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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내가 어떻게 해버릴지도 몰라 (43/112)

#43화. 내가 어떻게 해버릴지도 몰라2021.03.30.

“내가 1층으로 내려갈까.”

“…….”

“아니면, 네가 올라올래.”

방을 합치자는 말이다. 소란도 물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진짜 부부처럼 공간도 함께 쓰고, 형식적인 계약서 따위 없애버려야겠다고. 그러나 위험한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제 생각은 한없이 건전했구나 싶다. 단순히 주거 공간을 하나로 합치잔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진한 욕망이 가득 배인 말이 분명했다. 마음까지 확인한 마당에 불씨가 언제 옮겨붙어 걷잡을 수 없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는 건 확실한 상황이다. 성적인 의도가 아니더라도 함께 있다 보면 언제든 그렇게 되어버릴 수 있고. 다만 문제가 있다면…….

‘며칠 안 남았는데. 어쩌면 당장 시작할 수도 있고.’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생리주기였다. 비교적 규칙적인 편이라 예측이 가능했다. 조만간 시작할 터였다. 그와 같은 방, 같은 욕실, 같은 침대를 쓰자마자 대자연의 시기를 맞이하고 싶진 않다. 결혼했지만 아직 남들과 같은 부부 사이는 아니니까. 연애를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됐다. 굳이 신비롭게 남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조심할 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가까워질수록 예상치 못한 순간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니까. 게다가 소란은 통증도 심한 편이라 연애 초기부터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또 하나 걱정되는 것도 있고.

‘인간의 탈을 쓰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섹시하면 어쩌자는 거.’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저릿했다. 강호는 제 입술이며 턱, 목, 어깨까지 차분히 훑을 뿐이지만 그 눈빛이 너무나 아찔하게만 느껴졌다. 얼굴이면 얼굴, 몸이면 몸, 눈빛이면 눈빛. 이렇게나 퇴폐적이고 색정적인 남자와 한방을 쓰게 된다면 위험한 건……, 이 남자다.

‘내가 어떻게 해버릴지도 몰라.’

거침없이 질주하는 욕망 열차는 아직 브레이크가 어디 있는지 못 찾았으니까. 백강호는 살아 숨 쉬는 자체만으로 유혹이다. 불쾌하고 찝찝한 사정에 더불어, 유혹적인 존재까지 참아내야 한다니 너무 잔인하다. 그래, 이건 아니지.

“음.”

소란은 이내 입술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1층 아니면 2층. 보기는 두 개만 줬는데 가차 없이 다른 선택을 해버렸다. 강호의 눈썹 끝이 살짝 구겨졌다.

“꼭 같은 방을 쓰기 싫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절대 아닙니다.

“시간을 좀 더 두고 정하는 게 좋겠어요. 일단 올해는 지난 다음에요.”

“올해는 나흘 남았는데. 곧 주말도 오고.”

나흘이면 부족하다. 넉넉히 일주일에서 열흘은 지나야 안정권인데.

“새해가 된 후에 다시 논의하는 게 어떨까요?”

“논의라.”

소란이 바로 오케이할 줄 알았는지 그의 표정이 한층 서늘해졌다. 그렇다고 갓 시작한 우린 뽀송뽀송한 사이인데, 내가 어떻게 내 입으로 얘기합니까. 어마어마한 대자연이 닥쳐오고 있다고. 사실 얼굴에 철판 깔았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니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긴 하다. 그게 뭐 대수라고. 그거야 그렇다고 치자. 강호가 ‘그래서 뭐?’라고 하면 어떡하나. 무슨 상관이냐고. 같은 방 쓰는 것뿐인데 그게 대체 왜 신경이 쓰이냐고 한다면? 생활의 불편함을 일일이 다 풀어 설명해야 한다니 안 될 일이다. 그뿐인가. 내 몸은 이런데 그쪽은 살벌하게 섹시하고, 그럼 나는 어떻게 참아야 하냐고 되물을 수도 없고. 먹을 수 없는 떡은 그릇째 치워버리는 게 낫다고, 어떻게 얘기한단 말인가.

“당장 내가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역시나 그는 떡 줄 사람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투다.

“그렇게까지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압니다. 하지만 저도 제 사정이란 게 있고, 너무 급진적인 것보다는 살짝 온건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편이라.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망할 놈의 대자연. 그것만 아니었어도 나는 급진파인데. 온건파인 척하게 생겼다.

“이제 와서?”

“네.”

나 이제부터 뼛속까지 온건파야.

“……그래. 정 그렇다면.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얘기해.”

“네,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쉬운 건 소란도 마찬가지였다.

  ◇ ◆ ◇

“진상아, 너 정말 아버지 회사 안 나갈 거니?”

박 여사는 밤늦게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진상을 붙들었다. 지켜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속이 터질 노릇이다.

“자리 마련한다고 했잖아.”

“뭐 하러 나가. 관심 없다니까.”

“그럼 차라리 로스쿨이라도 들어가든가. 엄마가 알아봐?”

“로스쿨? 말 참 쉽네. 그거 마음먹는다고 다 되는 거 아니야, 엄마.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데. 장난 아니야.”

소파에 기대어 누운 진상이 생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박 여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소란이 그 계집애도 한 걸 네가 왜 못 해,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쩌려고. 너 계속 이렇게 술 마시고 다닐 거야?”

“나 뭐 꼭 일해야 해? 어차피 임대료 따박따박 나오고, 나중에 재산도 다 물려줄 거잖아.”

회사 일도 안 배우겠다, 공부도 더는 안 하겠다. 일찌감치 떼어 받은 건물과 이후 받게 될 유산만 믿고 진상은 한량 노릇이다. 금방 괜찮아질 줄 알았더니 소란의 결혼 이후로 계속 이 모양 이 꼴이다. 제 아빠의 소원이 아들 판검사 만드는 것이라, 온갖 사교육과 스펙 만들기에 돈을 처발라 명문대 법대에 밀어 넣은 것까진 좋았다. 대학에 들어가니 공부엔 관심이 없는 것도 뭐, 괜찮았다. 판검사가 다 무슨 소용. 어차피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 진상이 떵떵거리고 살도록 해줄 거였다. 그게 불법적이든, 도의에 어긋나든, 박 여사는 상관없다.  

‘이것도 다 내 노력이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박 여사는 꽤 잘난 집안인 줄 알고 선보아 결혼했다. 상대는 ‘백화푸드’의 전신인 ‘백세식품’ 창업주 차남의 아들, 즉 손자였다. 비록 장남인 백무영 회장이 기업을 이어받았고, 자신의 시아버지인 차남은 후계 구도에서 밀려났지만 큰 계열사를 운영했고 워낙 재산도 많다 하니 그걸로 족했다. 그러나 빛 좋은 개살구였다. 시부모는 일찍 돌아가셨는데 유산에 맞먹을 정도로 빚이 많았다. 남편이 물려받은 자회사도 날이 갈수록 부실해진다는 걸 알았을 때는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같은 창업주 핏줄인데 누군 다 차지하고 앉아 승승장구하고 있고, 누군 그 10분의 1도 갖지 못했다니.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나. 백무영 회장네와는 비할 수 없이 격차가 벌어졌다. 박 여사가 시집와서 보게 된 큰댁은 얼마 되지 않아 아들 내외도 죽고, 손자 백강호만 남아 있다. 그것도 같은 사고를 겪고 운이 좋게 살아난 아기란다. 거참 아까운 일이다. 아기까지 함께 저세상으로 갔더라면 백 회장에겐 직계혈족이 없게 되는 건데. 시간이 갈수록 돌아가는 집안 꼴을 보아하니 나중에 백 회장이 죽고 나면 저 재산은 다 백강호에게 가겠구나 싶어 열불이 났다. 어째서 가문의 온 재산을 저 집에서만 다 끌어안고 있는가. 선대에서 제대로 나눈 유산을 두고 패악을 부린 것도, 그걸 허투루 까먹은 것도 전부 제 시부라는 걸 박 여사는 인정하지 않았다. 물려받은 회사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침몰해가는 것도 시부와 남편의 무능 콜라보 때문이란 사실조차 무시했다. 그저 백 회장네가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다 차지해 부당하다고만 여길 뿐이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래야,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정당하게. 우리의 몫을 제대로 챙겨야겠다, 박 여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때를 노렸다.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치밀하게, 그리고 인내심 있게, 차근차근 해야 할 일들이었다. 지금껏 잘해왔고, 또 모든 일은 다 잘될 것이다.  

“저희가 이만큼 잘 지내는 것도 모두 백부님 덕분이죠.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 회장 앞에 가면을 쓰고 살아온 세월만 해도 얼마인가. 무능한 남편 옆에서 이만큼의 부를 축적하며 생활해온 것도 모두 그녀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그뿐일까. 믿음직한 조력자의 능력 또한 출중하니 오랜 세월에 걸친 계획은 뜻대로 되어가고 있다. 내 새끼가 세상을 발아래 두고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더러운 건 모두 제 차지가 되어도 좋았다. 모정이라고 다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그럼. 당연히 이 재산 다 네 거지.”

그뿐인가. 더 많은 것들을 네 품에 안겨줄 텐데. 조금만 기다리렴.

“그게 다 어떻게 오빠 거야? 웃기고 있네.”

주방에서 도우미에게 주스를 한 잔 받아서 가지고 나오던 진혜가 볼멘소리를 했다. 이에 든든한 빽이 있는 진상이 코웃음을 쳤다.

“야, 너는 대학원 졸업하면 얌전히 시집이나 가. 내 유산 탐내지 말고.”

“난 뭐 자식 아니야? 엄마, 아빠 죽으면 그 유산을 오빠 혼자 물려받는 게 말이 돼?”

“엄마, 아빠가 나한테 다 준다고 하면 그걸로 끝이지. 원래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면 그걸로 장땡이야.”

멀쩡히 살아 있는 엄마를 앞에 두고 남매가 벌써 유산 다툼이다.

“웃기시네. 오빠는 법대 나와서 그것도 몰라?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 나 그런 거 할 거야. 오빠한테 다 주기만 해.”

진혜가 박 여사와 진상을 표독스럽게 흘겨보았다. 진상이 술이 다 깬다는 얼굴로 진혜를 어이없게 보았다.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설마 그런 것까지 미리 알아봐놓은 거야?”

“그래. 무슨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내가 손 놓고 있어?”

어릴 적부터 자기 먹을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챙겨온 딸을 보며 박 여사는 혀를 찼다. 그래, 쟤는 똑똑하니까. 사막에 갖다 놔도 알아서 잘 살 애니까. 진혜라면 걱정은 안 해도 될 터다.

“너 어디 눈을 흘겨. 표정 곱게 못 해?”

박 여사는 야무진 진혜보다는 진상에게 늘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감추지도 않았다.

“멀쩡한 엄마 앞에 두고서 유산 어쩌고 그딴 소리 집어치우고 넌 방에 들어가기나 해.”

“유산 소리는 오빠가 먼저 했거든?”

“엄마가 어련히 다 챙겨줄까. 넌 꼭 바락바락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더라.”

사람 질리게.

“설마 이 많은 재산을 오빠한테만 다 물려주겠니?”

“물려주고도 남지. 내가 엄마를 몰라?”

끝까지 그런다. 저러니 정이 안 가지. 박 여사는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진혜가 못내 불편했다.

“하여튼 그러기만 해. 나 가만히 안 있어.”

진혜는 끝까지 쏘아보곤 휙 돌아섰다.

“쟤는 누굴 닮아 저래, 정말.”

그 말에 진상이 박 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랑 붕어빵이잖아.”

“너는 무슨 소릴 그렇게 하니?”

아무래도 자신을 닮아 그렇다는 건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진혜를 보고 있으면 제 단점과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아서, 박 여사는 그런 딸을 더더욱 예뻐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끔찍한 차별 때문에 진혜가 더욱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박 여사는 오직 유약한 아들 진상만 감싸고 돌 뿐.

“너도 얼른 들어가서 씻고 푹 쉬어. 내일 해장국 끓여놓으라고 할게. 아침에 내려와서 꼭 먹고.”

후우우. 진상은 알코올 향이 짙게 느껴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들이 터벅터벅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깟 여자애가 다 뭐라고. 어차피 싹 치워버릴 존재라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진상 혼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박 여사는 속이 뒤틀렸다. ◇ ◆ ◇ 로펌 근처 고급 한정식집. 소란은 점심 한 끼 사주고 싶다며 찾아온 백 회장의 앞에 앉아 있다.

“할아버님. 이것 좀 더 드셔보세요. 고기가 굉장히 부드럽네요.”

그녀는 맛있는 음식을 백 회장의 앞에 놓아주며 살갑게 말했다.

“나 다 주지 말고 너도 좀 먹으렴.”

“저도 맛있게 먹고 있어요.”

백 회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강호 그 무뚝뚝한 거만 보다가 이렇게 우리 손주며느리랑 식사하니 무척 좋구나.”

“그런 의미에서 이 점심은 제가 사드릴게요.”

“뭐? 아니다. 내가 사주고 싶어서 일부러 온 건데.”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가 대접해야죠. 그렇게 하게 해주세요, 할아버님.”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뭐 하러 나한테 쓰시나.”

그냥 먹는 밥 한 끼로는 무척 비싼 금액이다. 아무리 변호사라 해도 백 회장의 눈엔 코흘리개 사회초년생의 쌈짓돈으로만 느껴졌기에 끝까지 물리치려 했는데.

“할아버님 맛있는 거 사드려야 힘들게 일하는 보람도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맛있게 드셔주세요.”

같은 말도 저리 예쁘게 하니, 백 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질 수밖에 없다.

“그러자. 그럼 맛있게 먹자꾸나.”

줄지어 나오는 음식들을 차례로 비우고, 그림처럼 예쁘게 꾸며진 디저트를 먹을 때쯤이었다.

“일전에 돈을 빌렸다지. 진상이에게.”

백 회장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소란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박 여사가 결혼식에 와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낼 때, 돈을 빌렸던 이야기까지 다 했다고 했다. 역시나 그 일을 언급하시는 거였다.

“네, 당시 집안에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어요. 하지만 매달 상환 중이고 내년 안에는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 계좌와 금액을 적거라.”

백 회장은 직원을 불러다 받은 종이와 펜을 소란에게 건넸다.

“내가 처리해주마.”

“할아버님. 이건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소란은 깜짝 놀라 거절했다. 강호와 결혼하며 받은 계약금이 있다. 단순히 돈만 보고 했던 결혼은 아니지만, 그는 계나린과의 결혼에도 일정 금액을 걸어두었었다. 그대로 인계한 계약서에 의해 소란 역시 강호에게 받게 된 돈이다. 그걸 진상의 빚을 바로 정리하는 데 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결혼식에 우르르 몰려와 백 회장 앞에서 그 난리를 치고 갔으니, 결혼 직후 돈을 갚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빌미를 제공할 여지가 있었다. 돈 때문에 강호와 결혼했냐 소리는 당연히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나머지 빚을 청산할 계획이었다. 그때까진 지금껏 하던 대로 원금과 이자를 자동이체 중이고. 그런데 백 회장이 나서서 금전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하니 소란은 조금 곤란했다.

“네 뜻은 알겠다만, 나는 내 손주며느리가 그런 식으로 진상네 가족과 엮여 있는 걸 원치 않는단다. 이건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는 게 좋겠구나.”

백 회장의 뜻은 부드럽지만 강경했다.

“그럼 제가 빨리…….”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런다.”

백 회장의 진심 어린 눈빛에 소란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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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어떤 연유로 진상이에게 돈까지 빌리게 되었는지 다 말해주지 않겠니. 분명, 네게도 이유가 있었을 텐데.”

추궁이 아니다. 소란의 사정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벌써 이해할 준비가 된 얼굴이었다. 그 믿음 가득한 시선에 소란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몇 해 전,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에 불이 났어요.”

그리고 천천히 털어놓았다. 그녀를 옥죄고 있던 돈의 덫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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