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예쁜 남편 여기 있는데2021.02.06.
“잠깐 얘기 좀 해.”
강호가 소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태석에게 다른 이들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뭐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차디찬 기운의 남자가 좌중을 압도하며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버렸으니, 끌려 나간 소란을 걱정하는 기색이다. 태석이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남편.”
“남편이요?”
갑작스러운 강호의 등장, 그리고 자연스럽게 둘이 나간 상황 자체가 태석은 가슴이 시렸다.
“응. 소란이 남편인데, 출장 갔다더니…….”
그제야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 씨가 그래서 일부러 제주도 온 거였구나. 남편이 출장 와 있어서.”
“그런데 만나기로 했다가 연락이 안 되거나 한 거 아니에요? 화난 것 같은데.”
“싸우는 건 아니겠죠?”
이해는 하지만 걱정이 남아 있는 상태. 태석은 두 사람이 향한 식당 입구 쪽을 묵묵히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정말 제주도에 일부러 내려온 거였나. 그때 다시 강호와 소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얘기를 끝마쳤는지 둘이 나란히 들어오는데…….
“깨가 쏟아진다, 우와.”
“신혼이라더니 역시.”
소란이 강호에게 팔짱을 끼고 찰싹 붙어 있는 게 아닌가. 본품과 별책부록인 줄.
“소란 씨 뭐야아. 남편 왔다고 기분 엄청 좋아졌네.”
활짝 웃는 그녀에게,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이에 소란이 눈을 반달처럼 휘며 살랑살랑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응, 소란이 남편 와서 너어어어무 좋…….”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호가 소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커다란 손은 입을 막았다기보다 소란의 얼굴 반을 가리는 느낌이다. 그렇게 그녀의 얼굴을 가려 말을 막더니 제 팔에 더 확 기대게 하는 게 아닌가.
“형, 내 와이프가 많이 취했네.”
“아아, 그래? 아깐 괜찮아 보였는데.”
내 와이프. 강호의 서늘한 목소리에 태석은 뜨끔했다. 남의 아내를 붙들고 술을 진탕 먹인 사람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분명 소란은 막걸리 한 병 정도는 마실 수 있다고 했고, 그녀가 비운 건 고작 반병 정도 될까. 눈웃음을 짓는 모습이 너무나도 예뻐 그저 기분이 좋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아니, 많이 마셨어.”
그러나 강호는 단언했다. 그래, 남편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태석은 애써 웃으며 일어섰다.
“너도 합석할 거지? 여기 앉…….”
“데려갈게.”
“그냥 간다고?”
그 순간, 소란이 강호의 손을 제 얼굴에서 떼어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남편이 데려가면 소란이 너어어무 좋…….”
또다시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이번엔 강호가 소란을 제 품에 확 껴안아버렸다. 태석은 흠칫 놀랐다. 무슨 말을 했는지 귀에도 들어오지 않고, 그저 강호와 소란이 딱 붙어 있는 모습만 제 눈에 아프게 박힌다. 탄탄한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소란은 딸꾹질을 하는지 어깨를 들썩했다. 강호는 그런 그녀를 한 팔로 완전히 안았다.
“먼저 데려가서 죄송합니다. 식사는 제가 대접하겠으니 편하게 드시고 가세요.”
“아, 네, 네.”
“네, 그러세요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건넨 강호는 다시 태석을 바라보았다. 먼저 자리를 뜨지만, 태석에겐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내 아내가 왜 제주도에 와 있는지. 그것도 외간 남자와 어울려 술까지 마셔가며 즐겁게 웃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용납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들른 식당이 여기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소란이 제주도에 와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제가 서울로 갔더라면. 그녀는 저 없는 제주도에서 내내 사랑스럽게 웃으며 시간을 보냈을 것 아닌가. 이렇게 다른 남자, 앞에서. 나만 봐도 모자란 이 얼굴을, 나만 들어도 모자란 이 귀여운 목소리를. 또 속이 부르르 끓어오른다. 강호는 식당에 미리 넉넉한 금액으로 계산해두며 주인과 인사를 마치고 소란을 데리고 나왔다. 렌트한 차 문을 열자 그녀는 순순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몽롱한 듯 내내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심히 위험했다.
“여기, 소란이 짐.”
태석이 따라 나와 그녀의 등산가방이며 겉옷 등을 건네주었다. 차에 올라 있는 소란을 두고 두 남자가 주차장에서 대치했다. 말 그대로 대치였다. 강호는 소란의 가방을 받아 든 채 싸늘한 눈으로 태석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기에. 태석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야, 아우, 뭔데, 나 잡아먹을 거 아니지? 너 눈 그렇게 뜨지 마, 진짜 무섭거든?”
“소란이 데리고 술 마시지 마, 앞으로.”
“뭐?”
강호의 단도직입적인 한마디에 태석이 표정을 굳혔다.
“그건 아니지. 회식도 있고 개인적으로 이런 자리도 있고 한데 어떻게 술을 아예 안 마셔.”
“…….”
“그리고 소란이가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애도 아니야. 나 쟤 취한 거 한 번도 못 봤거든. 자기가 알아서 다 조절해가며 얼마나 똑소리 나게…….”
갑자기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창턱에 얼굴을 내밀고 꽃받침을 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출발해여? 소란이 졸린데, 산에 갔다 와서 소란이 너무너무 피곤…….”
강호가 막아섰다. 태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못 들을 소릴 들은 양 의아해했다.
“지금 쟤 뭐라 그러는 거야? 소란이 뭐?”
설마 제정신으로 저러는가 싶은 얼굴. 강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소란을 가려 섰다.
“형은 신경 끄고 앞으로 얘랑 술이나 마시지 마.”
이렇게 귀여운 모습, 나만 볼 거니까. 시원하게 뻗은 눈매 끝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소란이 병’을 누릴 수 있는 건 온전히 남편뿐이라는 듯. 그게 남편의 특권이라는 듯. 콩깍지엔 답이 없다.
◇ ◆ ◇ 조금 전 강호가 소란을 데리고 식당을 나갔을 때. 넘치는 감정을 더 이상 누르지 못하겠다고 여긴 그때. 제 마음을 터트려 그녀에게 드러내야겠다 생각한 바로 그때.
“우소란.”
“…….”
“네가 따라와.”
아무것도 모르는 네게 맞춰 천천히 가는 것 따위 못 하겠으니, 이제 내 속도에 네가 맞추라고. 나는 그저 달려가야겠으니, 너도 걷지 말고 뛰어오라고. 제 속마음을 꺼내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소란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래?”
“어디로 따라갈까? 소란이 어디로 가면 돼요?”
반말과 존댓말을 자유자재로 섞어 구사하며.
“소란이 어디로 따라오라고 하든 다 따라갈게, 말만 해봐요.”
자신을 ‘소란이’라 지칭하기 시작했다. ……안다, 이게 무슨 신호인지. 난데없이 제주도에서 발견한 그녀가 태석과 함께 다정하게 술을 마시는 모습에 방금까지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이 모습이 미치도록 예뻐 죽겠으니 이 정도면 다른 의미의 ‘소란이 병’을 앓고 있는 게 자신 아닌가 싶다.
“우소란.”
“응, 소란이 여기 있지.”
대답은 찰떡같이 잘한다.
“취한 건가.”
“에이, 소란이가 왜 취해요. 소란이 하나도 안 취했어. 자 봐봐, 하아, 술 냄새 나? 많이 나요?”
소란이 그에게 바짝 붙으며 까치발을 들었다. 마치 강호의 얼굴에 음주측정기가 장착되기라도 한 양 그에게 훅 들이대면서. 아, 돌겠다. 정말. 들큰한 막걸리 냄새가 아니다. 사탕처럼 달콤하고 꽃처럼 향긋한 그녀가 송두리째 제게 스며들었다.
“잠깐.”
떨어져봐, 미치겠으니까.
“왜요. 소란이 술 냄새 나? 진짜 취했나?”
히잉, 실망한 얼굴로 그녀가 눈썹꼬리를 내려뜨렸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나. 다른 이의 눈에 어떨지 몰라도 제 눈엔 그랬다. 취하면 치사량 이상의 귀여움을 장착하는 우소란. 그녀를 아무한테도 내보이고 싶지 않다. 이런 부분에서 소유욕이 들끓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강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붙잡았다.
“일단 인사하고 가자.”
아무래도 얘기를 이어가기란 무리다. 게다가 한라산을 다녀왔다니, 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굉장히 피곤한 상태일 터다. 그러니 언제 취했는지도 모르게 훅 갔을 테고. 소란을 데리고 호텔로 가야겠다. 우선 좀 쉬게 해야겠다. 태석 일행과 인사를 나눈 후, 강호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식당에서 벗어났다. 소란은 그의 마음도 모르고, 생글거리며 조수석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이러고 있으면 정말 취한 줄 하나도 모르겠다. 그저 웃음이 많아진 것 말고는.
“하늘 너무 예쁘다. 바다 좀 봐요.”
졸리고 피곤하대서 바로 곯아떨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소란은 해안도로를 달리는 동안 경치를 보며 감탄했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
“소란이는 제주도 두 번째 온 건데, 두 번 다 태석 선배님이랑 왔거든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태석의 이름이 강호의 귀에 거슬렸다. 란이란이 우소란이. 석이석이 마태석이. 둘 사이에 그런 호칭이 자연스러운 것도 퍽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런데 뭐? 두 번 온 제주도가 전부 다 태석과 함께였다고?
“2년 전쯤 왔을 땐 로펌 입사 결정되면서, 태석 선배님 모임에서 한라산 가는 거 소란이도 따라온 거거든. 되게 좋았어요, 그때도.”
“…….”
“알잖아요. 태석 선배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진짜 잘 챙겨주고 너무 고마웠는데.”
“…….”
“그래서 일하면서도 일요일마다 태석 선배님 산에 가는 거 따라가는 거 되게 좋았어요. 매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란이는요, 태석 선배님이 어딜 가든 다 믿고 갈 수 있을 것 같…….”
“이젠 안 돼.”
딱 잘랐다.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부터는 안 될 말이다. 그녀의 곁에 있던 건 백진상만이 아니었다. 사람 좋은 마태석. 강호 역시 그를 형으로, 선배로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제 아내 곁에 있을 땐 상황이 다르다.
“왜 안 돼요?”
남자의 육감이랄까. 소란과 자신이 함께 있는 모습에 마치 상처받은 듯한 태석의 얼굴이 명치에 서걱 걸렸다. 그를 떠올린 강호는 좀 더 강경하게 나갔다.
“너 유부녀잖아. 외간 남자 믿고 따라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아, 맞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소란이 결혼했지!”
그래, 너 결혼했지. ……나랑.
“소란이 남편 여기 있는데.”
그녀가 손을 뻗었다. 어어.
“예쁜 남편 여기 있는데, 소란이가 가긴 어딜 가요.”
그녀의 보드라운 손이, 강호의 볼을 꼭 잡았다. 운전대를 잡은 강호는 너무도 황당하고 기가 막혀 전방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내 볼 꼬집은 거야, 우소란?
“소란이는 남편만 꼭 따라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았죠?”
강호가 굳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잡은 볼을 흔들기까지 했다. 맨정신이 아닌 건 알았지만……, 또 선을 넘는구나. 술이 깨어 이걸 떠올려내면 또 도망가버리려나. 이젠 그리는 안 될걸.
“약속했다.”
기억해.
“나만 꼭 따라온다고.”
절대 안 놔줄 거니까. ◇ ◆ ◇ 막걸리의 위험성은 익히 경험한 바가 없었다. 다만 소란은 연희와 마셨을 때 막걸리 한 병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 그래서였다. 한라산 등반을 마친 후 일행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스스로 한 병을 마지노선으로 정했다.
“아아……. 머리 쪼개질 것 같다…….”
소란은 눈을 반쯤 뜨면서 겨우 일어나 앉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절경이었던 백록담을 바라보고, 산 정상에서 김밥과 초콜릿 바까지 먹었지만 오후가 되자 허기가 밀려왔다. 김밥은 간식으로 치고, 늦은 점심을 먹자며 태석이 추천하는 맛집에 우르르 몰려갔다. 반주로 막걸리를 곁들인 건 당연했다. 신이 났다. 낙오 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산행을 마쳤고,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을 실컷 눈에 담아 그녀는 기분이 꽤 좋았다. 정신없이 몰아친 일정에 몸이 힘든 것도 괜찮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강호에 대한 생각으로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돼 매우 홀가분했다. 그런데 먹고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 술이 확 올라왔다. 반병 정도 마셨을 때인가. 뭐지, 제주도 막걸리는 더 빨리 취하나. 몸이 너무 피곤해서 생각보다 취기가 빨리 올랐나. 그렇게 생각했을 땐 이미 늦었다. 그런데.
“응, 소란이 남편 와서 너어어어무 좋…….”
“소란이 결혼했지!”
“예쁜 남편 여기 있는데, 소란이가 가긴 어딜 가요.”
잠에서 깨자마자 훅 치고 올라오는 기억의 편린. 헙. 설마 나 또. 소란은 서둘러 옷을 확인했다. 잘 때 입으려고 가져왔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다. 비교적 멀쩡한 차림이다. 후, 안도의 숨을 내쉬며 두리번거렸다. 그는 보이지 않는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이곳은…… 어느 호텔 룸이고. 제가 전날 묵고 체크아웃했던 호텔은 분명 아니다. 태석, 일행들과 즐겁게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한 기억에 이어진 건 난데없는 백강호의 등장. 그리고 그를 반기던 자신.
‘하아……, 술만 마시면 어떻게…….’
그를 향해 바보처럼 헤벌쭉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어진 ‘소란이 병’이야 말해 뭐 해. 그러니까 어찌 된 일인지 그 자리에 갑자기 강호가 나타나 자신을 데리고 나왔는데. 차에서 잠이 들었던가. 아니지, 그래. 호텔에 걸어 들어온 기억이 있다. 체크인을 하고, 룸에 들어오고……, 여기 아마 오션뷰였던 것 같은데. 그래. 또 기억난다, 기억나. 씻고 나온다며 그에게 기다리라고 하고서. 다행히 어제 잘 때 입었던 트레이닝복이 있어서 그걸로 갈아입고서. 그리고 그를 앉혀놓고 얘기 좀 하겠다고…….
“헐.”
나 뭐라고 했더라. 분명히 진지하게 대화를 좀 해보려고 했는데. 정작 그와 마주하니 정신이 나갔는지 대화는커녕 엉뚱한 질문부터 했다.
“한 번만 만져봐도 되냐고…….”
으악. 소란은 제 손을 들며 기함했다. 이 손으로 무슨 짓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