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소란이 남편 몸 너무 좋잖아. (29/112)

#29화. 소란이 남편 몸 너무 좋잖아.2021.02.09.

‘이 손으로 대체 무슨 짓을?’

취중에도 손에 닿은 그 감촉이 생생하다. 그의 가슴을 만졌다. 셔츠 위 탄탄한 가슴을 움켜쥐고서. 남자 가슴이 벽돌처럼 딱딱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질감 좋은지 몰랐다느니. 그런데도 탄력이 엄청나서 힘 있는 탱탱볼을 눌러보는 기분이라느니.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하면 근육이 튼실하냐느니. 적나라한 감상을 잘도 나불거렸다. 그뿐인가. 황당해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우리 계약서엔 ‘합의’가 아니라 ‘협의’라고 명시했다느니. 저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의사를 표명하고 행위를 하는 것이니 ‘협의’가 성사하여 법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느니. 취중에도 입만 살아 개소리에 덧붙여 또, 그런 말까지 했다.  

“정 억울하면 소란이 것도 만지든가. 공평하게.”

16615902742621.jpg

  미쳤다. 대단한 평등주의자 납셨네. 어디서 공평을 찾아. 아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태 살아 있을까.

“흐어어.”

소란은 베개에 머리를 처박았다. 앞으로 막걸리 한 모금이라도 입에 대면 내가 우소란이 아니라 개소란이다. 그때 룸 문이 열렸다. 화들짝 놀란 소란이 침대에서 내려와 똑바로 섰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강호가 들어섰다. 호텔 내 피트니스 센터에 다녀온 듯 막 운동을 마친 모습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대표님.”

그를 향해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야. 알잖아. 내가 아닌 거. 형식적인 미소를 띤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번 호텔 숙박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지금은 뭔가, 굉장히 못마땅한 듯 화가 나 보이기도 하고. 기본적인 위압감이야 언제 봐도 엄청나지만, 지금은 또 마뜩잖음까지 더해져 소란은 쓸개까지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씻고 나올 건데.”

“아, 네, 씻으세요. 씻으셔야죠.”

“어디 가지 말고 있어.”

할 말이 있는 얼굴이다. 소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제 제가 했던 개소리에, 미친 손까지, 할 말 없는 편이 더 이상하다.

“네, 아무 데도 안 가겠습니다.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올 것이 왔다. 지금껏 폭발하는 성적 욕구로 인해, 그를 보며 비이성적으로 굴었던 저의 모든 미친 행각을 청산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강호는 소란을 싸늘히 쳐다보고 서 있다가, 이내 욕실로 휙 들어갔다. 소란은 밭은 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도망가진 않을 거다. 사실, 이곳 제주도도 이른바 도망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봤자 백강호의 손바닥 위였다. 그가 나타날 줄 정말 몰랐다. 호텔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제게 위치추적 장치를 심어놓은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딱 찾아올 수 있는지 신기했다. 아, 맞다.  

“대표님 아내분이셨군요. 계약 때문에 출장 내려오신 걸 못 기다리고 따라오셨나 봅니다. 하하.”

  어제 식당에서 나오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강호와 인사를 나누며 말했다.

‘출장지가 제주도였구나.’

이제야 깨달았다. 도망친 곳이 이미 그가 와 있던 곳이었다니. 위치추적은 무슨. 제가 강호를 쫓아온 거나 마찬가지니, 절 스토커 취급해도 할 말이 없다.

‘하필 그 많은 식당 중에 왜…….’

태석 선배도 참. 그렇게 강력추천하던 맛집이 하필 강호가 계약하러 간 식당이었다니 그 인연이 참 묘하다. 그건 그렇고. 소란은 창가로 갔다. 커튼을 젖히자 테라스 너머 푸른 바다가 보였다. 어제는 산, 오늘은 바다. 좋긴 좋구나. 그녀는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아침 햇살을 받은 바다가 반짝거렸다.

“너무 예쁘네.”

이토록 아름다운 정취에 사람이 홀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기분이 좋고, 행복해진다. 그를 보는 제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강호가 조금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술만 마시면 둑이 허물어지듯 경계심이 약해져 쉽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는 취기 따위에 휩쓸리지 않겠다. 정정당당하게. 맨정신으로. 나를 잠식해버린 이 욕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리라. 이렇게 도망만 다녔다가는 언제 더 심한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강호를 기다렸다. 담판을 지어야 했다. ◇ ◆ ◇ 홍찬규와 이연희 부부의 집.

“혹시 소란 씨는 집들이 얘기 안 해? 언제 한다는 그런 얘기.”

찬규는 아침 일찍 깬 서후에게 분유를 먹이며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는 세안 후 로션을 바르다가 돌아보았다.

“집들이를 하겠어? 한창 바쁠 텐데.”

“신혼집 구경하러 가고 싶은데. 크리스마스 때 하자고 하면 안 되나?”

연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더 안 되지.”

“아, 신혼인데 좀 그렇겠지?”

“그것보다, 소란이한테 크리스마스는 별로 안 좋은 의미야.”

“왜?”

남들 다 설레며 기다리는 크리스마스인데.

“그럴 일이 좀 있고. 그보다 오늘 연락해볼까? 거창하게 집들이 그런 거 말고 그냥 차 한잔하면 어떤지. 소란이도 주말에 우리 집 놀러 오고 했었잖아.”

오구오구, 분유 맛이쪄? 하며 서후와 눈을 맞추던 찬규가 대답했다.

“오늘은 안 되겠지. 제주도에 가 있잖아.”

“누가?”

“둘 다.”

“어? 소란이 제주도 간단 소리 없었는데.”

연희가 그럴 리 없다는 듯 말했다. 소란은 금요일 저녁만 해도 제게 전화해 주말에 뭐 하냐고 물었는데.

“아니야. 강호 지금 제주도에 출장 가 있는데, 소란 씨도 거기 있다고 했어. 어제 계약 잘했는지 저녁에 통화했거든.”

“그래?”

“소란 씨가 강호 보고 싶어서 따라간 거 아니야?”

“에이, 걔 그런 스타일 아니야.”

연희는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소란이가 얼마나 담백한데. 그 백진상이랑 사귀는 동안에도 철벽을 얼마나 쳤는지, 둘이 연인인지 친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니까. 백진상만 난리 치며 쫓아다녔지.”

“그런데 왜 사귀었대?”

“뜨겁게 불타올라야만 사귀는 건 아니지. 적당한 관계라는 게 있으니까. 게다가 소란이는 그 사이에 아버지 투병 생활도 있었고, 오빠 가게 도우면서 로스쿨 준비에, 공부에, 변시 준비에 뭐 바빴잖아.”

그때를 떠올리며 연희가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헤어질 타이밍이나 결정적 계기를 놓쳐서 계속 이어져왔던 것 같아. 소란이가 멀어지는 것 같으니까 백진상은 점점 더 다가오면서 그나마 거리를 유지했던 거고.”

“9년 사귀었대서 놀랐는데, 남들 같은 9년은 아니었던 거네.”

“그렇지.”

분유를 다 먹은 서후가 몸을 일으켜 달에 처음 착륙한 지구인처럼 힘차게 발을 떼었다. 한창 걸음마에 재미를 붙인 아기다.

“아구, 이뻐라. 아빠한테 오세요. 오구구.”

찬규가 팔을 활짝 열어 서후를 안았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연희가 말했다.

“그래서 소란이가 강호 오빠랑 결혼한 거 너무 신기해. 언제 둘 사이가 가까워졌는지도 궁금하고.”

“나도 그래. 강호 그 자식 여자한테 진짜 관심 없는데.”

“소란이도 누가 멋있는 남자 얘기해봐야 맞장구친 적 거의 없었거든.”

연희는 소란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혹시 넌 무성욕자가 아니냐고. 남자를 보며 간질간질한 그런 마음 절대 없냐고. 진상과 헤어진 후에도, 얼른 다른 남자 만나고 싶은 그런 생각은 안 드냐고. 그때마다 소란은 천하에 쓸데없는 소리라는 듯 흘려 넘겼다.  

“네가 백진상만 만나봐서 그래. 진짜 인연을 만나보면 지금까지의 나는 내가 아니었구나. 이런 게 천국이고 내가 살아 있는 이유였구나, 하게 된다니까. 속궁합이 괜히 있는 거 아니라니까. 겉이 아니라, 속이 착! 맞아야 하는 거라고.”

“알았고요. 관심 없고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남자 찾아보자니까. 너 이렇게 늙어 죽을 거야? 예쁜 몸 어디다 쓸래? 그 가슴 다 안 쓸 거면 나한테나 더 붙여주든가.”

  쯧쯧, 소란은 혀를 찼다.  

“겉모습만 보면 양갓집 규수가 따로 없는데, 너 이러는 거 찬규 오빠도 알고?”

“오빤 모르지. 사람은 언제나 의외의 매력을 가져야 하는 법. 내가 평소 조신해 보이니까 밤마다 침대에서 녹는 거 아니겠니.”

  세상 얌전한 외모와 다르게 연희는 입도 걸고 야한 소리도 잘했다. 소란은 그런 말에 적극적으로 맞장구쳐주거나 공감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강호와 죽고 못 살아 결혼해버렸다. 너무나 반갑고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론 의아했다. 핫뜨핫뜨 신혼부부. 그 불은 언제 타올랐는지.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 ◆ ◇ 연희는 의아해했지만, 지금 이 순간 소란의 욕구는 평생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진실은 단순했다. 남녀 간의 정염은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소란은 오직 강호만 보고, 강호만 생각하는 중이다. 그게 전부였다. 그를 만나기 전엔 몰랐던 세계다. 남자를 보고 가슴이 쿵쾅거리고, 만져보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 줄이야. 그러나 그 단순하고 명확한 사안으로 인하여, 현실이 꼬이고 복잡해지면 안 된다.

‘이성적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내가 이러면 자격 미달이라고 결혼을 없던 일로 하자거나.’

안 될 말이다.

‘상황이 나빠진다거나, 그만두자거나, 그러면 안 되니까.’

절대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소란은 생각했다. 현실도 단순하게 만들어버리자고. 이왕 도망가지 않고 직면하기로 결심하지 않았나. 피하지 않겠다. 남은 건 정면돌파뿐이다.  

“소란이 남편 몸 너무 좋잖아. 처음엔 이렇게까지 좋을 줄 몰랐는데.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거든요.”

  어젯밤, 가슴속에만 감춰두었던 말을 입 밖으로 줄줄 내뱉었다. 맨정신으로 못 할 말은 취중에도 해서는 안 되는데. 고로 취중에 했던 그런 얘기들, 멀쩡한 정신으로도 다 말해버리겠다 이거다. 미쳐버린 소란의 의지는 종내 활활 불타고 있었다.  

“안광이라고 하잖아요. 가만히 있어도 소란이 남편 눈에서 레이저가 막 나오고, 알죠? 호랑이 눈빛. 그게 되게 무서운데, 근데 또 하나도 안 무섭다? 무섭지 않고 그냥…… 섹시해. 눈빛이 아주 그냥 막 섹시해서 쳐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하나씩 돌아오는 기억은 이제 부끄럽지 않다. 맨정신으로도 말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역시 인생사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전까진 현실도피를 위해 철면피를 장착했다면 지금부턴 정면돌파를 위해 얼굴 거죽을 두껍게 하기로 했다. 그때 테라스 문이 열렸다.

“추운데, 들어오지.”

굳세게 결의를 다지느라 계절도 잊었다. 게다가 제주도 바닷바람은 또 얼마나 거센가. 얇은 트레이닝복만 덜렁 입고 있던 소란은 그제야 한기를 느끼며 얼른 안으로 들어섰다. 테라스 문 옆에 서 있던 강호와 바짝 닿았다. 여전히 커다란 덩치의 그는 태산 같았다. 이 사람을 상대로 내가 지금 무슨 싸움을 하려는 건지……. 소란은 옆으로 비켜서선 다시 용기를 내었다. 힘내, 용감한 오늘의 나야. 비겁한 어제의 나는 영원히 안녕. 새 삶을 시작하는 거야.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도 있어.”

아아. 당연히 있으시겠지만 제가 먼저 해야겠습니다. 그가 하는 얘기를 들어봤자다. 최악의 경우는 결혼 상대자 역할 박탈, 사정이 조금 나아봤자 경고 내지는 주의일 것이다. 강호의 처분은 이후에 듣는 게 훨씬 낫다. 달라진 나를 보여줄 테니까. 내가 먼저다.

“제가 드리려는 말씀부터 들어주세요.”

“……그래, 해봐.”

사형수에게 마지막 발언의 기회를 주는 느낌이랄까. 강호가 하는 수 없이 허락했다. 어쨌든 기회를 얻었으니 소란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어제 술 취해서 한 고백은 무효입니다.”

“고백?”

‘네가 언제 그런 걸 했지?’ 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고백이라면 고백이다. 그의 외양에 혹하는 마음을 전부 다 쏟아내었으니. 이제는 그걸 정리할 필요가 있다.

“네, 고백이요. 마음속에 있던 말을 모두 했으니 그게 바로 고백이죠.”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고백.

“그래서.”

“어제 한 고백은 전부 무효로 하고.”

그걸 무효로 하겠다니, 피하고 도망가는 거와 뭐가 다를까 싶겠냐만. 이다음부터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부분이다. 강호가 어떻게 받아들일진 모르겠지만. 모르겠다, 나는 지른다.

“지금부터가 유효합니다. 제 고백은.”

“고백?”

이번엔 ‘그걸 네가 지금 하겠다고?’ 하는 얼굴이다.

“네, 맨정신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오늘부터가 진짜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이든 꿋꿋하게 앞만 보며 나아가리라. 소란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강단 있는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가슴속을 가득 채웠던 바로 그 말을.

“제가 원하는 건, 대표님 몸입니다.”

강호의 눈매가 싸늘히 길어졌다.

“……원하는 게 뭐?”

잘못 들었나 싶겠지만 아니에요, 제대로 들으신 겁니다.

“몸이요.”

“…….”

“대표님 몸.”

미쳤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강호만 보면 어쩔 줄 몰라 했다. 술 취해 키스하겠다고 덤비고, 같은 침대에서 자자고 들이대고, 몸을 만져보면 안 되냐고까지 물었다. 물론 실제로 만지기도 했다. 그건 전부 망할 욕구 때문이다. 그의 몸에 정신을 홀딱 빼앗겨버린 탓이다. 본능이 단순하듯 현실도 단순하게 도식화해버리면 그만인 것을. 원한다. 그러니 요구한다. 될 때까지, 설득한다. 대단한 협상에라도 나선 듯 소란은 이 순간 매우 진지했다.

“대표님 몸을 원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