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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부드러운 깃털부터 시작할까요? (47/112)

#47화. 부드러운 깃털부터 시작할까요?2021.04.13.

소란은 새해 첫 새벽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강호의 문자 덕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1월 1일. 소란은 남편과의 약속을 앞두고 새벽부터 일어나 씻고 옷을 골랐다. 마치 데이트를 준비하는 기분이다.

“이건 너무 집에서 입는 옷 같고.”

흐음.

“이건 또 너무 외출하는 옷 같네.”

뭘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강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힘을 팍 주기에도 민망하고. 소란은 머리를 말려 자연스럽게 내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브라운 컬러 니트 원피스에 도톰한 레깅스를 신었다. 그리고 겉에는 따뜻한 카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어둑하지만 정원 곳곳에 조명이 들어와 있다. 강호도 이미 나와 있다는 얘기다. 소란은 천천히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다. 사탕처럼 귀여운 알알이 전구가 오두막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밝히고 있다. 소란이 계단을 오르는데, 위쪽에서 손이 내밀어졌다. 커다랗고 깨끗하고 늘씬한 손바닥.

“자.”

고개를 들자 그가 슬쩍 웃음기 띤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고 있다. 그 모습 자체가 그림 같다.

“깨우러 가려 했는데.”

“잘 일어났어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이렇게 약속해서 만나니 설레는 마음이 배가되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 서로 익숙해지고 나면 이 느낌도 사라지겠지. 벌써 아쉬워진다. 소란은 그의 손을 잡고 오두막에 올라섰다. 그곳에 나란히 서서 어둑한 바깥을 내려다보니, 일출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근사한 장소에 찾아온 기분이다. 그것도 둘만 알고, 둘만 머물 수 있는 비밀 장소. 이런 행복이 찾아올 줄 몰랐다. 갑작스럽게 결혼을 결심할 때까지만 해도.

“해가 뜨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앉아서 기다릴까?”

강호의 말에 오두막 안을 보니 난로도 켜져 있고 따뜻한 담요도 깔려 있다. 거기 앉아 있어도 문을 통해 해가 뜨는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을 듯했다.

“네, 들어가요.”

안에 들어가니 강호가 옆에 놓아둔 보온병을 열고 컵에 차를 따라주었다. 언제 다 준비했을까. 무릎을 세우고 앉은 소란은 컵을 두 손으로 쥐고서 호호, 불었다.

“여기 정말 예뻐요.”

근사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 앞으로 여기서 수많은 별을 볼 테고, 수많은 해를 만나겠지.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면.

“해 보고, 들어가서 떡국 먹자.”

“좋아요.”

그토록 기다리던 새해.

“또 하고 싶은 거 있어?”

“계약서 파일 삭제해요, 우리.”

“그래, 그러자.”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소용없어진 계약서다. 전후가 바뀌었을 뿐, 이제는 사랑해서 한 결혼이 맞으니까 말이다. 서로 가까워지는 일만 남았다. 그러고 나면 여느 부부와 다름없는 사이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동쪽 하늘로부터 능선이 고운 언덕 너머 해가 올라오고 있다.

“나한테도 하고 싶은 거 있는지 물어봐야지.”

“……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강호가 소란의 손에서 컵을 잡아 내려놓았다. 그러곤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고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서로 맞닿은 시선이 떠오르는 해보다 뜨거웠다.

“하고 싶은 거 있어.”

새해를 맞이해 꼭 하고 싶은 것.

“사랑해.”

널 사랑한다는 말. 강호는 그녀의 입술을 진하게 머금었다. 두 사람의 맞닿은 입술 사이로 햇살이 부서졌다. 잠시 떨어졌다가 서로를 잡아당기듯 금세 또 얽혀들었다. 새해 첫 고백. 새해 첫 키스. 깊어가는 부부 사이의 새해 첫날이다. ◇ ◆ ◇ 하루가 지난 밤이었다.

- 저 잠깐 올라가도 될까요?

강호가 잠들 준비를 하고 누우려던 참이다. 소란에게 전화가 왔다. 야심한 시각. 누굴 또 말려 죽이려고. 안 그래도 간신히 참는 중인데. 겉으로 괜찮은 척 선을 딱딱 긋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올라와.”

그러나 강호는 거절할 수 없었다. 잠깐이 아니라 24시간 365일 계속 두고 보고 싶은 사람이니까. 잠시 후 그녀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기다리고 있던 강호는 방문을 열었다. 혹시 주거 공간을 합치자는 말을 하러 온 건 아닐까,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그런데 그녀가 쇼핑백을 들고 서 있다.

“잠깐만 앉아보실래요?”

소란이 침대 옆 테이블로 가더니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이게 뭔데?”

일단 주거 공간 합치자는 용건은 아닌 것 같다.

“제가 강호 씨 촉각 방어 극복에 대해 좀 더 알아봤어요. 어떤 방법이 좋은지.”

소란은 내내 마음에 담고 있었나 보다. 책임감이 참 강한 사람이다. 낫게 해달라는 한마디에 정말 나을 때까지 노력할 모양이니. 그런 집념이 있었으니 힘든 상황 속에서 이만큼 달려온 것이겠지만.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바쁘죠. 엄청.”

가뜩이나 일하느라 부족한 시간에 나린 챙기랴, 강호 트라우마 신경 쓰랴. 여러모로 고생 중인 소란이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요. 강호 씨가 터틀넥을 편하게 입을 때까진.”

소란이 싱긋 웃으며 쇼핑백 안에서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지금 이게.”

“우리를 도와줄 물건들이에요.”

강호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테이블을 보았다. 크고 부드러운 깃털, 얇은 장갑, 하얀 로션, 말랑말랑한 작은 공, 털이 고운 붓까지. 의도가 수상한 물건들이 골고루 놓여 있다.

“자, 뭐부터 써볼까요?”

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숨이 밀려 나온다. 답을 내놓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자 소란이 마음대로 판단했다.

“고르시기 힘든가 봐요.”

그게 아닌데.

“그럼 제가 골라볼게요.”

결정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깃털부터 시작할까요?”

이 상황이 너무나 야릇하고 묘해서였다. 소란은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상냥한 미소만을 지으며 연분홍색 깃털을 들어 올렸다. 테이블 앞 의자에 앉은 강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란을 바라볼 뿐이다. 사실 강호도 알고 있다. 촉각 방어에 시달릴 만큼 예민해진 신체의 감각을 둔화시키기 위한 방법들이다. 부드러운 자극을 줌으로써 좋은 감각을 일깨워주고, 무언가 제 피부에 닿아도 괜찮다는 걸 학습해가는 과정이었다. 촉각 방어뿐 아니라 감각에 지나치게 예민한 아동부터 성인까지, 증상 완화를 위해 치료사나 보호자가 쓰는 흔한 방법들. 소란은 그의 트라우마에 대해 비교적 열심히 찾아보고 공부라도 한 듯했다. 그렇게만 따지면 굉장히 감동적이고 고마운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소란을 마주 올려다보는 강호의 심정은 그게 다가 아니다. 매우 복잡했다.

‘사람 미치게 하려고…… 작정을 했군.’

스치는 공기에도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보드라운 깃털을 손에 든 소란은, 돌아버릴 만큼 야했으니까. 그 어떤 건전한 행동도 이제 둘 사이에서는 야릇한 짓이 되어버린다는 걸 실감했다. 치료하기 위해 다가오는 보호자가 아니라 이건 마치…….

“눈 감아보세요.”

절 흥분시키려 자극하는 여자 같았다.

“저 믿으시죠?”

시키는 대로 순순히 눈을 감지 않고 빤히 바라다보기만 하자 소란이 안심시키려는지 덧붙였다.

“처음부터 억지로 머플러나 터틀넥을 시도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찾아봤더니 가볍고 부드러운 자극부터 조금씩 경험해가는 게 좋대요.”

다 아는 얘기다. 그러나 강호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밤이 깊었다. 가라앉은 밤공기에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듣기 좋았다. 소란과 이렇게 결혼으로 엮이기 전까진 촉각 방어를 극복해보려는 생각 따위 해보지 않았는데. 그저 그녀의 접촉이 남들과는 달리 불쾌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도움을 받으면 될 테니까.

“이렇게 조금씩 해나가다 보면 차차 익숙해질 테고, 목 주변에 뭔가 닿는 게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몰라도, 도와줄게요.”

지금은 목이 졸리고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에 익숙해져 있다. 그게 고통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위험하지 않다는 느낌에 익숙해진다, 라. 그녀를 볼 때 느끼는 싱그럽고 청량한 바람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거지. 나아가 절 괴롭히던 과거의 기억을 억지로 외면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이겨낼 수 있게 된다.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해봐.”

강호의 입술 사이로 허락이 떨어졌다. 긴 다리를 느른히 꼬고 앉아 팔짱을 끼자, 얇은 티셔츠는 탄탄한 가슴 근육에 당겨져 팽팽해졌다. 턱을 약간 들어 올린 그는 세상을 다 발아래 둔 오만한 남자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오히려 긴장하며 한 발짝 다가선 이는 소란이다.

“눈을 감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길고 굵은 목을 드러낸 강호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시각이 차단되자 불쾌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곧바로 밀려드는, 까맣게 덮인 어둠 속에서도 생생히 느껴지는 그녀의 숨소리.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향기. 그것은 꽃내음처럼 짙고 달았다. 이대로 제게 다가온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고, 흠뻑 코를 박아 낱낱이 마셔버리고 싶을 만큼. 소란은 제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유일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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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턱 아래쪽으로 부드러운 촉감이 스쳤다. 공기 중에 띄워놓아도 중력을 이기고 나풀나풀 날아가버릴 듯 가벼운 털에 불과했지만, 깃털이 닿은 부위는 찢어발길 듯 세찬 통증이 느껴졌다. 물론 착각이다. 말하자면 그냥, 기분 탓인 거다. 눈을 감고 있으니 더욱 예민해지기도 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에 그렇게 대답했다. 실체가 없는 통증과 고통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운을 뗀 강호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소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앞에서 깃털을 들고 있다. 빛처럼 환하고 따스한 그녀를 마주하자 비로소 고통스러운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눈은 뜨고 있는 게 낫겠는데.”

아무래도 보고 있는 편이 더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럼 편하신 쪽으로 하세요. 한 번 더 해볼까요?”

그녀가 동의를 구하며 깃털을 살랑 움직였다. 강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방금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에 비해 두려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제게 조금 더 다가오는 소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참으로 놀랍다. 순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밀려드는 울창한 숲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새들이 지저귀고, 호숫가엔 유리알처럼 내려앉은 햇빛이 반짝거린다. 평화롭고 싱그러운 숲속에서 인형처럼 아름답고 다정한 그녀가 제게로 다가왔다. 나풀거리는 날개를 매단 듯 어여뻤다. 섬세한 손끝엔 치유의 빛이 어려, 막혔던 숨통이 점차 트이는 듯했다. 깃털이 목에 닿았다. 지긋지긋한 압력이 아니라, 간질거리는 촉감이 피부를 쓸었다. 생경한 감각이다. 언제 목에서 이런 걸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음, 아까보다 나아 보이는데요? 어떠세요?”

그녀는 세심하게 그의 표정을 살피며 살살 깃털을 움직였다. 턱 밑으로, 목선을 따라, 귀 뒤를 쓸어내려는 손길이 여리고 섬세했다. 등줄기에 전율이 훅 끼쳤다. 거친 충동이 다른 의미로 강호의 숨을 막히게 했다.

“그만.”

참다못한 그가 제게 닿아 있는 소란의 손을 탁 치워냈다. 사뿐히 움직이던 그녀의 깃털이 강호의 손등에 부딪혀 세차게 떨어져나갔다. 소란은 당황하기는커녕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제 기대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듯.

“엄청 잘 참으셨어요.”

“……그래, 나 잘 참았어.”

다른 의미였다. 고통이든 전율이든 충동이든. 뭐가 됐든 어쨌든 참아낸 건 확실했다. 강호는 미간을 좁히며 손을 들어 제 목을 감쌌다. 고르지 못한 호흡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 그사이 소란은 사용했던 깃털과 다른 물건들을 챙겼다.

“오늘은 이걸로 끝내고, 내일 이 시간에 또 해봐요.”

“이 시간에?”

“네, 퇴근하고 저녁도 먹고 씻고 그러다 보면 이 시간이니까요. 자기 전에 십 분이라도 잠깐씩 시도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힘드시면 격일로 할까요?”

강호는 뜨거운 숨을 탁 내뱉었다. 트라우마 극복을 돕겠다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듯 톡톡 부러지는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란의 그 모습이 더 야하게 보이기도 했다.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면서, 저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한 그런 얼굴. 강호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나를 죽였다 살렸다 하면서. 너는 그렇게나 여유롭단 말이지.

“아니, 매일 해.”

“알겠습니다. 그럼 매일 준비할게요.”

대표님 몸을 원한다느니, 섹시하다느니, 잘생겼다느니. 맛있는 음식을 삼킨 것처럼 만족스러운 얼굴로 절 바라보더니. 치료를 목적으로 예민한 터치를 날마다 시도하겠다고 하면서 태도는 지극히 사무적이기만 하니. 모든 걸 참아내야 하는 자신만 도를 닦게 생겼다. 이거 혹시. ……잡은 고기에겐 밥을 주지 않는다는 뭐 그런 건가. 우소란. 설마 그런 거야?

“전 그럼 내려가볼게요.”

소란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왜 자꾸 약이 오를까. 이쪽에선 기껏 몸 상태 생각해서 더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참인데.

“잠깐.”

그가 일어섰다. 침실에서 나가려는 소란을 가로막고서, 그녀의 눈을 빤히 내려보았다. 너는 1층, 나는 2층. 네가 직접 빗장을 열어줄 때까지 아마 우리 사이의 그 문은 내내 닫혀 있겠지.

“더 하실 말씀이라도……?”

강호는 문밖에 서서 열어달라 애원할 생각은 없다. 빗장은 스스로 열어야지. 제발 좀, 들어와달라고 사정하면서.

“네가 준비한 이거.”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눈빛으로만 그녀의 입술을 훑었다. 샅샅이. 진득하게.

“상은 마련했나?”

“상이요?”

내 눈빛이, 내 몸이, 내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가. 이게 무기가 될 수 있다면 아낌없이 써야지. 네가 애타는 얼굴로 매달릴 때까지.

“뭐든 극복하는 게 쉬운 건 아닌데. 그걸 도와주겠다면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상이 아닐까.”

“아.”

“열심히 견뎌볼 테니 내 마음에 드는 상을 준비해봐.”

그러니까 결국. 문을 열고 들어와달라 먼저 애원하는 건 네가 될 거야. 나는 인내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니까. 멍해진 소란의 귓가에 어디선가 여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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