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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욕구를 자극하는 행위 (26/112)

#26화. 욕구를 자극하는 행위2021.01.30.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으니 피를 본 건 불가피했다. 소란은 애플힙의 마수에 빠져, 넋 놓고 사과를 깎다가 엇나간 칼날에 그만 손을 베고 만 것이다. 사과를 받치고 있던 왼손의 엄지였다. 깎아나간 껍질보다도 붉은빛의 피를 보니 가슴이 선득했다. 그릇을 내려놓고 단숨에 저벅저벅 다가온 강호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방금까지 애플힙이니 뭐니 그의 엉덩이를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곱씹었던 소란은 도둑놈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빼려 했다. 그는 왜인지 불쾌한 얼굴로 손목을 더 세게 그러쥐었다.

‘설마 내 불순한 사상을 다 알아버렸나.’

소란이 찔리는 마음에 그에게서 손목을 빼려 안간힘을 쓰는데, 강호는 더욱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쳤잖아.”

“아, 네. 다 제 불찰…….”

헙. 말을 하다 말고 소란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베인 손가락이 강호의 빛깔 좋은 입술 사이로 먹히듯 빨려 들어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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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대표님, 그게.”

아아. 이건 아니죠. 소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의 세포는 다 죽고 제 엄지만 살아 있는 기분이다. 예민한 손가락 감각은 그의 입술과 그 안쪽 촉감까지 다 생생하게 느껴버린 상태. 붉게 흐르는 피가 그의 입안에서 멎는 동안 소란은 애꿎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미친다, 진짜.’

시간이 멈추고 몸은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제 손목을 쥐고서 손가락을 머금어 빨고 있는 그의 입술이 섹시하다 못해 지나치게 색정적이라서 정신이 혼미해질 뿐이다. 소란은 잠시 떴던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보지 말자, 차라리. 자칫 이 모습을 각막에 박제라도 했다간 제2의 애플힙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의 입술을 볼 때마다, 제 엄지를 볼 때마다, 지금이 떠오를 테니까.

“피는 멎었는데.”

뜨끈한 느낌이 사라지고 소란의 엄지는 그의 입술에서 빠져나와 공기에 노출되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또 길게만 느껴진 시간이었다.

“잠깐 그대로 있어.”

강호가 그녀의 엄지를 무심한 눈으로 살피는가 싶더니 손을 놓고 돌아섰다. 소란은 참았던 숨을 겨우 내쉬며 제 엄지를 바라보았다. 벼린 칼날에 베인 살에서 전혀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마음이 컸다. 약상자를 가지고 돌아온 그가 다시 소란의 손을 쥐었다. 먼저 소독패드를 꺼내 상처 부위를 닦아주려는데 소란이 난감해하며 입을 뗐다. 도둑놈에게 밥 먹고 가라며 상 차려주면 이런 기분이 들까. 괜히 미안해졌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그냥 있어. 귀찮게 하지 말고.”

“대표님이 이렇게 움직이시는 게 오히려 귀찮으실 텐데요. 주세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우 변호사는 말이 많아서 변호사가 됐나, 변호사라서 말이 많나.”

소란이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변호사 비하 발언입니다.”

강호는 무정하게 내리깐 눈으로 그녀의 엄지에 상처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그러고는 소란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변호사 비하한 적 없어. 내가 변호사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 순간, 우소란 변호사의 가슴에는 때아닌 봄바람이 일었다. 들었다 놨다 이 남자 정말 안 되겠네. 그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을 텐데, 욕망의 롤러코스터에 몸을 싣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에 소란은 딱딱한 태도를 유지했다.

“직접 지혈에 상처 치료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표님.”

“얘기해.”

“다음부터는 지혈한다고 아까처럼 입으로…… 음, 그런 행동은 지양해주셨으면 해요.”

“입으로?”

“네, 입으로 빠는.”

어감이 묘하지만 아무튼 사실이 그러하니까.

“입속 세균이 상처를 통해 혈관으로 침투해 2차 감염이 일어날 수도 있어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행동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내 손가락 막 입에 넣고 그러지 말란 말이에요. 2차 감염이고 뭐고 나 심장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렇군. 반사적인 행동이었어.”

“아무래도 의식 없이 반사적으로 하는 행동이 가장 위험한 법이죠.”

그게 욕구를 자극하는 행위라면 더더욱.

“앞으로 주의하지.”

“네, 주의 부탁드립니다.”

소란은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본능을 경계하라. 모름지기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으로서 이 정도 상식은 있어야 했다. 하물며 피를 보는 지경까진 가지 말았어야지. 소란은 오늘과 같은 실수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 ◇ 며칠째 소란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강호는 출퇴근 전후로 수면 시간 빼고는 전부 1층에 머물렀지만 그녀를 볼 순 없었다. 아침식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꼭 일찍 나와 식사 준비를 돕곤 하던 소란이 자취를 감췄다. 그녀가 사과를 깎다가 손을 베인 바로 다음 날부터였다.

“오늘 오후에 출발하는 거야? 제주라고 했지?”

휴게 공간에서 만난 찬규가 강호에게 일정을 확인했다. 새로운 거래처 계약을 위해 출장이 예정되어 있다.

“응. 오후에.”

“내일 토요일인데 너 출장이라서 제수씨 엄청 서운하겠다. 지난 주말도 일만 했다며. 신혼 초에 너무한 거 아니냐.”

내 말이. 강호는 아무도 모를 답답한 한숨을 홀로 삼켰다. 일하느라 바쁜 건 소란이 더했다. 무슨 놈의 로펌이 애를 데려다 탈탈 털어 부려먹는지. 소란은 밤낮이고 주말이고 정신없이 일하느라 여유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오늘 저녁이랑 내일 오전에만 일 처리하면 되는 거 아니야? 소란 씨랑 같이 가지. 간 김에 놀고 오면 좋잖아.”

내 말이. 마음 같아선 정말로 소란과 함께 제주도에 가고 싶다.

“다음 주 초면 곧 크리스마스인데, 중간에 휴가 내서 그냥 쭉 같이 보내고 오면 안 돼? 결혼 후 첫 크리스마스잖아.”

진짜 내 말이. 하지만 할 말이 없다.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크리스마스는 무슨.”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소란을 만나야 제주도를 가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든, 말을 할 것 아닌가. 바람이라도 쐴 겸 같이 가겠냐고 물으려 해도 틈이 없었다. 어젯밤에도 전화를 걸었더니 소란은 일이 너무 많아 늦게 들어간다는 말만 하고 급히 끊었다. 심지어 자신이 출장 간다는 얘기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강호는 생각난 김에 다시 소란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갔다. 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설마 일부러……는 아니겠지.’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정말 아닐까.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봤던 때가 자꾸 얹힌 듯 마음에 걸렸다. 새빨간 피가 흐르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고 반사적으로 입에 가져갔다. 보드랍고 조그마한 엄지가 제 입에 들어오는 순간, 피를 멎게 하려던 의도와 다르게 나쁜 생각이 들끓었다. 이대로 여린 피부를 핥아 낱낱이 맛보고 싶단 마음. 그러나 그녀는 언짢은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우 이성을 되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려던 거지. 약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치료해주고 난 후 그녀는 말했다.  

“입속 세균이 상처를 통해 혈관으로 침투해 2차 감염이 일어날 수도 있어서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행동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차 싶었다. 그녀의 피를 본 순간 사고가 마비되어버린 탓에 실수를 저질렀다.  

“아무래도 의식 없이 반사적으로 하는 행동이 가장 위험한 법이죠.”

  그 한마디가 쇠창살처럼 날카롭게 제 심장에 꽂혔다.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 그녀에게 선처란 없었다. 벌을 내리듯 소란은 제 눈앞에서 멀어져버렸다. 얼마나 일찍 나가고, 얼마나 늦게 들어오는지 정확한 시간마저 알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현관 앞에 지켜 서 있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그녀가 기함할 것이다. 소란은 백진상의 스토킹에 몸서리치지 않았던가. 그와 똑같은 수준으로 굴 순 없다. 그래서 강호는 애타는 마음을 달래며 평소 그대로 움직여왔다. 그녀와 다시 마주할 날을, 그럴 기회를 기다리면서.

[오늘 출장 가. 내일 돌아올 거야.]

결국 강호는 그녀에게 담백한 문자를 보냈다. 한 시간이 지나고야 답신이 왔다.

[지금 확인했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아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경직된 말투. 소란은 여전히 제게 벽을 치고 있다. ◇ ◆ ◇ 강호는 회사에서의 오후 일정이 조금 일찍 끝나 예정보다 빠르게 공항으로 향했다. 비서인 김상현 실장이 차를 운전했다. 출장은 혼자 가지만 공항까지는 김 실장과 동행하기로 했다. 태블릿으로 자료를 정리하던 강호는 문득 쭈뼛 머리카락이 솟는 것 같았다.

“……신분증.”

강호가 중얼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 뒤져보았지만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에 탑승하려면 신분증이 필요한데.

“회사에 두고 오신 거 아닙니까? 차 돌릴까요?”

김 실장의 말에 강호는 기억을 찬찬히 되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회사는 아니고…….”

집에서 출장용 짐을 간단히 챙기면서 욕실 앞 드레스룸에 지갑을 두고 온 게 분명했다.

“집입니다. 잠시 집에 들르죠.”

“아, 네. 시간은 충분할 것 같네요.”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이다. 김 실장은 강호의 신혼집으로 차를 돌렸다. ◇ ◆ ◇

[오늘 출장 가. 내일 돌아올 거야.]

강호의 문자를 받은 소란은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변호사협회 연수가 있어 마치고 난 후 모처럼 일찍 퇴근했다. 안 그래도 오늘 연수 후에 다시 사무실에 돌아가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했는데 잘됐다 싶다. 며칠간 강호를 피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하아, 집 좋다…….”

간만에 마주한 신혼집은 정말 최상의 환경이었다. 이렇게 안락한 공간을 놔두고, 새벽 별 보며 출근해 밤하늘 별 보며 퇴근했던 지난 며칠이 새삼 눈물겹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모두 자업자득. 사심 가득한 이 가슴으론 도저히 강호를 마주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러지 말자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눈앞의 강호를 보면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홀리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그 남자를 어떻게 당해내. 안 보는 게 상책이지. 그러니 강호가 출장을 가서 내일 온다고 하는 말이 반갑기만 했다. 모처럼 집에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목욕해야겠다.”

가장 절실한 건 거품 목욕이다. 그간의 피로가 싹 가실 거란 생각에 가슴이 설렐 정도로 좋았다.

“맥주도 있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한 캔 꺼낸 소란은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에 들어갔다. 목욕 후에는 치킨 한 마리 시켜서 이 즐거움을 이어가야지. 소란은 넓은 욕조에 물을 틀었다. 물을 받는 동안 샤워 먼저 하려 옷을 벗었다. 그리고 샤워부스에 들어가 물을 트는데…….

“앗, 차가워.”

분명 온수를 틀었는데도 물이 차가웠다. 시간이 좀 지나야 하나 싶어 기다려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욕조로 가서 바닥에 찰박찰박 깔리기 시작한 물에 손을 담가보니 역시나 차가웠다.

“온수에 문제가 생겼나…….”

으슬으슬 금세 추워졌다. 소란은 얼른 두툼한 샤워 가운을 걸쳤다. 씻다 말 수도 없고. 그녀는 제 방 안쪽에 있던 욕실에서 나와 1층 주방 옆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부스만 있는 욕실이라 거품 목욕을 할 수 없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찬물만 나오는 게 아닌가. 1층만 그런지 집 전체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떡하지…….”

고민은 잠깐이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금 집에는 나 혼자인데.”

소란은 입술을 앙다물고 결심을 굳혔다. 강호도 매일 1층에 드나드는데 나라고 2층에 못 갈 건 뭔가. 처음 집 구경할 때를 제외하고는 2층에 간 적이 없지만, 지금은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중문을 열고 계단으로 나왔다. 꽁꽁 여민 가운 아래로 휑하니 바람이 통하는 게 어쩐지 허전했지만 그래도 뭐, 혼잔데 뭐. 가운 하나 걸친 소란은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실내로 들어가는 중문은 자동문이었다. 그 앞에 서니 마치 알리바바의 동굴 문을 여는 듯 신비로운 기분이다. 열려라, 참깨. 고소한 주문을 떠올리며 그녀는 안으로 들어섰다. 강호의 세간이 다 들어온 2층은 비어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깔끔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이 물씬 풍겼다.

“……집 구경할 때가 아니지.”

주인이 없으니 주인이 남기고 간 향기에 홀리고 앉았다. 소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2층 서재 옆 욕실에 들어갔다. 세면대 수도꼭지를 돌리자 곧 온수가 콸콸 쏟아졌다.

“뭐야, 여긴 따뜻한 물 나오네.”

1층에만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 업자를 불러 수리하고 목욕을 한단 말인가. 다 벗고서 이미 찬물 한번 끼얹었던 몸인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따뜻한 물에 몸은 담가봐야 하지 않을까. 이 욕실엔 1층과 마찬가지로 샤워부스만 있다. 2층에도 강호가 쓰는 메인 침실 안쪽에는 욕조가 있는 욕실이 있다.

“……실례합니다.”

소란은 아주 조심조심 그의 방에 들어섰다. 완전범죄를 위해. 목욕 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나오겠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강호의 향기가 잔뜩 어린 방을 통과해 드레스룸을 지나 안쪽 욕실로 들어갔다. 넓은 욕실 안 새하얀 욕조가 자신에게 들어오라 반기고 있다. 혹시나 하고 얼른 물을 틀어보니 역시나 따스한 물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이거지, 이거야.”

구조가 같으니 소모품이 보관된 욕실장도 어렵지 않게 열 수 있었다. 배스밤이 들어 있는 서랍 위치도 같았다.

“두 개만 쓰고 이따 채워놓겠습니다.”

소란은 물이 떨어지는 아래에 거품 입욕제를 넣었다. 목욕하고 청소하고 환기하고, 그러면 하루 지난 내일은 그 어떤 흔적도 없이 뽀송뽀송한 원래 모습 그대로 강호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좋아, 완벽해.”

느낌이 아주 좋다. 오늘은 꽤 근사한 휴식이 될 것만 같은 예감. ……은 개뿔. ◇ ◆ ◇ 삼십 분 후. 샤워를 마친 후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돌돌 말고, 따뜻한 물속에 앉아 한쪽 다리를 길게 뻗으며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꺄아아아아악!”

미친 듯 소리를 질러야 했다. 출장을 가서 내일 온다던 남편이 욕실에 들어선 까닭이다. 물 밖에 드러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려주는 건 거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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