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안고 잘게. (32/112)

#32화. 안고 잘게.2021.02.20.

“그래서 같이 자려고. 오늘 밤은.”

“저랑요?”

그럼 누구겠냐는 듯 그가 빤히 내려다본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해 우리가 원래 같이 자던 사이였나 싶을 정도다.

“언제까지 여기 서 있어야 하지?”

“일단, 들어오세요.”

소란은 얼떨결에 비켜섰다. 그를 문밖에 세워두고 대화를 지속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그만큼 강호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얼굴이다. 밤이 늦었다. 거두절미하고 일단 자야 할 시간.

“정말 여기서 주무실 거예요?”

“그래, 같이.”

우르르 콰아앙! 오늘 하늘이 무너지든 내 심장이 무너지든 둘 중 하나는 끝장을 볼 모양이다.

“의견을 정리할 시간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저는 아직이라서요.”

“알아.”

“동침할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몸을 원하면 마음을 내놓으라며. 그 마음 아직 내놓지 못했는데 왜 들이닥치냐고.

“동침할 사이가 아니라서 우리가 호텔방에서 함께 자고, 두 번의 입맞춤과 한 번의 딥한 키스를 했던 건가. 그것도 대부분 네 의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쪽이 좋으세요, 이쪽이 좋으세요?”

소란은 군말 없이 침대의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무심히 스킨십 횟수를 읊는 그 때문에 볼이 화끈 달아올라 일단 소모적인 대화를 거두기로 했다. 다행히 침대는 소란이 가로로 누워도 남을 정도로 충분히 넓으니까. 둘이 나란히 누워도 360도로 돌지 않는 이상 몸이 닿을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침대 끝에 찌그러져 자면 될 터였다.

“내가 이쪽.”

강호가 창가에서 떨어진 반대쪽으로 갔다. 자연히 소란은 창가와 가까운 침대 끝에 섰다.

“혹시 고백하신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뭔가를 기대하고 오신 건, 아니시겠지만.”

“그래, 아니야.”

“다행이네요.”

노파심에 건넸던 말인데 아니라는 확답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다행이란 소리에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 또 멋있네. 인상 쓰는 얼굴이 제일 섹시하다, 정말. 소란은 마음을 다잡았다. 섹슈얼한 분위기로 흘러가선 안 된다. 진짜 다 망하는 거다.

“대표님도 안심하세요. 저 믿으시고요. 손도 안 잡고 잘게요.”

같이 자자고 내려온 건 저쪽인데, 어쩐지 자신이 자자고 한 것처럼 말이 많아졌다. 천하에 쓸데없는 소리들. 그건 어쩜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소란, 정신 바짝 차리자. 그냥 잠만 자는 거야, 잠만.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여기 온 진짜 이유가 뭔지 아예 묻지도 않았다. 공부와 업무에 최적화된 소란의 몸은 잘 땐 확실하게 자는 편이다. 그래야 깨어 있을 때 효율적으로 집중할 수 있기에. 그렇게 적응해온 몸은 지금 당장 숙면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화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일단 잠부터 자자. 소란은 먼저 여린 불빛의 스탠드를 끄고 침대 끄트머리에 붙어 누웠다. 분명 한방, 한 침대에서 자게 되었지만 전적이 있어서인지 그리 어색하지만도 않았다. 거센 비와 천둥소리 사이로 그가 바스락, 이불을 들추고 눕는 소리가 났다. 훌륭한 매트리스는 세밀한 움직임의 여파까지 전해주진 않았지만, 가라앉은 공기만으로도 얼마든지 느껴졌다. 모든 세포와 신경이 침대 반대편으로 향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맨정신으로, 같은 침대에 누운 것이다. 소란은 그를 등진 채 긴장감에 젖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머리만 대면 자는 편이라서요.”

“알아.”

술을 마시긴 했었지만 키스한 직후에 잠들어버린 적이 있다.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무리 없이 잘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먼저 자겠습니다.”

“그래, 자.”

정말 용건은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같이’ 자는 데만 있었다는 듯 그의 반응은 심플했다.

‘뭐지?’

의견을 잘 정리하고 있나 확인하러 온 건가. 내 머릿속에 들어가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침대라도 들어온 건가. 대체 이유가 뭐야. 이 밤에, 비도 오는 이 야심한 밤에, 멀쩡한 자기 방 놔두고 왜 온 거야. 무슨 얘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손끝 하나 대보려는 것도 아니면서. 뭐지, 뭐지. 잠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났다. 소란은 숨죽인 채 어두운 침실에서 눈만 깜빡거렸다. 테이블 너머 창밖으론 하늘이 갈라진 듯 여전히 비가 몰아쳐 내리고 있다.

‘자나……?’

등 뒤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호는 잠이 든 걸까. 왜 여기까지 내려왔냐고 아까 그냥 물어볼걸. 무서울까 봐, 라니. 전혀 아니라고 하는데도 들은 체도 안 하고 말이야. 내가 어디 이런 천둥이나 무서워할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도저히 안 되겠다.’

이대로 있다가는 잠도 못 자고, 숨도 못 쉬고 밤을 꼴딱 새울 게 뻔했다. 소란은 거실로 나가야겠다 싶어 슬쩍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어엇.”

손목이 붙들렸다. 세진 않았지만 붙잡힌 힘에 이끌려 풀썩 다시 침대에 눕게 되어버렸고. 손을 잡은 이는 당연히 강호였다.

“나가지 마.”

잔뜩 잠긴 목소리. 가라앉은 음성이 침잠한 공기를 가르며 귀에 박히자 소란의 가슴이 쿵 울렸다. 천둥과 함께. 콰아앙! 그가 소란을 당겨 제 품에 가두었다. 강호는 그녀처럼 등지고 있지 않았다. 소란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그렇기에 소란은 쉽게 그 품에 쏙 들어갔고, 순식간에 침대 속에서 강호에게 마주 안겨버렸다. 소란은 놀랐지만 아무런 말도 못 하고서 숨만 삼켰다. 그가 너무도 단단히 끌어안은 터라 빠져나올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안고 잘게.”

섹시한 음성이 귀가 아닌 가슴으로 바로 들어온다. 하염없이 떨리고 설레 내 몸이 내 게 아닌 것 같다.

“더는 안 움직여. 그냥 이렇게만 있자.”

“…….”

“계약 위반이라고 생각되면, 배상 청구해. 얼마든지.”

선을 넘었고, 그는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어 보였다. 다만 소란만이 혼란 속에서 세차게 흔들릴 뿐이다. 좋아한다는 고백 끝에 얼굴도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돌아서놓고는, 돌연 들이닥쳐 이렇게 안고 자자니. 어느 틈에 생각을 정리하고 답을 내어야 한단 말인가. 스펙터클하기 그지없는데. 다시 번개가 번쩍, 하얀빛으로 하늘을 쪼개며 콰아앙! 천둥이 내리쳤다. 그의 커다란 덩치가 바짝 긴장하듯 힘이 들어갔다. 안겨 있으니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소란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지는 근육의 세세한 반동. 몰아쉬는 한숨과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까지.

‘혹시.’

또 쾅, 콰쾅!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또 훅 떨렸다.

‘……진짜 무서운 거였어?’

내가 아니고, 백강호가. 천둥 치는 밤을? 새로운 혼란에 빠졌다.

‘아, 아니. 다른 남자도 아니고. 뭐, 뭐지. 백강호인데……? 배, 백강호잖아.’

이름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되는 사람이다. 강렬한 기운과 온몸에서 내뿜는 매서운 카리스마. 눈만 마주쳐도 등줄기에 훅 서늘함이 스치는 그런 남자인데.

“대표님……?”

대답이 없는 그. 소란은 탄탄한 가슴에 폭 파묻힌 채, 강호의 등을 조심히 쓸며 다시 불렀다.

“……강호 씨.”

낮은 숨소리만 흩어졌다. 일부러 대답을 안 하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소란은 힘겹게 그를 밀어내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침실의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옅은 빛이 스민 그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놀란 소란이 그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땀이다. 눈을 감은 강호는 잔뜩 인상을 쓴 채 괴로운 얼굴로 누워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목이 답답한 듯 빈손으로 티셔츠 위를 움켜쥐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몸을 일으키진 않는 걸로 보니 무력해 보였고.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떡하지?’

수건이라도 가져와야 하나. 그녀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것만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가 다시 손목을 잡았다.

“여기 있어.”

필요한 건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너 하나라는 듯. 그에게 다시 붙잡힌 소란은 조그맣게 숨을 내쉬며 강호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 품에 안기는 게 아니라, 안아주려고. 제가 직접 강호를 안아주고 싶어서. 가슴이 뜨겁고 간질거렸다. 이 품에 그를 안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자세를 바꿔 그를 조심히 당겨 안았다. 강호가 기다렸다는 듯 깊이 안겨들며 소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이 제 가슴 위쪽에 파묻혔다. 소란의 손가락이 부드럽고 결 좋은 머릿결 사이사이를 감싸듯 가만히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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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르르 콰아앙! 번쩍하고 또 하얀 빛과 함께 아까보다 더 매서운 천둥소리가 심장을 가르며 떨어졌다. 그는 안식처를 만난 듯 소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안으며 파고들었다. 단순히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거대한 짐승 같았고, 두려움으로 맥진한 모습이 그저 위태롭고 애처로울 뿐이었다.

“괜찮아요.”

더는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소란은 그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다 괜찮을 거예요.”

“…….”

“아무것도 아니야, 저런 건.”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아요. 이렇게 안아줘서 되는 거라면 백번 천번 안아줄 수 있다고, 소란은 생각했다. ◇ ◆ ◇ 소란은 새벽에 잠이 깼다. 출근하기 위해 늘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이었다. 선잠을 잔 터라 머리가 몽롱했다. 옆을 보니 강호가 눈을 감고 있다.

‘……잘 자네.’

다행이다. 이런 얼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는 무척이나 편안한 표정이다. 평소처럼 싸늘함이 잔뜩 서린 분위기가 아니다. 잘 뻗은 눈썹, 우뚝하게 솟은 콧대, 빛 좋은 입술만이 그의 외모가 얼마나 완벽한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인정.’

어, 진짜 인정. 잘생긴 건 정말이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야말로 최고다. 이 정도면 천년의 원수도 천년의 사랑이 될 것만 같은 외모 아닌가. 술 마시고서 이번 시즌 한정판 신상백이라며 마트 로고가 찍힌 장바구니를 선물해주고, 네게 잘 어울리는 틴트를 찾았다며 제육볶음 양념을 입술에 발라준다고 해도 이 얼굴을 보면 용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란은 그를 두고 드레스룸 안쪽 욕실로 들어갔다. 강호가 깰세라 신속하게 출근 준비를 마친 후 나왔다. 그는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이제야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 그의 잔뜩 긴장했던 몸도 녹진한 잠에 흠뻑 빠져 있다. 옆 테이블엔 강호의 휴대전화가 있다. 출근을 위해 알람을 맞춰뒀겠지. 깨워주지 않아도 괜찮겠지. 조금이라도 더 푹 잤으면 하고 생각하며 소란은 침실을 빠져나왔다. 차고로 내려가 제 차를 몰고 밖으로 나왔다.

“비 그쳤네.”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낀 하늘은 다소 흐리긴 해도 평화롭기만 했다. 툭툭, 문을 두드리며 찾아왔던 강호. 제 침대로 와 품에 안겨 잠들었던 강호. 신호에 걸려 멈춰 선 소란은 운전대를 잡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를 안았던 제 손. 아직 그 감촉이 생생했다. 심장이 조용히 두근두근 뛰었다. 제 품을 파고들던 그의 묵직한 몸. 자신의 손에 안정을 찾던 숨. 그뿐이었을까.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는지. 그걸 확인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네.”

  단추를 잠가달라고, 타이를 매달라고. 그리고 10년이나 걸렸다는 확인.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우소란. 역시 잘할 줄 알았어.”

“설마 저랑 이것 때문에 결혼하시는 건 아니죠?”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군.”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걸 싫어한다던 그가, 제게만 관대했던 이유. 그것 역시, 절 좋아해서였다. 목이 갑갑한 걸 극도로 꺼려 타이도 매지 않는다는 그에게 처음 만나자마자 머플러를 둘러주었던 자신. 이미 그때부터 강호에게 자신은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아…….”

심장이 미칠 듯 뛰었다. 전속력으로 단거리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의미였는지 알게 된 순간 제게 닥쳐든 감정. 자꾸만 그에게 두근거리던 마음이, 몸을 뜨겁게 만들던 욕구가 전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밤사이 떨어진 벼락은 뒤늦게 소란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번쩍. 흰빛이 스친다.

‘좋아해.’

몸만 원한다는 바보 같은 소리는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였어…….’

당연하게도. 이미 그를 사랑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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