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벗으세요, 얼른 벗어요!2021.03.27.
“네가 직접 입혀줘.”
누가 들으면 손이 없나, 눈이 없나, 어린아이도 아니고 왜 옷을 입혀달래, 하겠지만 이들의 상황은 달랐다. 소란이 그에게 준 터틀넥은 특별한 의미였다. 다만 셔츠를 벗어버린 그와 마주하고 있으니 굉장히 수줍어질 수밖에. 소란은 눈동자를 위로 굴리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 꼭…… 당장 입으시라고 드린 건 아니고요.”
“선물인데. 바로 입어야지.”
뭐. 추진력 인정합니다. 좋은데. 다 좋긴 한데……, 그렇다고 대뜸 셔츠를 막 벗어젖히면 미치게 더 좋잖아요. 강호의 앞에 서 있으려면 아무래도 인공호흡기를 필히 지참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착하다. 나는 착해. 나는 참 착하지.’
착하다는 주문으로 뇌를 속이며 소란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상체를 드러낸 강호를 빤히 바라보고 있기란 힘든 일이다. 견물생심이라 했던가. 눈앞에 생생한 근육이 숨 쉬고 있으니 손을 대보고 싶고, 그 손을 움직여보고 싶고, 한번 안겨보고 싶고……. 그게 사람의 본능이요, 욕심 아니겠는가. 착한 생각도, 착한 주문도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심장은 그저 활어처럼 뛰어댈 뿐.
“촉각 방어 극복 차원에서 준비한 선물 아닌가?”
“아, 맞습니다.”
정신 차리라는 듯 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씻으러 들어가야 하는데. 빨리 입혀보지.”
그가 팔짱을 낀 채 턱을 들고 눈을 내리감았다. 시착을 기다리며 꼼짝하지 않는 강호는 마치 대리석 조각 같다. 그래. 조각이다, 조각. 이건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조각일 뿐이야. 마네킹이라고 생각해보면 답이 나왔다. 그 위에 훌렁 옷을 뒤집어씌우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지금 강호는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트라우마와의 힘겨운 싸움에 도전하는 중 아닌가. 그런 사람을 두고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소란은 불순한 의도를 멀리멀리 떨쳐버렸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은 소란이 터틀넥을 쥐고 그의 머리 쪽으로 뻗어보았다.
“그런데 키가 안 맞네요.”
머플러와 달리 터틀넥은 머리에 완전히 씌워 입혀야 했다. 강호가 허리를 숙여 머리를 내어주든가, 아니면 자세를 완전히 낮추어야 가능할 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는 1인용 의자에 앉았고, 소란은 그 앞으로 다가섰다. 손끝이 어째 파르르 떨렸다. 입혀주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또 그의 얼굴이며 몸을 내려다보게 되는 위치다. 앉아 있는데도 옆구리살은커녕 근육이 촘촘히 올라붙은 굴욕 없는 배. 술김이었지만 분명 만져본 적이 있는 탄탄한 가슴. 매달려도 끄떡 안 할 것처럼 강인해 보이는 팔과 어깨. 이건 그냥 고문이다, 고문.
“언제까지 감상만 할 거지?”
눈을 감고 있던 그가 툭 내뱉는 말에 소란은 놀라서 손에 쥔 터틀넥 목 부분을 강호의 머리에 훅 씌웠다. 윽. 그의 입에서 짧은 비명 비슷한 소리가 터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거칠었죠.”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통과한 옷이 어깨 위에 걸쳐져 있다.
“거친 것도, 나쁘진 않지.”
강호의 눈꺼풀이 열리며 색정적인 시선이 그녀에게 와서 닿았다. 아니, 착각이다. 그는 그냥 쳐다보는 것뿐이다. 게다가 슬쩍 웃음기까지 어린 입매에 소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아. 그와의 일상은 심장에 해롭고 또 버겁다. 저 사람 잡는 섹시 눈빛 때문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니, 제가 이런 주접쟁이가 되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닌가. 강호가 몸을 일으켜 소매에 차례로 팔을 끼워 옷을 마저 입었다. 이에 소란은 자연히 물러섰다. 따뜻하고 질감 좋은 옷이 마치 맞춘 것처럼 그의 몸을 착 감쌌다. 도톰하게 목을 둘러싼 부분은 턱 밑까지 올라와 있다. 날카로운 느낌의 얼굴이 더욱 냉랭해 보여 그와 꼭 어울렸다.
‘와, 진짜 조각 맞네. 너무 멋있는 거 아냐?’
이 남자가 정말 내 남편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드레스 셔츠도, 그냥 티셔츠도, 심지어 법복을 입었을 때도 멋있었지만 소란이 좋아하는 스타일인 만큼 터틀넥을 입은 그는 움직이는 화보와도 같았다. 이 사람과 내가 부부라니. 감탄 어린 눈빛의 소란과 달리 그는 영 목이 갑갑한지 불쾌한 듯 눈썹을 구겼다. 목이 너무 졸리지 않도록 넥 부분이 여유로운 옷으로, 무엇보다 목에 닿는 느낌이 나쁘지 않게 보드라운 옷감으로 세심하게 골라왔는데 아직은 무리인 모양이다. 거울을 향해 선 강호는 손을 올려 목 부분을 움켜쥐었다. 찡그리며 짧게 숨을 삼키는 모습이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괜찮으세요?”
아무래도 계속 입고 있으면 안 될 듯했다. 강호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숨이 아까보다 가빠져 있다.
“벗으세요, 얼른 벗어요!”
소란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마치 응급처치를 하려고 뛰어든 사람처럼 서둘러 그의 터틀넥 아랫자락을 잡고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강호의 잘 짜인 복근이 드러났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빨리 벗어야지, 큰일 나겠어요.”
그녀는 질주하는 한 마리 야생마가 되어 강호의 터틀넥을 벗기려 했다. 이 순간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오직 그의 옷을 벗기기 위해서인 사람 같았다.
“어어?”
다만 너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던 탓일까. 한 발짝 물러서려 했던 강호가 제 뒤에 있던 의자에 걸려 몸이 기울었다. 게다가 앞에서 밀어붙이던 소란의 무게까지 더해져, 순간 그는 뒤로 넘어가고야 말았다.
“꺄아악!”
강호의 옷을 꽉 붙들고 있던 그녀까지 함께. ◇ ◆ ◇
“내가 아무리 거친 걸 좋아한다고 했지만.”
“…….”
“이러면 너무 고마운데.”
양모 카펫 위에 누운 강호는, 제 복근을 깔고 앉아 있는 소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몸통의 반까지 올라간 터틀넥은 아직 다 벗기지 못한 상태였다. 뒤로 넘어져도 그의 훌륭한 운동신경이라면 몸을 휙 돌려 가볍게 다시 일어섰을 테지만, 제 위로 함께 넘어진 소란에게 깔려 그럴 수 없었다. 벗기다 만 옷, 드러난 상체 아랫부분에 말을 타듯 올라앉은 소란. 자세가 심각하게 야할 뿐이다. 그냥, 넘어진 것뿐인데. 그녀의 볼이 화르르 불타듯 빨개졌다.
“아니, 전 그냥 옷을 벗겨드리려고.”
“그러니까.”
순간 목이 조여드는 느낌도 잊었다. 당황한 얼굴로 제 위에 앉아 있는 소란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고맙다고.”
손만 뻗으면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다. 그뿐인가. 제 몸 옆으로 접어 댄 그녀의 다리에도 닿을 수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내어 손을 위로 뻗으면, 편안한 차림 안에 감춰진 그녀의 허리까지도…… 잡을 수 있는 위치다. 이건 제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그런데 언제 비킬 예정이지?”
“지금요. 바로 지금입니다.”
소란이 후딱 일어섰다. 버튼을 누르면 튀어 오르는 인형인 줄 알았다. 갑자기 배 위가 허전해졌다. 그냥 조금 더 있을 걸 그랬나. 그러나 목도 다시 갑갑해졌다. 아마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지독하게도 고통스러운 감각. 숨통이 조이는 느낌은 아직 다 벗지 못한 옷의 목 부분에서 전해지는 것이다. 허술하게 두르기만 했던 머플러와는 또 달랐다. 강호는 상체를 일으켜 빠르게 옷을 올려 벗어냈다. 하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 하고 대답하며 강호는 목을 쓸어보았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턱 아래를 세게 짓누르다가 물러간 기분이다.
“……이것까진 아직 무리 같아요. 원래도 당장 입으시라고 산 건 아니었고.”
안다. 당장 입고 싶은 건 강호의 마음이었다. 그녀가 제 생각을 하며 사준 선물이라니 터틀넥이고 뭐고 빨리 입어보고 싶은 생각에 그만 서둘렀다.
“이걸 입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 노력해봐요.”
우리.
“제가 여러 방법을 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란다. 강호의 심장이 불씨를 떨어뜨린 듯 화르르 타올랐다. 겨우 그런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끓어올랐다. 어린 소년처럼. 사실 그는 지금껏 이 불쾌한 감각을 이겨낼 시도를 하진 않았다. 생존을 위협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트라우마에 맞서기까지 해서 이겨내야 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불편함도 익숙해지면 일상이 된다. 납치당했던 경험에서 기인한 두려움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나아졌고, 그날 밤을 떠오르게 하는 천둥소리만 참아내면 될 뿐이다. 그런데.
“우리 노력해봐요.”
그녀가 그러자니 이건 죽어도 극복해야만 할 문제가 되어버렸다. 낫게 해주든가, 하고 스치듯 던졌는데 그녀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었나 보다. 예쁘게도. 소란은 떨어진 옷을 들어 잘 접었다. 기껏 사 온 옷을 던졌다고 생각할까 봐 강호가 덧붙였다.
“마음에 들어.”
아직 입을 준비가 안 된 것뿐이다.
“선물, 고마워.”
좋다는 말을 조금 더 해주고 싶은데. 그러고 보니 이 터틀넥은 가격이 꽤 높은 편인 데다가 흔하지 않고 아는 사람만 아는 해외명품 브랜드였다.
“그런데 이 브랜드는 한국에 들어오는 곳이 별로 없는 걸로 아는데. 나도 해외 나갔을 때만 구입했던 거라.”
“아, 역시!”
소란이 뿌듯해하며 손뼉을 쳤다.
“태석 선배님이랑 같이 골랐거든요. 선배님께 부탁해서 자주 가시는 편집숍에 갔어요.”
단번에 강호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소란은 그저 그의 취향을 제대로 맞혔다는 사실에 기뻐할 뿐이다.
“마태석이 가는 편집숍에, 같이 갔다고?”
괜히 유치해지는 마음에 ‘형’ 소리를 떼어버렸지만 소란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역시 태석 선배님이라면 이런 센스가 있을 줄 알았어요. 오늘 선배님이 입으신 옷이 너무너무 멋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멋있었다고?”
“아, 네. 제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로 입고 오셨더라고요.”
“좋아한다고?”
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런 터틀넥을 입고, 음, 저기 걸린 코트. 저런 코트를 위에 걸쳤는데 이게 아시죠? 피지컬이 좀 되어야 소화 가능한…….”
“그래서 지금 마태석 스타일로 날 입히려는 거야?”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소란이 손을 내저었다.
“아뇨, 꼭 선배님 스타일이라기보단, 제가 너무 좋아하는 스타일로 이미 태석 선배님이 입고 오신 거라서요.”
그거나 그거나. 기분이 언짢은 건 매한가지다.
“그래서 퇴근 후에 같이 쇼핑을 했나.”
“네, 했죠.”
“저녁도 먹고?”
생각만 해도 부아가 치민다. 그 꼴은 죽어도 못 볼 것 같은데, 지금까지 백진상과 9년이나 만난 걸 어떻게 참아왔는지 자신이 생각해도 미스터리였다. 물론 이젠 얘기가 다르지. 지금은 명실상부 제 아내니까.
“아뇨. 저녁은 집에 와서 저 혼자 먹었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려던 차였는데, 소란이 또 야속한 소리를 했다.
“태석 선배님이 선약이 있다고 하셔서요. 제가 사드리려고 했는데.”
뒷골이 확 당긴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혔다가 다시 휙 날아오길 반복하니, 혼자 롤러코스터에 몸을 실은 느낌이다. 이런 건 짝사랑일 때나 경험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쌍방이잖아. 강호는 억울했다. 그러나 소란의 눈은 아무런 의도도 담겨 있지 않아 그저 담백하기만 했다. 그러니, 마태석이 아무래도 널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니 조심하라고 말할 수 있나. 태석의 감정도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물론 아무도 모를 거고, 소란을 향해 아주 예민한 레이더를 세우고 있는 자신에게만 발동한 촉이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끝까지 모르는 채로 살아. 절대 깨닫지 말고.
“그럼 씻으세요. 전 내려갈게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소란이 끝까지 모른다 한들, 과연 그녀가 완전히 제 사람일까.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잠깐.”
강호는 나직하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네?”
소란이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따지고 보면 제 울타리 안으로 먼저 들어온 건 바로 소란이다. 이미 고백하고, 고백을 되돌려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10년이나 차곡차곡 쌓인 그 마음의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겨우 절 돌아봐주기 시작한 그녀로선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일 텐데. 네가, 그런 날, 감당할 수나 있을까. 강호가 한 발 한 발 느리게 걸어갔다. 제 발로 굴러들어온 사냥감을 바라보듯 번뜩이는 눈빛을 감추지 않고서. 긴장한 듯 멈춰 선 소란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우소란.”
다른 남자의 마음 따위는 몰라도 된다.
“이제, 같은 방 써야지.”
하지만 내 마음은 알아야 할 거야.
“내가 1층으로 내려갈까?”
그녀를 포위하듯, 아니, 출구를 봉쇄하듯 드레스룸에서 침실로 나가는 통로를 막아섰다.
“아니면, 네가 올라올래?”
대답하지 않으면 절대 비켜주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