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우리가 아기를 갖게 되면2021.04.10.
……지금 이것들이 내 집에서 뭐 하는 거야.
“그만들 해. 남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어?”
성질이 난 나린이 버럭 소리 질렀다.
“서러우면 말해.”
이어 강호가 입술만 벙긋거렸다. 도, 와, 달, 라, 고. 어쩐지 악마의 속삭임처럼 유혹적이고 위험하다. 그 도움을 곧이곧대로 받았다가는 어떤 사달이 날지 모르겠다. 영혼을 팔아야 할 수도 있다. 세상 사람 도움은 다 받아도 백강호 저놈 도움만은 받지 않을 것이다, 절대.
“됐거든?”
나린은 손을 탁 내저었다.
“너희 둘 다 그만 가. 정신 사나워.”
“언니, 설거지 이거 조금만…….”
“아, 그냥 둬. 내가 할 거니까.”
나린은 소란의 손에서 고무장갑을 간신히 빼내곤 등을 떠밀었다. 소란과 강호를 억지로 내쫓고 현관문을 탁 닫았다. 비로소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나린은 한숨을 내쉬며 주방으로 돌아왔다. 성준의 손길이 닿은 반찬들이 테이블에 놓여 있다.
“하아, 진짜…….”
이 사람은 날 다시 만날 생각이 전혀 없을 텐데, 쟤는 대체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눈물도 같이 맺혔다.
“미치겠네.”
나린은 신경질적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자꾸만 약해지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떡할까. 나린은 마음을 강하게 다잡기 위해 서랍을 열고 병원에서 새로 받은 초음파 사진을 꺼냈다. 젤리곰 같던 아기는 어느새 제법 모양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매번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아기의 심장 소리는 우렁차기만 했다. 그래, 아기만 있으면 돼. 내가 그런 결정을 한 거잖아. 그런데.
“……보고 싶어.”
결국 테이블 앞에 웅크리고 앉아버렸다. 가슴을 짓누르는 그리움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나 당신, 너무너무 보고 싶어. 나린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앉은 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끝끝내 아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건, 아직 남은 미련 때문 아니었을까. 바보처럼. 어쩌면 영혼을 팔라고 해도…… 팔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 사람의 따뜻한 미소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내어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 ◇
“택시 타고 가도 된다는데 굳이 오셨어요.”
“계나린 집에 혼자 간다는데, 안심이 안 되잖아.”
늦은 시간 일을 마치며 소란에게 연락했더니 나린의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뭘 줄 게 있다나. 그런 그녀를 찾으러 갔더니, 설거지까지 해주고 있다. 계싸가지. 보기도 아까운 내 와이프를 감히 부려먹어.
“저녁은 먹었어요?”
“야근 시작할 때 대충.”
“저도 오빠 집에서 먹고 왔어요.”
“계나린한테는 뭘 갖다준 거야?”
소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오빠가 만든 반찬이요. 오빠한테 밥 먹으러 갔다가 받아 왔거든요.”
“……형님 반찬을?”
“네. 언니가 저희 오빠가 만든 열무김치를 엄청 잘 먹더라고요. 저번에 집에 왔을 때 주니까…….”
“내 열무김치를 먹었단 말이야?”
강호의 표정이 단번에 살벌해졌다.
‘내 열무김치’.
고작 열무김치에 소유욕을 드러내는 강호를 살피며 소란이 말했다.
“네, 언니가 입덧 때문에 엄청 고생하잖아요. 그런데 저희 오빠 음식은 입에 잘 맞나 봐요. 입덧도 안 하고 너무 잘 먹어서요.”
“그러면서 끝까지 자존심은.”
“네?”
“아니야.”
입덧하니까 봐줬다.
“아, 언니 아기 태명 뭔지 아세요?”
“내가 그걸 알아 뭐 해.”
“열무래요. 열무.”
또다시 열무 이야기에 강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사람이 열무 하나에 유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경험하는 중이다.
“언니도 열무김치 되게 좋아하는 모양이던데, 그걸 정말 태명으로도 쓰는 사람들이 있나 방금 검색해봤거든요.”
“그런데.”
“있더라고요.”
“있어?”
생각보다 흔하고 인기가 많은 태명이라고 했다.
“‘열 달 동안 무럭무럭’, ‘열 달 동안 무탈하게’. 그런 의미래요. 언니가 아기 생각을 엄청 하나 봐요.”
“얻어걸린 거겠지.”
강호가 시니컬하게 받아치는데도 소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니가 아기 잘 품고 있다가 예쁘게 잘 낳았으면 좋겠어요. 정말 어려운 결정을 한 건데, 옆에서 힘이 좀 되어주고 싶기도 하고요.”
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강호는 옆에 앉은 소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린을 챙기는 그녀를 보니 가슴이 아릿했다. 지금도 이렇게 마음을 곱게 쓰는데, 그 아기가 제 오빠의 아기란 걸 알면 소란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정말 좋은 고모가 되어주겠지. 두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복해주겠지.
“……왜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물끄러미 절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소란이 물었다. 강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예뻐서.”
갑작스런 말에 소란의 볼이 그만 발그레해졌다.
“내가 결혼을 참 잘했구나 싶어서.”
“무슨 그런 말을 예고도 없이…….”
“그럼 이런 것도, 예고부터 해야 하나.”
안전벨트를 푼 강호가 그녀에게 입술을 촉, 맞추었다 떨어졌다.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꿈처럼 닿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렸다. 강호는 다시 느긋하게 안전벨트를 매었다. 소란이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차가 출발했다. 사람 들었다 놨다 못 살겠네. 언제 달콤한 말을 하고, 언제 입술을 맞췄나 싶게 그는 다시 차분한 상태로 돌아갔다. 소란의 심장만 쿵쿵 울릴 뿐이다. 잠시 후 강호가 입을 열었다.
“집들이 말이야. 그때 형님도 오시게 해.”
강호의 말에 소란이 되물었다.
“오빠요?”
“그래. 집들이 여러 팀 하면 힘드니까 가까운 사람들 다 모아서 한 번에 하자고.”
“아.”
소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도 결혼 후 여러 차례의 집들이를 하느라 주말마다 골병이 들 것 같다고 했다. 친구들 말고도 식구가 많다면 따로 하는 게 맞겠지만, 아무래도 제 쪽 식구로는 성준 혼자니까 연령대가 비슷한 지인들과 함께해도 좋을 듯했다.
“물론 형님은 언제든 괜찮으니까 집들이 때 말고도 편하게 들르시라고 하고.”
“아, 네.”
“그래도 집들이 땐 꼭 오시라고 해.”
“오빠까지 신경 써주시고 감사해요.”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일은 아닌데.”
“아니에요. 저는 사실, 강호 씨가 저희 오빠한테 이렇게 잘 대해줄지 몰랐거든요.”
“왜?”
오히려 강호가 의문이라는 듯 태연히 되물었다. 소란은 입술을 벌린 채 뭐라 대답해야 할까 생각했다. 딱히 싸가지 있어 보이진 않으셔서요. 이 소릴 하면 큰일 나겠지? 소란이 눈동자만 굴리고 대답을 하지 않자 강호가 피식 웃었다.
“내가 친절해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지.”
아, 저렇게 대답할걸. 싸가지보다는 훨씬 세련된 표현에 소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편이에요.”
“인정하니 기분이 좋진 않은데.”
“사실이죠. 누가 봐도 강호 씨는 불친절해 보이는 편이라서요.”
“나 친절해.”
소란은 깜짝 놀라 운전석의 강호를 바라보았다. 사람 잡아먹게 생긴 얼굴을 하고 앉아서, 자기 입으로 친절하단 소릴 하다니. 그러나 요즘 하는 걸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분위기는 한없이 퇴폐적이고 위험해 보여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힘든데, 사실 하는 행동만 보면 머슴과 다름없을 때가 많으니까. 무거운 건 꼭 직접 옮기고, 남의 일손도 척척 잘 돕고, 밥도 잘하고. 잘하기만 하나, 밥은 또 얼마나 잘 먹는지. 그뿐인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해달라면 해준다.
‘아 뭐야, 매력 있어…….’
맹수가 아니라 제 덩치가 큰 줄도 모르고 덤벼드는 커다란 강아지 같다. 속을 까면 깔수록 이런 세상 순둥이가 없겠다 싶다. 그런 와중에도 전방을 주시하는 저 섹시한 눈빛은 어쩔 거야, 정말.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소란은 아직 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 알 것 같다. 볼 때마다 반하고 있다는걸. 그는 절 10년이나 지켜보고 좋아했다지만, 그녀의 사랑은 이제 시작된 셈이다.
“그런데 넌 어떤 김치를 좋아하지?”
문득 그가 선호하는 김치 종류를 물었다. 소란은 무심코 대답했다.
“배추김치요.”
“그럼 ‘배추’라고 해야 하나.”
뭘 배추라고 하겠다는 거지?
“나는 갓김치도 좋아하는데. ‘갓’은 좀 그렇고.”
“……뭘요?”
“우리가 아기를 갖게 되면.”
“아기요?!”
소란이 놀라서 되물었다. 이보시오, 아기라니. 너무 빠른 거 아니시오.
“그래, 아기.”
신호에 걸리자 운전대를 지그시 잡은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좋아하는 김치 이름으로 태명을 짓는 게 유행 아니었어?”
“어우, 아닌 거 같은데요.”
지금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 같은데, 태명이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저희 아직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아기 얘기는 너무 빠른 것 같죠, 하하. 결혼도 한 달도 안 되었고.”
아무리 부부라지만 겨우 키스나 몇 번 해본 사이에 아기라니. 백강호와 연애를 하는 것도 실감이 안 되는데.
“빠른가.”
“네, 빠릅니다.”
“하긴. 아직 같이 잔 것도 아니니까.”
“네, 같이 자면 그때…….”
이게 아닌가. 같이 잔다니. 그 말이 풍기는 묘한 농염함에 소란은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 ◆ ◇ 집에 돌아온 후, 그래도 올해의 마지막 날이니만큼 강호가 함께 있자고 하진 않을까 기대했다. 꼭 침실을 합치는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같이 있을 순 있으니까. 12시가 되고, TV를 통해서라도 타종을 보고, 샴페인이라도 한잔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층 중문 앞에서 헤어지기 전, 소란이 입을 열었다.
“강호 씨.”
“잘 자, 그럼.”
“네?”
너무나도 쿨하게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오늘 같은 날은 좀 질척거려도 되지 않나.
“아, 강호 씨. 많이 피곤하지 않으시면…….”
그는 계단을 오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피곤할 텐데, 잘 자.”
방금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는데. 예쁘다고도 하고, 뽀뽀도 하고, 또 차 문을 열어주고 옥이야 금이야 하듯 절 귀하게 대해주더니……. 어째서 문 앞에선 또 이렇게 칼바람 쌩쌩이란 말인가. 화가 난 건 절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간을 보거나 밀당하는 것도 아닌 듯한데.
“네, 주무세요…….”
소란은 미련 없이 2층으로 올라가는 그에게 힘없이 인사했다. 누굴 탓할까. 침실 합치길 미루자고 한 자신이 죄인이지. 결국 소란은 제 방으로 돌아와 씻고 누웠다. 마지막 날이 별건가. 그냥 똑같은 밤일 뿐인데.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 외로운지. 분명 깨를 볶고 있는 건 맞는데, 어째 반은 덜어놓고 볶는 기분이랄까. 강호는 자고 있으려나.
‘……자니.’
문자라도 보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뒤척이는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벌떡 일어난 소란이 휴대전화를 열었다.
[오전 7시. 오두막.]
마치 접선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는 듯 간결한 메시지였다. 강호가 보낸 그 문자에 소란의 가슴이 별안간 또 두근, 하고 뛰었다.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푹 자고 아침에 나와. 일출 보자.]
함께 보는 해돋이라니. 소란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밤보다 아름다운 아침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올해의 마지막 날까지도 진상은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박 여사는 2층 진상의 방으로 따라 올라갔다.
“걔 남은 돈 다 갚았더라? 계좌 확인했어. 그런데 그거 다 백강호 돈 아니니?”
소란과 강호의 이야기를 꺼내자 진상이 인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엄만 신경 쓰지 말라니까.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괜히 네 속만 상하지.”
박 여사는 억장이 무너졌다. 내 아들은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데, 홀랑 결혼해서 남편 돈 끌어다가 빚 갚는 데 쓰고 있는 소란이 괘씸했다. 그 교활한 아이를 받아준 백 회장조차 멍청하게 느껴졌다. 결혼식에 일부러 찾아가서 바른 소리 해줬는데 그걸 못 받아들이고 도리어 제게 망신을 줬던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분노가 일었다. 아마도 백 회장은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느라 그랬을 것이다. 제 말을 듣고도 손주며느리한테 노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말이 안 되지. 어쩌면 남들 앞에서나 편들어주는 척하고, 지금쯤 냉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아들 눈에서 눈물 빼고 잘 살 수 있겠니? 저는 피눈물 쏟아야 옳지.”
“엄마 뭘 어쩌려고?”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그렇다는 거지. 엄마 남 골탕 먹이고 할 위인도 못 돼. 알잖아, 엄마 간 콩알만 한 거.”
“하긴. 소란이랑 만나는 동안에도 나서서 반대한 적도 없었지, 우리 엄마.”
진상이 헛헛하게 웃으며 팔 벌려 박 여사를 안아주었다.
“그럼. 엄마는 항상 네 행복이 우선이야.”
박 여사는 진상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아들은 모르는 게 많다. 나서서 반대하지 않았을 뿐, 자신이 뒤로 얼마나 많은 일을 자행해왔는지. 그리고 아들은 모르는 게 낫다. 소란과 돈이 엮인 일부터 다른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우게 된 일까지, 하나하나 제 손이 안 들어간 부분이 없다는 걸 알면 진상도 분노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결국은 제게 고마워할 것이다. 그건 전부 진상을 위한 일이 아니던가. 그나저나 얼른 백 회장을 만나 확인해봐야겠다. 늙은이 재입원 시기가 언제더라. 그전에 다녀와야겠는데. 박 여사는 머릿속으로 때를 가늠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