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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사랑해서 한 결혼 (36/112)

#36화. 사랑해서 한 결혼2021.03.06.

“혼자 애 낳아서 키우겠다는 결심까지 했으면 너, 못 할 일이 없어.”

“…….”

“뭐든 얘기해. 도와줄 테니까.”

나린이 복잡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건데?”

“보은이야.”

“보은?”

“은혜 갚으려고.”

“무슨 은혜?”

강호가 엷게 웃었다. 영문을 몰라 자꾸 되묻기만 하는 나린에게 급격히 변화한 현 상황을 알려주었다.

“결혼 계약서 조만간 삭제하려고 해.”

“왜?”

“사랑해서 한 결혼에 계약서가 왜 필요하겠어.”

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뭘 했다고?”

“사랑.”

그는 모든 걸 다 얻은 남자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강호 씨.”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녀로부터 생생한 고백을 들었다. 소란은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해주었다. 못 들었을까 봐 또 해주고, 다시 해주고, 확인시키듯 계속해주었다.

“백강호, 웃지 마.”

나린의 눈물을 보고 그가 질색했듯, 강호의 얼굴에 퍼지는 미소를 보고 그녀가 상당히 질색했다.

“어우, 왜 저래, 진짜.”

“아무튼 도와줄 거 얘기해.”

“아, 됐어. 너 지금 제정신 아닌 것 같아.”

급기야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끔찍한 광경을 봤다는 듯 기함하며 나린이 자리를 떴다. ◇ ◆ ◇ 마침내 퇴근이다. 얼마나 하루가 길었나. 마음이 급해진 소란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러다가 복도 코너를 돌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혔다. 빨리 나가려고 서두른 탓이다.

“앗.”

“어억.”

소란의 가방과 상대의 브리프케이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딪치면서 가방 모서리에 옆구리를 맞았는지 억, 하고 허리를 굽힌 사람은 태석이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윽, 옆구리가 너무…… 괜찮지! 너무 괜찮네.”

장난이었다는 듯 그가 활짝 웃었다.

“웃지 마세요. 슬퍼 보여요.”

아무래도 맞은 곳이 아프긴 한가 보다. 눈물이 찔끔 난 것도 같다. 이 선배 요즘 유난히 안돼 보이네. 연말이라 그런가.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하지 않았나. 화려한 생활을 즐기는 슈퍼핵인싸 마태석도 모임이 많을수록 어쩐지 더 짠한 느낌이 들곤 했다. 풍요로운 싱글 태석이 싱글싱글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소란의 소지품들을 주워 담는 걸 도왔다.

“우 변은 지금 퇴근?”

“네, 오늘 좀 일찍 나가요.”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어, 근데 우 변도 이거 계속 쓰는구나. 저번에 동문회에서 준 USB.”

그녀의 립스틱 옆에 떨어진 USB를 집어 가방에 넣어주며 태석이 반가워했다.

“네, 엄청 좋더라고요. 접속 자체도 그렇고. 여기에다가 저번에 선배님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보안폴더 생성해서 사용하니 편하던데요.”

“중요문서 백업은 뭐니 뭐니 해도 보안이 생명이지. 잘하고 있어.”

소란의 자잘한 소지품을 다 담아주고, 태석도 몇 개 안 되는 자신의 서류와 USB 등을 모아 브리프케이스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선배님 너무 자상하셔서 나중에 어떤 분이 모셔갈지 벌써 기대돼요.”

“내 말이. 인간 로또 아니냐, 마태석 자체가.”

“그러믄요. 백번 동감합니다.”

“우리 란이란이 아주 사회성이 좋아. 크게 되겠어.”

“네, 크게 키워주세요.”

까르르 웃으며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세요.”

“그래, 우 변도.”

항상 이맘때면 말을 붙이기도 어려울 만큼 침울해 있던 소란이었는데. 여물지 않은 상처를 함께 나눌 방법을 찾지 못했던 건 태석뿐 아니라 제일 친한 연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저 지켜보고 기다려줄 따름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서는 소란의 얼굴은 화사한 빛이 흘렀다. 어둡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결코 아니다.

‘예쁘네.’

……우소란은 또 예쁘고 난리 났다. 슬퍼지게.

‘미친놈, 정신 차려.’

태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감히 가질 수 없는 생각이다. 그녀는 유부녀고, 이젠 친한 후배의 아내다. 태석은 제 뺨을 손으로 찹찹 때리듯 두드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 ◆ ◇ 소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아침 출근은 강호의 차로 함께 했다. 고백에 이어 몰아치듯 키스까지 했던 직후라 차 안 공기는 후끈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아침에 헤어지고 저녁에 만나는 부부의 삶. 그게 저와 강호의 것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데리러 갈게. 몇 시에 퇴근하는지 알려줘.]

의뢰인 상담을 끝내고 나와서 확인한 그의 문자는 깔끔했다. 소란 역시 간결하게 답했다.

[5시에 나가려고 해요. 오늘은 좀 일찍.]

[그래. 5시에 갈게.]

기다렸다는 듯 답이 왔다. 그때부터 5시까지 일 초가 1년 같았다. 그러니까 2시부터 5시까지 세 시간. 백팔십 분. 초로 따지면 만팔백 초다. 문자를 주고받은 지 장장 일만 년의 시간을 견디고서야 강호를 보게 된 것이다. 소란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가로질렀다. 막 1층에 도착해 있다는 그를 만나러 가는 길. 옮기는 걸음마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막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도로 한쪽에 임시로 정차한 차가 보였다. 그 차에 기대서 있는 남자도. 탄성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끝내준다.”

“차가? 남자가?”

“야, 둘 다지.”

그녀의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인도 너머 강호를 흘끔거렸다. 소란은 그저 가만히 선 채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살면서 믿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건 소란에게 늘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일 때만 해당했다. 한 번도 가슴 벅찰 정도로 설레고 두근거려서 믿기지 않는, 그런 일은 없었다. 가족이 전해주는 따뜻함과는 또 별개의 감정이다. 백번 얘기하지만 진상과 사귈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순간. 바로 지금이 그랬다. 그의 손엔 꽃이 들려 있었다. 톤다운된 색감의 꽃 사이에 목화솜이 꽂혀 있어 겨울 특유의 분위기를 살려주었다. 꽃을 든 강호가 문득 고개를 돌리다가 소란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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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린 눈발이 날리듯 차디찬 바람이 휭 불었다. 냉한 얼굴엔 엷은 미소가 스쳤다. 봄볕처럼 따스하진 않아도, 서늘하기에 더욱 매력적인 웃음이다.

‘너무하네.’

세상 혼자 사는 듯 주변에 지나가는 남자들을 전부 쭈꾸미로 만들어버렸다.

‘저렇게 멋있으면 난 어떡하라고.’

오로지 백강호만 보고, 백강호만 사랑하게 생겼다.

‘할 수 없이, 그래야겠네.’

이미 웨딩드레스 입고 그의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서약을 했다. 사랑하는 사이라 공표하고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입맞춤도 했다. 혼인신고까지 야무지게 마쳐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명실상부 부부로 자리매김했다. 등본을 떼면 그의 이름 아래 제 이름이, 그것도 ‘배우자’란 명칭을 달고 기재되어 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이래도 되나 기분이 묘했는데. 이제 다 진짜가 되어버렸다.

‘남편.’

그가 한 발 한 발, 제게로 걸어오고 있다.

‘내 남편이구나…….’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너무도 기쁘게만 느껴져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서.

“꽃,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녀에게 다가온 강호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두 번째 꽃이다. 처음엔 그녀의 집에 인사하러 왔던 날 가지고 왔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꽃다발을 받고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던가. 강호는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단 한 번의 반응에 그녀가 좋아하는 걸 캐치하는 센스까지 있다니. 냉랭함 속에 감춰진 섬세한 배려가 이질적이면서도 설렜다.

“……네, 좋아해요.”

꽃보다는 꽃을 든 남편이 더 좋은 게 맞겠지만.

“가자.”

“네, 가요.”

강호가 몸을 돌렸고 소란이 옆에서 따라가는데 같은 로펌에 근무하는 변호사가 알은체했다.

“우 변호사님 남편분이 데리러 오셨네요.”

“아, 네. 안 변호사님 이제 가세요?”

“네. 저도 여친 만나러 가요. 크리스마스 잘 보내세요!”

활달하게 인사하며 그가 멀어져가자, 비로소 실감이 났다. 우 변호사 남편. 제 곁의 강호는 지금 당연하게도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너무 좋다.’

남자친구도 건너뛰고 남편이란 말부터 듣는데도, 그게 이상하게 좋았다.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고, 꽃을 안은 소란이 차에 올랐다. 진짜 연애를 시작하고 있었다. ◇ ◆ ◇ 두 사람은 작은 레스토랑에 왔다. 아담하지만 테이블 간격이 넓어 답답하지 않고, 분위기 있는 조명과 소품이 제법 로맨틱한 곳이다. 찬규에게 데이트할 때 괜찮았던 식당을 추천해보라고 했더니 리스트를 만들어주었다. 낮에 계속 괴롭혔던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강호는 퇴근 후 소란을 데리러 간다는 약속을 하자마자 리스트 중 한 곳에 예약부터 했다. 바질 치즈 리소토, 전복 관자 파스타, 토마토 가지 라자냐까지 음식은 전부 훌륭했다.

“눈이 좀 부은 건가.”

“어, 그래요?”

밥을 먹다 말고 소란이 거울을 꺼냈다.

“티가 나요?”

“조금.”

그런가, 하며 소란은 계속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미세한 차이겠지만 강호의 눈엔 보였다. 울었나 보다.

“내일 로펌 쉰다고 했지?”

그녀와 하루 종일 함께 보낼 생각이다. 내일뿐일까. 모레도 마찬가지다. 첫 크리스마스라서는 아니다. 성준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나도 휴가를 냈…….”

“저는 내일 갈 곳이 있어서요.”

소란이 조용히 덧붙였다.

“어딜 가는데?”

딱 잘라 말하는 게 왠지 불안했다. 혼자 가려는 건가. 같이 가면 안 되는 곳인가.

“그게…… 1박이라서요.”

“1박?”

강호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심지어 1박이라고?

“자고 온다는 건가.”

“네. 1박이니까, 자고 오는 거죠.”

그녀의 마음을 달래줄 방법을 내내 고민했다. 처음 함께 맞이하는 이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만약 그녀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다면, 이제 함께하면 될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기에 원래는 24일이 휴일은 아니었지만 강호도 휴가를 내고 그녀와 같이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차분히 선을 그었다.

“같이 가.”

“아, 그게. 예약이 끝났어요.”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크리스마스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그것도 막 마음을 확인한 연인을 두고 대체 어딜 혼자서 가겠다는 건지.

“절이요.”

“그래, 절……, 절?”

뜻밖의 장소에 강호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절.”

소란은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템플스테이요.”

크리스마스에? 절? 날 두고? 소란은 흔들림 없는 얼굴이다.

“아마 지금은 자리가 없을 거예요. 예약이 끝난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기어이 혼자 크리스마스에 절에 가겠다는 건가.

“오빠한테 들어 아신다고 하던데. 저 다녀와서 모레 오후엔 같이 가요. 괜찮죠?”

그녀는 혼자 마음을 정리하고 올 생각인지 부탁하는 투로 말했다.

“……그래.”

그러자. 결국 강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오전. 강호가 1층에 내려왔을 때 소란은 없었다. 이미 출발한 것이다.

“벌써 갔네.”

그녀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어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겨우 하루인데 뭐. 혼자 있길 원하는 게 소란의 뜻이라면 그 정도야 참을 수 있다. 강호는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로 검색창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에 템플스테이’.

검색해보니 의외로 포스팅이며 사이트가 쏟아졌다. 가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 포스팅을 몇 개 보니, 휴식과 힐링을 위해 템플스테이를 신청해 다녀왔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양한 분위기의 절이 있지만 대체로 조용한 느낌이다. 잘 갔으려나. 예약이 끝나 함께 참여하지 못한다면 데려다주기만 할 수도 있는데. 소란은 그것도 싫었는지 같이 가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아쉬운 마음으로 1층 창가에서 서성이다가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라도 한 잔 내려 마실 생각이었는데, 식탁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강원도 정해시 부각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볼펜으로 중간중간 밑줄도 치고 동그라미도 친 걸 보니, 가져가려고 출력했던 종이를 두고 간 모양이었다.

“정해시 부각사.”

본의 아니게 소란의 행선지를 알게 됐다. 그녀의 침울하고 진지한 모습에 어제는 차마 묻지도 못했는데. 소란이 그와의 동행을 원치 않는 듯하여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끝내 입을 다물었는데.

“……부각사.”

강호는 커다란 유혹을 마주한 듯 종이를 손으로 탁, 탁 천천히 두드렸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부각사에서 보는 바다가 아름답다고 하니까.”

꼭 그녀를 방해하러 가는 건 아니고. 순전히 바다. 바다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절에서 바다를 볼 자유쯤은 있으니까. 오늘 또 유난히 바다가 보고 싶고. 역시 크리스마스에는 절에 꼭 가야 할 것 같고. 강호는 낚아채듯 종이를 확 쥐고서 2층으로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차 키를 챙겨 내려오는 데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바다만 보고 돌아오자.”

입으로는 계속 바다라고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이 순간 소란뿐이다. 차고를 빠져나온 그의 차는 거침없이 부각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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