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기쁘다 남편 오셨네2021.03.13.
“정신없이 달려왔어.”
“…….”
“네가 너무 보고 싶었나 봐.”
툭 내려놓는 한마디가 그 어떤 말보다 설렜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 네게 향해 있었다는 말. 못내 가슴이 떨렸다.
“이건 따라오라고 놓고 간 거 아닌가.”
강호가 꺼낸 종이는 자신이 두고 온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안내지였다. 고속버스에서 다시 한번 보려고 찾았는데 없었던 종이. 이미 스마트폰에 다 있는 내용이니 잊고 있었는데, 그가 그걸 가지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네요.”
자신이 두고 온 마음도 그에게 있었다.
“따라오라고 놓고 온 거, 맞는 거 같아요.”
휘이이,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생긋 웃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강호가 가만히 잡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함께 있으니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강호는 목에 무언가 조금이라도 닿기만 해도 숨통이 끊어질 듯하던 기분을 잠시 잊었다. 그녀가 방금까지 하고 있던 머플러는 따뜻했다. 너무도 따스해서 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엄마는요, 사실.”
소란이 낮은 음성으로 지난날을 꺼내놓았다.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아마도 말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을 이야기를. 그래서 이제껏 가슴속에 꽁꽁 숨겨놓기만 했던 그 말들을. 푸른 바다에 던지듯 쏟아냈다.
“이브에 엄마가 사 온 케이크를 보고 펑펑 울었거든요. 나는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냥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서.”
그때 소란은 여덟 살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떼도 쓰고 울기도 할 나이였다.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아니라고 엄마는 내 말을 기억도 못 하냐고 울었어요. 아빠가 다시 사 오겠다고 했는데 엄마가 말렸어요. 여기 케이크 뻔히 있는데 뭘 또 사냐고. 그런 엄마가 야속해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울다 지쳐 잠들었어요.”
지금이라면 엄마가 진흙으로 만든 케이크를 가져온다고 해도, 그저 좋아하기만 할 텐데. 그리운 엄마 냄새 맡으며 그 품에 안길 텐데.
“다음 날이 크리스마스였어요. 밖에 나갔던 엄마가…… 트럭에 치여 돌아가셨어요. 그때 엄마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상자를 가지고 있었대요.”
“…….”
“나 때문에.”
아빠와 오빠는 소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러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건,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아빠의 친척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알게 됐다.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과 슬픔이 어린 소란을 먹어치웠다. 거기에 엄마가 사라지고, 자신이 아빠와 오빠의 삶에 짐까지 된다는 두려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혼자 가방을 싸서 보육원에 가야겠다고 집을 나갔을 만큼, 소란의 가슴을 짓누른 감정은 무겁기만 했다.
“아마 아빠와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어떤 삶을 살았을지 몰라요.”
……상상도 할 수 없다.
“네 탓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얘기해줬어요.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 때문이 아니라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친딸이 아닌 아이를 그렇게 감싸고 보듬어 거둔다는 건. 소란은 평생 아빠에게 효도하며 그 빚을 갚고 싶었다. 학교 끝나면 달려와 아빠를 도와 양파를 까고 배추를 씻었다. 저녁이 되면 하품을 해가며 공부했다.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아빠도, 오빠도, 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데 오빠가 이맘때 저 때문에 다쳤어요. 학원 갔다 귀가하던 밤길에 누가 따라와서, 오빠가 저 구해주다가. ……거기 공사장이었거든요. 2층에서 떨어져서 다리를 다친 거예요.”
그 말을 들은 강호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신 거죠?”
“혹시 다치신 건 아니죠? 한번 움직여보세요. 네?”
교정에서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 소란은 야구공을 피해 구해준 제 팔을 붙들고 다리를 잡아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의 오빠 성준은 그냥 다친 게 아니었다. 소란을 구하다가 낙하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런 경험을 했으니, 소란이 처음 본 제 팔다리를 붙잡고 그토록 놀란 눈으로 살핀 것도 이해가 되었다.
“종골 골절이라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발뒤꿈치를 크게 다쳤거든요. ……심한 분쇄골절이라 수술받고 핀도 박고, 재활을 열심히 했는데도 후유장해가 남았어요. 안 좋은 케이스였대요. 통증이 심한 부상이라 오빠가 정말 많이 고생했는데…….”
그녀를 구하다가 다친 것이었다니.
“그럼 그때 따라왔다던 사람은 잡힌 건가.”
“아뇨. 그 사람이 오빠를 밀치고 그대로 달아났어요. 겨우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 가기도 바빴고요. 나중에 경찰에 신고하고 진술했지만 공사장 근방이라 CCTV도 없고 잡을 방법이 전혀 없다고 했어요.”
얼마나 무서웠을까. 소란뿐 아니라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성준도, 두려웠을 것이다. 강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게다가 성준이 다쳤으니 소란의 마음에는 또다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을 거고.
“그런데 오빤 그것도.”
“…….”
“……내 탓이 아니라고.”
소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모든 건 다 내 잘못 같은데. 다 나 때문인 것 같은데. 하필이면 학원에 남아 공부를 더 하고 나오는 바람에 차를 놓치고 걸어와서. 아니었다면 오빠가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빠는 편찮으시다가 결국 돌아가셨는데……. 임종하신 날이 크리스마스였어요. 12월 들어 병세가 악화되면서 내내 고생하시다가 거짓말처럼, 엄마가 떠난 그날에 숨을 거두신 거예요.”
그랬겠다. 온 세상을 밝힌 이 불빛이 너는 참 끔찍했겠다. 아픈 기억을 자꾸만 들추는 불빛 너머로 참, 도망치고 싶었겠다. 강호는 가슴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그녀의 상처가 제 것처럼 느껴졌다. 힘겹게 이야기를 마친 그녀를 한 손으로 당겨 제 가슴에 안았다. 풀썩 안겨드는 그녀가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흐으흑.”
소란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흐윽, 하고 억눌렸던 소리는 이내 으어엉, 하고 거세어졌다. 속엣것을 다 쏟아내듯 소란이 울어버렸다.
“울어. 마음껏.”
힘들었겠다.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그런데도 씩씩하게 견뎌줬구나. 이렇게 잘 자랐구나. 강호는 소란이 실컷 울 수 있도록 단단히 안아주었다. 아이의 상처는 아이가 알아보는 법. 소란과 강호의 안에 덜 자란 아이는 서로를 아픔 속에서 건져 올렸다. 그리고 안아주었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네 탓이 아니라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리고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얘기했다. 마음으로 마음을 어루만졌다. 얼마나 울었을까. 이내 울음이 조금 잦아든 소란이 그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 고개를 들었다. 아직 눈물이 범벅이다. 누가 봐도 서럽게 울다 지친 얼굴. 강호가 한 손으로 손수건을 꺼냈다. 잘 다려진 손수건이 소란의 코 아래를 쓸었다.
“콧물.”
“에엣, 콧물이요?”
급히 소란이 흐읍, 하며 코를 들이마시려 했다. 그러다 그게 더 별로라는 걸 깨닫고 눈썹 끝을 내려뜨렸다.
“아, 엉망이다…….”
“엉망 맞아.”
냉큼 동의하는 것이, 강호는 거짓말을 못하는 타입인가 보다. 소란이 눈썹을 찡그리려는데,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볼을 한 손으로 감쌌다.
“그런데도, 예쁘네.”
그 한마디에 어이없게 심장이 또 덜컹한다. 엉망이라 한 다음에 예쁘다고 하니, 진짜 같잖아. 빈말은 못하는 사람의 칭찬이라서.
“내 앞에서만 울어.”
나만 널 안아줄 수 있게. 앞으로도 수많은 날, 수많은 밤, 내 품에서만 울겠다고 약속해.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건네는 조용한 말에 그녀가 응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소란은 그가 입술을 내리자 눈물로 가득한 눈을 스르르 감았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입술은 상처를 보듬는 가장 강력한 약이다. 그때, 탁탁탁. 목탁 소리가 났다. 순간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소란 법우님.”
스님 한 분이 서 계셨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
불경한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엄하게 말하던 스님은, 눈물 콧물 쏙 뺀 소란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 한발 물러섰다.
“……됩니다.”
탁, 탁, 탁. 스님이 목탁을 치며 돌아섰다. 크리스마스에 절에서 울다가 키스하는 커플이라니. 이 사연 깊은 연인을 더 이상 방해해서는 안 되겠다는 듯 물러나는 걸음이 빨랐다. ◇ ◆ ◇
“다행이에요. 방이 하나 남아서.”
밖에서 기다리던 소란은, 법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강호를 보며 웃었다.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참가를 취소한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했다. 예정에 없이 온 강호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됐다.
“게다가 옆방이라 더 좋네요.”
“같은 방도 괜찮은데.”
“안 돼요. 1인실이잖아요.”
요즘 템플스테이 하는 절은 거의 한옥 호텔 수준인 듯, 방도 아늑하고 안에 개별 샤워실과 화장실까지 있어 시설도 훌륭했다. 다만 부각사는 부부라 해도 같은 방에 머물 순 없고 1인 1실이 원칙이라 강호는 그녀와 떨어져 자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서 나가 호텔로 데려갈 것을. 강호의 아쉬움과 달리, 소란은 함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되게 잘 어울리네요.”
소란이 감탄했다. 이곳의 겨울 법복은 짙은 회색으로 위아래 누빔이었다. 어느 아이돌이 공항에서 개량한복을 입어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던가. 역시 옷은 누가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에 무심한 듯 걸쳐진 법복은 강호가 주로 입었던 셔츠와 또 다른 핏을 자랑했다. 옷이 날개가 아니라, 옷걸이가 이미 날개인 셈. 물론 소란의 눈에는 아마 그가 색동저고리에 연지곤지를 찍고 나온다고 해도 하트가 뿅뿅 하겠지만.
“너도 잘 어울려.”
“고마워요. 그런데 이거 우리 첫 커플룩이네요.”
소란이 함께 입은 법복에 의미를 부여하며 웃었다.
“사진 찍어요.”
그러곤 휴대전화를 꺼내 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사진을?”
“네. 남겨놔야죠. 기념인데.”
우리가 같이 보낸 첫 크리스마스. 내가 보고 싶어 이곳까지 달려와준 남편. 소란에겐 꼭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에게 붙어서서 휴대전화를 들어 전면카메라로 찍어보려 했는데, 아무리 팔을 쭉 뻗어도 두 사람의 모습이 잘 담기지 않았다. 강호의 키가 너무 큰 탓이다. 이에 그가 소란의 휴대전화를 가져갔다. 긴 팔을 휙 뻗어 휴대전화를 들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화면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게 들어왔다.
‘잘 어울리네.’
소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의 곁에 있는 제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강호가 촬영 버튼을 눌렀다. 소란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곧바로 찰칵 찍힐 줄 알았더니 5, 4 하고 숫자가 떠올랐다.
“음?”
그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찰칵 셔터음이 울렸다. 눈이 감겼다. 어, 하는 사이 연달아 또 찰칵찰칵. 뭐야. 또 찰칵. 아니, 대체 이 휴대전화 카메라에는 무슨 저주가 걸린 거야. 강호는 언짢아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푸하핫. 소란은 웃음이 터졌다.
“지워.”
“왜요. 안 지워요.”
휴대전화를 꽉 틀어쥔 소란이 소리 내어 웃으며 물러섰다.
“이건 아닌 것 같아. 당장 지워.”
“억만금을 줘도 안 지워요.”
백강호가 눈 감은 얼굴, 백강호의 어리둥절한 표정, 인상 쓰는 표정, 짜증 섞인 표정, 그 모든 게 소란의 휴대전화에 보물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고장 난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초기화하는 게 좋겠어.”
“누구 마음대로요.”
소란 혼자 찍느라 타이머 맞춰놓고 연속촬영 설정해뒀던 걸 깜빡했는데, 오히려 강호의 버라이어티한 표정을 담을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아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찍혔겠지. 다만 그런 표정들이 사진으로 남아 영구박제된 게 영 못마땅한지 강호가 계속 사진 삭제를 요구했다.
“이거 초상권 침해야. 몰라? 그쪽 변호사 아니신가.”
소란이 미소 띤 채 휴대전화를 꽉 쥐고서 대꾸했다.
“현행법상 초상권 관련한 규정은 없어요. 물론 헌법 제10조에 의거해 일반적 인격권에 포함되기는 하죠. 형사상 처벌을 받을 근거는 없고 원하시면 손해배상 청구를 하실 순 있어요.”
변호사 아니냐는 말로 괜히 건드렸다. 후회하는 건 강호 쪽이다.
“그리고 촬영 버튼은 강호 씨가 직접 눌렀으니 촬영에 따른 초상권 침해는 분명 아니고요, 이 사진을 제가 동의 없이 외부에 공표했을 때가 문제가 되는데 전 그럴 생각이 없거든요. 갠소할 겁니다.”
“갠…… 뭐?”
“개인소장이요.”
소란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초상권 침해 관련하여 이 건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보이지 않는데요. 더 궁금하신 점 있으세요?”
“내가 물었지.”
“뭘요?”
“말이 많아서 변호사가 됐나, 변호사라서 말이 많은가.”
“변호사 비하 발언이라고 말씀드린 적도 있는데요.”
“그럼 이 얘기도 했겠네.”
강호가 소란의 허리를 제게로 당겨 안았다. 흡, 당겨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윽한 눈빛에 시크한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많이 좋아한다고.”
“변호사를요?”
“너를.”
뭐야. 차가운데 뜨거워. 툭 내뱉는 듯한 그의 말에 소란의 귀가 또 빨개졌다. 그가 좋다고 하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그럴 때마다 미칠 듯 좋았다. 시선이 맞닿으니 자석처럼 또 입술이 서로 이끌려 열릴 듯했다. 서로의 눈을 한번, 입술을 한번, 번갈아 바라보는 눈빛에 뜨거움이 번졌다. 가만히 점점 가까워지려던 때. 탁, 탁, 탁. 멀리 목탁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소란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왜 그래?”
강호는 듣지 못한 걸 보니 환청인가 보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는, 빨리 정신 챙기라는 신호 같다. 그래, 이러면 안 되지. 소란은 고개를 흔들곤 정신을 부여잡았다.
“공양 시간이에요. 여기선 식사를 공양이라고 하거든요. 얼른 가요.”
강호를 붙든 소란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한쪽에 비켜 서 있던 스님이 빙긋 웃었다.
‘평온의 하얀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 기쁜 날.’
천천히 돌아서는 스님의 손에 맑은 목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부부의 앞날에도 무한한 축복만이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