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너무 보고 싶었나 봐2021.03.09.
“어머니 돌아가신 날이 크리스마스야. 그리고 공교롭게도 아버지도.”
강호는 부각사로 향하는 동안 성준이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불행은 해만 다를 뿐 같은 시기에 찾아왔다.
“……내가 다친 것도 이맘때였어. 크리스마스는 아니지만 같은 12월.”
차곡차곡 쌓인 아픔은 세월이 흐른다고 옅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불빛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사랑스럽게 울려 퍼지는 캐럴에 숨이 끊어질 듯 아팠다.
“소란이한테 크리스마스는 정말 잔인한 날이야.”
“형님도 마찬가지셨겠군요.”
“……그래. 소란이는 아마 더할 거고.”
기억은 흐릿해질 수조차 없었다. 온 세상이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아름답게 물드는 이 시기는 반드시 오고야 말았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날이다. 한 번쯤 물 흐르듯 넘길 수도 있을까 싶었지만 그런 해는 없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빵집에 진열된 케이크만 봐도 그녀는, 억장이 무너졌다. 조그마한 산타와 루돌프 장식에 소란은 길 가다가도 울곤 했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는데, 크리스마스만 되면 아직도 너무 힘든가 봐. 억지로 웃게 해주려는 것보다는 그냥 지켜봐주는 게 나을 거야. 잘 지나가고 나면 괜찮아지니까.”
지켜보라기에, 옆에서 지켜보려고 했다. 그런데 아예 모습을 감춰버릴 줄이야.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절이라니.
“……아, 그래서 절인가.”
적어도 그곳만은 온 세상을 뒤덮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부터 청정구역일 테니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얼굴만 보고 와야지.
“아니, 바다만.”
바다를 핑계로, 강호는 아내를 보기 위해 부지런히 달렸다.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
◇ ◆ ◇ 정해시 부각사.
“저는 무교예요. 불자는 아니지만 뜻깊은 경험을 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요즘 회사에서 복잡한 일이 있어서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왔습니다.”
“애인과 헤어졌거든요. 속상해서 왔어요.”
스님과의 차담 시간. 따뜻한 차를 놓고 둘러앉은 몇 사람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란의 차례가 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해묵은 고통을 매년 제 마음에서 덜어내는 중입니다. 성탄절마다 절에 온 건 4년째예요.”
캐묻는 사람은 없다.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만, 딱 하고 싶은 만큼만 말한다. 편안하고 가벼운 대화를 마치고 나왔다. 각자 원하는 대로 산책을 하거나 방에서 책을 보거나 스님과 더 대화를 나누거나 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찾은 부각사. 다른 템플스테이에 비해 참여할 프로그램이 적어 일부러 휴식을 위하는 사람들이 찾고는 했다. 소란도 마찬가지였다. 이전 성탄절에 갔던 다른 절보다 부각사가 훨씬 편안하고 한갓진 느낌이다. 그녀는 털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엊그제 서울에 비가 온 동안 이곳엔 눈이 내렸나 보다. 하얀 눈으로 덮여 있어 무척이나 고즈넉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 내린 절의 낮은 담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푸른 겨울 바다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작년에도 조용히 시간을 잘 보내고 갔던 터라 올해도 이곳으로 예약했는데.
“흐음…….”
올해는 잘못 왔나 보다. 눈 내린 정취는 역시나 아름답지만…….
“어머, 절에 트리가 다 있네. 저기 봐. 탑 아래도 장식해놨어.”
“편견을 버려. 종교대화합 모르냐.”
“하긴. 우리만 해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절 구경하러 왔는데.”
이 지역에 여행 왔다 들렀는지 연인이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래, 이곳은 서울의 유명백화점 앞 못지않게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했다. 아마 해가 지고 나면 더 볼만할 것이다. 연등 대신 반짝거리는 불빛이 절을 밝히고, 불상 아래 산타와 루돌프 장식이 밝게 빛날 테니까.
‘작년만 해도 안 이랬는데.’
부각사에 새로운 바람이 일었나 보다. 대화합의 장을 이루는 게 비단 종교뿐은 아닐 터. 방송사 간에도 프로그램 제작에 벽이 없어지고, 각 기업이나 예술가 사이에서도 그랬다. 세상 어디서나 컬래버레이션이라 일컫는 협업이 자연스러운 요즘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부각사의 변화는 반응이 꽤 좋은 모양이다. 외국인도 찾아와 사진을 찍는 것이 이미 소문도 났나 보다. 다만 온 세상에 가득한 크리스마스를 피해 절에 들어온 소란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작년만 생각하고 왔다가 올해 확 바뀐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미리 예약까지 하고서 왔는데 도망쳐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길이 막힐까 봐 일부러 차를 놓고 택시에 고속버스에 다시 택시를 갈아타면서 도착한 게 아까워서라도 하루를 보내야겠단 싶어 잠자코 들어왔다.
‘……그냥 지금이라도 갈까.’
소란은 눈길을 밟다가 다시 만난 산타 모형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불상과 나란히 서 있는 산타할아버지가 참 새롭고 이색적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난 뭘 바라고 온 걸까?’
황당한 광경에 오히려 머리가 개운해졌다. 크리스마스. 캐럴. 케이크. 산타. 루돌프. 전구. 그 모든 건 제 아픔을 불러일으킨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도 자신이 만들어놓은 벽에 불과한 건 아니었을까.
‘그냥 서울에 있을 걸 그랬나.’
크리스마스 미로에 갇혀버린 느낌이다. 이럴 바에야 강호와 함께 있어도 괜찮을 뻔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그에게 부담이 안 된다면 같이 있어도 좋았을 텐데. 성탄절이 닥쳐와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기분이 괜히 다른 이에게까지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소란은 늘 혼자 떨어져서 보냈다. 불행도, 아픔도, 고통도 전염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즐거워하고 설레는 이런 날에, 제 기분을 전해줄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강호로부터도 망설임 없이 떨어져나왔다. 타인이 해결해줄 수 없는 슬픔이다. 그에게 짐을 지우긴 싫었다. 내일 오후에는 엄마, 아빠를 모셔둔 봉안당에 가야 하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따로 있고 싶었다. 그에겐 오직 밝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기어이 혼자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보고 싶네.’
산타를 마주하고 있으니 뜬금없이 그가 보고 싶다.
‘혼자 있을까?’
첫 크리스마스인데. 마음을 확인하고 겨우 이틀째에 맞이한 이런 날에 그는, 뭘 하고 있을까. 혼자 온 게 이기적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곁에 남아 슬픔에 빠져 있는 게 더 이기적이었을까. 난 대체 어떤 선택을 한 걸까. 소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다.
“……어.”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내 눈이 잘못됐나, 싶어서.
“……강호 씨?”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모습에 소란이 이름을 불렀고.
“그래, 나야.”
그가 대답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네 앞에 있는 것이 그 선택에 대한 답이라는 듯. 흰 눈을 밟고 선 강호가 거기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 ◆ ◇ 뒤로는 하얀 눈이 쌓인 절. 앞으로는 시리도록 푸른 바다. 강호와 소란은 담 너머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앞에 두고 돌을 깎아 만든 긴 의자 앞으로 왔다. 그녀가 앉으려 하니 강호가 잠깐, 하고 막았다. 입고 있던 검은색 코트를 휙 벗어 매끈한 돌의자에 툭 얹었다.
“앉아.”
“이 위에요?”
소란은 기겁하며 한발 물러섰다. 엉덩이가 차가울까 봐 코트를 깔아준 뜻은 알겠다. 그것만으로도 송구스러운데, 강호의 코트를 깔고 앉긴 부담스러웠다.
“이거 제 차보다도 비쌀 것 같은데요.”
“그건 맞겠지만, 그래도 앉아.”
“아니, 전 찬 데 앉는 거 좋아합니다.”
소란은 자신의 승용차보다도 비싼 게 분명한 코트를 엉덩이로 깔아뭉갤 수 없었다.
“이거보다 더 비싼 내 차에도 잘만 앉았잖아.”
얘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나요.
“성가시게 하지 말고 앉아.”
그의 눈썹 끝이 구겨졌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어야 한다. 코트를 두고 실랑이하는 건 소모적이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소란은 지나치게 비싸 보이고 고급스러운 코트에 인사하며 조심스레 그 위에 앉았다. 그제야 강호는 소란의 옆에 앉았다.
“안 추우세요?”
그는 목이 깊이 파인 푸른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코트까지 벗어주었으니 가뜩이나 추운 지역에 바닷바람까지 더해져 걱정되었다.
“추워.”
말이라도 안 춥다고 할 줄 알았더니 그는 대뜸 춥다고 수긍했다.
“내가 추위를 좀 타거든.”
“이거 그냥 다시 입으세요.”
소란이 냉큼 일어나 코트를 집어 올리려 하는데, 강호가 다시 그녀를 앉혔다.
“됐어. 그냥 앉아.”
“그럼 이거라도 하실래요?”
소란은 법복 위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얼른 풀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강호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너나 해.”
“제가 해드려요?”
“됐…….”
“쉿.”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소란이 그의 말을 막았다.
“제 말 들으세요.”
리드에 능한 신여성처럼 그녀는 강호의 목에 능숙하게 머플러를 둘러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단 쉬웠다. 지금은 앉아 있으니까.
“이제 됐어요.”
강호는 갑갑한 듯 인상을 썼다. 그래도 추운 것보단 낫지 않을까. 다행히 그는 풀어내지 않았다. 참을 만은 한 모양이다.
“목에 뭐 매거나 닿는 걸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전부터 묻고 싶었다. 소란은 말이 나온 김에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납치당한 적이 있어. 그때 검은 봉지가 머리에 씌워진 다음 목에서 꽉 졸라매였거든.”
“……어, 언제요?”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와 오히려 소란이 당황했다.
“어릴 때야. 열여섯 살 때.”
“아. 그래서…….”
소란의 숨이 다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혹시 그날 천둥이 쳤어요……?”
“그래.”
그랬구나. 강호가 천둥 치던 밤에 힘들어하던 모습이나, 추운데도 목을 다 드러내고 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래서 싫어해. 무서운 게 아니고, 싫어하는 거야.”
강호는 약한 모습을 보인 게 마음에 걸리는지 보태어 말했다.
“네. 싫어하는 걸로 알게요.”
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이 다치던 밤에도 천둥 벼락이 쳤다. 납치를 당했다니 죽음을 직면한 고통 속에 있던 강호에게야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소란에게도 성준과의 그 밤은 아픈 기억이다.
“납치범은 잡혔어요?”
“잡혔어. 복역하고 나왔는데 비명횡사했다고 들었고.”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강호에겐 두려움을 남겼다.
“지금은 괜찮아.”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최면을 걸듯 괜찮다 생각하며 살아왔을 뿐일 거다. 언제까지고 그 기억에 갇혀 있을 순 없으니까. 애써 괜찮은 척, 별거 아닌 척. 나아지지 않는 아픔을 그저 끌어안고 살아온 거다. 저처럼.
“네가 낫게 해주든가.”
소란이 고개를 돌려 강호를 바라보았다.
“제가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소란은 천둥 치는 밤에 그를 품에 꼭 안고 잠들게 해주었다. 타이나 머플러, 심지어 단추조차 거부하는 그의 목에 손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목 쪽은 혹시, 그게 병 같은 건가요?”
“촉각 방어.”
“아, 용어가 따로 있구나.”
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낫게 해달라니. 왠지 모를 사명감이 느껴진다. ‘촉각 방어’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절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새삼 숨이 삼켜지지 않았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일찍도 물어본다 하는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보고 싶어서.”
두 번 생각지도 않고 터져 나오는 그의 말에 소란은 머쓱해하며 웃었다.
“아,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바로.”
“바다가.”
“……아, 바다가 보고 싶으셨구나.”
“그래.”
뭐야. 나 실망한 거야? 소란은 괜히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 우리 어제부터 연애하고 오늘이 2일 차이니 너무 앞서가지 말자. 나만 우스워지는 건 한순간이야. 이 남자를 봐. 저 겨울 바다보다 훨씬 시리고 차가운…….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까 아니었어.”
……게 아니란다. 강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에 얹어졌다.
“정신없이 달려왔어.”
“…….”
“네가 너무 보고 싶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