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내 취향은 너니까2021.03.16.
소란은 몽연한 안개를 헤치고 골목을 돌고 또 돌아 익숙한 장소로 들어갔다. ‘달 뜨는 밥집’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를 마치면 달려갔던 엄마의 식당. 아무렇지 않게 들어서자 그곳 주방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소란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엄마?”
조리대 앞에 서 있던 엄마가 돌아보았다. 연두색 앞치마를 한 엄마는, 서른 살 그대로였다. 소란의 기억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바로 그 모습.
“엄마…….”
소란은 놀라서 엄마를 부르기만 했다.
“어서 와, 내 딸.”
엄마가 팔을 벌리며 웃었다. 머리가 멍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꿈에도 한번 나와주지 않았던 엄마가. 그토록 보고 싶어도 다시 볼 수 없었던 엄마가 지금, 제 앞에 있다.
“진짜 엄마야……?”
소란이 눈을 감았다 뜨며 흔들리는 걸음을 옮겼다.
“그래, 엄마야.”
지금의 나와 나이가 같은 엄마. 소란은 그녀의 앞에 천천히 다가갔다. 기억하는 것보다 키가 작았다. 저보다 더 아담한 체구였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보다 더 젊고 예뻤다. 고생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엄마는 참 곱고 아름다웠다.
“엄마…….”
소란이 할 수 있는 말은 ‘엄마’뿐이었다. 눈물이 그득하니 차올라도 오직 그 말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엄마가 지금 제 앞에 있다는 것이.
“내 딸.”
엄마가 품에 가득 소란을 끌어안았다. 말랑하고 따뜻한 품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진짜 엄마였다.
“말도 안 돼…….”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엄마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숱한 밤, 숨죽여 울면서 그리운 엄마를 떠올리고 또 아파했다. 그랬던 엄마가 이제야 나타나주었다. 엄마가 떠났던 그날. 서른 살의 엄마가, 서른 살의 소란 앞에 찾아와주었다.
“미안……, 미, 미안해……, 엄마. 흐흑……. 미안해.”
엄마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무리 아빠와 오빠가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주고 위로해주었어도 완전히 씻겨지지 않는 죄책감은, 오직 엄마에게만 전할 수 있는 마음이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잘못……, 자, 잘못했어, 정말…….”
숨이 넘어갈 듯한 울음 속에서 소란은 미안함을 쏟아냈다. 엄마가 사 온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더라면.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다음 날 그 시간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새로 케이크를 사러 가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엄마는 지금 제 옆에 있을 텐데. 어릴 때는 엄마의 부재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이 컸다면, 성인이 된 후로는 그녀의 삶에 대한 미안함이 더욱 커져만 갔다. 이십 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아기를 낳고, 혼자 아기를 키우다가 이제야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는데. 엄마가 오래도록 누렸어야 할 따뜻한 행복을 앗아간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소란은 가슴이 무너졌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가 죽은 그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더 그랬다. 서른 살의 크리스마스에 생을 마감한 엄마를, 서른 살의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감정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의 미안함은 비할 수도 없다.
“미안해, 너무너무…….”
끝내 소란은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
“엄마가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가도 되는데. 제발 그 소원 들어달라고 수없이 기도했는데.”
대신할 수만 있다면 수백 번도 바꿀 수 있는데. 그 운명을 바꾸어 엄마가 좀 더 행복을 누릴 수 있었으면 했는데. 무너진 소란 곁에 앉은 엄마가 품을 열어 다시 안았다.
“아가.”
내 새끼. 가여운 내 새끼.
“그러지 마. 엄마는 우리 딸이 그런 생각 하는 거 바라지 않아.”
소란의 심장을 꿰뚫은 날카로운 창을 녹여 없애듯 엄마가 부드럽게 말했다.
“네 탓이 아니야. 우리 소란이가 엄마 때문에 아파하는 거, 엄마는 절대로 원하지 않아.”
엄마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따뜻했다.
“어떤 일을 당한대도 너와 관련된 거라면 억울하지 않아. 그럴 수가 없어, 엄만.”
“…….”
“그 무엇도 내 딸 소란이보다 소중한 건 없어. 설령 그게 내 목숨이라 하더라도.”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소란아. 그게 엄마 마음이야.”
그러니까 아파하지 말라고. 그만 슬퍼해도 된다고. 죄책감 따위 내려놓으라고.
“몇 번이나 말해주러 오고 싶었는데, 혼자 우는 너를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는데, 그런데 소란이 네가 엄마를 봐주지 않더라. 엄마 얘기를 들을 준비가 안 되었다고, 자꾸만 밀어내더라.”
엄마는 늘 너를 안아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늦었어. ……늦어서 미안해.”
그러고도 끝내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엄마였다.
“이제 그만 엄마 놓고 훨훨 날아가. 엄마 그만 붙들고. 엄마도 홀가분해질래.”
엄마가 그녀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엄마는 우리 소란이가 행복한 모습 보고 싶어. 그랬으면 좋겠어.”
그녀의 삶이 멈추었던 그날, 딸이 새로운 날개를 펼치길 간절히 바라면서. 여덟 살 아이로 머물러 웅크리고 우는 딸이 이제 죄책감 떨치고 진정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길 바라면서. 처음으로 엄마는 소란의 꿈에 다녀갔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밤. 방문 앞 툇마루에 앉은 강호의 귓가에 소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두 개가 나란히 붙은 방문은 하나는 강호, 하나의 소란의 것이다. 시설은 좋지만 방음은 잘되지 않아 그녀의 울음소리는 벽을 사이에 두고 누워 있는 그에게까지 닿았다. 결국 문을 열고 나왔지만 그녀의 방문을 열진 못했다. 그저 그 앞에 등을 기대고 앉았을 뿐.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달빛에 비친 눈 덮인 절은 고요했고, 그녀의 울음소리는 서글펐다. 제게 안겨 울던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울음에 느껴지는 질감도, 소리도 완전히 달랐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 응어리가 빠져나오는 듯 모든 걸 쏟아내는 울음이었다.
‘잘 울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잘 울고 있다고. 그래, 정말 잘하고 있다고. 이렇게 오늘이 지나고 나면 앞으로 그녀에게 크리스마스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아픔은 오늘로 끝이다. 이제 그 곁에 있을 사람은 바로 자신이니까. ◇ ◆ ◇
“아이스크림 케이크요.”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더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라고 대답했다. 템플스테이를 잘 마치고 부각사에서 나오기 전 스님과 차를 마셨다. 절에서 내려와서는 소란이 매운 게 먹고 싶다고 하여 근처의 낙지볶음 맛집을 찾아가 식사를 했다. 맛있게 먹고 나서 또 물었더니,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후 정해 시내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 앉았다.
“포장해드리겠습니다. 가시는 데 얼마나 걸리세요?”
“아뇨. 먹고 갈 겁니다.”
그냥 아이스크림이 아니고 무려 케이크였다. 매장에 앉아 먹을 만한 메뉴는 아니었기에 직원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고 테이블로 왔다. 그리고 둘이 먹기엔 과한 크기의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앞에다 두고서 마주 앉은 것이다. 귀여운 캐릭터 모양 안에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색색으로 가득했다. 소란이 귀를 먹어치우고 이마를 쪼개고 눈에 붙은 초콜릿을 파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그녀가 웃었다. 밤새 울었는지 눈이 조금 부어 있지만 그것도 귀엽고 예뻤다. 부각사에 잔뜩 쏟아내고 온 마음은 새로운 사랑으로 채워지고 있다.
“같이 먹어요.”
“너 많이 먹어.”
“자.”
소란이 숟가락으로 뜬 아이스크림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물린 강호가 가만히 아이스크림을 바라보았다.
“아이스크림 안 좋아해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누군가 제게 먹여주는 게 익숙지 않았다. 일 때문에 만든 술자리에서 어떤 여자가 제 곁에 앉아 억지로 과일 안주를 먹여주려 하기에 불쾌하여 슥 밀어낸 적은 있다. 그럴 적마다 그녀들은 왜 과장하여 소리를 지르는 걸까. 여자를 때린다는 루머에 루머 한 스푼 더한 순간이었다. 숟가락이 제 앞으로 온 순간 물러난 건 그저 본능이다. 그러나 괜찮다는 듯 눈짓하며 꾸준히 숟가락을 내밀고 있는 소란을 보니 강호의 마음이 말랑하게 풀어졌다.
“혼자 다 못 먹어요. 같이 먹어요.”
“둘이서도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먹을 수 있어요. 얼른 아.”
입 벌려. 아이스크림 들어간다. 소란은 흔들림 없이 아이스크림을 내밀 뿐이다. 강호는 하는 수 없이 입술을 벌렸다. 입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아이스크림은 딸기 맛이다.
“잘 먹으면서.”
먹여주고 뿌듯한 듯 그녀가 한 번 더 내밀었다. 그런 소란을 바라보며 강호가 또 받아먹었다. 이번엔 바닐라에 호두가 씹히는 맛이다.
“자, 또 아.”
먹여주는 데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소란이 캐릭터의 입 부분을 퍼서 또 내밀었다. 자동으로 받아먹었는데,
“으.”
이번에는 초콜릿에 무슨 일인지 치약이 섞여 있다. 민트는 내 취향이 아닌데.
“이건 별로야.”
“헉. 민초 무시하세요?”
“맞아. 무시해.”
당당하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소란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확인할 게 있어요.”
“뭔데.”
“파인애플 넣은 피자 먹는다, 안 먹는다.”
“뜨거운 파인애플이라니, 끔찍한데.”
소란이 헐,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탕수육 부먹이다, 찍먹이다.”
“모름지기 진짜 고급스러운 탕수육은 소스와 어우러진 튀김의…….”
“부먹이었어요?”
천하에 이런 배신감은 처음 느껴본다는 듯 소란이 숟가락을 삽 삼아 캐릭터 코의 한가운데를 푹 찍었다.
“대표님이랑 취향이 이렇게 안 맞을 줄 몰랐어요.”
“갑자기 대표님이야?”
“거리감이 느껴지네요.”
별것 아닌 데 진지하게 흥분하는 그녀에 강호는 나오려는 웃음을 턱을 들어 참아냈다. 멀리서 보았던 소란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새로이 알게 된 소란은 지난 10년 보아온 모습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예뻤다. 그런데 거리감이라니. 이제 내 몸처럼 가깝게 느껴지는데. 그깟 취향이 무슨 대수라고.
“강호 씨라고 해, 다시.”
“마음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녀가 선을 긋자, 강호가 숟가락을 들었다.
“이 치약 먹으면 돼?”
“네?”
“치약 먹을게.”
아까 소란이 푹 떠서 주었던 캐릭터의 입술 아래를 과감하게 한 삽 떴다. 그리고 강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입에 넣었다. 빛깔 고운 민트 빛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붉은 혀가 입술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가만히 핥고 들어가는데 소란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러. 대표님 말고.”
“그게 뭐라고…….”
뭐라고라니. 호칭으로 거리감을 표하겠다는데, 다시 가까이 오라는 뜻이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피자는 이제부터 하와이언 피자야. 뜨거운 파인애플로 가득 덮인 피자라면 한 판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만 해도 물컹하게 씹히는 과일은 정말 끔찍하지만.
“탕수육은 역시 찍먹이지. 튀긴 고기에 소스는 살짝만 담가 먹어야 그 바삭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까.”
진짜 잘 튀긴 탕수육은 소스를 부어도 전혀 눅눅해지지 않는다는 소리는 집어치웠다. 그런 걸로 소란을 설득하기보다 그냥 그녀가 좋아하는 걸 먹는 편이 나으니까. 대표님이라 불리면서 제대로 된 부먹을 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
“아직도 안 불렀어?”
거침없이 거리를 좁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강호 씨.”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물복, 딱복?”
“그게 뭔데.”
“물렁한 복숭아, 딱딱한 복숭아요.”
이번에는 어떤 복숭아를 선호하나 물었다. 강호는 입에서 뭉개지는 물렁한 복숭아는 딱 질색이었다. 식감을 중요시하는 그에게 모름지기 복숭아란 딱복이 최고니까. 소란이라면 물복을 선호한다고 할 것 같다. 파인애플 피자를 좋아한다면 물컹한 과일 식감에도 익숙할 것 같은데.
‘아니야.’
의외로 딱복일 수도 있다. 찍먹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씹히는 맛을 좋아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지? 취향에 일관성이 없네. 예측을 할 수가 없잖아.
“어떤 거예요?”
그녀는 단지 저와 마음이 통하는지를 알아보고 싶은 모양이다. 답을 맞혀야 한다는 생각에 이 순간 강호는 굉장히 진지해졌다. 그래, 이게 뭐라고. 답은 분명히 있었다.
“물딱복.”
“네?”
그런 게 어디 있냐는 듯 소란이 눈썹을 찡그렸다. 강호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느른하고도 날카로운 눈빛이다. 감히 피할 수도 없을 만큼.
“네가 좋아하는 건 뭔데?”
대답해. 그게 설령 물복이라고 해도 눈 딱 감고 먹을 테니까. 앞으로 살아가면서 평생 물복만 보고, 물복만 먹을 거야. 내 혈관을 전부 물복 과즙으로 채워도 괜찮아. 다시는 딱복 따위 쳐다보지도 않을게.
“제가 먼저 물어봤는데요.”
“물어볼 필요 없어.”
그런 소모적인 질문은 할 필요 없다고.
“내 취향은 너니까.”
앞으로 네가 먹는 것, 입는 것, 좋아하는 것 전부 다. 그게 바로 내 취향이야. 오늘 이후로 강호의 취향은 소란과 동기화가 진행될 예정이다. 소란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사랑 고백을 들은 듯 그만 뺨이 발그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