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그리운 사람 (45/112)

#45화. 그리운 사람2021.04.06.

“자, 타.”

그는 조수석 문까지 열어주었다.

“히터 틀까. 피부 때문에 꺼려지면 미리 얘기하고.”

“피부요?”

“그래. 피부에 안 좋다던데.”

그런 것도 아네. 소란은 의외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상관없어요.”

“벨트는. 내가 해줘?”

“제가 합니다, 제가.”

소란이 얼른 안전벨트를 매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식사 때도 얼마나 친절했는지 모른다. 아침부터 소고기를 구워 잘라주질 않나. 물도 따라주고, 숟가락을 떨어뜨리니 새 걸로 갖다주기까지.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는 또 뭐지? 이건 마치……. 오기에 차서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겠다 이런 느낌인데. 혹시 침실 합치는 문제를 새해까지 미루자고 해서 화가 난 걸까? 강호가 운전하는 차가 출발했다. 소란은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화가 난 건 아닐 거야.’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가 살벌하다고 속까지 그런 건 아니니까. 이제 그 정도는 알잖아? 그럼 뭘까. 진짜 이유가 뭘까. 혹시 이거, 나그네의 햇빛 이런 건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 바람과 태양이 경쟁했는데, 거센 바람은 오히려 옷을 꽁꽁 여미게 했던 반면에 따뜻한 햇빛은 스스로 벗게 했다는 그 우화. 그러니까 일단 알았다고 후퇴한 후, 이렇게 잘해주는 걸로 날 홀려서…….

“퇴근은 언제 하지.”

“퇴근이요?”

옆을 돌아보니 강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다.

“그래. 데리러 올게.”

와……. 햇빛 맞네. 눈부신 남편 덕에, 눈부신 아침이었다.

  ◇ ◆ ◇ 새로 맡은 기업 관련 소송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소란을 태석이 불렀다.

“우 변, 나 잠깐.”

“선배님.”

“네 방으로 가자.”

소란의 사무실로 태석이 따라 들어왔다.

“이거 바뀌었더라.”

그가 내민 건 USB였다.

“어? 이거 제 거예요?”

학교 로고가 찍혀 있는 은색 USB.

“응. 저번에 우리 부딪쳤을 때 바꿔서 가지고 온 것 같더라고.”

소란은 서둘러 가방을 열어 USB를 꺼냈다. 고리가 다른 색이었다.

“아, 정말이네요.”

태석이 가지고 온 제 것을 받아 챙기고 그의 것을 내밀었다.

“죄송해요. 괜히 귀찮게 해드렸어요.”

“아니야. 부딪쳐서 바뀐 건데.”

그가 USB를 가지고 나가려는데 소란이 불러세웠다.

“선배님.”

“응?”

“1월 초나 중순쯤에요, 신년회 겸해서 집들이를 할까 하는데요.”

“집들이?”

소란은 웃으며 말했다.

“네, 그때 미리 초대드릴 테니까 선배님도 꼭 오셔야 해요.”

“……집들이를 하려고?”

“네? 네.”

태석이 생각에 빠진 얼굴로 대답을 미루고 있어, 소란이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많이 바쁘세요? 1월에도? 그럴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일정 안 되심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어, 아니야.”

태석이 웃어 보였다.

“초대해줘. 꼭 갈게.”

그의 약속에 소란은 환히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 ◆ ◇ 강호는 소란의 퇴근시간에 맞추어 데리러 왔다. 그는 차 문도 열어주고, 닫아주고, 가방도 이리 달라며 들어주었다. 뭐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 저녁식사도 함께했다. 집에 돌아온 후엔 1층 중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럼 들어가서 쉬어.”

소란은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강호가 자꾸 다가오길 원하는데 자신이 너무 틈을 안 주는가 싶었다. 내가 너무 선을 그었나 하여 차라도 한잔 마시자고 할까 입을 열려는데.

“저…….”

“올라갈 테니까, 따뜻하게 하고 자.”

자꾸 자란다. 자꾸 쉬라 그러고. 그럴수록 아쉬운 건 어쩐지 소란이었다. 그러나 강호는 칼 같이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선을 긋는 쪽은 오히려 강호인 것 같다. 후우,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소란은 1층으로 들어갔다. 아쉽고 안달 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시작했는걸. 조금만 더 참기로 하며 안달 난 가슴을 달래었다. ◇ ◆ ◇ 올해의 마지막 날.

“여긴가?”

소란은 오피스텔 복도에 서서 휴대전화를 꺼내 저장해둔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1701호. 여기다.”

찾는 집 문 앞에 선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소리와 함께 철컥 문이 열렸다. 집주인은 나린이다.

“들어와. 뭘 준다는 거야?”

나린은 소란의 손에 들린 것부터 바라보았다.

“오늘 회사 안 나가셨다고 해서요.”

아까 강호가 연락했다. 오늘은 좀 늦게 데리러 갈 듯하다고. 나린이 출근하지 못해 예정보다 일이 늦어졌단 말을 듣게 됐다. 괜찮다고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은 소란은 조금 일찍 퇴근하여 성준에게로 갔다. 갑자기 온다는 말에도 성준은 반가워하며 저녁을 차려주었다. 간만에 오빠의 집밥을 먹고 있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오빠, 혹시 나 반찬 좀 싸주면 안 돼?”

“되지.”

“아, 우리 먹을 건 아니고, 아는 분인데 요즘 식사를 잘 못 하거든. 근데 저번에 우리 집에서 식사할 때 보니까 오빠가 만든 김치를 되게 잘 드시더라고. 오빠 괜찮으면 반찬 좀 싸다 드려도 될까 하고.”

“그래, 싸줄게.”

  성준은 소란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기에 선뜻 반찬을 싸주었다. 집에서 나오며 소란은 나린에게 전화해, 줄 것이 있으니 주소를 좀 알려달라고 했다. 퀵으로 보내란 말에 소란은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온 길이다.

“와, 여기 전망 좋네요.”

제법 넓은 평수의 오피스텔이다. 굉장히 깔끔한 실내엔 꼭 필요한 가구와 가전만 있었다. 이 집의 사진을 찍어 컬러 차트를 뽑아보면 검은색, 흰색, 몇 가지 톤의 회색만 나올 것이다. 그만큼 삭막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님 내지는 본부장님인 남자주인공 혼자 살 것 같은 분위기의 집. 그 안에 계나린이 있다.

“주방은 어디예요?”

“저기.”

소란은 보자기에 꽁꽁 싼 것을 들고 나린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갔다. 반질반질한 식탁에 올려놓고서 풀기 시작했다.

“먹을 거야?”

“네, 반찬을 좀 가지고 왔어요. 아직 밥 잘 못 드시나 해서.”

누가 보면 친정엄마인 줄 알겠다. 진짜 엄마도 안 하는 일인데. 나린은 새초롬한 얼굴로 소란이 뚜껑을 열어 늘어놓는 반찬을 내려다보았다.

“지난번에 열무김치 되게 잘 드시길래 한 통 하고요. 장조림, 무말랭이무침이랑 호두멸치볶음…….”

때깔 고운 반찬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소란 씨가 한 거야?”

“아뇨. 저희 오빠가요.”

“……오빠가?”

“오빠한테 부탁했거든요. 가져다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반찬 조금만 싸달라고요.”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이 간질거렸다.

“언니. 얼굴은 예쁘신데, 말씀까지 예쁘게 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뭐?”

“사실 고맙다는 말을, 그렇게 하시는 거잖아요.”

정곡을 찌르는 소란의 말에 나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딩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할 말 따박따박 다 하는 모습이 봐도 봐도 놀랍다. 얘는 보통 애가 아니다, 정말. 내가 말을 예쁘게 할 줄 알았으면 진작 했지. 나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름 끼쳐. 강요하지 마.”

“네. 하고 싶으실 때 하세요.”

소란은 생긋 웃으며 다시 반찬을 정리했다. 의자에 앉은 나린은 음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운 맛. 그리운 냄새. ……그리운 사람.

“저희 오빠 멸치볶음이 또 기가 막히거든요. 입맛 없을 때 밥에 김 부숴 넣고 이 잔멸치 넣고 참기름 조금에 깨소금 넣어서 뭉쳐 드시면…….”

“지금 해줘.”

“지금요?”

“응, 참기름, 깨소금 저기. 김은 저기.”

소란은 알겠다며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몇 개 안 되는 주방 살림을 뒤져 보울을 꺼내고, 밥통에 밥이 없어 즉석밥을 찾아 데웠다. 도움 안 될 걸 아는지 제게 묻지도 않고 척척 해나가는 소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린은 웃음이 났다. 우성준 씨. 당신 동생, 참 예쁘네.

“다 됐어요. 드셔보세요.”

소란이 동글동글 귀엽게 만 주먹밥을 접시에 담아 왔다.

“빠르네.”

“제가 오빠만큼 손맛이 막 좋은 건 아닌데, 그래도 손은 빨라요.”

나린 앞에 내려놓곤 물까지 따라주었다. 누가 집주인인지 모르겠다.

“드실 수 있겠어요?”

또 욱, 입을 막으며 화장실로 달려가진 않을까 소란은 살짝 길을 터놓았다. 나린은 젓가락으로 작은 주먹밥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밥알 사이사이 고소한 멸치가 맛깔나게 씹혔다.

“……맛있네.”

“다행이다.”

소란이 웃었다.

“언니 입덧 끝났나 봐요. 축하드려요.”

“아닌데.”

나린은 젓가락으로 또 하나를 집어 먹었다.

“나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고 아침에 병원도 갔다 왔는데. 입덧 심해서.”

“아, 맞다. 그래서 회사 못 나가셨댔죠.”

소란이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데 저번에 열무김치랑, 또 이건 이렇게 잘 드시는데요?”

나린은 말없이 또 주먹밥을 먹었다. 그 이유는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

“언니 언제 저희 오빠 식당 한번 같이 가실래요? 유명하진 않고 규모도 작아서 동네 사람들만 오는 식당이긴 한데요. 그날그날 메뉴가 바뀌어서…….”

“시간 없어.”

나린이 매몰차게 딱 자르자 소란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언니 입덧 끝날 때까지 가끔 반찬 싸다 드릴게요. 오빠가 또 필요하면 얘기하라고 했거든요.”

“입덧 끝날 때까지?”

“네. 끝나면 말씀하세요.”

주먹밥을 하나 입에 넣은 나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입덧이 끝나도 계속 하는 척해야 하나. 아니지, 그건 비겁하다. 백강호 그 자식이 말했지. 숨지 말라고. 혼자 아기 낳을 생각까지 했으면 못 할 일이 없다고. 하지만 감당할 수 있을까. 그의 앞에 나타났다가 다시 거절당하면, 정말 무너질 것 같은데. 그때 소란이 물었다.

“그런데 언니. 혹시 아기 태명은 뭐예요?”

“태명?”

그 질문을 병원에서도 들었다. 아기수첩에 이름을 써넣기 위해 간호사가 물었다. 아직 태명 없는데요, 라고 하니 그냥 ‘계나린 아기’라고 적어주었다. 이후로 태명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네, 아기 이름 안 정하셨어요?”

“아…… 정했어.”

“뭔데요?”

소란이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숨을 길게 내뱉은 나린이 입을 열었다.

“열무.”

“……네?”

“태명이 열무라고.”

“열무요?”

“응.”

쑥쑥이, 튼튼이, 그런 이름을 기대했던지 소란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열무김치를 좋아해.”

덧붙이는 말에 소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소란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린이 물었다.

“소란 씨 오빠는 결혼 안 해?”

“아, 오빠요? 음……. 아직 생각이 없나 봐요.”

“애인은?”

“없어요.”

“왜? 잘생겼던데.”

나린이 주먹밥을 씹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 소란의 눈이 커졌다.

“보셨어요?”

“아, ……결혼식 갔잖아.”

“잠깐 들르기만 하셨다고 해서 저희 오빤 못 본 줄 알았는데. 보셨구나.”

입이 방정이다. 그를 생각하면 잘생겼단 말부터 자동으로 튀어나오니.

“전 오빠가 천사 같은 여자 만났으면 좋겠어요.”

“천사?”

나린이 미간을 좁혔다.

“네. 오빠한테 상처 주지 않고, 이해심도 많고, 잘 웃고, 고운 말만 하는…….”

나랑 정반대네.

“천사처럼 착한 여자요.”

“그런 여자는 세상에 없어. 인간이 어떻게 천사일 수가 있어?”

“왜 없어요? 천사처럼 착한 저희 오빠도 있는데.”

그건 맞지만. 나린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목구멍으로 넘긴 주먹밥이 까끌하게 느껴졌다.

“입맛이 없다.”

물컵을 탁 내려놓은 나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먹밥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 비운 접시를 보며 소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맛 없는 거 맞나. 아니, 애초에 입덧하는 사람이 맞긴 하던가. 소란은 빈 접시와 아까 주먹밥을 만드느라 썼던 보울을 가지고 싱크대 앞에 서서 고무장갑을 꼈다.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때 딩동, 또 벨이 울렸고, 나린이 인터폰을 확인하고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한 남자가 들이닥쳤다.

“뭐야, 백강호.”

“소란이 어딨어?”

거침없이 들어선 강호가 구두를 벗고 올라섰다.

“어? 왜 이쪽으로 오셨어요? 금방 집에 갈 건데.”

설거지하던 소란이 뒤를 돌아보곤 강호를 확인했다. 강호는 이 집의 주인인 나린을 보며 물었다.

“내 와이프 데려다가 일 시키냐?”

“누가 일을 시켜. 본인이 하는 건데.”

물론 주먹밥을 만들어달라고 하긴 했지만, 설거지는 분명 스스로 시작했다.

“이거 몇 개 안 돼요. 금방 씻어놓고 출발하려던 참이었어요.”

“이리 줘. 내가 할 테니까.”

주방으로 들어간 강호가 소란의 고무장갑을 빼앗으려고 했다.

“다 했다니까요. 잠깐만 있으세요.”

“달라고. 네가 왜 이 집에서 설거지를 해.”

나린은 눈을 꿈뻑거렸다. ……지금 이것들이 내 집에서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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