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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달달한 맛 고백, 뜨거운 맛 키스 (33/112)

#33화. 달달한 맛 고백, 뜨거운 맛 키스2021.02.23.

그 얼마나 우스운 착각이던가. 강호의 외모에 홀려 몸만 원한다고 했던 건, 이미 깊게 자리해버린 제 감정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리 없어서. 아니, 감히 좋아할 수나 있는 사람인가 싶어서. 감정 따위 언제나 뒤로 미뤄두었던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차마 제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였어…….’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빠아앙! 뒤에서 경적이 시끄럽게 울렸다. 청신호로 바뀐 걸 모르고 여태 서 있던 탓이다. 아차, 한 소란이 서둘러 차를 출발하는 동시에 비상등을 깜빡여 뒤차에 미안함을 표했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상태로 다음 블록으로 달려가는데, 마침 붉은 신호가 보였다. 소란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유턴 차선으로 진입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이 마음을 전해야만 할 것 같아서. 망설임 없이 반대쪽으로 차를 돌린 그녀는 액셀러레이터를 쭉 밟았다. ◇ ◆ ◇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에게 말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 내어놓을 마음이 보물처럼 가득했다. 모두 다 전해주고 싶다. 사실은 나도, 당신을 너무나 좋아해요. 그래서 자꾸만 시선이 가고 마음이 가고 그랬던 건데, 바보 같은 내가 그걸 몰랐어요. 전부 말해주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차고 안에는 그의 차가 서 있다. 아직 나가지 않은 것이다.

‘아직 출근 전이네, 다행이다.’

소란은 차고에서 1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중문을 열어젖힌 그녀가 서둘러 거실과 주방을 지나 침실로 향했다. 아직 자고 있을까. 아니면 일어났을까.

“……없네.”

침대는 비어 있었다. 언제 여기서 잤냐는 듯 가지런하게 정돈된 시트가 마치 꿈만 같다. 아니야. 어젯밤 일은 꿈이 아니야. 안쪽 욕실에서도 당연히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는 출근 준비를 하러 2층에 갔나 보다.

‘2층.’

소란은 도망친 채무자를 찾듯. 마약탐지견이 마약을 찾듯. 다리 없는 귀신이 남아 있는 학생을 찾듯. 아니, 아니. 오매불망 그리는 님을 찾아 헤매듯 소란은 집 안을 샅샅이 탐색했다. 왜 전화를 할 생각은 못 했던가. 소란은 꼭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층 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올랐다. 집 끝까지 왔다 갔다 하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단순히 많이 움직여서가 아니다. 터져버릴 것 같은 가슴 탓이다. 혹시 2층에도 그가 없어 루프톱까지 가야 한다면 그땐 계단에서 쓰러져 실려 갈지도 모른다. 어서 그를 보고 싶었다. 2층 자동문이 열렸다.

‘침실에 있나 보네.’

멀리 침실 안쪽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소란의 침실에서 나와 역시 2층에 와 있던 것이다. 애타는 마음이 그녀를 어지럽혔다. 견딜 수 없는 가슴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다. 이유는 단 하나, 꼭 그를 보고 직접 말해주고 싶어서. 나도 좋아한다고. 사실은 나도 좋아하고 있었더라고. 어쩌면 홀린 듯 결혼하겠다고 했던 것도 전부, 그의 옆자리가 탐나서였는지 모르겠다고. 순서가 잘못됐지만 이제야 마음을 깨달았다고. 그래서 그의 곁에 머물지 못할까 봐 애써 허튼소리로 감정을 감추고 또 감추었던 것 같다고.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 수많은 계약 조항 따위도 둘 사이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였다. 우리는 왜 먼 길을 돌고 돌아 만나게 되었을까. 소란은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무척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바흐다.’

골드베르크 변주곡(J.S. Bach-Goldberg Variations). 마치 어제 그녀가 마셨던 캐모마일 티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악. ……은 또 개뿔. 서정적인 음악 역시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소란의 감정을 가라앉혀주지는 못했다.

‘클래식 들으면서 출근 준비하나 보네. 사람 참, 고급스럽기도 하지.’

다만 알면 알수록 그는 그저 빛이라 소란은 감탄하며 침실에 들어섰다. 아마 트로트를 듣고 있었어도 사람 참 인간미 넘친단 말이야 했을 테지만. 침대를 지나 안쪽 드레스룸으로 향한 그녀는 유리벽을 두드렸다. 똑똑. 자신이 왔다는 기척을 하며 그를…….

“강호 씨, 보고 싶어서…….”

……막 찾으려던 순간이었는데. 그가 젖은 머리를 손으로 흩트리며 나오다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허어업!”

소란이 두 손을 들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안 그러면 꺄아악 소리를 내지를 것 같아서. 아니. 그 손으로 눈부터 가렸어야 했나. 이미 늦었다. 차라리 돌아섰어야 했는데, 고장 난 육체는 말을 듣지 않았다.

“보고 싶어서?”

그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강호의 잘생긴 눈썹 끝이 일그러졌다. 욕실에서 막 나온 그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다. 가운도. 하다못해 허리에 배스타월도 안 둘렀다. 실오라기라도 하나 걸치고 있으면 덜 충격이었을까. 그저 손에 반쯤 젖은 수건만 하나 쥐고 있을 뿐이다. 아악. 나 곡기 아직도 안 끊었냐! 왜 여태 안 끊고 있었냐! 소란은 놀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얼어붙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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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신이시여. 보고 싶다는 게 정녕 이건 아니었어요. 결백합니다. 진짜예요. 믿어주세요. 하고 싶은 말은 오직 입속에만 맴돌 뿐 밖으로 나와주질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엉엉 울고 싶었다. 그가 손에 쥔 수건을 천천히 내렸다. 가슴이 웅장해지던 장관이자 절경이며 신이 주신 선물이 그제야 수건에 가려졌다. 소란은 하얗게 타버려 재가 된 기분이었다. ◇ ◆ ◇

“보고 싶어서.”

아아. 아닙니다…….

“결국 내 몸이라는 건가.”

진짜 아니에요. 소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죄인의 심정으로 2층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다. 셔츠에 바지까지 꼭꼭 다 입고 나온 그가 소파 위에 캐시미어 코트를 툭 던지고서 앉았다. 그 모습이 상당히 냉랭하고 또, 징글맞게 섹시하다.

“내가 샤워하고 나오는 타이밍을 일부러 노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데.”

“아닙니다.”

고백하려고 되돌아왔는데 취조를 받게 생겼다.

“생각보다 계획적이군.”

“전 정말 억울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출근했던 우 변호사가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뭐지? 게다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2층까지 올라왔고.”

아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하는 거야, 대체. 소란은 입술 안쪽을 질끈 깨물었다.

“마음은 주기 싫고, 몸은 갖고 싶고.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대표님.”

“강호 씨랬다, 대표님이랬다. 불리하면 대표님인가.”

“좋아합니다!”

“알아. 내 몸 좋아하는 거.”

물론입니다. 좋아하기만 할까요. 아주 환장하죠. 대표님을 만나 새로운 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절 신세계로 인도하셨어요. 소란의 시선에 실린 경탄의 빛을 느꼈을까. 그가 헛웃음을 치며 오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미치겠다. 너무 멋있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아, 나올 만하지, 참. 백강호라면 그래, 자신감 가지는 게 당연하다. 암요. 네. 인정. 자신감의 원천은 바로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이럴 때가 아니지. 소란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몸이 아니라.”

하아, 말을 하자니 한숨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무드 없이, 쫓기듯, 우습게 고백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소란은 또 한 번 울고 싶었다. 나는 이 사람 앞에선 왜 매번 이리되어버리는 걸까. 이렇게 된 마당에 어쩔 수 없지. 꼭 고백이 분위기 있어야 한다는 법이 있나. 오해를 풀고 할 말은 다 해야지. ‘정면돌파’ 하면 또 우소란이니까.

“대표님. 아니, 강호 씨. 저 이제 호칭 정리할게요. 다른 사람 앞에서나, 둘이 있을 때나, 강호 씨로 통일하겠습니다.”

“그 말 하려고 온 건가?”

간밤에 한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제 품을 파고들던 남자 어디 갔나. 지금은 찬바람 쌩쌩 부는 빙산 앞에 선 기분이다. 그것마저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듯해 소란은 아찔하고 좋았다. 모름지기 맛 중의 맛은 단짠 아니던가.

“혹시 다른 호칭을 원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저는 무엇으로든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호칭 왜.”

“강호 씨를.”

“…….”

“좋아해서요.”

“안다고.”

아니, 이 말이 이렇게 임팩트가 없었나. 좋아한다고만 하면 그가 어제의 저처럼 깜짝 놀라거나, 아니면 감격하거나, 기뻐하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내 답을 기다린다며. 마음을 달라며. 왜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거야.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고백에 소란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하긴. 제 탓이다. ‘대표님 몸을 원해요’ 같은 매운맛 폭탄직구를 날려놓고 순한 맛 ‘좋아해요’가 퍽이나 먹히겠다. 그러니 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선 표현의 강도를 좀 더 높일 필요가 있겠다. 달달한 맛으로다가.

“강호 씨. 제가 출근하다가 깨달았는데.”

“깨달았는데.”

“사랑해요.”

마신 것도 없는데 사레라도 들린 듯 강호는 갑자기 기침했다. 그렇지. 이 정도 임팩트는 있어줘야지.

“사랑합니다. 강호 씨.”

“자, 잠깐.”

“보리수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듯.”

“우 변호사?”

“자신의 사명에 대해 예수가 계시를 받았듯.”

강호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도 알게 됐어요. 강호 씨를 사랑한다는걸.”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다.

“갑자기?”

“누가 갑자기라고 했나요? 갑자기 아닙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기색 없었잖아.”

아니 자기만 천년의 사랑이고 나는 갑자기야?

“그렇게 따지면 어제 제가 받은 고백도 마찬가지죠. 저도 대표님이 그런 마음 갖고 계신 줄 전혀 몰랐는데.”

“불리하면 또 대표님. 호칭으로 거리 두기인가.”

“강호 씨야말로 불리하니까 호칭으로 트집 잡는데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래봤자…….”

“…….”

“제가 강호 씨 사랑한다는 사실은 어디 안 가니까요.”

마침내 소란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원래 세상만사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부턴 일사천리 아니겠나. 고백은 이제, 달달한 껌이었다. ◇ ◆ ◇

“더 깊은 대화는 퇴근 후에 하는 게 좋겠어요.”

그는 당황한 건지, 황당한 건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소란은 조급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오늘 휴가라도 써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출근하기로 결심했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로 로펌 전체가 휴가였다. 고로 오늘은 사무실에 나가서 웬만한 업무는 다 보아야만 했다. 할 말이 잔뜩 남아 있지만 생업이 우선이란 사실이 못내 서글퍼진다.

“강호 씨는 대표님이지만, 저는 보통의 일개미라서요.”

“나도 마찬가지야.”

방금 고백을 들은 사람이 맞나 싶게 그는 금방 페이스를 되찾았다. 더없이 차디찬 기운은 사람을 주눅들게 한다.

“할 일 많아. 출근해야 해.”

그런다고 주눅들 우소란이 아니지. 함께 차고에 내려간 후, 그녀가 말했다.

“데려다드릴게요.”

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소란은 웃으며 말했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우니까, 출근 같이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강호 씨 회사가 더 가까우니 제가 내려드리고 가면 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차 타.”

그가 자신의 차로 가서 문을 열었다. 조수석 문을 열고 서 있는 그는 그림 같았다. 감동이다. 존재 자체가 그냥 감동이다. 크, 비율 하며. 저 넓은 어깨 하며, 문을 잡고 있는 섬세한 손까지도.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다, 정말. 이 사람을 내가 사랑한다니. 이 사람이 나를 오래도록 짝사랑해왔다니. 쌍방향 그린 라이트라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행복이 밀려온다.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감정이다. 소란은 벅찬 가슴으로 걸음을 옮겼다. 절 향해 문을 열고 있는 그에게 가는 길. 마침내 다가가 소란이 차에 오르려 할 때. 강호가 그녀를 감싸 안아 차체에 붙이며 마주 섰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넌 모르지.”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그의 귀에도 들릴 것만 같다. 바짝 마주 선 채 주고받는 시선이 델 듯 뜨거웠다. 어째서 이런 천국을 모르고 살았을까.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데. 시원하고 달콤한, 흰 눈밭의 향기가 그에게서 났다. 출근이고 뭐고 이대로 모든 게 다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지각 정도는, 괜찮지 않나.”

지금부터 시작할 일은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는, 사전경고였다.

“1일인데.”

소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단숨에 맞붙은 입술은 열기가 섞이며 벌어졌다. 소란은 팔을 올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방이 툭 떨어졌다. 강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당기며 야릇한 살덩이를 휘감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너무 좋다.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몸을 원하면 마음을 내놓는 게 맞았다. 이 마음이 전부 제 것이라고 생각하니 실로 엄청난 충족감이 온몸을 휩쌌다. 닿는 곳마다 아찔한 전율이 일었다. 하아, 흩어지는 야한 음성이 귓가에 젖어들었다. 차고 안에는 막 연애를 시작한 부부의 뜨거운 숨소리가 파동을 일으키며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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