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숨지 마 (35/112)

#35화. 숨지 마2021.03.02.

강호가 찬규의 집무실에서 나와 개발팀에 들렀다가 자신의 집무실로 왔을 때다. 똑똑. 유통팀의 한아인 대리가 들어왔다.

“대표님. 팀 회의에서 말씀하셨던 자료입니다. 검토 부탁드려요.”

“다음 회의 전에 확인하겠다고 했는데.”

“네, 일찍 가져와봤습니다.”

한 대리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재무팀 고현호 팀장이 들어왔다.

“대표님. 이번 분기 이익률 개선에 대한 보고입니다.”

“이건 왜 벌써…….”

“지난번에 반려하신 내용, 수정해보았습니다.”

이상하다. 다들 아직 기한이 남은 자료와 보고서들을 서둘러 가져왔다. 게다가 사내 메신저와 전자결재 시스템을 놔두고 왜 굳이 찾아와 그의 얼굴을 봐가면서까지 서류를 내미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소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할 수도 없을 만큼 업무가 쌓여갔다. 연애 첫날인데 왜 이리 바빠. 강호의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 뒤로도 마케팅팀, 디자인팀에서도 직원이 찾아왔다. 오늘을 넘기면 안 된다는 듯 있는 업무, 없는 업무 다 끌어모아 달려드는 식이다. 뭔가 싸한데. 급기야 아까 들렀던 개발팀에서도 사람이 왔다. 인력 확충 건에 대해 다소 무리한 요구가 담긴 서류를 가지고서.

“은주 님. 혹시 지금.”

“네? 전 그냥 오늘 꼭 가지고 가라고 해서 온 것뿐인데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대답하고 있다.

“왜 꼭 오늘입니까.”

그제야 개발팀 방은주 사원이 하하, 웃었다.

“그야…….”

“오늘 내 기분이 좋아서?”

“네, 하하하.”

강호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러니 오늘 꼭 컨펌 받으라고 홍찬규 대표가 시켜서?”

“네, 하하하.”

거짓말을 못하는 방은주 사원은 그저 곱게 대답하며 웃을 뿐이다. 홍찬규 내 이놈을 그냥. 그새를 못 참고 홍찬규는 오늘 백강호 기분이 좋다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닌 거다. 그러니 할 말 있으면 오늘 다 하고, 결재받을 거 오늘 다 받으라고. 그래서 지금 전 사원들이 앞다퉈 제 방에 들락거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혈압이 다 오른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듯, 쉽게 결재를 받기 위해 아직 기한이 남은 보고까지 죄다 쓸어다가 올리는 모습이라니. 회사에 홍찬규 하나만 있어도 머리가 아픈데, 모든 사원이 홍찬규화 되고 있는 걸까. 통탄할 노릇이다.

“하아. ……나가보세요.”

“네, 그럼 이건 오늘 꼭 좀 부탁드립니다아…….”

방은주 사원은 강호의 싸늘한 얼굴을 보며 검지 끝으로 서류를 스윽 밀었다. 그리고 겁먹은 얼굴로 슬슬 뒷걸음질하며 인사했다. 하필 늦게 온 바람에 백강호의 좋은 기분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나마 서류라도 세이프시킨 것이 다행인 걸까. 문을 열고 나간 방은주 사원은 뒤에 줄줄이 기다리던 다른 직원들에게 속삭였다.

“끝났어, 끝났어. 약발 떨어진 듯.”

마취총을 맞았다가 깨어난 호랑이 우리에서 막 빠져나갔다. 다들 아쉬워하며 돌아섰다.

  ◇ ◆ ◇ 그렇게 직원들이 한바탕 휩쓸고 간 강호의 집무실. 그는 도저히 업무에 집중할 수 없어 휴대전화를 들었다. 소란의 목소리라도 들어야 기분이 전환될 것 같다. 아무 용건 없이 전화한 적은 없었기에 강호는 조금 긴장되었다. 뭐라고 할까. 이따 데리러 가겠다고 하면 될까. 몇 시에 끝나는지 물어보면 되겠지.

- 네, 여보세요.

“이따 끝나지.”

- 네?

하, 강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따 데리러 갈게. 몇 시에 끝나지. 이 말을 제대로 못 해서 다짜고짜 ‘이따 끝나지’라고 해버리다니. 백강호, 설마 바보가 됐냐.

- 그런데 지금 의뢰인 상담 들어가야 해서요. 제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아, 그래.”

겨우 대답만 했는데 통화가 끊어졌다. 그녀의 바쁜 시간을 방해한 꼴이 되어버렸다. 강호는 눈을 감고 평정을 찾기 위해 숨을 고르게 내뱉었다. 새로 시작한 연애에 마음이 설레 구름 위를 걸었던 죄로 나는 지금 홍찬규에게 농락이나 당하고 있는데. 너만 바쁘지. 너만 바빠. 한없이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기분. 이건 다 홍찬규 때문이다. 강호는 그에게 전화했다.

- 아이고, 대표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깐죽거리는 홍찬규 때문에 고혈압 진단을 받게 될 것 같다.

“내 표정이 썩은 건 8할이 네 탓이야.”

-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인 뉘우치는 마음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말을 말자.”

누가 봐도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 찬규는 고강도 깐죽 스킬로 항상 잽을 날린다. 그러다 진짜 한 대 크게 처맞고 실려 가지 않을까 모르겠다.

- 그런데 너 나린이한테 좀 잘해줘라. 너무 틱틱거리지 말고.

갑자기 홍찬규가 멀쩡한 소리를 했다.

- 연희가 그러는데 임신 초기에 진짜 힘들다고 하던데. 엄청 예민하고. 계나린 입덧까지 하는 거면 그야말로 헬이지, 헬. 우리라도 잘해줘야지 걔 집에서 알게 되면 전쟁 시작일 텐데.

“내가 뭘.”

- 말 좀 예쁘게 하라고. 임신 중에는 무슨 말을 들어도 그냥 괜히 울컥하고 억울하고 승질 나고 속상하고 그런댄다.

“그냥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해. 내 옆에.”

- 그런데 누구래?

아기 아빠를 또 묻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물은 것처럼 새삼스럽게. 홍찬규는 상대가 진실을 말할 때까지 계속 이럴 것이다. 집요한 놈.

“모른다. 끊어.”

전화한 내가 바보지. 강호는 휴대전화를 책상에 탁 내려놓았다. 후우우. 한숨이 나온다. 강호는 나린을 보는 마음이 너무나도 불편하고 이상했다. 서로의 비밀을 하나씩 쥐고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나린의 아기 아빠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았겠다. 어제 강호는 성준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차 한잔하자며 집에 찾아갔다.  

“형님도 좋은 분 만나셨으면 하는데. 제가 신경 좀 써볼까요.”

  그답지 않게 오지랖을 떨었다. 성준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나는 그냥 이대로가 좋아서.”

“저희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결혼 타령을 하셨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습니다.”

“왜?”

“혼자 계신 거 보기 쓸쓸하고 안 좋네요.”

  성준은 가을바람처럼 선선히 웃었다.  

“주변에 괜찮은 여자는 없으십니까. 좋아하는 분이라든가.”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왜요.”

“나는…… 알잖아. 상황도 그리 좋지 않은 거.”

  가만히 서 있으면 수려한 외모에 호리호리하면서도 듬직한 체구까지, 길 가다 돌아볼 정도의 미남자였다. 그러나 성준이 걷는 순간 다들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목발 등의 보조기구를 이용하는 건 아니지만 다리를 저니 저마다 안됐다거나 안타깝다거나 짠하다거나 그런 눈빛을 보내곤 하였으니까. 동정 혹은 무시. 때로는 차별. 다친 후의 성준이 겪게 된 세상이다. 사고는 순간이었다. 시간을 돌려도 성준은 똑같은 선택을 하고야 말겠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종골 골절로 운동을 포기했고, 끔찍하게 힘들던 재활치료를 견뎌냈다. 후유증을 겪긴 하지만 이만하길 다행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도 혼자서 이동할 수 있고 이렇게 장사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제겐 그저 대단한 기적이다. 다리를 절든 어깨가 아프든 귀가 안 들리든, 혹은 눈이 나빠 안경을 쓰든 매일 혈압약을 먹든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들 수 있든, 누구나 크고 작은 불편은 겪기 마련인데. 장애는 극복해야 할 문제나 억지 감동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부분이라는 걸 성준도 다치고 나서야 알았다. 그냥 서로 다른 삶의 한 모습이다. 아직은 인식 개선이 요구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누군가와 엮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괜히 나 때문에 누군가 고생하는 거 보고 싶지 않거든. 그게 몸고생이든 마음고생이든 어느 쪽도 다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

  묵직한 울림. 지나친 책임감은 도리어 세상을 향해 세운 벽을 더욱 견고하게 했다. 성준의 심정도 알 것 같다. 그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어떤 준비든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흐음.”

강호는 제 집무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연애 시작에 브레이크댄스를 춰도 모자란 오늘, 이런 고민이나 하게 하다니.

‘계나린 진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아니다. 취소.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 절대 안 되지. 계나린이 임신한 덕분에 계약을 파기했고, 파기한 덕분에 소란과 결혼하게 됐고, 결혼한 덕분에 서로 마음까지 확인한 거 아닌가. 이 정도면 귀인이다. 보답을 해도 시원찮을 판이다. 그래, 다시 생각해보자. 계나린과 형님을 위하는 길이 어떤 건지. 그때, 똑똑 노크하며 계나린이 들어왔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절대 화를 내지 말자. 계나린이 아무리 어그로를 끌어도 평정을 유지하자. 강호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그녀를 맞이했다.

“차 마실래? 뭘로 내줄…….”

“야! 차는 집어치우고 너 티나 좀 내지 마. 내가 어디 네 일에 티 낸 적 있어?”

기껏 친절하게 대해주려고 했더니 나린은 들어오자마자 성질을 버럭 냈다. 이것들이 진짜.

“아까 홍찬규 방에서 서후 동생이 어떻고 그딴 소린 왜 하는 거야? 이 멍청아.”

계나린 이 성질머리로 감히 우리 형님을 건드렸겠다. 강호는 파르르 끓어오르는 화를 내리눌렀다.

“어차피 홍찬규도 다 아는데. 그게 티를 내고 말고 할 일이야?”

“툭하면 내 아기 걸고넘어지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쳐다보고. 그냥 애가 있구나 하고 넘어가면 안 돼? 너는 내가 그렇게 못마땅해?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 못 해? 너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왜 헤어졌는데?”

툭 질문을 던졌다. 열심히 항의하던 나린이 입을 다물었다.

“왜 대답 못 해?”

“너한테 말할 이유 없어.”

“그 사람이 맞긴 하다는 거네.”

“그만 좀 해. 맞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다는 거야?”

“넌 상대 생각은 안 해?”

강호가 일침을 놓았다.

“무슨 생각을 해. 상관없다니까. 몇 번을 말해.”

“세상 어딘가에 자기 핏줄이 자라고 있어. 그걸 아버지가 모르고 살아야 하는 게 말이 돼? 언제까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왜 없어. 책임을 지든 말든 그건 그쪽에서 알고 결정할 문제야.”

“이 아기, 나는 내가 혼자 키울 생각으로 낳겠다고 한 거야. 온전히 내가 감당하겠다고 결정한 거라고.”

나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젠장.

“울어, 설마?”

그는 질색하며 티슈를 휙 뽑아 건넸다.

“이 상황에 우는 거 최악이다.”

“최악 맞아. 근데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호르몬이 잘못한 거라고.”

나린이 분한 얼굴로 눈물을 찍어냈다.

“이것 봐. 입덧도, 호르몬 지랄도, 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내게 결정할 자유가 없어? 숨길 자유도 없어? 난 이 아기한테 뭐든지 다 해줄 건데. 네가 무슨 권리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해?”

급기야 설움 가득한 음성을 쏟아냈다.

“그 사람이 나 싫댔어. 너무너무 싫다고 했다고.”

“이해는 해. 싫을 만하지. 당연한 일이야.”

“야!”

강호는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성준이 그녀를 싫어할 리가 없지. 아기 생길 일이 그냥 있었을 리도 없고.  

“나는…… 알잖아. 상황도 그리 좋지 않은 거.”

  강호는 확신했다. 성준은 나린이 싫은 게 아니었다고.

“그런데 내가 뭘 할 수 있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울어? 정식으로 사귄 것도 아닌데 책임져달라고 울까?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해? 나 싫다는 사람한테?”

“계나린 너.”

“뭐.”

“도망친 거지?”

나린은 심장이 철렁했다. 들킬 줄 몰랐다. 제가 비겁하게 도망친 걸 들킬지 몰랐다. 설령 우성준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은 모르길 바랐다. 자존심이 상해 돌아섰다. 사랑해달라 구걸하고 싶지도 않았다. 끝끝내 저를 보게 애쓰고 싶은 용기도 없었다. 결국, 그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와 시작해봐야 상처만 가득하리란 걸 알기에. 함께 걸을 길이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에. 그래서 도망쳤다. 모르길 바랐다. 버려질까 무서워 먼저 버렸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짝사랑은 하기 싫고, 그 사람은 자꾸 뒷걸음질 치는데 붙잡을 용기는 없고.”

“그만해.”

“그 사람에 대한 네 감정 하나 책임질 수도 없었으면서, 아기를 책임지겠다는 오기나 부리고 있고.”

“야.”

나린은 진짜 죽여버리고 싶단 얼굴로 강호를 노려보았다. 진실이 드러났을 때의 표정이 확실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상관 안 해. 그런데 형님은 내가 평생 볼 사람이야. 가족이라고.”

강호의 딜레마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네 아기가 태어나고, 내 형님은 지척에 자기 애가 자라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이걸 난 양쪽에서 다 지켜봐야 하는데.”

“…….”

“비극 아니냐?”

“그래서 너는.”

한층 누그러진 투로 나린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

“숨지 마.”

강호가 단단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혼자 애 낳아서 키우겠다는 결심까지 했으면 너, 못 할 일이 없어.”

“…….”

“뭐든 얘기해. 도와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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