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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핑크 레이디 (21/112)

#21화. 핑크 레이디2021.01.12.

호텔 바. 나린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부모님은 언제부터 안 계셨어?”

소란은 멈칫했다. 보통 이런 얘기가 나오면 미안해하거나 껄끄러워하거나 둘 중 하나던데, 나린은 꽤 단도직입적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검게 물든 밤하늘을 수놓으며 반짝이는 야경, 감미롭게 퍼지는 재즈 선율, 어둑한 공간에 아른거리는 촛불. 흘러간 이야기를 하기 좋은 시간이다. 잘 꺼내놓지 않던 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엄마랑 아빠는 재혼하신 거예요. 저희 엄마랑, 오빠의 아빠가 살림을 합치신 거죠. 제가 여섯 살, 오빠가 열 살 때요.”

나린이 조금 놀랐다는 듯 물었다.

“……그럼 친오빠가 아니야?”

“피가 섞이진 않았어요. 그래도 저한텐 하나밖에 없는 오빠예요.”

성준과는 의붓남매였다. 부드러운 인상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긴 해도, 이목구비 자체가 닮았다는 느낌은 별로 없긴 하다.

“저는 친아빠 얼굴도 보지 못했어요. 제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고 했거든요.”

“그럼 어머니가 소란 씨 여섯 살 때까지 혼자 키우신 거야?”

“네, 그러셨대요.”

  ◇ ◆ ◇ 소란의 엄마는 싹싹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공사장 함바집에서 일하다가 건설근로자인 남편을 만났고, 현장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고 했다. 소란을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이후 엄마는 유복자인 소란을 낳아 혼자 키우며 살았다.

“저만 데리고 식당을 운영하며 어렵게 사시다가 지금의 아빠를 만난 거예요.”

엄마로선 어려운 결정이었다. 재혼에 대해 고민이 많았지만, 상대는 동네에서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물든 사랑과 신뢰로 새 가정을 이루었고, 가족이 되어 함께 행복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엄마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소란의 나이 여덟 살, 모두가 함께 살았던 시간은 겨우 2년뿐이었다. 어린 소란의 곁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새아빠와 의붓오빠만이 남았다.

“아빠 친척들이 저를 보육원에 데려다주라고 했어요. 혼자 애 하나 키우기도 힘든데, 남의 애까지 떠맡아 어떻게 할 거냐고. 저 그거 다 들었거든요…….”

새장가라도 가려면 그런 혹은 붙이고 있으면 안 된다고. 성준이는 어떻게 키울 거냐고. 혼자 애 하나도 힘든데 남의 애까지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지금 당장은 마음이 아파도 서로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밤마다 혼자 울었어요. 언제 보육원에 갈지 몰라 무서워서. 아빠가 아무렇지 않게 웃고 돌봐주셔도 매일 불안했거든요. 그러다 하루는 가방에다가 제가 짐을 싼 거예요. 나 때문에 아빠랑 오빠가 힘들게 살면 안 된다고. 차라리 내가 먼저 보육원에 가야겠다고.”

소란은 아홉 살에 울면서 집을 나갔다. 어느 보육원으로 가야 할지 몰라,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그곳에서 붙들렸다. 쪼그만 아이가 혼자서 큰 가방을 메고 보육원 찾아가는 길을 묻고 있으니 경찰이 곧이곧대로 알려줄 리 없었다. 소란의 목걸이에는 아빠가 새겨준 전화번호가 있었다. 경찰의 연락을 받은 아빠와 오빠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소란이 네가 왜 보육원엘 가! 아빠가 있는데, 거기가 어디라고 네 발로 가!”

  아빠는 소란이 친척들의 말을 들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어떻게든 품어 키워내겠다고 다짐했는데, 갑자기 소란이 없어져 하늘이 무너진 줄 알았다고.  

“소란아, 넌 내 딸이야. 아무 데도 안 보낼 거야. 절대로.”

  그날 세 식구가 경찰서 안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성준도 잃어버린 동생을 되찾은 기쁨과 그동안의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피가 섞이지 않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가족이었다. 그날 이야기를 조심히 꺼내놓는 소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후, 술이 다네요.”

애써 웃으며 소란은 남은 술을 마저 마셨고, 직원을 불러 또 주문했다.

“핑크 레이디 한 잔 더요.”

“오빠하곤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나 봐.”

가만히 보고 있던 나린이 약간 물기가 느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특유의 빳빳하고 날 선 말투가 아니었다. 소란은 자신이 왜 이 정도까지 세세하게 얘기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린이 경청해주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 계속했다.

“사실 재혼가정의 남매가 만나자마자 우애 있기란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성준에게 소란은 특별했다. 어린 시절 친엄마에게 받았던 상처가 크고 깊어, 오히려 성준은 아버지의 재혼으로 만난 새로운 가족 소란, 그리고 새어머니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만두려 했던 운동도 새어머니의 응원으로 계속하게 됐고, 따뜻한 밥의 힘 역시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소란 씨 오빠의 그, 친엄마라는 사람은? 어릴 때 대체 어떤 상처를 줬다는 거야?”

“제 얘기도 아닌데 자세히 할 건 아니고요.”

그렇긴 하지. 나린은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긴 해도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얘기는 아니다.

“오빠하고는 네 살 차이가 나니까 제가 마냥 아기 같았대요. 오빠가 절 많이 챙겨줬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엄마가 쌓은 은덕이 아닌가 해요. 아빠랑 오빠를 만난 것부터 곁에 있게 된 것까지 전부 다.”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니까 소란 씨 어머니가 재혼을 결심하셨겠네.”

“네, 그랬을 거예요.”

서로의 빈 자리를 채우며 그렇게 진짜 가족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너무나 따스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후로 성준은 아프고 감사한 마음 모두 동생 소란에게 쏟으며 살아온 것이다.

“그럼 아버지는?”

“저 고1 때, 처음 혈액암으로 쓰러지셨는데 8년 정도 투병하셨어요. 그리고 돌아가셨고요.”

“……힘들었겠네.”

“네, 그랬죠.”

절 사랑으로 키우고 돌봐준 아버지였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보며 소란은 자주 눈물을 훔쳤고, 꼭 성공하여 병도 낫게 해드리고 호강시켜드려야지 다짐했다. 그러나 없는 집 살림에 돈 나갈 구석은 왜 그리 많은지. 치료비에 생활비에, 아예 아버지 곁에만 붙어 있을 수 없으니 들어가는 간병비까지. 삶의 고단함이 물씬 느껴져 나린은 먹먹한 눈으로 소란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처음이다.

“오빤 그럼 대학교 때부터 계속 그 식당을 아버지 대신 운영했던 거야?”

“네, 저희 가족한테는 그 식당이 밥줄이고 터전이라서. 오빠가 그냥 문 닫을 순 없다고 휴학하고 지금까지……, 그런데 오빠 대학교 때부터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소란의 질문에 나린의 눈이 커졌다. 쿵 떨어진 심장을 겨우 붙든 나린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소란 씨 고1 때 쓰러지셨다며. 오빠랑 네 살 차이라고 하니까 대학생이었겠구나 한 건데.”

“언니 기억력 되게 좋으시네요.”

소란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와중에 오빤 복학도 못 하고 있으면서 저 대학 졸업하게 해주려고 엄청 애썼어요. 졸업하고 취업했는데 그것도 그만두고 로스쿨 가게 해줬고요. 그리고 또……, 아니다.”

뭔가 말하려다 말고 소란은 다시 칵테일을 마셨다. 배고프다며 주문한 안주는 거의 먹지도 않고 벌써 칵테일만 네 잔째였다.

“아무튼 저는 오빠한테 진 빚 평생 갚아도 모자라요.”

“그렇겠다. ……그랬겠네.”

소란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근데 소란 씨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이거 독해.”

“이게 독해요? 아닌데, 단데. 맛있는데.”

“취한 거 같은데.”

“에이이, 취하긴요.”

어째 이상하게도 소란의 눈에 간질간질 웃음이 맴돌았다.

“저 괜찮아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소란은 생긋 예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태로운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를, 나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00퍼센트 취했네.

“룸에다 데려다주고 가야 하나.”

팔자에도 없는 에스코트를 하게 생겼다. 나린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창밖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랬구나. 당신 그런 삶을 살았구나.

“힘들었겠네.”

아까 소란에게 건넸던 말을 조용히 되짚었다. 제게 열어줄 마음은 단 한 줌도 없는 듯 여유가 보이지 않던 것도, 당연한 거였구나. 내 사랑 노래는 팔자가 좋아 부르던 거였구나. 매몰찬 거절보다도 미안함 가득하던 눈빛이 더 싫었는데. 자존심이 상해 더는 당신을 견디지 않겠다고 끝끝내 돌아선 나는, ……용기가 없었구나.

“휴. ……우소란 오빠일 줄이야.”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마음으로 그를 다시 곱씹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설마? 나린이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냈다.

“……에이씨.”

백강호다. 헛된 기대가 무너졌다. 성준에게 전화가 올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도, 늘 바보처럼 기대를 해버린다.

“왜, 뭐.”

- 너 지금 어디야.

범인 취조하는 말투다. 빈정 상한 나린은 알려주지 말까 싶었지만, 저쪽에서 눈이 마주친 모두에게 생글생글 웃어주며 걸어오는 소란을 보며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너 있는 호텔 본관 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하여튼 싸가지 봐.”

휴대전화를 탁 내려놓는데, 소란이 자리에 와서 앉았다.

“언니.”

취기가 오른 터라 다소 과장된 미소긴 했으나, 저렇게 눈웃음이 예쁜 여자도 있나 싶다. 나린은 성준의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소란 자체만으로도 참 매력이 있단 생각을 했다. 그동안은 제대로 보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왜 백강호가 그녀를 바로 신붓감으로 받아들였는지 알 것 같다. 제가 아는 백강호는 적어도 진심이 아니고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기에.

“언니, 언니.”

“그만 불러.”

그런데 지금은 약간 위태위태하다.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넌 것 같은데…….

“왜요, 언니. 나는 언니가 안 싫은데. 언니도 나 싫어하지 마세요, 네?”

안 싫어해, 하고 말해주려는데 소란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싫어하면 소란이 슬퍼. 소란이 너무너무 슬퍼.”

혀나 꼬였으면 말을 안 하지. 제법 정확한 발음으로 진지하게 하는 소리라 더 충격적이다.

“그거 하지 마.”

“네? 뭘요? 소란이 뭐 하지 마요?”

핑크 레이디 진짜 무서운 술이구나.

“아, 그거. 진짜 싫어. 진짜 하지 마.”

“싫어하지 마세요, 자꾸 그러면 소란이 너무 슬…….”

“죽여버린다, 진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시무시한 공기가 느껴진다.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소란을 보고 있던 나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뒤로 살벌한 표정의 백강호가 서 있다.

“누굴 죽여버린다고?”

그 말에 나린이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진짜 죽인다는 게 아니라. 아니, 얘가 미쳐가지고 계속 소란이 소란이…….”

이번엔 누굴 보고 미쳤다고 하냐는 듯 강호의 눈썹이 더 싸늘하게 구겨졌다. 누가 보면 애 끌고 와서 못살게 굴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나린은 너무 억울했다.

“하, 피곤하다. 그냥 데려가라, 데려가.”

“음? 소란이는 언니랑 계속 얘기할 건데.”

“안 해, 나는 할 얘기 없어. 백강호 뭐 해, 빨리 데려가라고.”

나린은 손을 휘휘 저으며 내쫓듯 말했다. ‘소란이’ 공격에서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다. 정말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만 같다. 평소 똘똘하고 야무져 보이던 애가 핑크 레이디 넉 잔에 팔푼이가 된다고? 우소란과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내심 다짐했다. 물론 자신은 술 마실 일이 당분간 없겠지만. ◇ ◆ ◇ 강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고급스러운 입구를 지나 바 안으로 들어갔을 때. 저 멀리 소란의 뒷모습이 먼저 보였다. 이제 어디서고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일부러 찾아왔다면 조금 오버로 보일 수도 있으니, 그냥 술 한잔하러 들렀다고 해야지 했다. 아무리 계나린과 통화를 했다 하더라도 거기 소란이 있냐고 물은 적은 없으니까. 네가 여기 있는지 몰랐다고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싫어하지 마세요, 자꾸 그러면 소란이 너무 슬…….”

“죽여버린다, 진짜.”

소란의 부드러운 음성을 팍 자르며 나린이 사납게 내뱉었다. 물론 저나 찬규에겐 밥 먹듯 하는 소리긴 했다. 그러나 나린이 소란과 친밀한 사이도 아니고, 진짜 말 그대로 죽여버리겠다는 게 아닌 이상 할 이유가 없다.

“안 해, 나는 할 얘기 없어. 백강호 뭐 해, 빨리 데려가라고.”

기어이 귀찮은 떨거지 내치듯 구는 통에 강호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계나린, 개싸가지 진짜. 그 터진 인성으로는 우리 형님 그림자도 못 쳐다보게 할 것이다. 순간 그런 생각까지 하며 강호가 소란의 어깨를 짚었다. 내 귀한 사람이 여기서 이런 소리를 듣고 있을 이유는 없지. 어서 데려가야겠다.

“우소란 그만 가…….”

“으응?”

순간. 강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환하게 퍼지는 그녀의 미소.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도 이렇게 눈부시진 않을 것이다. 양 볼이 핑크빛으로 발그스름하게 물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소란이 남편 왔네?”

그런 소란이가 너무 예뻐서, 소란이 남편 강호는 눈이 멀 것 같았다. ◇ ◆ ◇

“흐음……. 물. ……오빠, 물.”

소란은 꽉 막힌 목으로 있는 힘껏 소리 내어 성준을 불렀다. 마른 식도가 타버릴 듯 뜨겁고 건조했다.

“오빠……, 오빠, 나 물 좀.”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소란은 눈을 비비며 정신을 끌어모았다. 아, 여기 호텔이지. 성준이 있는 집이 아니었다. 침대 옆 협탁에 생수가 있었는데, 그거라도……. 몸을 돌려 물을 찾던 소란은 지금 자신의 몸을 감싼 차림이 지나치게 가뿐하단 느낌이 들었다. 연한 핑크빛 슬립 차림이다. 어제 옷 속에 입고 있던 슬립. 너무도 휑한 기분에 소란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확 당겨 끌었다.

“히이익.”

넓은 침대 위. 바스락거리는 이불이 치워진 그녀의 옆쪽엔 누군가 엎드려 누워 있었다. 벗은 등을 그대로 드러낸 채. 마치 사냥을 끝낸 맹수처럼 느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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