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딱 제 스타일이에요 (40/112)

#40화. 딱 제 스타일이에요2021.03.20.

“내 취향은 너니까.”

그의 말에 소란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민트초코를 먹겠다는 거지. 파인애플 피자도, 찍먹도, 물복도. 다 자기 취향 아니어도 기꺼이 먹겠다는 거지. 이거 그야말로 트루러브 아닌가? 민트초코를 극혐한다는 연희는 서슴지 않고 소란을 비난했다. 세상에 먹을 게 없어서 치약을 먹냐는 소리를 해 소란을 대로하게 했다. 그깟 취향이 뭐라고 진지하게 다투는 그녀들을 보며 동료 변호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다. 반민초단이 나로 인해 민초단에 합류하다니. 사랑이 이렇게 위대하구나. 소란의 감동 어린 시선이 강호에게로 향했다.

“내가 전에 했던 고백보다 지금 이 말에 더 설레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바로 보셨는데요.”

그녀가 생긋 웃었다. 단순히 음식 취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트러블이 있겠어요, 앞으로.”

“…….”

“그중 사소한 취향 하나하나가 어긋나서 오는 문제도 많다고 들었어요.”

소란이 조곤조곤 말했다.

“그런데 지금 그걸, 저한테 맞추겠다고 하는 거잖아요. 뭐가 됐든.”

강호는 숨 쉬듯 한 말일지 몰라도, 그게 사실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소란은 알았다. 믿기지 않는 사랑 속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도.

“……진짜 감동했어요.”

한번 꺼내놓은 마음은 다시 숨길 방법을 몰랐다. 강호도, 소란도, 그저 솔직하게 말하는 법만 안다는 듯 그렇게 제 사랑을 전했다.

“사실 나한테도 겨울이란 계절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어.”

그가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납치를 당했던 것도 12월이라서.”

소란이 가슴 아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물론 12월의 네 그 상처들은 나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겠지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비교할 수 있는 상처가 어디 있을까. 소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12월 말이야.”

크리스마스를 포함한 12월.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날도 12월이더군.”

“아…….”

고3이었던 소란이 그 겨울에 논술을 위해 학교에 갔다가 강호와 처음 만난 건 바로 12월이다. 인연이 바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강렬하게 각인된 첫 만남은 분명 서로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강호가 제 왼손을 가만히 들어 보였다. 심플한 반지가 그의 왼손 약지에 얌전히 끼워져 있다. 다시는 빼지 않을 것처럼.

“너와 내가 결혼한 것도 12월이야.”

할아버지가 올해를 절대 넘기지 말라고 하셔 강호는 12월로 날을 잡았다. 원래는 12월 중순이었지만 소란과의 결혼을 진행하며 식을 12월 초로 당기기도 했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은 것도 바로 이 겨울이다.

“우리의 만남을 생각하니.”

“…….”

“그렇게 잔인한 계절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소란의 가슴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맞아요.”

그녀는 제 왼손 약지에도 끼워진 결혼반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우마. 어쩌면 스스로 만든 틀 속에서 한없이 괴로워만 하며 살았던 건지 모르겠다. 제게 손을 내밀어 그 지옥에서 건져준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다. 12월. 그리고 크리스마스. 소란에겐 더 이상 잔인한 날이 아니다. 아니, 그와 함께하는 한 매일매일이 아름다운 날일지도. 그녀는 환히 웃으며 남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었다. 무척이나 달고 맛있다. 둘 사이에 감도는 공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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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소란은 절에 버스를 타고 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강호가 올 줄도 몰랐고, 그의 차를 타고 함께 돌아오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자신이 보고 싶어 왔다니. 몇 번을 마주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이다.

“좀 자둬.”

서울로 오면서 그가 조수석 시트를 조정해 뒤로 눕혀주었다.

“이렇게까진 안 하셔도 되는데.”

“돼.”

그는 간결하게 대답했고, 심지어 시트의 마사지 기능까지 사용해 그녀를 더 안락하게 해주었다. 온열시트가 엉덩이를 따뜻하게 데우고, 시트 속 안마기가 등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강호를 운전기사로 부려먹을 생각은 없는데, 어째 자꾸만 눈이 감겼다.

“저 그러면 조금만 잘게요.”

밤새 꿈을 꾸고, 또 깨어나 펑펑 울었던 탓일까. 하염없이 잠이 쏟아졌다. 엄마의 품속처럼 따뜻했다. ◇ ◆ ◇ 강호와 소란은 서울로 돌아온 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성준에게 갔다. 그와 함께 엄마 아빠의 유골을 모셔둔 봉안당에 가기 위해서였다. 강호의 차를 타고 근교의 봉안당에 도착했다.

“엄마, 아빠.”

그 앞에 바짝 다가선 소란이 먹먹한 목소리로 나란히 있는 엄마, 아빠를 불렀다. 어린 성준, 소란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과 두 분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고마워.”

내 꿈에 다녀가줘서. 와서 안아주고 얘기해줘서, 엄마 너무 고마워. 오랜 시간 가슴을 짓이기던 죄책감을 떨쳐낸 건 둘째치고, 엄마의 감촉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목소리와 품이 너무나 생생했다. 미안함도, 그리움도, 한순간에 씻겨나갔다. 가슴속에는 엄마가 남겨주고 간 따뜻한 온기만 가득했다.

“아빠. ……아빠.”

그토록 사랑했던 엄마의 곁으로 간 아빠. 자신을 끝까지 안아주고 품어주었던 아빠. 어느 밤. 병원에 누워 있는 아빠 옆에서 책을 보던 소란이 물은 적 있었다.  

“아빠. 그런데 왜 식당 이름이 ‘달 뜨는 밥집’이야? 저번에 채소가게 아줌마가, 너네 식당 ‘지연이네 밥집’일 때부터 내가 봤는데, 라고 하시던데. 이름 바꾼 거였어?”

“아, 그거.”

  소란에겐 어릴 적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원래는 엄마가 혼자 운영했던 식당이잖아. 엄마가 자기 이름 지연이 넣어서 그냥 지은 거였대. 그런데.”

“그런데?”

“아빠가 엄마한테 결혼하기 전에 매일 시를 필사해서 편지를 주곤 했거든.”

“헐, 낭만적이다.”

“엄마가 1년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답장을 해주었는데.”

“1년이나?”

  그저 동네에서 알고 지내다가 서로 좋아져 결혼했다고 들었다. 그런 낭만적인 날들이 있었는지 몰랐다. 1년이나 시를 옮겨 적으며 아빠가 얼마나 애탔을지. 그 마음을 쉽게 받아주지 못했던 엄마도 얼마나 속으로 앓았을지. 지나고 나니 다 예쁜 추억인 것을.  

“답장을 받고 나서 아빠가 그다음 편지에, 김용택 시인의 시를 적었어.”

“어떤 시?”

“아주 오래된 시집에 수록된 시인데,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란 시야.”

“그거 알아. 엄청 로맨틱한 시잖아. 엄마가 감동했겠다.”

“그랬나 봐. 아빠 하던 서점 정리하고 엄마 식당 같이 운영하면서, 식당을 새로 정비하는데 엄마가 간판을 바꾸면 어떠냐고 하더라.”

“그렇게 바꾼 거였구나.”

  아빠의 사랑에 대한 엄마의 화답이었다. 달빛에 실어 보낸 연정이 엄마, 아빠의 터전에 가득히 자리했다. 고통도, 아픔도, 슬픔도, 저 멀리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빠와 오빠. 그 안에서 자신이 받은 건 온통 사랑뿐이다. 운이 좋았다. 아파할 이유가 없다.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그녀가 받은 사랑은 넘쳐흘렀다. 감사한 일이다.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강호가 묵묵한 음성으로 인사했다. 결혼 전에 왔어야 했는데 그럴 경황이 없었다. 마음을 확인한 그녀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지금, 못내 더 애틋하기만 했다.

“엄마 아빠도 강호 씨 봐서 좋으실 거예요.”

소란이 엷게 미소 지었다. 강호 역시 그러길 바랐다. ◇ ◆ ◇ 성준이 안에서 엄마, 아빠를 뵈며 혼자 조용히 시간을 갖는 사이, 강호와 소란은 먼저 건물 밖으로 나왔다. 겨울의 봉안당은 조금 쓸쓸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싫기도 했다. 바깥은 온통 반짝거리고 화려한데 이곳은 착 가라앉은 분위기라서. 물론 트리도 있고 장식도 있긴 하지만 어쩐지 더 을씨년스러워 소란은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다. 더는 마음이 불편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오빠도 좋은 사람 만나면 좋을 텐데요.”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툭 꺼내놓았다. 제게 이런 변화가 찾아온 것도 전부 강호와 함께 있게 된 덕분이니까. 저 안에서 착잡한 마음으로 엄마, 아빠를 마주하고 있을 성준이 소란은 안쓰럽기만 했다. 이제 오빠는 집에 혼자 있고, 식당에도 혼자 있다. 외로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

“네. 오빠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요. 옆에 저도 없고.”

“형님이 원하시는 거야?”

“오빠요? 그건 아직 몰라요.”

강호는 흐음, 하고 생각하는가 싶더니 또 물었다.

“형님, 아기는 좋아하시나.”

“아기요? 엄청 좋아하죠. 식당에 아기 오면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아기는 왜요?”

“잘됐네.”

중얼거리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형님이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은?”

“음. 오빠 여자친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난해하긴 하던데.”

“네?”

“쉽진 않을 거야.”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워낙 작은 소리라 잘 듣지 못한 소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다만 정말 성준에게 여자친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소란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오빠가 관심을 좀 보이면 좋을 텐데. 주변에서 아무리 소개해준다고 해도 성준은 마다하기만 했다. 전부 절 구하다가 다친 다리 때문인 것 같아 소란은 늘 마음이 무거웠다. 오빠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자신은 무조건 그 두 사람의 편이 되리라 생각해왔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시누이가 될 테다, 다짐하면서. 반드시 그런 날이 오길 바랐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 ◆ ◇

[전주에 있는 거래처에 문제가 생겨서 내려갔다 와야 해. 좀 늦을 테니 먼저 저녁 먹어.]

소란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했고, 강호의 메시지를 보게 됐다.

“또 출장이구나.”

그녀는 조금 실망해 중얼거렸다. 바쁜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강호는 출장이 잦았다. 오늘 모처럼 야근을 하지 않고 집에 가서 저녁을 차려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혼자 먹게 생겼다. 어제는 봉안당에서 나와 성준과 근처 식당에서 함께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성준을 데려다주고 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1층 중문 앞에서 어색하게 헤어졌다. 마치 썸을 타는 남녀처럼. 먼저 들어가. 아니, 먼저 올라가세요. 서로에게 등 보이길 미루며 겨우겨우 헤어졌다. 어떤 계기가 있어야 불이 확 붙을 텐데 적어도 어젠 그럴 일이 없었다.

“계기는 앞으로 만들면 되지.”

소란은 싱긋 웃으며 사무실로 향했다. 이미 결혼했고, 또 이미 마음까지 확인했는데 계속 1층과 2층으로 공간을 나누어 사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소란을 누군가 불렀다.

“란이란이.”

석이석이 마태석이다. 소란이 돌아보자 코트까지 챙겨 입은 태석이 있다.

“어디 나가세요?”

“아니. 외부 미팅 다녀오는 길이야. 삼성동이었는데 거기 우 변 좋아하는 빵집 근처였거든? 빵 잔뜩 사다가 휴게실 넣어놨는데 가서 좀 먹어.”

“아뇨. 괜찮아요.”

어쩐지. 사무 공간에 있던 직원들과 비서들이 다 어디 갔나 했다. 야근을 한다면 소란도 당장 달려가서 먹겠지만 오늘은 일찍 나갈 예정이다. 강호의 출장으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긴 했지만.

“아, 그것보다요.”

소란은 태석을 보곤 불현듯 할 일이 생각났다. 그는 아이보리색 터틀넥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입고 있어 언제나처럼 댄디했다.

“왜?”

“선배님 오늘 되게 멋있네요.”

“나?”

뜻밖의 말에 태석이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소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에게로 조금 더 다가갔다.

“저는 남자가 터틀넥에 코트 입은 모습이 그렇게 멋있더라고요. 딱 제 스타일이에요.”

“그, 그래?”

“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태석이 긴장한 얼굴로 애매하게 웃었다.

“뭔데?”

“선배님 그 옷 어디서 사셨어요? 백화점? 편집숍? 평소 어느 매장들 이용하시는지 혹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왜?”

소란이 사랑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강호 씨한테 선물하고 싶어서요.”

#애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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