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내가 원하는 건 몸이 아니야. (30/112)

#30화. 내가 원하는 건 몸이 아니야.2021.02.13.

“제가 원하는 건, 대표님 몸입니다.”

“……원하는 게 뭐?”

“몸이요. 대표님 몸.”

강호의 심장이 쾅 내려앉았다. 어떤 의미의 심쿵인지 저도 알 수 없다. 설렘인지, 당황인지, 아니면 상처인지. 대체 어떤 쪽인지. 중요한 건 소란은 그저 무감한 얼굴로, 마치 계약 조건 하나 더 추가하자고 요구하는 듯 담담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녀가 입 밖으로 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노골적인 발언과는 상반되었다.

“대표님 몸을 원해요.”

“지금 제정신인가?”

몸을 원한다니. 대체 그게 뭘 뜻하는지나 알고 하는 소린지.

“아직 취중이야?”

“술 깼습니다. 제정신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잘 생각해봐 주세요. 화내셔도 어쩔 수 없지만, 저도 더 이상은 뱅뱅 돌리기 싫어서요. 말도 행동도요.”

그 결혼, 제가 해드릴게요 하고 나설 때부터 알아봤다. 그녀에겐 정말이지 남다른 구석이 있다.

“핑계나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에요.”

“이런 사람?”

“색욕에 밝은 사람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

“대표님과 결혼하기 전까지는요.”

그래서 지금은, 색욕에 밝아졌다는 거야?

“저도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요. 인간적으로 대표님 너무…….”

“너무?”

“섹시해서요.”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너무나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저절로 찡그리고 마는 것처럼, 참된 미간이었다. 허. 기가 차 한숨이 튀어나왔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우소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저도 사람인지라 아름답고 섹시한 것을 보면 몸이 동하고 갖고 싶고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저 입에선 갈수록 대단한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제게 대표님이 지금 그렇습니다.”

현기증이 날 것만 같다.

“본의 아니게 대표님 몸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한 번쯤 만져보고 싶고, 그래서 술에 취해 만져보면 안 되냐, 키스하면 안 되냐, 했던 거였…….”

“잠깐.”

강호는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오는 한숨이 뜨겁기만 했다. 어제는 치사량 이상의 귀여움으로 자신을 초토화시키더니, 오늘은 또 색다른 방법으로 마구 헤집어놓고 있다. 너 때문에 나는 진짜, 살 수가 없다.

“갑작스러우신 거 압니다. 제가 두 번이나 취해서 못 볼 꼴을 보였을 때 당황하셨던 것도 짐작하고요.”

“…….”

아니 다행이다.

“제가 지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소리를 하는 건, 더 이상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예요.”

“불상사.”

“네, 불상사요.”

상서롭지 못한 일.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 그걸 막겠다며 지금 우소란이 쏟아내는 말이 이미 불상사 아닌가. 강호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앞서가버린 내 속도에 네가 맞춰 따라오라곤 했지만, 이건 더 나간 것 같은데. 뛰어오라고 했더니 뭔가 잡아타고 휭 가버린 뒷모습을 보는 기분이다. 어째 중간이 없는 우소란. 그녀의 말을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만도 없다. 내 몸을 원해? 그래 나도 널 원해. 이대로 밀어붙이면 딱일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이 찝찝한 기분은 대체 뭐지……? 순간 강호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건 내 몸이라는 거지.”

“맞습니다.”

“몸도? 아니면 몸만.”

그게 중요했다. 감정이 섞여 있는 발언이냐 아니냐. 그 말에 소란이 손사래를 쳤다.

“아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아주 단순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거라서요.”

그러니까 네 말인즉슨.

“대표님 몸이면 됩니다. 몸만 원하는 거예요.”

이 몸뚱이 하나면 된다는 거였나. 강호는 시선을 내려 새삼스레 자신의 신체를 훑었다. 기가 막힌다.

“결혼 전에 말씀드렸듯 저는 대표님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불온한 생각을 갖게 된 건 저도 뜻하지 않던 바고요.”

소란은 최후변론을 하듯 또박또박 제 의견을 전했다.

“다만 한집에 살면서 계속 부딪히다 보면 제가 대표님에 대해 갖게 된 마음이 점차 새어 나올 게 분명하고요. 이미 두 번이나 전적이 있으니 앞으로도 또 그럴 수 있다는 점 충분히 예상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러니 대표님이 동의하신다면 저희 ‘부부 관계’에 대해서 새롭게 논의를 했으면 하고, 혹시 이런 제안이 마음에 안 드시거나 논의 의사가 전혀 없으시다면.”

“없으시다면.”

소란은 숨을 삼키고는 천천히 말했다.

“제가 당분간 집을 나가서 지내거나, 혹은 주거 공간의 점유를 좀 더 명확히 하여 집 안에서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

“절대로 대표님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갈게요.”

모 아니면 도다. 그녀는 승부수를 띄웠다.

  ◇ ◆ ◇ -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하겠습니다. 좌석 등받이와 발 받침대, 테이블을 제자리로 해주시고…….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소란은 창밖 구름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옆에는 강호가 눈을 감고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다. 아까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나와 공항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소란은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섰다. 강호가 새로 끊어둔 비행 티켓으로 탑승했다. 한 시간여 짧은 시간을 날아와 김포에 도착하는 참이다. 길지 않은 시간, 두 사람은 함께 있지만 따로 있는 것처럼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대화는 아까 그걸로 끝이었다. 강호는 소란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의견이 정리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지.”

  유예기간이 생겼다. 그건 소란의 피를 말리는 시간을 뜻했다. 갑작스럽긴 하겠지만 그렇게 어려운 결정인가. 부부로서, 파트너로서, 이제 조금 더 폭넓은 영역에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면 어떻겠냐는 건데. 그게 성적인 부분이라서 좀 당황스럽긴 하겠지만, 그래도 계약의 한 면으로 조목조목 따져가며 세세하게 조항을 만들면 될 문제인데. 만약 자신을 상대자로 받아들이는 게 탐탁지 않다면 거절하면 될 일이고.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하는지.’

강호가 정리할 의견이란 게 어떤 건지 소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한 후 1층 중문 앞에 그녀의 짐을 놓아준 강호가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

“저, 대표님.”

아무런 인사도 없이 가려던 그가 돌아보았다. 하아, 저 눈빛. 살벌하고 차가운 얼음조각 같은데, 그게 또 뜨겁게 느껴진다. 저 눈에 내가 미치지, 진짜. 소란은 작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까 하던 얘기는 언제 다시 할 수 있을까요? 의견이 정리되면, 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해서요.”

그가 싸한 눈빛으로 절 쳐다보기만 하자, 소란은 정적을 못 참고 덧붙였다.

“바로 거절하셔도 저는 괜찮습니다.”

차라리 미친년 소리를 들으면 찬물을 끼얹은 듯 놀라 제정신이라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나는 안 괜찮아.”

“네?”

“내가 원하는 건 몸이 아니야.”

강호는 잘 다듬은 얼음 끝처럼 매서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기다려.”

툭 떨어진 그 말에 망부석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 ◆ ◇ 다음 날.

“계씨 주말에 오피스텔로 짐 옮겼대. 들었어?”

찬규가 강호의 집무실에 들어서며 말했다. 그의 앞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오늘 점심을 거른 강호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앉아 눈을 감고 있다. 찬규는 입맛이 없어 밥을 안 먹겠다는 그가 걱정되었는지, 식사 후 회사에 돌아오는 길에 먹을 것을 사 온 참이다.

“관심 없어.”

“계씨? 아니면 샌드위치?”

“둘 다.”

“이 형아가 또 손수 까드려야 먹지. 오구오구, 우리 왕자님 자 한입.”

찬규가 마치 서후 대하듯 샌드위치 포장을 먹기 좋게 열어 그에게 대령했다. 강호는 피곤하여 이조차 거절했다.

“그냥 둬. 내가 이따 먹든지 할게.”

“하여튼 고맙다는 말도 없고, 백씨나 계씨나 이 싸가지들.”

찬규가 혀를 차며 제 몫의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계나린이 오피스텔로 갔다고?”

“그래. 본가에서 나왔대.”

찬규는 강호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입을 뗐다.

“그런데 너 진짜 몰라? 계씨 그 애기 말이야. 아빠가 누군지.”

강호는 아무 말 없이 찬규를 바라보았다. 알아도, 모르는 거야. 어차피 본인 입으로 우리 형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으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흰 그래도 좀 통하는 게 있잖아.”

“통하는 거 뭐.”

“똑같이 싸가지가 없는 거라든가, 똑같이 매정한 거라든가.”

“시끄럽고, 나가.”

찬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한테 기대했던 내가 노답이다. 알아도 얘기 안 해줄 놈인데.”

조금 뜨끔했지만 강호는 모른 척했다. 찬규가 제 커피를 들고 나가려다가 문 앞에서 돌아보았다.

“계나린, 괜찮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친구니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힘든 결정을 한 걸 알기에.

“신경 쓰이면 깐죽거리지나 마. 그게 돕는 거야.”

“오케이.”

찬규가 싱긋 웃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다시 혼자 남은 집무실. 강호는 소파에서 일어서 창가로 갔다.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는 시선이 묵직했다. 이런저런 감정으로 가슴속이 복잡한데, 거기에 나린과 성준의 일까지 얹혔다. 나린의 임신은 소란은 물론, 당사자인 성준조차 모르고 있다. 나린이 혼자 감내해야 하는 현실과 그 무거운 결정에 대하여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처럼 그냥 모른 체하고만 있으면 되는지. 강호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성준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형님.”

- 아아, 매제.

“혹시 저녁에 잠깐 시간 되십니까? 찾아뵙고 싶은데.”

- 되지. 먹고 싶은 거 있어?

그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열무김치가 먹고 싶습니다, 형님.”

- 새로 담가야겠네. 오늘 당장은 안 되고. 지금 막 점심 장사 마무리하는 참이라서.

“당장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이따가 5시쯤에 차나 한잔하러 들르겠습니다.”

- 그래, 이따 보자.

전화를 끊은 강호는 창밖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오지랖은 딱 질색이지만 그래도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평생을 함께해온 친구에 대한 의리인지, 쓰잘데기없는 걱정인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 동네에선 계속 사셔야 되나…….”

강호는 소란이 성준과 함께 살던 집을 떠올렸다. 근방에 있는 성준의 식당도. 주거 환경이 안 좋아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다. 강호가 어릴 적 납치당했던 장소가 바로 그 옆 동네였기에. 처음 소란의 집을 찾아갈 때도 동네 이름을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기에 마냥 두렵거나 꺼림칙한 것은 아니라 별다른 내색은 않았다. 소란은 모르겠지만. 제게 남은 트라우마조차 그녀는 아직 모르지만. 모르는 게 어디 그뿐이겠는가.

“후우우…….”

너는 내 마음도 모르지. 다시 가슴이 갑갑해졌다. 제 앞에 선 남자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는지도 모르고서. 몸만 원한다느니, 부부 관계에 대해 새로운 조항을 마련하자느니, 그게 아니면 집에서 나가거나 눈에 띄지 않겠다느니.

‘진짜 사람 미치게 하네.’

감정은 됐고, 육체만 원한다라. 이런 소릴 소란에게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물론 그녀는 ‘결혼하기 전’엔 이러지 않았다고 분명히 명시했다. ‘대표님이 너무 섹시해서’라고도 했다. 남녀 사이의 감정에는 스킨십에 대한 열망도 자동으로 따라붙는 것이기에 나쁜 시그널은 아니다, 분명히.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원하는 건 몸이 아니야.”

  가슴앓이는 10년으로 족하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 했던가. 아니. 더 사랑하는 내가,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는 이기는 싸움 전문이었다. ◇ ◆ ◇ 소란은 현관을 지나 1층 중문을 열고 들어섰다. 야근까지 하고 늦게 들어온 밤. 내 집에 내가 들어오는데 이렇게 숨이 막힐 일인가. 어쩐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듯 느껴져 그녀는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 거실을 통과하려는데.

“우소란.”

흡, 하고 놀란 소란이 고개를 돌렸다. 2층에 있을 줄 알았던 그가 1층 주방 테이블 앞에 앉아 있다. 의견이 정리된 모양이다. 강호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녀를 향해 느리게 다가왔다. 한 발, 또 한 발. 소란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그만 다가오라고, 거기 서서 얘기하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습해오는 그의 강렬한 기운에 눌려서. 숨조차 쉴 수 없어서. 몇 발짝 물러서지 않았는데 벽에 등이 닿고 말았다. 더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벽과 그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갇혔다. 강호가 절 위협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사로잡힌 짐승처럼 애처로워졌다. 그녀는 도저히 그를 마주 바라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뚝 떨궜다.

“나 봐.”

흐읍. 또 겨우 숨을 삼켰다. 강호가 손으로 제 턱을 들어 올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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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볍고도 섬세한 손끝이지만 그래서인지 더 은밀하게 느껴지는 움직임이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런가. 어째 정신이 혼미해진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도 바로 취해버리는 느낌. 그와 눈을 맞추기는 여전히 버거웠다.

“내 말 잘 들어.”

그러믄요. 귀가 뻥 뚫려 있으니 듣지 않을 방도가 없습니다. 수긍의 의미로 소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얼굴을 내렸고 조금 더 가까워졌다. 하아, 진짜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그의 목소리가 선선히 흩어졌다.

“내가 원하는 건 너야.”

“…….”

몸이 아니라.

“마음까지,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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