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급진파 VS 온건파2021.04.03.
“몇 해 전,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에 불이 났어요.”
밤사이 일어난 화재는 ‘달 뜨는 밥집’ 주방에서 기인했다고 조사 결과 밝혀졌다.
“저런. 큰일이 있었구나.”
백 회장은 화재라면 아주 끔찍했다. 아들 내외를 잃은 건 화마 때문이었고, 강호가 납치당해 갇혀 있던 그 폐창고에도 불이 났었다. 강호는 유독가스나 화상의 위험을 입기 전에 구출되었지만 그 아찔한 기억은 아직도 백 회장을 괴롭게 했다.
“그나마 모든 상인들이 장사를 마친 한밤중이라 인명 피해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어요.”
건물에는 ‘달 뜨는 밥집’뿐 아니라 작은 가게들이 여럿 있었고, 2층은 피아노 학원, 3층은 PC방이었다. 밤중이라 인명 피해가 없는 대신, 바로 진압하지 못하고 번져나간 불길은 각 영업장에도 막심한 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건물에 화재 보험을 들어두지 않았던?”
“당장의 재건비는 화재 보험금으로 충당했는데 보상 한도가 적은 편이었고, 사실 피해금액은 그 이상이었거든요.”
“그랬구나.”
상인들에겐 소중한 터전이었기에 당장 영업을 하지 못함에 따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 건물주인 법인에서 ‘달 뜨는 밥집’을 상대로 막대한 손해배상까지 청구했다. 화재가 나기 한 달 전쯤 건물주가 한 법인으로 바뀌었고, 새로운 법인 대표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대리인이 나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법인으로부터 배상 청구를 당한 후 성준은 어떻게든 일을 해결해보고자 애썼다. 자신의 식당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주변 상인들에겐 당연히 보상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건물주인 법인은 그 이상의 다소 무리한 금액을 요구했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공부 중인 소란의 눈으로 봐도 이건 오히려 법의 한계치까지 치밀하게 적용해 작성한 청구서였다. 딱한 사정을 고려하여 서로 감안할 수 있는 부분까지 무시하고, 부득부득 미미한 항목까지 다 끌어다 붙여 시일을 촉박하게 두고 배상을 요구하는 모습이 지극히 비인간적이었다. 전 재산을 내놓고 나가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정말 한순간에 벼랑 끝에 서게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픔을 뒤로하고 소란을 로스쿨에 보낸 성준은 사력을 다해 동생을 뒷바라지해왔다. 그 노력도, 꿈도,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식당 일단 다 정리하고, 나도 다른 일 알아보고, 돈도 좀 더 빌리고 하면…….”
“오빠가 무슨 일을 알아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오랜 시간을 서서 일할 수 없어서 하루 중 점심 장사만 해왔던 성준이다. 처음엔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닫아놓은 가게를 할 수 없이 열게 됐던 것이지만, 생각지도 못했는데 적성에 잘 맞았다.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를 지켜보며 도와왔던 터라 운영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휴학하고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 일의 만족도가 갈수록 높아져 성준은 식당 운영이 좋다고 했다. 소란은 성준의 몸 상태에 따라 스스로 일할 수 있는 만큼 조절이 가능한 이 식당은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다. 성준이 또다시 좌절을 겪게 할 순 없었다. 소란에겐 그게 전부였다. 장학금을 받으며 로스쿨을 다니고 있지만, 이번 일로 대출도 더 받게 됐다. 그래도 보상액으로 물어야 할 돈은 아직 부족했다. 몇 번이고 도와주겠다는 진상의 뜻은 고맙지만 거절했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이 되자 소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삶의 터전도, 성준도, 어떻게든 다 지켜야만 했기에. 이후로 최대한 빨리 갚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여기까지 달려왔다. 어차피 결혼하면 네 돈 내 돈이 어디 있냐는 진상의 달콤한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걸 빌미로 인생을 저당 잡힐 생각은 없었다. 그러려고 받은 돈도 아니었다. 내 삶이 소중하면 남의 돈도 귀한 줄 알아야 했다. 진상의 돈은 끝까지, 반드시, 갚을 거였다. 소란이 덤덤하게 털어놓는 지난 사정을 백 회장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많이 고생했구나.”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백 회장이 제일 먼저 건넨 한마디였다.
“네 잘못도, 네 오빠의 잘못도 아닌데. 참 고된 세월을 보냈어.”
기꺼이 그녀의 처지를 공감하고 위로해주었다.
“할아버님…….”
“더는 그럴 필요 없다. 그 돈을 기어이 네가 다 갚겠다고 할 필요도 없고. 누가 갚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
“이제 우리가 가족인데.”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진상의 돈은 올가미처럼 제 목줄을 쥐고 흔들었다. 막판에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도 진상이 그토록 당당하게 굴었던 것도, 돈 때문이다. 나는 널 위해 큰돈도 선뜻 빌려줬는데, 하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네가 네 오빠를 위해 그 힘든 마음의 짐을 여태 지고 있었던 것처럼, 네 오빠도 너를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테고.”
“…….”
“강호도, 나도, 그런 널 위해 이 정도 부담은 함께 나누고 싶은데. ……그래도 안 되겠다고 할 테냐.”
더 마다할 수 없다. 절 향한 따뜻한 진심을 차마 밀어낼 순 없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할아버님. 염치없지만……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고. 이건 그냥 우리가 함께하는 거란다.”
“…….”
“그러니 내겐 갚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백 회장은 애틋하고도 자상한 눈빛으로 손주며느리를 바라보았다. 소란이 울음 섞인 얼굴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힘겨운 돈의 굴레를, 돈으로써 벗어난 것이 아니다. 애틋한 사랑으로 벗어나게 된 것에 소란은 벅차기만 했다.
“어허, 할애비 앞에서 울기는.”
“죄송해요, 할아버님. 너무 감사해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보면 볼수록, 예쁜 아이였다. 강호의 어미도 그랬을까. 제 아들이 그토록 사랑했으니 참 아름다운 아이였겠지. 앞에 두고 제대로 얘기 한번 해보지 못한 지난 세월이 못내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 속죄하고 싶었다. 백 회장은 그 마음을 담아 강호와 이 아이를 더 아끼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 ◇
“할아버지께서?”
강호는 의아해 고개를 기울였다. 퇴근 후 돌아오니 소란이 1층 거실에서 잠깐 보자고 했다. 그녀가 준비해둔 차를 마시며, 오늘 할아버지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네, 다 갚아주셨어요. 완전히 끝났어요.”
홀가분함과 먹먹함이 배어난 얼굴이다.
“잘됐네.”
“네, 잘됐어요. 지금 갚으나 나중에 갚으나, 일시불로 시달리든 할부로 시달리든 마찬가지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진작 나서서 갚아줄걸. 강호는 어딘가 모르게 억눌려 있던 소란의 눈빛이 환해진 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처리해준다고 할 때는 못 하게 하더니. 할아버지와 날 차별하는 건가.”
“할아버님 말씀은 들어야죠.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얄밉지 않았다. 돈도 돈이지만, 할아버지라는 든든한 지원군 덕분에 오늘 그녀의 어깨에 뽕 좀 들어간 느낌이다.
“그런데 지난번에 비해 할아버님 안색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건강은 괜찮으시죠?”
“나보다 건강하실 거야, 아마.”
강호는 딱 잘라 말했다.
“어르신 건강은 자주 챙기고 살펴야 하는 거랬어요. 저도 신경 쓸 테니 강호 씨도 종종 전화도 드리고 같이 찾아뵙기도…… 왜요?”
열심히 말하던 소란이 멈칫했다.
“뭐 묻었나……?”
볼이 화끈거릴 정도로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 침도 못 삼킬 정도로 굳어졌다.
“제법, 와이프 같아서.”
“와이프요?”
소란의 뺨이 화르르 붉어졌다.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부끄러움이 번진 볼을 보니 미칠 듯 귀여웠다.
“왜, 와이프를 와이프라고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
“와이프 맞죠, ……결혼했으니까.”
집안 어른 건강을 걱정하고, 좀 잘 챙기라 잔소리도 하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강호는 자신이 정말 이 여자와 결혼을 하긴 했구나 실감이 난다. 그게 못 견디게 좋았다.
“근데 자꾸 뭔가 이상해서요.”
“뭐가 이상한데.”
“모든 단계를 다 건너뛴 느낌이라……. 아직 완전히 가까워진 것도 아닌데.”
결혼이니 와이프이니 그런 말이 익숙해지려면 아직 먼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가까워지는데?”
자꾸만 골리고 싶어진다.
“설명해봐.”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것만으로도 소란은 바짝 긴장했다.
“우 변호사 말 잘하잖아.”
꿀을 먹었나. 힘껏 다문 입술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말이 힘들면, 다른 걸로도 괜찮은데.”
그러니 자꾸만 더, 조금만 더, 건드리고 싶어지지. 강호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소파에 앉은 소란의 옆에 한쪽 무릎을 대고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가까이에서 얼굴을 바라보자 동그랗게 커진 눈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음, 대표님?”
당황했는지 대표님이란다. 저러다 침대에서도 대표님 소리를 하게 생겼다. 아, 침대. ……거기선 그런 호칭도 나름 섹시하겠는데.
“후, 갑자기 이러시면.”
“이러시면?”
“온건파인 저로선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
뻔뻔하게도 자꾸 온건파라 우기는 그녀가 너무나 귀여웠다. 대표님 몸을 원해요, 제가 원하는 건 몸뿐입니다, 당당하게 외치던 우소란 어디 갔을까.
“급진파인 나는,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는데.”
“하아.”
그녀가 복잡한 얼굴로 내뱉는 숨이 뜨거웠다.
“내 머릿속에선 이미 가까울 대로 가까워져서 우리 사이에 틈이라곤 1밀리미터도 안 되는 것 같거든. 물론 온건파인 넌, 모르겠지만.”
진심 반, 장난 반이었다. 자꾸만 뒷걸음질하는 그녀를 꽁꽁 가두고 싶은 마음도 있고, 실제로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어떻게 더 가까워져야 할까. 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하나하나씩 밟아가려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든 손가락 끝이 아랫입술을 살짝 쓸었다. 흠칫 놀란 소란의 어깨가 떨렸다.
“선호하는 순서라도 있는 건가?”
‘와이프’란 말 듣는 게 이상하다고 한마디 했다가 전방위에 걸쳐 쏟아지는 공격에 참다못한 소란이 벌떡 일어섰다. 대뜸 튀어 오른 그녀를 피해 강호 역시 몸을 일으켰다.
“아하하……. 아직 연말이구나. 연말이네…….”
소란이 어색한 입가에 미소를 걸고 말했다.
“새해가 며칠 안 남았는데…….”
자꾸 새해, 새해. 그놈의 새해.
“오늘 일을 좀 무리해서 했더니 너무 피곤하네요. 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기한을 상기시킨 소란은 허리를 꾸벅 굽혀 인사하더니, 호다닥 침실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그게 또 귀여워 강호는 픽 웃었다. 내가 미쳤나. 저런 모습도 약 오르거나 얄미운 게 아니라 그저 귀엽게만 보이니. 미쳤지. 우소란한테 미친 건 확실하지. 찻잔을 정리한 강호는 트레이를 가지고 주방으로 향했다. 가볍게 설거지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조리대 한쪽 구석에 네모난 약상자가 보였다. 꺼내 먹은 듯 포장이 열려 있다. 어디 아픈가. 그는 작고 납작한 약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생리통, 허리통증, 근육통.
“아.”
그제야 이해가 돼 강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가.”
온건파의 비밀. 그 이유 때문에 침실 합치는 문제를 자꾸만 미루자고 한 건가. 한참 뒤도 아니고 겨우 일주일 정도 뒤라 의아했는데, ……그래서였구나. 그녀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게 됐다. 갑작스러운 결혼이 아니었다면 전혀 상상치도 못했을 일들인데.
“괴롭히면 안 되겠네.”
약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강호는 짐짓 심각해진 얼굴로 주방에서 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와, 내 얘기 좀 들어봐.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다니까.”
연희와 소개팅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찬규가 씩씩거린 적이 있다.
“걔가 춥다고 해서 차에 히터를 틀었다? 그랬더니 히터가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지 아냐며 막 성질을 내는 거야. 그래서 히터를 껐다? 좀 이따가 자기 추워 죽겠다고 또 난리를 치는 거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되냐?”
“알아서 해.”
“하, 그건 그렇다고 쳐.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을 먹자고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데려갔더니 오늘은 이게 안 땡긴다며 왜 자기한테 메뉴도 안 물어보고 마음대로 데려왔냐고 갑자기 펑펑 우는 거야, 내가 미쳐, 안 미쳐?”
“미치고 싶으면 미치든가.”
찬규의 절규에 응답해주지 않았다.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이유가 남자인 자신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러고도 내내 변덕에, 성질에, 우와, 진짜 나 이연희 성격파탄자인 줄 알았잖아. 그런데 나중에 미안하다면서, 자기가 ‘그날’이라 그랬다고.”
“그날?”
“어. 진짜 미안한데 그때 잘 받아줘서 너무 고마웠다고.”
“받아주긴 잘 받아줬나 보네.”
“별수 있냐? 받아줘야지. 그런데 그 공포의 기간이 또 돌아온다는 거 아니냐. 나 얘랑 연애하면서 잘 버틸 수 있을까? 모든 여자가 다 이래? 이런 거야?”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겠냐. 계나린한테 가서 물어보든가.”
찬규가 토로하는 고민은 강호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흘려들었는데 지금에야 그때 생각이 났다. 찬규는 연희가 예민해진 기간에도 늘 지극정성으로 보필했고,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 임신해서는 또 얼마나 잘 보살펴주었던가.
“내가 이제 연희 비위 맞추는 거 만렙 아니겠냐. 하여튼 잘해줘야 돼. 무조건 잘해주면 돼. 다른 거 없어, 그냥 미친 듯이, 잘해주면 돼. 그게 비결이야.”
“너희 부부가 잘 지내는 비결 따위 궁금해한 적 없는데.”
“인생 선배가 말씀하시면 새겨들어라, 좀.”
홍찬규가 지나온 길을 가만히 떠올려보자니, 마냥 무시하면 안 될 것 같다. 아무렴 이쪽으론 모든 게 서툰 자신보단, 검증된 사랑꾼 쪽이 낫겠지 싶다.
“잘해주라고 했지.”
강호는 그가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내일을 기약했다. ◇ ◆ ◇ 그가 차려준 아침을 먹었다. 소란이 설거지하려고 하자 강호는 눈을 무섭게 뜨며 비키라고 했다. 이 싱크대는 내 구역이니 넘볼 생각하지 말라는 듯 표정이 살벌했다. 뭐, 기본 표정이 그렇긴 하지만.
“그럼 저는 먼저 출근해보겠…….”
“기다려.”
“네?”
“데려다줄 거니까, 기다려.”
소란은 빠르게 설거지를 마치고 행주로 싱크대에 튄 물기까지 말끔히 닦는 강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시무시한 포스다. 손에 쥔 게 행주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말 안 어울리는데 또 묘하게 어울린다.
“저는 제 차 타고 가면 되는데요.”
“내려가서 차고 앞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그는 2층에 올라갔고, 소란은 차고로 내려왔다. 갤러리 라운지처럼 꾸며진 차고 앞 공간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자니 기분이 묘했다. 여긴 이러라고 만든 곳이었나. 함께 출근하기 위해, 남편을 기다리는 곳. 왠지 아침부터 설렘 지수가 초과한 기분이다. 이따 낮에 구치소 접견도 가야 하고, 법원도 가야 하고, 사실 차가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끝까지 거절하진 않았다. 출근길 데이트는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이따가는 뭐, 택시 타면 되겠지. 잠시 후 강호가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하아, 정말이지.
‘남신이 내려오네…….’
정장에 코트를 입고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오는 강호의 자태에 넋이 나갈 뻔했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남편의 모습이다. 그가 소란에게 다가왔다.
“오늘 많이 춥다는데.”
툭 내뱉는 말끝에 강호가 몸을 숙여 그녀의 패딩 지퍼를 잡았다. 흡, 돌연 가까워진 거리에 소란이 숨을 삼켰다. 지퍼 끝을 맞물리더니 지이익, 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손길에 발끝이 간질거렸다.
“자, 이거.”
그가 주머니에 뭔가를 넣어주었다. 소란이 손을 넣어보니 뜨끈뜨끈한 것이 잡혔다. 핫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