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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같이 자려고, 오늘 밤은 (31/112)

#31화. 같이 자려고, 오늘 밤은2021.02.16.

“내가 원하는 건 너야.”

“…….”

“마음까지, 전부 다.”

소란은 눈을 크게 떴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물론 자신이 했던 말이 강호에게 훨씬 더 당황스러웠겠지만. 그럼에도 소란은 너무 놀라고 말았다. 마음까지 원한다니. 네 전부를 원한다니.

“그게 지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거 맞나요……?”

대체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사랑 때문이다. 상대를 가슴에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백강호가? 나를?

“맞아.”

여전히 차가운 눈빛.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마냥 차디찬 저 얼굴로 절 잡아먹을 것처럼 보고 있으니 이게 바로 언행불일치가 아닌가. 소란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거죽 따위야 어찌 됐든 속은 그렇지 않다는 듯 강호가 숨을 느리게 쉬며 덧붙였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

“내가 너를.”

“…….”

“좋아해, 여자로.”

소란이 헛소리를 덧붙일까 우려했는지 그가 단 한 번의 고백에 쐐기를 박았다. 좋아해. 여자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그런데도 소란은 사고가 그대로 멎어버려 멍하니 되물었다.

“왜요?”

이해할 수 없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그것도 아니다. 제게 사심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역시 아니다. 강호는 언제나 냉정했고 그런 그에게 들이댄 건 오히려 자신이다. 그의 육체에 혹하여 갖은 주접을 떨었던 저조차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이성으로 좋아하는 느낌, 그런 확신은 아직 받아보지 못했으니까. 그게 얼마나 엄청난 건지도 안다.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사람과 사람 사이 그 대단한 감정의 움직임이 바위를 들어 옮기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도 소란은 너무 잘 알았다. 그러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대표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는데.

“날 이용하라고 했었지.”

“그러셨죠.”

“널 좋아해서야.”

허, 조그만 입술 사이로 숨이 터져 나왔다. 진상의 모친이 로펌까지 찾아와 난리를 쳤던 날, 그는 제게 남편 뒀다 뭐 하냐며 본인을 이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게, 날 좋아해서였다고?

“백진상을 때려서 경찰서에 간 적이 있지.”

“그, 그랬죠.”

“널 좋아하니까.”

강호와 결혼하기로 하면서 흘러간 시간들이 하나하나 뼈에 새겨졌다. 아니, 그가 직접 날카롭게 새겨주고 있었다.

“백진상과 만나기 전, 처음부터 널 알고 있었다고 했어.”

“……네.”

“좋아했으니까.”

머리가 어지럽다.

“내가 다 해줄 테니 뭐든 넌 받기만 하라고 했고.”

“그랬어요. 결혼식에서.”

“그것도 당연히 널.”

“좋아해서?”

“그래.”

하, 이럴 수가 있나. 지금껏 진실과 거짓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던 발언 모두가, 그에겐 진짜였다고? 소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럼 혹시.”

설마 싶지만 일단 물어봐야겠다.

“애초에 제가 결혼해드리겠다고 한 데 승낙한 것도…….”

“널.”

소란의 말을 받으며 그가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시선은 마치 그물 같았다. 온몸이 옭아 매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전부터 쭉.”

“…….”

“좋아해왔으니까.”

소란의 심장이 순간 뜀박질을 잊은 듯 멈춰버린 듯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강호는 지금껏 오래 참았다는 듯 그보다 더한 말도 할 수 있단 얼굴로 소란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전부터요?”

“꽤 됐어.”

“그런데, 나린 언니와 결혼하려고 했잖아요.”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날 좋아하는데 왜 다른 여자와 결혼을? 그는 수학 문제의 답을 내듯 명료했다.

“네가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결혼 같은 건.”

입을 열 때마다 엄청난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내가 아니라서, 나와 결혼할 수 없으니까, 결혼이 닥친 상황에 그냥 아무나와 하려 했고 그게 바로 계나린이었다는 건가. 그 결혼은 나린의 임신으로 인해 어그러졌다. 사건 하나로 무너질 만큼 그들의 결혼 계약은 허술한 모래성이었던 것이다.

“왜 저는 몰랐던 거죠?”

그의 마음을. 아니, 그가 아예 절 알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좋아한 지 꽤 되었다면서 그는 어째서 제 앞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네가 백진상과 사귀었잖아. 내내.”

“아.”

제 곁엔 철옹성 같은 백진상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지만 소란은 금세 수긍했다. 백진상이라는 이름 하나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친척이라 껄끄러웠고, 그래서 다가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런데도 절 좋아해왔다니. 그렇게나 오랫동안.

“나는 짝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짝사랑이라.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어딜 봐서 짝사랑을 할 남자란 말인가.

“계나린과 결혼할 뻔했지.”

이제껏 백강호가 했던 행동과 말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수많은 복선을 깐 채 저를 대했지만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시 날 좋아하나, 그런 착각조차 한 적 없다. 그가 절 이성으로 보고 좋아할 거라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벼락처럼 닥친 고백에 소란은 숨이 막혔다. 고백. 그래, 진짜 고백을 받았다. 백강호로부터,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고백을 받고야 말았다.

“네 마음이 나와 같은 수준일 거라 기대하진 않아. 아직은.”

“…….”

“그러려면 네가 아주 많이 노력해야 할 거야.”

그가 분발을 요구했다. 짝사랑이란 미명 아래 홀로 가슴앓이해왔던 사람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강호에게서 뿜어지는 기세는 고고하고 찬엄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사람 우습게 만들지 말고, 몸을 원한다면 네 마음부터 내놓고 말해.”

감히 색욕 따위에 견줄 수 없는 마음. 그걸 가진 남자는 더없이 빛나고 당당했다.

“준비되면 그때, 네가 바라는 모든 걸 다 해줄 테니까.”

역시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다. 스스로 짝사랑 중이라고 했으면서도 절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 날 때부터 모든 걸 다 쥐고 난 듯 뼛속까지 품위 있고 오만하며 우아한 그 자태를 마주한 소란은 정신이 다 얼얼했다. 대체 누가 짝사랑 중인 건지 모르겠다. 앞으로 이 남자 때문에 제 심장이 남아나지 않으리라는 건 예감할 수 있다.

  ◇ ◆ ◇ 기다려. 그렇게 말했던 남자는 하루 사이 제 입장을 모두 정리해 전달했다.  

“네 의견 정리되면 말해. 충분히 기다릴 테니.”

  이번엔 제게 시간을 주고 기다리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제 소란의 차례라는 것이다. 몸을 원한다면 마음부터 달라, 그게 강호가 제시한 이 거래의 요구사항이다. 소란은 씻고 파자마로 갈아입고서 젖은 머리를 드라이했다. 후우. 조금 말리다 말고 한숨. 후우우. 또 조금 말리다가 다시 한숨.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너냐. 백강호의 사랑을 받는 자가.

“으아아.”

드라이어를 탁 내려놓은 소란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희한한 고백을 받은 밤. 분명 제게 결정권이 넘어오긴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 혼란스럽기만 하다. 자격은 주어졌으나 누릴 방법을 모르겠으니 이게 무슨 상황일까.

‘몸을 원했잖아. 그만큼 그 남자가 매력적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뭐가 문제야?’

나도 좋아한다고 해버려?

“헐. 그건 아니지.”

소란의 가슴속이 어지럽게 엉켰다. 실체 없는 거부감이 심장을 꽁꽁 싸매고 든다. 겨우 대충 머리를 말린 소란은 침실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적막이 흐른다. 강호는 이미 2층으로 올라가고 없다. 소란은 얼른 주방에 가 포트에 물을 끓이고 캐모마일 티 포장을 뜯어 티백을 꺼냈다. 티백을 담은 컵에 끓인 물을 채워선 침실로 돌아왔다.

“진짜 비가 오네.”

밤새 거센 비가 올 거라던 예보가 적중했다. 침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바깥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 참이다. 이번 주는 유독 안 춥다 싶더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눈이 아닌 비가 오는 밤이다. 혼란스러운 마음까지 씻겨내리면 좋으련만. 투둑. 투둑. 애꿎은 창문만 두드리며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후웁. 침대 옆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은 소란은 따뜻한 차를 불어가며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심신 안정에는 캐모마일…….

“……은 개뿔.”

가슴만 더 벌렁거린다. 소란은 침묵을 견딜 수 없어 휴대전화로 라디오 어플에 접속했다. 비 내리는 겨울밤과 어울리는 발라드가 흘러나오자 그제야 좀 차분해졌다.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애초에 결혼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소란은 그의 결혼 상대 자리가 공석이 되자 제안했을 뿐이다. TO 난 자리에 입사를 지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백강호는 절 사랑하고 있었다니. 언감생심 저는 꿈도 못 꾸던 사람이었는데. 그걸 전제로 하니 그가 제 어이없는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여준 것도 이해가 된다. 그에겐 거절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좋은 기회였단 거니까.

‘나는 어떤 마음인 거지?’

그를 보며 심장이 쿵 내려앉던 때를 떠올려봤다. 백강호의 사람 홀리는 눈빛과 매혹적인 몸에 흔들린 건 그저 신체적인 반응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과감하게 그의 몸을 원한다는 말을 지를 수 있었던 거지. 강호에게 조금의 감정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는 못 했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럼 나는,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아직은. 그래, 아직은 그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랑은 더더욱 아니지.”

그녀의 현실 부정은 지극히 정상적인 방어기제였다. 단지 그의 몸이 마음에 든다고 하여 당장 사랑이라 정의할 순 없지 않나. 그건 제게 진심을 고백한 강호에게도 굉장한 무례 같았다. 기만이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지 한 시간이나 채 지났을까. 벼락을 맞아 기절했어도 아직 깨어나지 못했을 거다. 소란이 충격에서 벗어나 감정을 정리하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다.

‘우선 자고, 내일 생각하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발라드가 이내 사랑스러운 캐롤로 바뀌었다. 또, 크리스마스. 소란은 칼로 쑤시는 것처럼 가슴 깊숙이 아팠다. 1년 중 가장 잔인하고도 서글픈 날이 코앞으로 다가들고 있다. ◇ ◆ ◇ 우르르. 쾅! 콰아앙!

“허. 무슨 비가 이렇게 무섭게 와.”

하늘이 두 쪽 나는 줄 알았다. 엄청난 천둥소리에 소란은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았다. 새벽 2시. 와, 겨울비 어마어마하네.

“혹시 나 때문에 하늘이 노하셨나…….”

강호의 마음을 갖고 논 건 절대 아닌데. 그가 절 그렇게 생각하는지 정말 몰랐는데. 게다가 내 마음이 어떤지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소란은 괜히 찔려 세찬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우르르 쾅! 그녀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했다.

“아, 그냥 자자.”

천둥소리에 밤새 놀라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 내일 출근하려면 어서 잠을 청해야 했다. 차라리 자장가나 ASMR을 틀고서라도 자야겠다는 생각에 소란은 휴대전화와 이어폰을 찾았다. 그때 문가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툭. 툭. 둔탁하고 묵직한 저 소리. 다시 느리게 울린다. 툭. 툭. 어깻죽지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문 두드리는 소리인가. 이 시간에? 도둑인가? 아니지, 도둑이면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을 리 없지. 보안시스템만 봐도 집에는 도둑 따위는 들어올 수도 없다. 그렇다면.

“……대표님?”

문가에 선 소란이 묻고 잠시 숨을 삼키는 사이,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나야.”

아니 이 밤에 왜? 아까 시계를 봤을 때 분명히 새벽 2시였는데. 게다가 마음을 내놓기 전까진 코빼기도 안 비칠 것처럼 냉랭하게 돌아섰던 그가 먼저 제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겨우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서. 소란은 의아해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이나마 손으로 매만진 후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너른 가슴을 착 감싼 아이보리색 브이넥 티셔츠. 그리고 짙은 회색 파자마 팬츠. 밤에 어울리는 편안한 차림의 강호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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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세요?”

집에 문제라도 생겼나. 비가 와서 물이 샌다든가, 정원의 오두막이 벼락을 맞았다든가, 루프톱 수영장에 비가 가득 차 흘러넘친다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아니고서야 이 야심한 밤에 왜.

“천둥이 쳐서.”

“아, 네.”

천둥이야 치고 있죠. 기상 상황을 전해주러 온 것도 아닐 테고. 그러니까 왜.

“무서울까 봐.”

“제가요?”

소란이 황당해 되물었다. 어둑한 밤. 쏴아아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쾅! 콰아앙! 번쩍거리며 치는 천둥소리.

“시끄럽긴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

네 의사는 상관없다는 듯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같이 자려고. 오늘 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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