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사과가 너무 야해2021.01.26.
“왜 상관이 없어. 엄연히 말하면 그 애, 내 처조카가 되는데.”
나린은 눈에 띄게 당황했고, 강호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형님은 전혀 모른다는 거잖아, 지금 네 상황.”
“시끄러워. 형님이고 뭐고, 네가 신경 쓸 일 아니거든? 그리고 내가 언제 그 사람이 맞다고 했어? 어영부영 넘겨짚지 마.”
나린은 절대 아니라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 사람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럼 다행이고.”
너무나도 사람 좋은 성준 옆에 계나린이 서 있는 그림이라니. 안 될 일이다. 절대로. 그런데 정말 아빠에게 아이의 존재도 알리지 않고 혼자 낳아서 키울 생각인가. 그때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본 강호는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럼, 이따 기획팀 회의는 오후에 시간…….”
하지만 나린은 톡톡 쏘아댔다. 제대로 끝맺지 않은 얘기, 어디서 마음대로 밑장을 빼냔 식이다.
“됐고, 너 어디 가서 입도 뻥긋할 생각 마. 걸리면 진짜 가만 안 둘 거니까. 나 임신했단 소리 내가 먼저 하기 전까진 아무한테도…….”
툭. 뒤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린이 경직했다. 하아, 강호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나 아니다. 네가 얘기했다.
“……누가 뭘 했다고?”
찬규의 놀란 음성이 이어졌다.
“계씨가 임신을?”
나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소리냐고. 계씨가 왜 임신을 해. 야, 너 남친 있었어?”
찬규가 다가와 묻자 나린은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뗐다.
“했어, 그래. 하긴 했는데.”
“헐, 대박. 누군데, 아빠가 누군데. 아니,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그나마 앞에 형님 어쩌고는 못 들었나 보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다.
“어차피 나중엔 다 얘기해야 할 거, 너 하나 좀 일찍 안다고 뭐 문제 있겠냐. 다른 직원들한테나 얘기하지 말…….”
그러다 나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강호와 찬규의 모습에서 뭔가 또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어쩐지 등골이 서늘하다. 나린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헙.
“저희는 아무것도…….”
“못 들, 못 들었습니다, 전혀 못 들었어요.”
찬규가 총괄하는 개발팀 직원들이 문가에 서 있다가 난감한 얼굴로 어버버 말했다. 망했다. 계나린의 임신 사실은 이제 회사 전체가 공유하게 된 거나 마찬가지다.
◇ ◆ ◇
“임신이라니, 계 팀장님 이게 진짜 무슨 일이래.”
“백 대표님이 갑자기 결혼해서 혹시나 했는데, 그쪽이 아니라 엉뚱한 쪽에 임신 소식이 있었네.”
“진짜 대박이야. 팀장님 남친 본 적 있어?”
“난 상상도 안 간다. 계 팀장님 남친이라니.”
점심시간. 식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직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잡담을 나눴다. 오늘 회사를 강타한 계나린의 임신 소식이 주된 화제였다.
“아마 카리스마는 팀장님보다 더한 분일 것 같아.”
“그렇지 않고야 계 팀장님을 휘어잡을 순 없지. 우리 같은 사람은 눈도 못 마주치는 거 아니야? 와, 너무 궁금하다.”
“보연 님, 신호 님, 채미 님.”
그때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직원들이 돌아보았다. 쭈쭈바를 물고 선 찬규가 싱긋 웃었다.
“계 팀장이 자기 얘기 하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걸리면 책임 못 져요.”
장난스러운 경고에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주의할게요. 너무 궁금해서 그만.”
“그런데…….”
직원 하나가 찬규에게 붙어서 소곤소곤 물었다.
“홍 대표님은 아세요? 계 팀장님이랑 결혼하실 분.”
나도 모른다며 어깨를 들썩하던 참이다.
“누가 결혼한대요?”
나린의 목소리. 다들 참고서비라도 빼돌리다가 딱 걸린 학생처럼 흠칫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찬규와 같은 쭈쭈바를 문 나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옆엔 막대사탕을 입에 문 강호가 역시나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우뚝 서 있고. 먼저 들어온 찬규를 따라 이들도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임신했으면 다 결혼하나? 식상하네.”
“보통은 너 빼고 다 식상하게 살아.”
강호가 되받는데도 나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남친 없고, 결혼 안 해요.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추측하지 말고 질문 있으면 나한테 직접 해줬으면 좋겠어. 아예 관심 안 가지면 더더욱 좋겠고요.”
“그럼 팀장님 애는 어떻게 하실 생각…….”
“내 애, 내가 낳고 내가 키울 건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나린이 당당하게 나오니 오히려 걱정해줄 말이 없다. 그녀에게 이 문제는 지극히 단순해 보였으니까. 물론 그러기까지 나린이 겪어야 했을 마음고생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겠지만.
“그렇죠. 문제 안 되죠.”
“팀장님 아이니까 팀장님 뜻대로 하시는 게 당연해요.”
“화이팅입니다!”
직원들은 저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응원뿐이란 것도 알았다.
“고마워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도도하게 인사를 건넨 나린은 쭈쭈바를 쭉 빨며 안으로 들어갔다. ◇ ◆ ◇ 소란은 외근을 다녀오느라 미처 점심을 먹지 못했다. 로펌에 들어가려는 길에 옆 건물 샌드위치 가게에 간 그녀는 주문한 음식을 받아서 창가 바 테이블에 앉았다. 한숨 돌리며 음료를 마시니 좀 살 것 같다.
“겨우 휴가 하루 썼다고 엄청 바쁘네.”
갑작스러운 결혼식 여파로 한동안은 고생 좀 할 듯하다.
“게다가 곧 크리스마스고.”
소란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며 유리창에 붙은 장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출입구 옆엔 화려하고 커다란 트리까지 있다. 매년 이맘때면 느낄 수 있는 분위기에 소란은 조금 침울해졌다. 한편 태석은 로펌 건물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오자마자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무심코 옆을 돌아보다가 인도 너머 샌드위치 가게에 앉아 있는 소란을 발견했다. 거짓말처럼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모습. 그는 신호가 바뀌자 횡단보도를 지나쳐 바로 그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일정까지 미루고 바로 1층으로 올라온 태석은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섰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 선배님.”
“우 변 여기서 뭐 해?”
“뭐 하긴요. 점심 먹죠.”
소란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커피를 사 온 태석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선배님은 드셨어요?”
“나는 먹었어. 우 변 보이길래 들어온 거야.”
우연으로 가장하지 않았다. 그건 태석의 스타일이 아니니까.
“혼자 심심했는데 잘됐다. 빨리 먹고 들어가야 하긴 하지만요.”
“천천히 먹어. 맨날 바쁜데 밥이라도 느긋하게 먹어야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대표변호사님이 그런 말씀 하시니 신빙성 하나도 없고 좋네요. 일 무더기로 얹어주시는 분이 누구시더라.”
“누구냐, 그놈. 악덕이네.”
소란이 풋 웃으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역시 태석과 있으면 즐겁고 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고 보니 결혼식부터 어제 호텔 숙박, 아니 오늘 아침식사까지. 강호와 있는 동안은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들. 거기다 결혼식 뽀뽀, 풀장에서의 포옹, 기억조차 없는 키스, 한 침대에서 맞이한 아침까지. 아악. 소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할수록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질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할 일 다 하고, 없는 일까지 만들어서 하고, 사무실에 오래오래 머물다가 집에는 느지막이 들어가야겠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태석의 걱정에 소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배가 고팠다가 갑자기 막 먹어서 속이 안 좋은가.”
소란은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음료를 마셨다.
“소화제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괜찮아요.”
소란은 가슴 위를 주먹으로 콩콩 치며 말했다. 차라리 그 생각을 하지 말자. 화제를 돌리자, 하고.
“선배님은 결혼 생각 없으세요?”
“결혼?”
“네. 인기도 엄청 많으시면서.”
순간 태석은 마음 한구석에 바람이 스친 듯 무척 허해졌다. 좋은 부모에, 좋은 집안에, 좋은 머리에, 좋은 성격, 거기에 좋은 운까지. 제법 훤칠한 외모와 넉넉한 재산까지 빠지는 것 하나 없는 삶, 나름 즐기면서 살아왔다. 인생 참 꿀잼이었다. 베푸는 게 많으니 적이 없고, 모난 데가 없으니 사람이 많이 따랐다. 그러니 오히려 여자 생각이 없었다. 한 여자에게 안주하기보다 마음 맞는 여러 지인과 취미를 즐기며 지내는 게 더 좋았다. 물론 자타공인 ‘마성의 태석’ 아니던가. 마태석을 짝사랑하는 이들은 여럿 있었지만 깊은 관계로 발전된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이상한 감정을 느낀 건 최근이었다.
‘소란이가 결혼을…….’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태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갑갑증에 시달렸다. 분명 소란은 아끼는 후배이자 동생일 뿐이었는데. 게다가 오래된 남자친구도 있었고. 그러니 이성으로 본 적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소란과 강호의 결혼을 알게 된 후 뒤통수에 피가 쏠리고 속이 갑갑해 내내 고생했다. 마침내 지난 주말 그녀의 결혼식에서 알아버렸다, 제 감정의 발원을.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다른 남자 옆에 서 있던 소란을 향한 제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그래서 너는 결혼하니까 좋아?”
“네? 하하, 며칠이나 됐다고……, 아니, 좋습니다. 너무너무 좋아요. 선배님도 얼른 결혼하세요. 결혼 강추!”
한없이 행복한 얼굴로 엄지를 치켜드는 너.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데.”
“어, 음……. 밤에 헤어지기 싫은데 같이 있을 수 있으니 너무 좋죠.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볼 수 있으니까 그것도 좋고. 뭐…… 다 좋아요.”
볼이 발그레해져서 좋은 점을 줄줄이 읊는 너.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백강호랑 결혼한다?”
“어우, 당연하죠. 백번 태어나도 백번 강호 씨랑 결혼하죠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너.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린 너. 뒤늦게 깨달은 사랑 따위 흔적도 없이 내버리라 말한다. 감히 욕심내지도 말라고. 이미 끝났으니 가슴이 찢겨나갈 듯 아파도, 소용없다고.
“잘됐네. 행복한 거 보니까 좋다. 우리 란이란이 우소란이.”
그것만은 진심이다. 태석은 아픈 속내를 감추며 활달한 목소리로 소란을 축복해주었다.
“강호가 울리거나 속 썩이면 꼭 얘기해. 머리카락 하나 안 남기고 다 뽑아버릴 거니까.”
물론 그것도 진심이다. 소란은 선배님 진짜 웃긴다며 까르르 웃었지만 태석에겐 농담이 아니다. 그녀의 눈에 눈물 나는 날, 강호를 꼭 대머리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해보지도 못한 사랑은 끝일지 몰라도, 태석의 가슴앓이는 이제 시작이다. ◇ ◆ ◇ 신혼부부의 아침식사는 계속됐다. 아침마다 강호가 밥을 차려줬고 소란은 그 상을 받았다. 모든 게 다 좋았다. 주방에서의 백강호가, 풀장이나 침대 위에서보다 훨씬 섹시하다는 문제점만 빼면. 특별히 대단한 요리를 하는 게 아닌데, 셔츠 소매를 걷은 그만 봐도 소란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잘게 쪼개진 근육의 움직임이 너무나 잘 보였기에.
‘그래, 남자 팔근육은 칼질하라고 있는 거지.’
훔쳐보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수저를 놓는 소란의 눈은 자꾸만 그에게로 향했다. 특히나 힙업 운동을 완전 제대로 하는지, 앞치마를 두른 허리끈 아래로 올라붙은 엉덩이가 마치…….
“사과?”
“그렇죠, 사과 너무 좋……, 네?”
“사과 먹을 거냐고.”
막 돌아본 강호가 탐스럽게 익은 사과를 손에 들고 있다. 소란은 정신을 차리고 과도를 챙겼다.
“아, 네. 제가 깎겠습니다. 주세요.”
아침 사과만큼이나 좋은 아침 엉덩이에 홀려 또 넋을 잃고 있다.
‘난 지옥 갈 거야. 남자를 몸으로만 보다니.’
소란은 제 적나라한 흑심을 마주할 때마다 자괴감을 느꼈다.
‘이러지 말자, 우소란. 제발 정신 차려.’
부딪히지 말고 살았어야 했는데. 이럴 줄 알아서 조심하려고 했는데. 어느덧 매일 아침 얼굴을 맞대고 밥까지 같이 먹고 있으니 제 마음속에 무럭무럭 자라나는 흑심의 나무는 울창한 숲을 이루고야 말았다. 그나마 강호도 일이 바빠 퇴근이 늦고, 자신 역시 매일 야근을 자처하니 아침만 견디면 되었다. 그는 소란에게 사과를 건네고는 그릭요거트에 갖가지 견과류를 토핑했다. 오늘의 메뉴는 연어 샐러드와 요거트, 사과였다.
‘이렇게 양질의 아침식사를 매일 제공해주시는데, 나는 불순한 생각이나 하고 있고. 욕구불만도 아니고 뭐야. 정신 나갔어, 정말.’
아무리 반성해도 모자란 아침이다. 소란은 애써 경건한 마음으로 강호가 건네준 빠알간 사과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붉은 껍질이 삭삭 벗겨지고 사과의 흰 속살이 점점 드러나자 소란의 심장은 더 크게 쿵쿵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야한 건데.’
미쳤나 봐, 진짜. 사과가 너무 야해. 둥근 사과에 자꾸만 그의 튼실한 허벅지 위 엉덩이가 겹쳐지는데, 이 정도면 병인가 싶다. 소란이 병에 이어 엉덩이 병까지 생긴 거야? 이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죄는 호텔 풀장에서 촤악, 물을 떨어뜨리며 몸을 드러냈던 강호에게 있다. 수영 팬츠를 입은 엉덩이의 탐스럽고도 차진 윤곽이 소란의 눈에 다이렉트로 박혔으니,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냐는 말이다. 이래서 애플힙, 애플힙 하는구나. 그게 괜히 있는 표현이 아니었다.
동그랗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보고 소란 역시 사과를 연상한 건 당연한 일, 지금 그녀의 손에 있는 속살을 드러낸 사과가 야하게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아얏!”
그때. 기어이 야한 사과가 일을 냈다. 툭! 반쯤 껍질을 벗겨낸 사과가 떨어졌다. 소란의 왼쪽 엄지 아래, 과도에 베인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를 본 강호가 살벌한 눈빛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