. 그 사고로 인해 필요해진 돈. 원래 함정에 빠진 당사자는 빠져나오기 급급해 알 수 없다. 그 함정을 판 자가 누구인지를. 그러나 옆에 서서 지켜보는 자라면 알 수 있다.
“내가 조금 더 알아봐야겠구나.”
“네, 그러셔야겠어요.”
그 말이 반가운 듯 박 여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혀로 분탕질 치고 가겠다는 목적에 어느 정도 달성한 모양이다. 백 회장은 찻잔을 들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얼마 남지 않은 삶.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은 듯했다. ◇ ◆ ◇ 소란이 준비한 촉각 방어 극복 프로젝트. 첫날 깃털에 이어 다음 날은 붓이었다. 그다음 날은 부드러운 스카프. 그리고.
“오늘은 로션을 발라볼게요.”
소란이 깨끗하게 씻은 손을 펼쳐 보였다.
“로션?”
“네, 이번엔 물체가 아니라 제 손이 직접 닿는 거라 어쩌면 더 거북하실 수도 있어요.”
강호는 앞서 경험한 깃털, 붓, 스카프도 미친 듯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시도했더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했다. 목에 닿는 자극보다도 소란으로 인해 받는 시각적, 후각적, 청각적 자극이 훨씬 강렬했기 때문이다. 목이 졸리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치유의 손길이 절 어루만졌다. 그녀를 향한 음심을 스스로 잘 달래기만 한다면, 극복을 위한 노력으로는 나쁘지 않은 건 확실했다. 하루아침에 나아질 순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익숙해지는 걸 느끼고 있으니까. 그런데 로션이라. 이 자극, 좀 강할 것 같은데.
“혹시 너무 불쾌하거나 싫으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강호가 고통스러울까 걱정하는 얼굴로 소란은 로션 뚜껑을 딸깍 열었다. 향긋한 향기가 풍겼다. 소란은 손에 로션을 쭉 짜냈다.
“시작할까요?”
그녀는 손바닥에 짠 로션을 가만히 문질렀다. 열기가 퍼진 손이 제게로 뻗어졌다. 어둑한 그의 시선이 소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문 채로 천천히 한 손으로 강호의 목 옆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끝에 귓불이 스치고, 턱이 스치고, 곧게 뻗은 뼈가 닿았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각들이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무너져갔다. 심장이 거세게 날뛰었다. 숨이 조이는 느낌은 점차 멀어졌다. 미끌거리는 촉감 아래 뜨거운 기운이 알싸하게 흩어졌다. 통제가 가능한 범위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그녀의 손이 지금 제 목을 문지르고 어루만지고 있다는 사실에 강호는 낮게 한숨을 흘렸다. 뜨거웠다.
“괜찮으세요?”
늘 하는 질문. 거기에 늘 괜찮다고 했던 대답. 오늘은 그럴 생각이 아니다. 괜찮냐고? 아니, 괜찮지 않아. 전혀. 나는.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은데.”
“아.”
놀란 소란이 얼른 손을 떼었다. 어떡하지, 하는 얼굴이었다. 강호는 눈썹을 가만히 일그러뜨린 채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아니.”
강호가 그녀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커다란 손안에 들어온 손목은 빠져나갈 틈이 없다.
“이것보단 다른 자극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아서.”
“다른 자극이요?”
그의 시선이 소란의 둥근 이마에서 눈을 거쳐, 작고 오뚝한 콧날을 따라 점점 내려갔다. 꽃잎처럼 예쁘게 다물린 입술에 닿은 순간. 그가 천천히 말했다.
“입술은 어때?”
“네, 입술 좋죠. ……네, 네?”
소란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래. 입술.”
뭘 뜻하는지 모르겠어서, 아니면 너무 잘 알겠어서, 어떤 이유로든 소란은 순간 탁 굳어버렸다.
“입술이, 여기에.”
강호가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다시 제 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개를 살짝 틀어 올리고 드러낸 목이 무척이나 섹시했다. 저기에 지금, 입술을 대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보여줄까?”
질문이지만 전혀 질문 같지 않은 음성. 그건 대답을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강호가 소란의 턱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들어 올렸다. 여리고 새하얀 목이 곧게 드러났다. 미치겠다. 이대로 호흡곤란이라도 올 것 같은데, 어쩌면 좋지. 그때.
“……이렇게.”
나른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비틀어 소란의 흰 목에 입술을 묻었다. 흡, 그녀가 달뜬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