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신혼의 시작은 침대에서2021.01.16.
소란의 머릿속엔 현장을 떠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자신은 슬립 차림에, 옆엔 상의를 벗은 채 엎드려 누워 있는 백강호라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소란에겐 이 순간이 재난 영화급이었다.
“너 절대 취할 정도로 마시면 안 돼. 아니다. 그냥 마시지 마.”
연희의 협박과 부탁이 술자리마다 이어졌다.
“누구 하나 살인죄로 잡혀가는 꼴 본다, 정말로.”
자신이 죽는 건 둘째치고 누군가를 살인자로 만들 수도 있는 주사라고 했다. ‘소란이 병’. 소란이 워낙 술을 잘 마시지 않고 조심해 주변에서 그 주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연희에게만 그 추태를 몇 번 보였다. 연희는 너무나 재수 없으니 부디 자중해달라고 했다. 진짜 살인 충동 불러일으킨다면서.
“네 사정은 알겠는데, 그래도 하지 마. 제발 좀 하지 마.”
마치 유아기에 있는 아이처럼 스스로 이름을 부르는 그 주사는 사실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시작되었다.
“우리 소란이 잘 다녀왔어?”
“소란이가 웃으니까 아빠도 기분이 너무 좋아.”
“오늘은 소란이가 좋아하는 꽃게찜 했는데, 얼른 들어와.”
“우리 소란이 힘들지? ……아빠가 미안하다, 아빠가.”
……어린 시절부터 쭉. 소란에게 아빠는 새아빠가 아니라 그냥 ‘아빠’일 뿐이다. 아빠가 병석에 있는 동안에도,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입에 ‘소란이’, ‘소란이’를 달고 사셨다. 아빠에겐 성준도, 소란도, 똑같이 소중한 자식이고 평생 그렇게 대해주셨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사랑만큼은 듬뿍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의 몫까지 채워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다. 소란은 아빠가 그리울 때마다 그 음성을 떠올렸다. 다정히 불러주던 이름. 사랑받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해주던 목소리. 보고 싶은 마음은 쉽게 옅어지질 않았다. 일찍 철든 아이는 감정을 감추는 데 능했다.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가슴속에 가득한 사랑이며 그리움, 애틋함…… 그 모든 감정은 보이지 않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주량을 넘기면 둑이 무너지듯 쏟아졌다. 울지 않는 대신 아빠처럼 저를 불렀다. 그립고 그리워 제 이름을 부르면, 아빠가 느껴지는 것 같아 다시 가슴이 든든해졌다. 물론 다른 사람 보기에 볼썽사나운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소란이 배고픈데 안주 하나 더 시켜도 돼?”
“그렇게 말하면 소란이 무서운데.”
“죽여버린다고 해서 소란이 깜짝 놀랐잖아.”
잘못된 언어가 입력된 로봇처럼 소란의 주사는 연희의 주먹을 불러왔다. 그런데 이 순간, 어제의 기억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끔찍하게도.
“소란이 남편 왔네?”
강호에게 했을 게 분명한 그 말. 그리고…….
“소란이 못 믿어? 손만 잡고 잔다니까. 소란이 약속할게, 진짜.”
으아아악. 소란은 입술을 벌려 소리 없이 절규했다. 미쳤다, 미쳤어. 이놈의 술을 끊든 곡기를 끊든 진작에 뭐든 끊었어야 했는데!
“사라지고 싶다…….”
울상을 지으며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가려는데, 바닥에 제가 벗어 던진 옷들이 보인다. 여기저기 툭툭 떨어져 있는 옷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야하기만 하다.
‘죽자, 그냥 죽자…….’
기억이 전부 나지 않으니 더 미칠 노릇이다. 게다가 여긴 어제 자신이 잤던 침실도 아니고, 강호가 쓰는 침실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강호의 침실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옷을 벗은 사람은 나야 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설마. 소란은 바닥에 발을 딛고 조심스레 내려서 제 모습을 확인했다. 슬립과 속옷은 착용 중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는 면했다는 건데.
‘아니지. 사건 후 다시 입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아직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상황이 명확히 밝혀진 게 아니니까.
‘일단 내 침실 쪽으로 가서 술을 좀 깨고…….’
소란이 바닥의 제 옷가지를 주섬주섬 모아 안고서, 강호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소리를 죽여 천천히 바깥쪽으로 향하려는데.
“설마 도망치는 건 아니겠지.”
들려온 목소리에 소란이 냅다 뒤돌아 꾸벅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대표님.”
예의 그 사무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비록 하늘하늘한 슬립 차림이고, 벗어둔 옷가지를 품에 안은 채였지만. 태도만큼은 오피스룩을 제대로 갖춰 입은 사람 못지않았다.
“못 잤지.”
다만 그는 슈트 차림 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누구 때문에, 새벽에나 겨우 잠이 들어서.”
암막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마치 조명처럼 그를 비춘다.
탄탄한 근육의 움직임이 눈에 새겨졌다. 손대면 그 촉감이 느껴질 것처럼 생생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손은 지나치게 섹시했고, 세상만사 귀찮은 듯 찡그린 눈썹까지 매혹적이었다. 그 분위기가 너무도 위험하고 사나우면서도 한편으론 무심해 보였다. 저런 사람에게 내가 어제 뭐라고 했다고? 손만 잡고 잘게? 소란이 못 믿냐고? 기억나는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도 절망적이라 소란은 이대로 먼지가 되고만 싶다.
“못 주무신 거 치고 피부가 아주 반짝반짝 광이 나네요.”
위기 탈출엔 면장우피만 한 것이 없다. 얼굴에 쇠가죽을 바른 듯 뻔뻔한 태도로 노선을 정한 소란은 미칠 듯한 속내를 잘 감추며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체크아웃 준비를 하겠습니다. 대표님도 편하게 씻으세요.”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소란은 얼른 그의 침실에서 나와버렸다. ◇ ◆ ◇
‘설마 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정말. 소란은 샤워하는 동안에도 생각을 이어가며, 부디 우려하는 일이 벌어진 게 아니길 바랐다. 백번 양보해, 어제 자신이 부린 추태처럼 ‘손만 잡고’ 잔 거라면 차라리 괜찮겠다. 술 좀 마시고 미쳐서 그런 거라 백강호도 한 번쯤은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남녀 사이의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면? 그건 문제가 좀 심각하다. 그래도 마냥 피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대놓고 물어봐야 하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멋대로 직진하는 상상은 그녀가 불안해하는 선을 넘어섰다.
‘어제 그러니까.’
계나린과 술을 마시다가…… 아, 핑크 레이디. 그 술을 마시다가 언제 취했는지도 모르게 확 상태가 가버렸다. 깜빡이라도 켜고 들어와야 피할 것이 아닌가.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온 취기는 그대로 소란을 먹어치웠다. 이런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그 술을 골랐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인생은 언제나 그렇듯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도 흘러가는 법. 취해버린 상태에서 강호가 바에 왔던 것까진 기억이 난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그 바에 들렀다가 본 건가.’
거기다 대고 자신은 어떻게 했던가.
‘소란이 남편 왔네? 하, 진짜…….’
창피하다, 창피해. 뭐 대단한 진짜 부부라고 남편이니 뭐니 하며 반겼을까. 백강호는 물론 계나린 보기에도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러고 강호와 함께 룸에 돌아왔겠지. 밤은 늦고 술은 취했고. 내내 들끓던 욕망을 기어이 참지 못하고 강호에게 달려들어 사달이…….
‘인간아, 왜 그랬니. 왜 그랬어.’
제게 마음도 없는 그에게 얼마나 추잡스럽게 굴었을지 이쯤 되니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저는 대표님에게 이성적 관심이 없으며 어쩌고저쩌고 그런 소리 해댈 땐 언제고. 이제 와 손만 잡고 잘게, 응? 이 난리를 쳐댔으니.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봐?’
잤든 안 잤든 자신은 쥐구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 맞다.
‘게다가 소란이, 소란이…… 그놈의 소란이……, 나 같아도 질렸겠다.’
그러나 무조건 회피하진 않기로 했다. 소란은 비겁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혼부부의 차 안 분위기는 건조하기 그지없다. 직접 운전하는 강호도, 조수석에 앉은 소란도 서로 말이 없다. 소란은 전보다 더 딱딱한 태도를 유지했다. 어젯밤 생글생글 웃던 눈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에 강호는 아쉽기까지 했다. 너무도 예뻐서,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는데. 한겨울밤의 눈사람처럼 사르르 녹아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강호의 눈에는, 지금 한껏 격식을 차린 듯한 차림과 태도도 예쁘긴 마찬가지다. 소란이라면 뭔들.
“대표님, 질문이 있습니다.”
그녀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해.”
뭔지 느낌이 온다. 어젯밤 일을 물으려는 거겠지. 아침의 반응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묻기 껄끄러울 텐데 먼저 얘기라도 해줘야 할…….
“잤나요, 안 잤나요?”
필요가 없네. 소란의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한 강호가 신호 앞에서 급정차했다. 끼이익. 다행히 뒤에 따라붙는 차는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는 동시에 그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소란의 앞쪽으로 뻗었다. 관성에 의해 앞으로 거세게 기우는 그녀의 몸을 막은 손. 아슬아슬하게도 소란의 탐스럽게 올라온 가슴 바로 위쪽이다. 조금만 내려갔어도 촉감을 생생하게 느낄 뻔했다. 위험을 막으려다가 위험을 겪을 뻔한 상황. 강호는 서둘러 손을 치웠다. 그녀의 귀 끝이 새빨개져 있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그녀의 몸이 보이는 반응을.
“저는 괜찮습니다.”
소란이 귀에 꽂은 머리카락을 내려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막아주셔서 감사해요.”
강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는 서둘러 민망한 상황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듯.
“제가 대표님께 사과해야 하는 일 같아서요. 어제 일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지금이라도 말씀드리는 거예요.”
강호는 차를 다시 움직여 도로 한쪽에 임시 정차했다.
“그래서 중요한가? 잤는지, 안 잤는지가.”
느릿하게 묻는 목소리에 소란이 담담히 대답했다.
“어느 쪽이라도 죄송한 일은 맞습니다. 정식으로 사과드릴게요.”
“안 잤어.”
아직은.
“안 잤어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강호는 그녀의 기쁨 어린 눈빛이 뭔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좋아? 안 잤다니까?
“다행이네요!”
심지어 다행이란다. 그의 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둘 다 죄송하긴 하지만, 잔 것보단 안 잔 게 훨씬 낫죠.”
낫긴 뭐가 나아. 하나도 안 나아. 소란에게 제 존재가 얼마나 부담인지 알 것 같아 강호는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해프닝이라 다행이에요. 어제는 제가 어떤 행동을 했든, 어떤 말씀을 드렸든 그냥 다 잊어주세요.”
잊긴 왜 잊어. 절대 안 잊을 건데.
“그래도 침실에 들어간 건 정말 죄송했습니다.”
“죄송할 거 없어.”
강호는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신혼의 시작이 침대인 건 당연하니까.”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그의 말에 소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대표님이 농담하시니까 이제 좀 긴장이 풀리네요.”
그녀는 본의 아니게 강호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물러서기 중이다.
“그게 다야?”
“네?”
강호는 점점 더 오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우 변호사가 왜 옷을 벗었는지는 궁금하지 않고?”
강호의 말에 그녀는 거미줄에 걸린 듯 난처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 ◆ ◇ 어젯밤.
“소란이 남편 왔네?”
딱 봐도 그녀는 취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예쁘게.
“……계나린, 네가 이렇게 먹였어?”
“내가 왜? 본인이 본인 손으로 마셨지. 주량이 센 편은 아닌가 봐.”
그 와중에 소란은 싱긋 웃으며 눈을 반쯤 감고 그를 보았다. 달콤한 말을 입술 사이로 흘리면서.
“소란이 남편이 데리러 와서 너무 좋다.”
남편이라. 그 호칭이 못 견디게 설레고 흐뭇하면서도,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평소와 다른지 걱정도 되었다. 강호는 왜 둘이 만난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아무래도 소란을 데리고 나오는 게 우선일 듯하여 그녀의 팔을 붙들어 일으켰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강호의 팔을 꼭 잡았다. 미치겠네. 정말 사람 잡는 미소다.
“일단 나중에 얘기해.”
“그래, 빨리 가라. 나도 나만의 시간을 갖자, 좀.”
나린이 적극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강호는 소란과 함께 바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가 촉촉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밑도 끝도 없이 건네는 고백이었다.
“결혼하길 잘했어.”
이어진 건 위험하고도 강렬한 유혹. 그녀는 강호 쪽으로 돌아서 마주 보고는 눈을 느른히 깜빡이며 말했다.
“소란이 지금, 키스하고 싶은데.”
“…….”
“해도 돼요?”
살며시 제 목을 감싸는 부드러운 손. 천진한 토끼가 사람 잡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